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일어나라! 쓰레기들아!”
결코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수 없었다.
2층 거실 중앙에 임혜리가 大 자로 엎어져 있었다.
임수원은 임혜리의 오른발 종아리를 배고 자고 있었는데, 등에는 현지를 매달았다.
황당한 건 둘 다 변신한 채라는 거다.
우리 현지가 커다란 고양이랑 개 사이에 끼여서 자고 있는 형국.
문제는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다.
저렇게 자다가 남매가 정신이 들면서 괴수화가 풀렸고,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현아가 집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 하나 여자 둘. 거기에 남매는 나체였으니 충격받는 것도 당연했다.
“하…… 신형 슈트라도 하나 마련해 줘야 하나? 아니다. 그 전에 금주가 먼저다. 징한 녀석들. 일어나라!”
몇 번 걷어차 봤지만 이미 알코올쓰레기가 된 터라 시체처럼 잘 뿐이었다.
특히나 저녁 내내 이어진 김밥 고문에 피곤했는지 임수원도 꼼짝하지 않았고.
결국 현지와 혜리를 방 안으로 구겨 넣고 이불로 잘 말아준 뒤, 임수원을 내 방에 집어넣고는 밖으로 나왔다.
“흐으, 겨울치고는 따뜻하네.”
부산은 축복받은 도시가 틀림없었다.
한겨울에도 새벽이 아니면 영하로 떨어지지 않았고, 한파주의보가 터져도 롱패딩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까.
밖으로 나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제는 일과가 되어버린 시간.
명상과 호흡, 그리고 서서히 차오르는 감각과 충족감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확실히 임씨 남매를 거두고 장사를 하면서, 조금씩이지만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절반에 불과했던 힘이 60% 정도로 회복되었다고나 할까?
“확실히 메뉴 늘려서 손님을 더 받으면 회복이 좀 빨라지는 것 같은데?”
새벽 손님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첫날부터 부지런하네.”
“배우려면 부지런해야죠.”
가볍게 대답한 녀석은 이미 몸이 풀렸는지 살짝 얼굴이 불그스레했다.
그러고 보니 저놈도 임씨였지?
“근데 집 위치가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이 정도면 가벼운 산보지. 진짜 용건이 뭐냐?”
“그게…… 합격은 했는데, 아쉬움이 많아서요.”
임민혁은 투덜대면서도 슬쩍 웃었다.
“우수반에 들어가기로 정해졌는데, 알아보니 30명 중에 하위권이라네요.”
“그게 방학하자마자 찾아온 이유냐?”
“예.”
“그럼 했던 거 해봐. 아직 아침까진 시간 있으니 잠깐 봐줄 수 있어.”
“여기서요?”
슬쩍 손을 들어 임민혁을 세우고는 기감을 퍼트려 주변을 확인했다.
몇 군데 걸리는 곳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라면 감시자는 아니고 그냥 우연히 스치는 것 같았다.
“주변은 됐고. 공간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실제로 집 마당은 게이트가 터지기 전 원래 카페를 하면서 야외 테이블도 놓을 계획이었는지 널찍했다.
중요한 건 이만한 공간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지만.
임민혁은 윗옷을 벗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하아.”
순간 약간 바람이 불더니 임민혁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헐, 미친놈이.”
분명 이전에는 강화골갑형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본 나이트에 가까웠다.
돌격형보다 방어형 탱크에 가깝게, 커다란 방패와 단창으로 무장한 상태로 변형된 것이다.
대충 보니 공격력을 절반 정도 줄이고 방어력을 한 배 반 이상 늘리는 형태.
“D…… 아니, D+ 등급인가? 거의 말년 병장 수준이네.”
임민혁은 몸보다 큰 방패를 바닥에 박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막고 친다는 바로 그 형태.
“이 정도라면 상대해 줄 만하군.”
따로 능력을 쓰기보다 직접 겨뤄주기를 바라는 모양새다.
가볍게 반응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움직였다.
속도는 느긋하게,
손짓도 알아볼 만큼.
휙!
그리고 서너 걸음 걸은 뒤, 몸을 숙였다.
방패 바로 앞으로 모습을 숨긴 것이다.
이어진 동작은 손가락 두 개로 방패를 미는 것!
“헙!”
임민혁의 눈이 커졌다.
분명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지더니, 뭔가가 방패를 짓눌렀다.
“끄윽…….”
임민혁은 억지로 비명을 참았다. 입을 열었다가는 버티지도 못할 것 같아서였다.
‘압력이 어마어마하잖아……!!’
그때,
스르륵.
갑자기 방패를 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그건 찰나였다.
임민혁은 기회다 싶어 다리에 힘을 줬다.
이대로 방패를 휘둘러 공간을 만들고, 단창을 내지르면?!
그렇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려는 순간, 다시 뭔가가 방패를 툭 쳤다.
아까보다는 배는 강한 힘!
“으아악!!”
마치 몸을 날려 버리는 듯한 압력에 임민혁이 바닥에서 그대로 떠버렸다.
슈우우욱-
그대로 2m 가까이 밀려난 것 같았다.
그 순간, 유현성이 손가락 끝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흘렸군.”
“……!”
“나름 좋은 시도네.”
‘칫, 읽혔잖아!’
임민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계획을 변경할 순 없는 상황. 밀리는 힘을 이용, 몸을 비틀어 단창을 내질렀다.
짧다고 하지만 1m는 넘은 창에, 길쭉한 팔 길이까지.
충분히 유현성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
쿠콰콰콰콰콰콰!
창을 중심으로 바람이 회오리치더니 유현성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역시 특별한 속성은 없구만.”
하지만,
팅!
임민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움직인 건 고작 손가락 두 개일 뿐인데, 마창이 가볍게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허무하게.
동시에 유현성의 손가락이 가볍게 방패를 두들겼다.
콰직!
방패가 산산조각 나며, 그 틈으로 손가락 두 개가 튀어나왔다.
딱!
손가락 두 개가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임민혁의 의식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 *
“이거 성장 속도가 제법인데?”
널브러진 임민혁을 내려다보며 유현성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임씨 남매랑 다르게 잠재력이 대단했다.
특히 상대를 잘 만나면 터질 놈 같았다.
싸우고 처맞으면 강해지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가만, 이거 써먹을 데가 있을 거 같은데…….”
잠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데, 임민혁이 몸을 움찔거렸다.
“2분 지났어.”
“……헉! 정말요?”
“보통 십 초 정도면 사람 열 명이 죽어 나가. 빠르면 그 두세 배도 가능하지. 그 기준이면 넌 백이십 번은 넘게 죽은 거야.”
“서, 설마…….”
“속도계 상위 능력자가 100m 뛰는 데 2초밖에 안 걸리는데, 그 정도는 차고 넘치지.”
실제로 전격계 마법은 초 단위가 아니라 그 절반 단위로 움직인다. 물론 발동 시간이 길고, 헌터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아오!! 이거 열받네! 형, 근데 나 강해진 거 맞아요?”
“확실히 변신 과정은 2초 이내니 열심히 수련한 건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뭘 제대로 한 것도 없는걸요?”
“그야 당연하지. 개미 한 마리가 열심히 문다고 사람한테 위협이 되냐?”
“헐, 하필 비교 대상이…….”
“그게 너와 나의 격차다, 인마.”
임민혁은 반쯤은 울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린 듯, 기습적으로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형은 능력은 뭐예요?”
“말해줘도 모를 텐데?”
“마법이나 그런 건가요? 아니면 이능?”
“비슷한데, 굳이 명칭을 정하자면…… ‘만능’과 ‘무능’ 정도?”
“그게 무슨…….”
“의지로 될 것 같다 하면 되는 게 만능이고, 다 지워져라 해서 지우는 게 무능이지. 대충 그런 개념이야. 말하기도 어렵지만, 할 수도 없어.”
아이가 태어나서 기어 다니다가 갑자기 걷게 되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냥 본능에 가까운 거였다.
“그냥 말해주기 곤란하면 곤란하다고 해요. 어차피 헌터들이 자기 능력 안 밝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정말인데?”
“됐고요. 어떻게 하면 형처럼 강해질 수 있어요?”
“한 천 번 정도 죽다 살아나면 그렇게 돼.”
“미친…….”
표정을 보니 질문 자체를 후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해도 믿지 못할 거다.
그 무수히 많은 게이트 속에서 내가 어떤 지옥을 겪었는지.
“와, 그래도 많이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진짜 뭐 하나도 제대로 이야기해 주는 게 없네요.”
임민혁은 요즘엔 칼국숫집 종업원 수준으로 일을 했고, 그러면서 분명 가까워진 건 맞았다.
하지만 달리 해줄 말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아, 해줄 말은 있지. 왜 그런 형태로 바뀐 거냐?”
“교관님이 공격형보다는 수비형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해서요.”
“흐음, 파티를 염두에 둔 건가?”
“잘못…… 된 건가요?”
임민혁이 눈치를 보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못된 건 없지. 아카데미라면 아무래도 생존을 우선시하는 교육을 할 테니까. 개인보다 파티 형태가 나을 수도 있어.”
문제는 강화골격계의 최종 형태가 파티와는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충분한 방어력과 회피력을 바탕으로 송곳 같은 공격을 쏟아부어 적 진형을 헤집어 놓는 형식이었으니까.
한마디로 체스의 ‘나이트’라 보면 된다.
‘이 녀석을 그렇게 한 번 만들어볼까?’
더불어 방에 쓰러져 있는 알코올쓰레기 남매랑 붙여놓으면?
오, 이거 그림이 나오는데!
개돌이를 타고 적진에 돌격하는 본 나이트.
후위는 알코올 돼냥이가 커버하면 되겠지.
그러고 보니 다들 성이 같으니까 임씨 1호, 2호, 3호 정도로 부르면 되겠군.
안 그래도 두 남매를 성장시킬 방향을 잡지 못했는데, 대충 정해진 것 같다.
“너, 수련하고 싶으면 와라. 자주는 못해도 종종 봐주기는 할 테니까.”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귀찮았지만 오해와 억울로 얼룩진 표정으로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데려갔던 공간…… 이 뭐예요?”
“기억이 난 모양이네?”
“수련 중에 갑자기 떠오르더라고요.”
“음, 거긴…… 레어야.”
“예? 레어요? 설마 판타지 소설 같은 데 등장하는, 그 드래곤 레어 같은 거요?”
“엉.”
임민혁의 얼굴에 더욱 오해가 덧칠되는 순간이었다.
* * *
“……생각해 보니 오지랖이었나?”
“예? 사장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아냐. 오늘은 좀 더 바쁠 것 같으니까 혜리 너는 청소 서두르고, 수원이는 재료 다듬을 준비해라.”
대충 지시를 해놓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점심 장사를 빨리 마무리하면, 금치수가 김밥 재료를 가지고 올 거다.
아까 전화로 확인했으니까 실수는 없겠지.
“그럼 난 유부만 준비하면 되겠군.”
대충 계산해서 냉동 유부가 200g 전후로 들어간다고 보면, 양념까지 포함해서 김밥 원가에 100원 정도가 더 들어갈 거다.
혹시 모르는 어묵도 좀 사다 놔야겠지.
둘 다 조리는 같은 방식으로, 불고기 양념으로 할 예정이었다.
간장과 설탕을 1 대 1 비율로 미리 섞어서 준비하고, 거기에 매실청이나 배를 갈아서 더할까?
거기까지는 좀 과한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역시 ‘왕’ 김밥이라는 것.
김은 한 장 하고 3분의 1 정도를 쓰면 될 거고, 밥으로 덮으면 뜯어지거나 하진 않겠지.
해보고 안 되면 육수를 조금 부어서 붙이는 방법도 있으니까.
그렇게 김밥에 대해 궁리하고 메모하는 사이,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자, 영업 시작이다! 손님 받을 준비해!”
“예. 사장님.”
임혜리가 씩씩하게 대답했고, 임수원도 주섬주섬 주방에 들어섰다.
오늘은 화구 앞에서 몇 가지 테스트를 해볼 계획이었다. 게다가 임수원에게 주방 일을 하나하나씩 맡기려면 가까이서 두고 시켜보는 게 좋았다.
집에서 할 때랑은 느낌이 전혀 다를 테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재수 없는 느낌이 드는데……?”
“야, 이 새끼가!!”
이건 분명 임혜리의 목소리다.
“이놈의 촉은 틀리지도 않아요.”
뭔가 싶어 다급히 나가 보니, 줄 선 손님들 중 몇 명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딱 보니 알겠다.
양아치네, 양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