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후아~ 하. 맛있다!”
진심으로 나온 감탄이었다.
사실 첫 등장부터 놀라긴 했다.
일반 라면보다 조금 맑아 보이는 국물.
중앙엔 잘 튀겨진 반숙 프라이가 보이고, 위로는 탕파가, 아래로는 쪽파가 자리했다.
노른자 왼쪽에는 구운 베이컨.
오른쪽엔 가늘게 채 썬 햄과 야채들.
그 담음새 또한 무척 독특했다.
과장하면 고급 중식당의 양장피와도 닮아 보였으니까.
아니, 국물인 걸 감안하면 고급 한식 요리인 신선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음식일 경우 손강희는 그녀만의 먹는 방식이 있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뜬 뒤 젓가락으로 적당량의 면발과 고명을 집어 든다.
그렇게 면과 고명, 국물을 한 번에 후루룹!
그리고 다시 면, 국물, 고명을 다양하게 조합해서 즐기면 쉽게 질리지 않았다.
“흐음~ 맛있다.”
“아~ 이것도 좋네.”
“라면에 베이컨이라니.”
맛을 즐기면서 분석도 진행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뭐가 맞지 않았다.
“이상해. 분명 맑은 해물짬뽕 스타일이긴 한데, 묘하게 깔끔하단 말이지. 그렇다고 마냥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젓가락으로 올라간 고명 하나하나를 살폈다.
“……역시. 튀긴 프라이와 베이컨 기름 때문이구나.”
특히 야채에서 그 향이 미묘하게 나는 것이 전체적인 통일감을 준다고나 할까.
“하아, 이러면 구분하긴 곤란한데?”
아무리 포장해 봐야, 라면, 짜장면, 짬뽕, 탕면, 라멘, 냉면 등등 대부분의 음식은 그 카테고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짬뽕만 보자.
일단 고기 계열로 따지면 차돌박이, 돼지 등뼈, 오리로스, 왕갈비 등등이 있고, 심지어 튀긴 돈가스가 올라가기도 한다.
해물 계열은 더 범위가 넓은데, 홍합을 포함한 어지간한 조개 종류만 십수 개가 넘었다.
여기에 꽃게, 홍게, 오징어, 낙지, 문어, 새우에 아주 가끔 랍스타까지도 들어간다.
육수 계열에 따라 고기 짬뽕과 해물 짬뽕으로도 나뉘어지며, 점도에 따라 국물과 볶음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또 소스에 따라…… 아, 그만하자. 숨차다.’
어쨌든 모두가 [짬뽕]이라는 그 이름 안에 있었다.
라면 역시도 마찬가지.
대부분 기성 제품에서 약간의 변형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김치라면, 치즈라면, 부대라면, 어묵라면, 짬뽕라면, 콩나물라면, 해장라면 등등 부가 재료의 이름으로 바뀔 뿐, 본질은 라면이지 않은가.
고급 스팸을 넣었다고, 부대찌개 라면이 라면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오! 생각하고 보니 라임 쩌네.”
어쨌든 이건 확실히 [라면]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경계를 넘는, 처음 접하는 맛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가격이 말도 안 된다.
단돈 4,000원!
분명 장사하는 입장에서 이 가격으로는 만들 수 없는 맛이었다.
“이건 오천 원 해도 먹겠어.”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데.
황당하게도 근처 테이블 손님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강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먹자!”
* * *
“사, 사장님, 저 손님 이상해요!”
임혜리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원래 그런 애야.”
갑자기 손강희가 옛날에 나한테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릴 때 엄마 따라 여탕을 갔는데, 좀 이상한 아주머니들이 있었단다.
먹기도 아까운 우유나 요구르트 같은 걸로 세수하고 막 몸을 문지른다는 것이다.
유제품이 피부에 좋다는 말 때문에 말이다.
어떤 유명한 배우는 아예 욕조에 우유를 가득 채워서 몸을 담갔다고도 했었지.
그러면서 툭 내뱉은 말이 이거였다.
“나라면 욕조 가득 라면 국물을 채울 텐데.”
초딩이니까 나올 수 있는 상상이었다.
슬쩍 그 이야기를 말해주자, 임혜리가 경악했다.
“허…… 먹을 라면도 없이 살았는데.”
“당시 쟤한테는 라면이 상상의 음식이었거든.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같은…… 알고는 있지만 볼 수 없는 전설의 신수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그래도 라면 국물 목욕은 좀…….”
확실히 살아온 과정이 다르니, 라면에 대한 관점도 달랐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다.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육회지만, 누가 사 준다고 해도 난 꺼려지니까.
“괜찮은 얘야. 너랑 동갑이기도 하고.”
“아! 그래요?”
“여기서 돌아서 저쪽 아파트 단지 입구에 가보면, 맛자랑 식당이라고 있어. 나름 맛집인데 그 집 딸이거든. 특히 그 집 김치찌개가 예술이지.”
“정말요?”
“어릴 때 쟤 별명이 그거였어. ‘밥 잘 먹이는 예쁜 친구’라고.”
단, 줄임말은 어감이 영 좋지 않았다.
‘밥잘구’였던가…….
어쨌든 맛자랑 식당은 인근에서 유명했다.
새벽부터 잘 익은 김치와 두툼한 돼지목살을 뭉텅뭉텅 넣고, 서너 시간을 푸욱 한약 고우듯 끓인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걸 덜어서 뚝배기에 담아 버섯, 양파, 두부, 파를 올려서 한소끔 바글바글 끓여서 내어가는 거다.
그 김치찌개는 그냥 밥 킬러다.
아니, 식탁 앞의 저승사자라고나 할까.
현지가 다이어트 중에 실수로 갔다가 밥 두 공기 반을 먹고 왔으니 말 다 했지.
“사장님, 저 갑자기 의욕이 생기는데요.”
“뭐가?”
“저 친구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혜리의 눈빛에 이상한 방향(?)의 욕망이 가득했다.
새 친구가 생기면 나쁘지 않지.
그렇게 잠시 수다를 떠는 사이, 손님들이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정말 계산 안 해도 돼요? 미안해서…….”
“그럼 다음에 또 와주시면 됩니다.”
“진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사장님. 사장님! 라면 정말 맛있어요. 저랑 친구랑 이 앞에 원룸 살거든요. 진짜진짜 다음에 또 올게요.”
“제발 그래 주시면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손님들 반응에 따라 몇 마디 대화가 오갔고, 전부 호평 일색이었다.
동시에 약간 걱정도 들긴 했다.
다음에 와서 먹었을 때 나오는 것과 비교할까 봐서.
방금 만든 건 평소보다 조금 더 자극적이었으니까. 물론 밸런스도 안 맞아서 한쪽으로 튀기도 했고.
‘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괜찮으려나.’
마지막으로 손강희만 남았다.
아주 그릇 속으로 들어갈 기세로 남은 국물까지 단숨에 해치우더니, 도도도 달려와서 와락 안겼다.
“오빠!”
“어? 어.”
“정말 오빠는 라면 신이 보낸 천사가 맞는 것 같아요.”
“엉?”
“저 그럼 가볼게요.”
“어엉?”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나중에 봐요!”
손강희는 정말 그대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니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라면에 진심인 녀석이구나.
* * *
“확실히 재료가 다 떨어졌네.”
임시 오픈 영업을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체크했다.
정식 오픈부터는 100 그릇을 팔기로 했으니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었으니까.
일단 라면 냄비를 좀 여유롭게 두고 작은 그릇도 주문해야 할 것 같았다. 기존 가게에서 쓰던 것 중 우리 강 여사님이 챙겨간 걸 제외하고 전부 처분했으니 보충해야지.
그 외 자잘한 것들을 메모한 뒤, 혜리를 불렀다.
“시장부터 보고 올 테니까, 정리하고 쉬든가 해.”
“사장님, 저 따라가면 안 돼요?”
임혜리는 뭐라도 할 일을 찾고 싶었는지 나름 간절한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장을 보는 건 내가 할 일이었다.
일단, 아직은 아니라는 거지.
무엇보다 내 애마 뒤에 아무나 태울 수 없었다.
“어. 안 돼!”
* * *
내 첫 번째 애마 돌돌이!
공식 명칭은 [전기 자전거]다.
처음에는 차를 사볼까 했다.
하지만 지하철 두 정거장, 걸어서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오가기에는 불필요하다 싶었다.
특히 좁은 골목과 주차가 심각한 동네라 바이크 쪽으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내가 그 분야를 전혀 모른다는 것…….
운전은 할 줄 알지만 관심이 없으니 뭐가 좋고 안 좋은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몇 안 되는, 아니, 이제 몇 안 남은 동기 찬스를 썼다.
석기찬이라고 이쪽으로 빠삭하고, 전역 후 무슨 개발소로 들어갔다는 녀석이었다.
“기찬아. 바이크 하나를 사려고 하는데…….”
“조건은?”
“그냥 튼튼하고, 시장 좀 왔다 갔다 하고…….”
“디자인은? 따로 필요한 건 없고?”
아주 부산 상남자 스타일의 통화가 잠시 오갔고, 이틀 뒤 화물 택배가 왔다.
녹색 짐 자전거의 미니 버전이라고나 할까.
다만 바퀴 폭이 주먹만 했으며 디자인이 조금 세련되고, 기어나 체인이 있는 부분은 짙은 녹색 커버로 덮여 있었다.
“……하필 국방색이냐.”
누군가의 표현을 인용하면 ‘오래되어 낡아 보이는 칙칙한 초록색’.
모델명 RK-P3.
최대 시속 40㎞.
1단 주행 출력.
2단 고출력.
3단 광출력.
사용 설명서의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일단 검색도 해봤는데 나오질 않았고, 비슷한 디자인의 전기 자전거를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궁금해서 전화했다.
기찬이가 당부하길, 평소에는 페달을 밟고 짐 때문에 무겁다 싶으면 1단으로 다니라고 했다.
어지간한 실생활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나.
심지어 산이 많은 부산의 특성을 감안해도 1단 이상은 불필요하다고 했다.
‘그럼 2단은?’ 하고 물었더니, 시멘트 열 포대 정도 실었을 때나 쓰란다.
그래서 3단은…… 차마 무서워서 묻지 못했다.
이 새끼 대체 뭘 보낸 거지?
다행히 시험 삼아 달려봤을 땐 그냥 평범한 전기 자전거였다.
페달을 밟고 달렸을 때도, 1단으로 끝까지 당겼을 때도, 막 튀어나가거나 속도가 크게 올라가지도 않았다.
다만 무식하게 단단한 건 알겠더라.
실제로 트럭이랑 부딪혀도 멀쩡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으니까.
“역시 게이트 이후에는 튼튼한 게 최고지.”
어쨌든 시범 운전(?)은 평범했고, 몇 번 자전거처럼 타보니 금방 익숙해졌다.
정작 문제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사방에서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 국방색에 짐 자전거 같은 외형 때문이겠지.
“에휴, 좀 평범하게 생긴 걸 보내지.”
그렇게 서면 교차로에서 기다리는데 옆으로 커다란 오토바이 한 대가 섰다.
100㎏는 우습게 넘길 정도의 덩치.
등 뒤에도 그만큼의 박스가 실려 있어 거의 경차만큼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시하며 전방만 보고 있는데, 대뜸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아저씨. 그거 얼마나 합니까?”
헬멧이 터질 정도로 살집 가득한 녀석이 비웃듯이 물으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요란한 장식이 된 커다란 바이크.
아무래도 돌돌이와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모양이다.
“그거보다 조금 비쌉니다.”
“예?”
“할리나 골드윙 정도 아니면, 이거보다 비싼 거 없죠.”
정확한 금액은 모르지만 적어도 저런 시제품보다는 고가다.
겉은 국방색 짐 자전거지만 석기찬의 추가 설명에 분명 [헌터 전용]이 붙어 있었으니까.
피식 웃으며 말하자 근육 돼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짐 자전거가…….”
“신호 바뀌었네요. 저 갑니다.”
부우우우웅-
-을 기대하며 힘껏 스로틀을 당겼는데,
돌돌돌돌돌…….
이 돌돌이 새끼.
이름을 바꿔 지을 걸 그랬나.
최고 시속 40㎞짜리답게 설렁설렁 나가자, 옆에서 피식 소리가 들렸다.
“아따~ 고거 이쁘네. 아재요. 열심히 하이소!”
근육 돼지는 비웃음을 날리더니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 진짜……!”
속 타는 마음과 달리 내 애마는 나름 최선을 다해 달릴 뿐이었다.
돌돌돌돌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