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후아, 정신없네.”
첫 손님부터 불안불안했는데, 쓸데없는 기우였다.
12시하고 15분이 넘자마자 가게가 순식간에 다 차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밖에 줄까지 생겼는데, 얼핏 봐도 대여섯은 넘어 보였다.
아주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3번, 라면 셋. 4번 라면 넷.”
“예. 가요!”
“5번, 라면 둘. 6번 라면 넷.”
“예!!”
화구가 여덟 개나 되니 한 번에 두 테이블씩 라면이 나왔다.
주문받을 필요도 없이 들어오는 사람 숫자대로 끓이기만 하면 되니 속전속결이었고, 공깃밥은 셀프라 딱히 번거로운 일도 없었다.
바에 앉은 손님들은 바로 끓여서 내주기만 하면 끝!
정말이지 무서울 만큼 거침없이 손님들을 클리어해 나갔다.
“음. 이거 생각보다 속도가 빠른데.”
그만큼 무리가 오는 느낌도 들었다.
체력적으로는 크게 힘든 건 없는데, 한 번에 라면 6~8개씩, 그것도 거의 열 번 가까이 끓이다 보니 정신적으로 지치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단순 반복 작업은 지겹지.
하지만 어느새 육수통 하나가 비어버렸고, 남은 육수통도 절반이 안 되어 보였다.
대충 스무 그릇 전후로 나올 분량.
“혜리야. 밖에 손님 얼마나 있는지 확인.”
“예. 몇 명까지 체크할까요?”
“일단 스무 명만 잡자. 일행 있으면 한둘 정도는 추가해도 괜찮아.”
“옙. 사장님.”
일전의 사고(?) 이후 바뀐 방식이었다. 남은 육수를 확인하고, 대기하는 인원수에 맞게 번호표를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육수에 여유가 있어도 모자란 것보다 남는 게 나았으니까.
“스물두 명까지 괜찮겠어요?”
“어. 충분해!”
어차피 라면은 정량이다.
아까 온 강한덕같이 체구가 큰 사람이 아니면 한 개, 한 그릇으로 딱 끝이니까.
모자라면 공깃밥으로 채우면 될 거고.
“근데 가격이 올랐다. 전에 4,000원이었는데…….”
여자 손님이 조용히 말한다고 하는데, 묘하게 귀에 쏙 들어오더라.
아무래도 새로 바뀐 부분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거겠지.
“난 이 가격이라도 괜찮다고 보는데? 요즘 공깃밥 하나 보통 천 원 하잖아. 비싼 식당은 이천 원씩도 받는데 뭘.”
“그런가?”
“저번처럼 딱 라면 한 그릇만 먹고 가는 건 조금 아쉽더라고. 역시 이런 국물에는 밥 말아야지.”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손님도 있구나.
애초에 국물을 넉넉하게 잡은 것도 이런 부분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그게 아버지 방식이었으니까.
“사장님 4번 테이블 마지막 주문요. 라면 여섯 개요.”
“어엉? 여섯 개?”
시선을 돌리니 예상과 달랐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이라 생각했는데 조금 마른 체격의 여자 손님 넷이었다.
그럼 둘이서 세 그릇씩 먹겠다는 건데……?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각자의 자리 앞에 공깃밥이 하나씩 있었다는 점.
“하긴, 많이 먹는 여자 손님들도 있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후 황당하게도 추가 주문이 두 그릇이나 더 들어오더라.
“……진짜 육수가 아슬아슬했네. 아무래도 다음에는 좀 더 여유 있게 잡아야겠다.”
아! 메뉴도 늘릴 예정이니 아예 육수통을 하나 더 구입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150인분 정도면 부족하진 않겠지.
그렇게 마지막 위대한 여자 손님들까지 보낸 뒤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50분에 시작했는데, 벌써 3시 넘었네.”
말 그대로 꼬박 세 시간을 라면만 끓였다.
중간에 약간 여유가 있기는 했지만, 틈틈이 설거지도 해야 했으니 제대로 앉아서 쉴 정도는 아니었다.
“어우, 지친다.”
내가 라면이요. 라면이 나인 느낌.
하지만 이럴 때 정신적인 피로감을 씻어주는 방법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개업식도, 가오픈도 아닌, 진짜 진짜 첫 정산!
“우와! 우리 백네 그릇이나 팔았어요?”
“아니, 백여섯 그릇.”
“근데 금액은 오십이만 원인데요?”
“마지막 추가 두 그릇은 서비스였잖아.”
“아! 맞다.”
여자 손님 네 명은, 아주 복스럽고 맛나게 식사를 했다.
대충 현지 또래로 보인 것도 있고, 반숙 계란 두 개가 터지고 베이컨이 좀 모자라서 그냥 드시라고 계산에 올리지 않았다.
“와, 근데 정말 점심 장사만 이만큼 벌었네요. 이러다 우리 금방 부자 되는 거 아니에요?”
“어, 아냐. 이건 일종의 개업발이라 보면 되니까.”
정확히 단가 계산을 해보진 않았지만 대략 한 그릇당 남는 금액은 1,500원이 조금 넘었다.
백 그릇 팔아 봐야 15만 원 정도를 버는 셈이라고나 할까.
주 5일 장사로 계산하면 한 달을 23.5일 정도 잡고, 추가 자투리까지 포함해 360만 원 정도를 수익으로 보면 될 터.
나중에 수원이까지 점심 장사에 가세하면 두 사람 월급만 200만 원은 나가겠지.
그럼 내 손에 남는 건 160만 원 정도.
하지만 이 정도 수익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월세도 나가지 않고 식사도 가게에서 해결하는 편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난, 분식집으로 큰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질 않는가.
그렇게 대략적으로 설명하자 임혜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얘가 숫자 계산이 조금 약했지.
“일단 차근차근 하나씩 해가면서 수익을 늘려 나가면 될 거야. 장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무엇보다 기다리는 게 있었다.
임수원은 아카데미 때문에 점심 장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아직 저녁에 짐 나르고, 재료 다듬고, 설거지하고, 치우고, 청소하는 게 전부.
흠, 이렇게 따지면 아예 노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곧 메뉴 하나를 더 늘릴 여유가 생긴다는 점이지.
며칠 지나면 겨울 방학이니까.
* * *
“라면에는 뭐다?”
“예? 그게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에요?”
“왜, 가장 만만하고 자주 먹는 거 있잖아. 아, 찬밥 말고.”
이 정도까지 힌트를 줬는데 설마 눈치 못 채지는 않겠지?
“김치, 깍두기, 단무지?”
엉겁결에 나온 임수원의 대답에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임혜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라면에는 역시 참맛 후랑크 소시지죠.”
“너희들은 상상력이 왜 그렇게 빈곤한 거냐?”
“그게…… 편의점 알바할 때 가끔 그렇게 먹었거든요.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설마 치즈 이야기 하는 건 아니겠죠?”
아무래도 스무 고개가 마흔 고개가 될 것 같아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밥이다. 라면에 김밥!”
“아~ 김밥.”
“그래. 이 조합은 모든 분식집의 스테디셀러이자 거의 실패하지 않는 정통 코스라고.”
“그게, 라면에 김밥 시켜서 먹어본 적이 아주 오래라서…….”
아…… 얘네들 개, 아니, 개털이었지…….
조금 슬프기도 했다. 얼마나 돈이 없었으면 라면에 김밥도 시켜 먹지 못했을까.
“사, 삼각김밥 정도는 먹어봤을 거 아냐.”
“삼각 김밥은 김밥이 아니죠. 그냥 밥, 양념 조금에 김 반 장도 안 되는데.”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
생각해 보니 그게 맞을지도 몰랐다.
먹을 때마다 빈약한 속 재료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요즘 잘 나온다는 말도 있긴 한데, 얼마 전까지 군인이었던 내 기준에는 당연히 성에 차지 않았다.
“크흠, 어쨌든 김밥 메뉴를 늘릴 거야.”
“김밥은 손 많이 가지 않아요?”
“일단 기본 김밥 하나, 시작은 서른 줄 정도로 해볼려고. 그 정도면 점심 장사로만 다 팔 수 있을 것 같거든.”
며칠 장사해 보니 대충 답이 나오더라.
라면이 백 그릇 정도 나가는 동안, 평균적으로 20인분짜리 밥통 두 개 반이 나갔다. 손님 절반 정도는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고 보면 된다는 거다.
즉, 밥을 찾는 수요도 분명히 있다는 것!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내가 하나하나 다 가르쳐 줄 테니까.”
그러면서 슬쩍 임수원을 쳐다봤다.
불길함을 예상했는지 임수원이 약간 움찔했다.
맞아.
김밥은 마는 건 네 몫이란다.
* * *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김밥은 가격이 얼마일까?
검색해 보니 강남의 유명한 식당에선 한 줄에 16,000원이나 받는다고 했다.
“내가 그런 걸 먹을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제일 저렴한 김밥은 역시 시장에 있었다.
밥과 단무지만 들어간 김밥 세 줄을 주는데, 가격은 달랑 1,000원.
물론 꼬마 김밥이라 불리는 작은 사이즈로 치면 무려 여섯 개나 된다.
심지어 30년 경력의 할머니가 싸 주기 때문에 가볍게 먹기는 괜찮은 편이기도 했고.
참고로 가장 장수할 수 있는 김밥은, 충무김밥이라더라.
사람들이 욕을 그렇게 한다나.
“그건 그렇다 치고, 꼬마김밥으로 갈 것이냐. 왕김밥으로 갈 것이냐인데.”
행복 분식은 적당한 가격대로 가기로 했다.
근처 가게들이 파는 저렴한 김밥은 1,500원. 당연하게도 속 재료는 많이 없었지만 기본에 충실했다.
평균은 2,500원 선이었고, 뭔가 추가로 들어가면 3~4,000원 정도.
“그러니 2,000원에 팔아야지. 그러려면 역시 왕김밥 라인이긴 한데!”
솔직히 혼자서 라면에 김밥 먹는데 7,000원이면 조금 과한 느낌이기도 했다.
하지만 둘이서 반줄씩 먹어도 될 양이라면 불만은 적을 터.
“역시 크고 튼실하게 가는 게 맞겠지?”
그렇다고 속 재료를 많이 넣게 되면 조리과정이 복잡해진다.
특히 계란 지단은 손이 많이 가고, 시금치는 호불호가 조금 있었다. 잘 데치지 못하면 풋내도 나지만 치아 사이에 끼는 경우도 많으니까.
행복 분식 손님의 상당수가 여성들이니 역시 빼는 게 맞겠지.
그 외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는데 자꾸 특색 있는 재료가 넣고 싶어졌다.
치즈라든가, 참치라든가, 고기라든가, 또 고기라든가…….
고기는 진리다.
“……이렇게 고민할 시간에 시장이나 돌아봐야겠네. 수원이 겨울 방학 기념으로 김밥 파티도 괜찮을 테니까.”
* * *
다행이었다.
진심으로.
포장 김밥집들이 모여 있는 라인은 정육점 골목과 거리가 제법 있었다.
즉, 내가 박살 낸 오토바이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농협 마트를 지나 부전 기차역 바로 앞에서 시장 골목으로 좌회전했다.
이쪽 라인은 제법 군침이 돌게 했다.
김밥, 떡볶이, 만두 등의 분식을 파는 가게만 네 곳이 붙어서 치열한 경쟁 중이었다.
그 옆으로 시장 빵집, 대왕 꽈배기, 고기 피자 고로케, 유명 떡갈비, 삼초 훈제 삼겹살 등, 하여간 포장 손님들을 줄 세우는 가게들까지 즐비했다.
난 하나하나 다 털어볼 작정이었다.
씹고, 뜯고, 즐기고, 맛보고, 그러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사실 처음부터 생각한 유명한 김밥집은 있었다.
하지만 곧 포기했다.
동네 알음알음 알려진 맛집이 갑자기 유명해지더니 부산에서 경남 일부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해 버렸다.
한마디로 프랜차이즈화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가격을 올렸고, 동시에 재료를 더욱 팍팍 넣기 시작했다.
당연히 더 맛있어진 거다.
행복 분식에선 그 단가를 맞출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일단 제일 오래된 대왕 김밥부터, 웰빙왕김밥, 달인 계란말이 김밥에 유부남 김밥은…… 아마 유부 김밥이겠지?”
기본 김밥으로 묵묵히 박리다매를 하는 가게들이 있는가 하면, 독특한 작명 센스로 돋보이려는 가게도 있었다.
“컥, 아저씨 고추김밥이라니…….”
좁은 간판 탓에 띄어쓰기가 잘 구분되지 않더라.
그걸 떠나서, 애초에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부전 시장을 쭈욱 돌면서 종류별로 김밥을 포장했다.
왕김밥도 있으니 대충 열네 줄 정도면 다섯이서 충분히 먹겠지. 비빔면도 끓이고 만두도 굽고 하면 술안주도 될 테고.
대충 계산을 마치고 행복 분식으로 돌아오니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어? 치수 네가 여긴 왜?”
“아~ 형! 아버지 심부름 왔어요. 김치하고 단무지 배달이요.”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매주 월요일, 수요일이 밑반찬을 받는 날이긴 했다.
“너도 방학했냐?”
“이 동네는 다 내일부터 쉴걸요?”
정태수는 칼국숫집 점심 장사부터 하고, 금치수는 아버지 일을 배우기로 했단다.
임민혁은 좀 더 수련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마지막으로 존재감이 흐릿한 호영이는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분간 태수나 친구들을 도와주면서 고민하기로 했다지.
“근데 형. 뭘 그렇게 잔뜩 사왔어요? 어, 다 김밥이네요.”
“어. 우리도 조금씩 김밥 팔아 보려고. 메뉴가 달랑 라면 하나뿐이면 좀 그렇잖아.”
“에이~ 그러면 저한테 먼저 연락 주셔야죠.”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조금 어색함을 느끼는데,
“형님,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치수 식품 사원, 금치수라고 합니다.”
“어? 어…… 근데 왜.”
금치수는 씨익 웃은 뒤, 영업사원처럼 고개를 숙였다.
“저희, 김밥 재료도 취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