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단무지, 당근, 우엉 정도만 받을 수 있을까?”
유현성의 말에, 금치수가 당황했다.
“형. 정말 그 세 개만 할 거예요?”
“어. 일단 맛살은 굳이 필요 없고, 색감 때문에 넣는 시금치나 오이 같은 경우 호불호가 있잖아.”
“그렇긴 하죠.”
“솔직히 맛살이 맛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간단하게 꼬마 김밥으로 비교하자.
한 개 혹은 두 개 정도의 재료로 김밥을 마는데, 스팸, 김치, 참치, 진미채, 멸치 등등을 많이 사용하더라.
거기에 맛살 김밥은 없었다.
즉, 메인급으로 맛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
“물론 두껍게 많이 넣으면 약간의 간과 전체적인 식감을 부드럽게 잡아주는 역할을 하긴 하지. 비싼 맛살을 쓰면 향도 괜찮고. 근데 내가 만들 김밥에는 굳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
“그러면…… 빼야죠.”
“시금치야 향과 질감을 채워주기는 하는데, 사정상 우리 가게에선 빼기로 했어.”
“왜요?”
“꼼꼼하게 할 자신이 없어서.”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넣으면 좋기는 한데, 우리 가게 손님의 절반 이상이 젊은 여성이다.
관리를 조금만 잘못해도 질겨지고 치아 사이에 끼이기도 하니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다고.
“그, 그런 이유라면 빼는 것도 맞죠.”
“오이도 마찬가지더라고. 난 맛있는데, 의외로 호불호가 크더라. 알레르기 있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오이도 빼면…… 진짜 당근, 우엉, 단무지 이 세 개로 김밥을 만들려고요?”
“어.”
확고한 대답에 금치수는 당황했다.
하긴. 영업하러 왔는데 뭐 빼고, 뭐 빼고 하니 막상 팔 건 몇 개 되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그렇게 주문하는 가게들도 있지?”
“인정. 자체적으로 이런저런 재료를 넣는 가게들은 딱 손이 가는 몇 가지만 주문하기도 하니까요.”
“그럼 단가 좀 뽑아줘.”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하자 금치수는 폰으로 이것저것 확인하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형이 말한 대로라면 한 줄에 800원 정도까지 낮출 수 있어요. 김까지 추가하면 대충 950원 선?”
“오케이. 일단 그 기준으로 잡아 주고…….”
기세를 완전히 잡았다 싶었는데, 금치수도 마냥 양보만 하는 건 아니었다.
“대신 최소 주문이 50인분인데 괜찮겠어요?”
“어? 자, 잠깐만!”
계산이 약간 복잡해졌다.
일단 하루 30줄 정도로 시작해 보려고 했다. 반응이 좋으면 양을 늘리고, 안 좋다 싶으면 다른 김밥을 시도해 볼 계획이었던 거다.
최소 50줄이라면 잘 안 팔렸을 경우 문제가 커진다.
일단 재료 받는 걸 1,000원으로 잡고 유부와 기타 추가될 걸 생각해서 넉넉하게 1,300원까지 치면, 한 줄에 700원이 남는다.
하루 50줄이면 35,000원 수익.
한 달 20일만 장사한다 치면 70만 원이 남는 셈.
여기다 실수해서 빠지는 부분을 감안하면…….
생각해 보니 정말 남는 게 적은 편이었다.
안 팔리면 매일 그 돈이 고스란히 날아가니, 이거 손해 아닌가 싶었다.
확실히 도전이냐, 마느냐인데.
……일단 하기로 했으니 진행하는 게 맞겠지.
김밥 안 팔리면 저녁이랑 다음 날 아침을 그걸로 때우면 될 테고.
크흠, 갑자기 임수원이 불쌍해지네.
“그래. 일단 그렇게 받기로 하자.”
이후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다.
재료는 일주일에 월수금 이렇게 세 번 받는다. 김치, 깍두기, 단무지도 그때 맞춰서 같이 보내겠다.
냉장 보관이고 무조건 이틀 이상 지나면 폐기할 것.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었는데 대부분 식중독이나 재료 관리 쪽 이야기였다.
충분히 납득되는 내용이었다.
금치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근데 형, 그러면 전체적으로 김밥이 벌겋게 보일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유현성은 씨익 웃은 뒤, 속삭이듯 말했다.
“당연히 생각해 놓은 게 있지.”
* * *
“일단 만들어 보자!”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임혜리와 임수원에게 용돈을 쥐여 줬다.
어차피 내일은 쉬는 날이었다.
아까의 일도 있고 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다녀오라고 했는데, 찜질방을 가 보겠다고 했다.
그것도 우리 강 여사님과 현지, 현아랑 함께.
나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러라고 했다.
단, 살기를 담은 주의를 주는 건 잊지 않았다.
“술 마시면 죽는다!”
그렇게 애들을 보내고, 김밥 만들 준비에 들어갔다.
당근을 살짝 볶고, 단무지와 우엉은 살짝 행군 다음 물이 빠지도록 놓았다.
“확실히 좋긴 좋네.”
당근 채를 빼면, 단무지와 우엉은 딱 김밥 길이었다. 따로 손을 댈 필요 없이 넣고 말면 끝나도록 나온 것이다.
또 하나의 재료를 손질해서 무친 다음.
마지막은 유부였다.
“이거 쉽지 않네?”
냉동 유부를 데쳐서 기름을 빼고, 간장과 설탕을 섞은 소스에 볶는다.
여기서 무려 네 번이나 실패했다.
맛이 없거나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수준의 쫄깃함과 짭짤함이 나오질 않아서였다.
“역시 인터넷에 올라온 대로 보고 따라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블로그니 유투브니 맛스타그램이니 이것저것 다 뒤져서 메모해 놓고 하는데도 생각만큼 잘 안 되더라.
“내가 감각이 없는 건가?”
아마도 그건 아닐 거다.
대략적이나마 생각한 대로 만들면 최소한의 맛은 나왔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경험치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눈대중으로 본 것도 있었고, 칼국숫집도 거들면서 자잘하게 배운 것도 많았으니까.
“역시 문제는 안 해본 걸 해본다는 건가.”
유부로 고기 질감을 낸다는 건 역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남들은 뚝딱 쉽게 했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 같았다.
“그래도 거의 비슷하게 나왔으니…… 일단 말아보자.”
제일 중요한 유부 조림이 끝났다.
일단 김밥용 구운 김을 꺼냈다.
이게 장당 100원짜리 고급품이란다.
검색한 가격보다 비싸다고 했더니, 이건 자기 회사의 노하우가 들어간 제품이라고 했다. 몇 군데 공장을 통해 김밥 전용으로 주문 생산을 한다는 것이다.
일반 김밥 김보다 더 질기고 바삭하다는데, 솔직히 맛을 봐도 그 차이를 잘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금치수가 적극 추천해서 받기로 했다. 임민혁을 통해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으니, 허튼짓은 안 하겠다 싶어서 말이다.
그 김 하나를 3분의 1로 잘랐다.
이걸 온전한 김 아래에 깔고, 양념한 밥을 전체적으로 펼쳤다.
“흐음. 이 정도 양이 맞나?”
약간 긴가민가했다.
보통 공깃밥 반 공기에서 3분의 2공기 정도를 쓴다고 들었다.
대충 성인이 한 움큼 쥐는 정도 양이라는데, 왕김밥인 걸 염두에 두고 조금 더 잡았다.
흐음, 깔고 보니 이거 주먹밥 느낌이네.
너무 많이 넣은 건가?
그래도 일단 진행하기로 하고 그 위에 절반을 당근 채를 뿌린 후, 나머지 비장의 재료로 살짝 덮었다.
이제 단무지, 우엉을 깔고 유부를 듬뿍 올려서 말기만 하면 끝이었다.
연습한 대로 살살살 말아 보니, 툭!
터졌다.
“으아, 힘을 어느 정도 줘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일단 맛이나 보자.”
터진 부분을 제외하고 적당히 썰어 한 개를 입에 넣었다.
밥이 많아 싱거울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다양한 맛이 느껴졌다.
당근의 아삭함, 단무지와 우엉의 식감과 약간의 새콤함, 마지막으로 유부의 고기 질감과 짭짤함이 어우러지는데.
“아.”
진심으로 짰다.
“간이 안 맞는 이유는……?”
일단 메모를 했다.
밥에 뿌리는 소금 양을 줄이고, 참기름을 늘리자. 혹시 모르니 유부를 볶을 때 들어가는 간장도 덜 쓰면 되겠지.
이런 식으로 체크하면서 다시 김밥을 말았다. 혹시 터질까 싶어서 밥의 양도 조금 줄였다.
그랬더니…… 아까보다 더 짰다.
“다시 밥을 늘려보자.”
그리고 여섯 개째.
그제야 제대로 된 완성품이 나왔다.
맛은 딱 예상한 그대로.
당근은 아삭했고, 우엉과 단무지는 적당히 짭짤하고 씹기 좋았다.
여기에 유부의 고소하고 쫄깃함에 비장의 새콤한 겉절이가 어우러지며 진짜 고기 쌈 느낌이 나더라.
물론 진짜에 비해 부족하긴 하지만 몇 번 더 연습해서 균형만 잘 맞춘다면…….
유현성은 씨익 웃었다.
“미각을 속이긴 충분하겠지.”
* * *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김밥에만 매달렸는데 순식간에 네 시간이 훌쩍 지난 거다.
다행인 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적어도 욕먹을 수준은 아닌 유부 김밥이 나왔다는 것.
간도 적당했고 식감도 부족하지 않았다.
유부도 제법 맛있게 나왔고.
“이 정도라면, 눈 감고 먹으면 고기로 착각할 수 있겠는데.”
적어도 내 입에는 그 정도였다.
문제는 남은 김밥이었다.
당연히 이틀을 쉬니, 남은 재료를 다 소진하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한 개, 두 개씩 집어 먹고 실패작은 버렸음에도, 무려 열여섯 줄이나 남아 버린 것이다.
“흐음, 태수네 갔다 줘야지.”
어차피 애들이 청소랑 정리 다 해놓고 갔으니 주방만 치우면 끝이었다.
후다닥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불을 껐다.
가게 문을 닫고 도어록을 잠갔다.
그때,
“저녁 장사는 언제 하냐?”
“아오, 깜짝이야!”
진심으로 화들짝 놀랐다.
어지간한 인기척은 다 느낄 수 있는데, 상대가 정말 소리조차 없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얼굴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고물상 박씨 아저씨.
생각해 보니, 한때 소리 소문 없이 동네 고물을 모조리 쓸어갔다는 업계의 전설적인 실력자였다.
혹시 그 부분으로 각성한 건가 싶을 정도.
심지어 별명도 ‘암행어사’였지.
이름이 박문수라서.
“뭘 그리 놀라?”
“아, 아뇨, 아뇨.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어쩌긴 뭘 어째. 요 위에 만냥포차 가서 한잔할라고 그라지.”
“아! 예.”
원래 새벽부터 움직이는 분이라 보통 여섯 시 되면 마친다.
아마도 지인들과 약속이 있어서 집에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온 모양이었다.
“근데 장사 좀 하지 않았나? 거의 한 달은 넘어가는 것 같은데? 저녁 장사는 언제부터 할라고?”
“그게…… 큰 문제없으면 새해 좀 지나서 해보려고요. 아직 자리도 잡지 않았고, 메뉴도 많이 없거든요.”
“거, 유씨도 많이 기대하던데. 몇 번이나 자네 라면 생각난다고 하더라고. 거기에 소주 한잔하면 딱이라나 뭐라나.”
“그래요? 그런데 왜 가게 안 오세요?”
박씨 아저씨는 소탈하게 웃었다.
“유씨나 우리 같은 이들이 손님 많은 시간에 들러봐. 현성이 너한테도 안 좋아.”
“아,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고물상 일은 결코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순히 폐지만 줍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가져가서 분류도 해야 하니 땀에 절고 냄새나는 경우도 많았다.
본인도 그걸 알기에 행복분식에 들르는 걸 피해주셨던 거겠지.
“허허, 니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냥 우리 일이 그런 건데.”
“예. 최대한 일찍 저녁 장사 시작해보도록 할게요.”
“그래. 매상은 우리가 쏠쏠하게 올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그리고 이거 좀 가져가서 드셔보실래요?”
유현성은 비닐 봉투에서 김밥 세 줄을 꺼냈다. 칼질로 먹기 좋게 잘라 놓은 거라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은박 포장을 해놓은 거였다.
“이번에 메뉴로 낼 김밥입니다.”
“허허, 잘 먹을게. 그리고 저녁 장사 시작하면 꼭 좀 연락하고!”
“옙.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박씨 아저씨를 보내고 당당히 칼국숫집 문을 열었다.
한가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손님이 그득하더라.
“어? 형 왔어요?”
임민혁이 묻자 막 그릇을 치우고 있던 금치수와 식탁을 닦던 호영이도 고개를 돌렸다.
“어, 그런데 오늘은 다 모였네.”
“바쁘다고 해서 거들 겸 왔어요. 마치고 같이 놀러 가려고요.”
“어딜?”
“이번에 새로운 게임 들어왔다고 해서요.”
“아, 게임방.”
하긴 첫 만남 때도 게임방을 언급했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녀석들 취미가 게임이라는 거였다.
보통 저 나이 되면 어떻게든 술집을 가려고 기를 쓰는데.
“요즘 뭐 하는데?”
“스타워즈4요. 진짜 이번 건 밸런스가 죽인다는데…….”
금치수가 신나서 떠드는데, 솔직히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나마 알아듣는 건, 우주 벌레, 사이코 기사단, 기갑 군대 세 종족에서 한 종족이 추가됐다는 정도였다. 게이트가 열리면서 판타지의 마법사 일족이 생겼다는 거다.
설마 현실 반영인 건가?
하여간 애들하고 잠시 잡담을 하면서 뒷정리를 도왔다.
그런 뒤, 손님들이 적당히 빠져나가자 오늘의 목적을 실행시켰다.
“자, 마무리했으니까, 모두 집합.”
“옙!”
“무슨 일인데요?”
난 오늘의 실험체…… 아니, 시식단에게 긴장을 주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신메뉴로 김밥을 만들었는데 맛 좀 봐달라고.”
식탁에 김밥을 풀자 모두 눈빛이 달라졌다.
특히 놀란 사람은 금치수였다.
“형! 미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