17화
“허허, 우리 현성이 때문에 오랜만에 기분이 좋구나.”
덕순 할머니는 살짝 취하셨는지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셨다.
“할머니 많이 드셨어요?”
“그러엄. 라면도 맛있었고, 그 고기도 간간하니 좋더라고. 막걸리하고 딱이더라.”
“다음에 말씀하시면 바로 해드릴게요.”
“글고, 이런 자리 만들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아졌거든.”
덕순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른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한 2년 정도 됐나? 맛자랑 식당 임옥이가 가게 이전해서 단지 앞 새 가게 개업식 이후로, 여기 동네 사람들이 새로 연 가게가 하나도 없어.”
“예? 정말요?”
“그럼. 게이트다 뭐다 시끄러운 것도 있기는 한데에~ 문제는 땅주인들이 자꾸 건물을 새로 짓는 거지.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지들도 살라고 하는 거니까.”
“그렇기는 하죠.”
“그래도 방식이 잘못됐지. 월세를 갑자기 두 배, 세 배씩 내라는 건 그냥 나가라는 거…… 아니냐? 그렇게 2~3년 사이에 다들 많이 내쫓겼어.”
태수는 재건축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부분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 내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좋은 이야기만 한 거겠지.
“대신 그만큼 새로 생긴 가게들도 많지 않아요?”
“에구, 거기 사장들은 우리 같은 토박이들 별로 안 좋아해. 다들 나이 먹은 노인네고 아줌마들이니, 들러도 영 표정이 안 좋더라고.”
“그래…… 요?”
“우리 같은 치들하고도 안 맞고, 젊은 손님들만 좋아하더라고. 오다가다 인사해도 뚱한 반응인 거만 봐도 보이는 겨…… 하여간, 현성아. 오늘 고마웠다.”
“아, 예에~”
연신 이어지는 칭찬에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할머니, 이제 들어가요.”
아까 정태수는 반쯤 기절한 임민혁을 자기 방에 재운다고 업고 갔다.
그런 뒤, 할머니 모시러 다시 왔다.
하긴 엎어지면 집이니 여러 번 왔다가도 부담은 없겠지.
그렇게 하나둘 행복 분식을 떠나는데.
술에 취해 흔들거리는 뒷모습에서 묘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뭔가 다들 떠밀려서 갈팡질팡하는 기분이랄까.
그런 내 손에 들린 건, 한 장의 명함이었다.
<요식업 조합, 대표 이예지>
“작은 축제 같은 요리 대회라고 했던가?”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 * *
“후우…… 개운하긴 하네.”
새벽 운동을 끝낸 뒤, 상태 점검에 들어갔다.
전역만 하면 무조건 놀고먹겠다고 맹렬히 다짐했지만 역시 습관은 무서웠다. 열흘도 되지 않아 일찍 일어나게 되더니 간단한 체력 단련까지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가벼운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다음은.”
딱, 딱!
몇 번이나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면서 흐름의 변화를 확인했다.
“확실히 변화가 있구나.”
이전까지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발동되던 능력들이 이제 On / Off 가 확실해졌다.
조금이나마 회복되고 있다는 거겠지.
확실히 베나레스의 조언이 맞는 것 같았다.
[피와 저주에 겹쌓인 능력은 끝내 타락할 터. 더불어 어울리는 다른 상반된 삶만이 이를 씻겨줄 것이다.]
당시에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게이트를 탐색해 앞으로의 위험을 막는 것만이 이능의 대가라고 판단했다.
군인이자 비공식 국가 헌터로 살아온 나날들.
피와 살육으로 점철된 그 임무들은 내 정신과 육체를 갉아 들어갔다.
결국 힘은 소진되고 이능은 닳아 없어졌으며,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은, 한 번씩 불쑥 튀어나와 아직도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다.
다 큰 성인들도 가끔 군대 다시 가는 꿈을 꾸는 것처럼.
아오, X발…….
생각만 해도 무섭네.
“부정한 건 금지. 앞으로 밝게만 살기로 했잖아.”
억지로라도 피식 웃으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어쨌든 변화는 확실했다.
우리 강 여사님과 두 동생들과 함께 할 때, 덕순 할머니 가게에서 태수와 노닥거리고 단골들과 어울렸다.
또, 임혜리와 임수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조금이나마 달라진 것도 느껴졌다.
임시 오픈 이후의 개업식 역시도 정신없었지만, 묘한 충족감을 주더라.
아마도 그게 내 능력을 회복시키는 방법이겠지.
물론 정확한 원리는 모른다.
그저 [직감] 이 맞다고 할 뿐.
띠띠- 띠띠-
때마침 알람이 울렸다.
오늘도 할 일이 많으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 * *
“우와~ 이거 맛있다.”
“예지가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그러네. 진짜 우린 운이 좋았어.”
두 여자는 연신 라면을 맛보며 소곤거렸다.
그러다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핏 봐도 대여섯 명 정도가 줄 서 있었는데, 자신들이 마흔여섯 번째라고 했다.
당연히 저 중에는 분명 못 먹는 사람이 있을 터.
심지어 이곳은 어제 임시 오픈한 가게였다.
그럼에도 웨이팅이 있고, 재료 소진으로 못 먹는 이들이 있다는 건 벌써 그만큼이나 입소문이 났다는 거다.
“진짜 정식 오픈하면 장난 아니겠는데?”
“그럴걸? 그냥 라면 하나 파는데 이럴 정도면, ‘파파 소바’보다 더 유명해지지 않을까?”
“그건 아니지. 거긴 일본 소바 대회 우승자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5년 넘게 배워왔다는데, 지금도 점심때면 30분 정도 기다려야 해.”
“만약 두 집 중에 하나만 먹으라고 하면 넌 어디 갈 건데?”
“…….”
“거긴 소바 한 그릇 만이천 원이야. 맛이 좋기는 한데, 솔직히 자주 가긴 부담스러워.”
“그건 인정.”
“난 이상하게 이 집이 더 마음에 들어. SNS 사진 찍기에는 수수하고 심심한 편인데, 오히려 좀 편안하다고 할까?”
“하긴, 요즘 가게들이 너무 겉멋에 치중된 건 맞지. 원래 분식은 편하게 먹어야 맛이니까.”
오! 의외로 예리한 여자 손님들이었다.
이어진 대화 역시도 자신이 생각한 콘셉트를 어느 정도 파악한 듯 보였고.
살짝 웃는데, 반대로 임혜리는 약간 당황하며 등장했다. 실수로 56명까지 주문을 받아버린 탓이었다.
“괜찮아. 충분해.”
“정말요? 그 정도나 돼요?”
“원래 한정 메뉴라도 딱 그것만 준비하는 게 아니거든. 보통 5% 정도는 더 여유 있게 준비한다고.”
임시 오픈 때는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이전까지 실제로 장사해 보지 않았으니까.
대충 진상 손님이 온다든가, 조리 중의 실수, 혹은 서빙하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추가로 만들어야 하는 거다.
때문에 그걸 감안해서 준비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6명은 좀…….”
“됐어. 걱정 말고, 어, 손님 나온다. 빨리 자리부터 치워.”
안심하라고 일단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실 조금 불안불안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무엇보다 마지막 손님은 꼭 받아야 했다. 내가 아는, 아주 라면에 환장한 아이었으니까.
“일단 육수 양은, 그럭저럭 나오겠군. 다른 재료는…… 삶아놓은 계란이 모자라구나. 그럼 반숙 프라이로 대체하면 될 거고.”
모자란 야채는 조금 더 썰고, 베이컨은 즉석에서 팬에 바로 볶았다.
오히려 강한 화력 때문인지 향이 더 퍼지는 것 같더라.
그렇게 베이컨 기름이 나오자 식용유를 약간 추가.
중국집에서 하듯이 끓는 기름을 끼얹으며 계란을 튀기듯 구웠다.
반숙보다는 덜 익혔지만 손님 받고 라면 나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육수를 나눠서 넣으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스프를 적게 넣으면 되겠지.”
아예 육수통에 스프 여섯 개를 넣었다.
물을 조금씩 넣으며 맛을 보니, 일단 간은 적당했다.
부족한 풍미는 바로 볶은 베이컨과 튀긴 계란이 잡아 줄 터.
여기에 서비스로 채 썬 햄을 조금 곁들여주면 더 괜찮을 것 같았다.
“역시 음식은 바로 해서 먹는 게 더 맛있지.”
테이블 다 치웠으면 바로 손님들 입장시키라고 혜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덟 개의 냄비에 남은 육수 전부를 넣었는데, 양은 딱히 부족해 보이지는 않더라.
문제는 타이밍!
이전 주문으로 먹던 두 여자 손님이 나가는 걸 마지막으로 가게 안의 손님들이 전부 바뀌었다.
지금부터 나가는 건 조금은 다른 라면이니까, 무엇보다 양해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임혜리가 모든 테이블에 라면을 내어가자, 조리모를 벗고 주방을 나섰다.
“일단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정 50그릇인데 저희 쪽에서 실수가 있었네요. 일부 재료가 부족해서 조금은 변형된 라면을 끓였습니다.”
“어, 그럼 맛이 달라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이 녀석이 덥석 물어볼 줄 알았다.
난 빙긋 웃어준 다음 나지막이 말했다.
“전체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족한 토핑을 새로 했고, 손님용이기보다 직원 식사용에 가깝거든요.”
“그게 무슨 차이가 있어요?”
슬쩍 윙크까지 보내는 걸 보니 저거 분명 알면서 물어보는 거다.
하긴 예전부터 능청스럽고 쿵짝이 잘 맞기는 했지.
물론 마지막에도 쿵짝 맞았고.
“손님용은 정해진 조리법에 정해진 방식대로 만들지만, 직원 숫자는 정해져 있고 그때그때 다르게 만들어 먹거든요.”
일부러 잠시 한숨을 쉬며 뜸을 들였다.
“당연히 맛은 장담합니다. 또, 오래 기다려 주신 게 죄송스러워서, 요금은 안 받겠습니다.”
“오! 진짜요?”
“예. 임시 오픈이니까요.”
다행히 대부분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런 손님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춘 다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가능하면 오늘 이야기는 저희끼리만 아는 걸로 해주십시오.”
파앗!
나름 정중한 자세를 취한다고 했는데, 이거 힘이 들어갔나 보다.
딱 절반이 눈이 풀리고는 마치 홀린 것처럼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아, 아하하…… 그럼 맛있게 드세요오.”
* * *
“라면이다!”
손강희는 침샘이 가득 돋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음식을 가려먹는 편이었는데, 중학교 이후부터는 면식에 푹 빠져 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여덟 달 만에 엄마 배 속에서 나왔고, 서너 살 때까지 잔병이 많아 수시로 병원을 다녀야 했다.
그때의 기억은 소독약 냄새와 주사 바늘이 전부.
이후 커가면서는 풀떼기와 풀떼기, 풀떼기로 이루어진 건강식과 몸에 좋다는 한약들이 줄을 이었다.
부모님이 식당을 시작하신 후론 삼시 세 끼를 가게에서 먹어야 했는데, 특히 인스턴트 식품은 손도 못 대게 했다.
그중 하나가 라면.
초등학교 2학년 때, 한 달을 조르고 단식투쟁까지 불사한 끝에 처음 라면을 먹어봤다.
면을 따로 끓여 기름을 빼고.
스프는 고작 절반이었는데, 집 쌈장으로 간을 맞춰 라면 구색만 갖춘 거였다.
하지만 그 자극적인 맛은 정말 황홀 그 자체였다.
“미미(味味)!”
당시 유명했던 요리 애니메이션의 대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후에도 그녀는 라면을 먹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행여나 불량식품을 먹고 탈이 날까 봐, 아예 용돈 자체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상황.
그때, 하늘에서 구세주가 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분식집.
그 앞에서 며칠이나 군침을 흘리며 라면 먹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 거기서 일하던 오빠가 불렀다.
“라면 먹고 갈래?”
당연히 고개를 저었지만, 그 오빠는 손강희의 손목을 붙잡고 가게로 끌어들였다.
돈이 없다고 했는데도 괜찮다면서.
그러면서 나만 한 동생들 있다며 뚝딱 라면 한 그릇을 끓여주었다.
그렇게 진짜 라면 맛을 알게 됐다.
이후 손강희는 엄마 눈을 피해 한 번씩 분식집에 놀러 갔다. 그때마다 라면, 비빔면, 짜장라면, 우동라면 같은 걸 얻어먹을 수 있었고.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가게 단골손님들 제보 때문에 들킨 손강희는 엄마한테 붙잡혀서 등짝을 쿵짝 맞고 말았다.
물론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몰래몰래 감시의 눈을 피해 일탈하며 인스턴트의 맛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된 것.
‘그때부터 결심했지.’
그리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직 라면을 먹기 위해서.
다행인 건 그때부터 조금씩 건강해져서 잔소리가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당당히 라면 맛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
블로그에 남긴 리뷰만 무려 200여 개.
4~5년을 돌아다니며 부산 동서남북의 유명한 면 요리집들을 털고 다녔다.
그런 손강희의 면 레이더에 동네 단골 분식집 자리에 새로 생긴 라면집은 포착되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사장이 그 라면 천사 오빠 아닌가.
하지만 오빠는 오빠요, 라면은 라면.
나름 면식에 대한 각오가 남달랐기에 결코 쉽게 평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손강희는 평소대로 사진을 찍고 경건한 마음으로 수저를 들었다.
왼손의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고, 오른손 젓가락으로 면과 베이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합체해 입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굳은 결심이 그대로 녹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