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왜? 맛있어서? 맛있지?”
“형,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요?”
“아~”
막 은박지가 벗겨진 채였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본심이 튀어나온 거다.
“그, 그게 맛은 괜찮을 거야.”
“그게 아니라 제가 재료 갔다준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세 메뉴를 만들었다니 놀란 거죠.”
“오, 그래?”
이게 놀랄 일인가 싶어 유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밥이야 해놓은 게 있고, 재료도 다 썰려 나왔으니 간단하게 준비만 하면 된다.
그런 뒤, 김 놓고 밥 깔고 재료 올리고, 추가로 슥슥 말면 끝인데.
하지만 금치수는 흥분하면서 말했다.
“아까 저한테 그랬잖아요. 야심 차게 준비한, 행복 분식만의 시그니처 메뉴라고. 정말 어디에서 맛볼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김밥을 만들겠다고.”
이 무슨 광고 멘트, 아니, 요리 방송에서도 피할 것 같은 과장된 개헛소리란 말인가.
분명 그렇게 말한 기억은 없었다.
그냥 다른 가게와 다른, 우리 분식집 라면과 어울리는 제법 괜찮은 김밥을 만들겠다고만 한 거다.
그것도 2,000원이란 가격 이내에서.
혹시 저 녀석 머릿속에 과장+아부 필터가 내장되어 있는 건가?
“설마 실패해서 가져온 거 아니겠죠?”
“죽을래?”
“아닙니다.”
“일단 먹어봐!”
“충성!”
아직 군대도 안 간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 갑자기 두통이 치밀어 오른다.
일단 가만히 녀석들의 먹는 모습을 봤다.
그때 구석에서 칼국수를 거의 마시듯이 드시는 손님들이 보였다.
아마도 커플 손님들이겠지.
김밥은 열세 줄,
한창 팔팔한 남자 넷이서 먹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양이었다. 게다가 크게 말은 푸짐한 왕김밥 아닌가.
두 줄이면 충분히 포식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유현성은 포장이 벗겨지지 않은 두 줄을 들고 한쪽 테이블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제가 맞은편에서 작게나마 분식집을 하는데, 한 번 시식해 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아, 예.”
“드셔보시고 편하게 이야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마지막 남은 테이블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인 뒤 같은 말로 김밥을 건넸는데 아저씨 하나가 툭 쏘아붙였다.
“뭐 하는 거요?”
“예? 그냥 김밥 한 번 드셔 보시라고…….”
“어이, 총각! 남의 가게 와서 무슨 영업질이여. 이건 상도덕에 어긋난 거야. 어디 여기 와서!”
적대적인 반응이지만 그게 오히려 반갑다고나 할까.
“하하.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뜻이 아니라…….”
“됐고. 가져가.”
“예?”
“안 먹는다고.”
너무 단호한 태도에 잠깐 당황하는데 태수가 후다닥 뛰어왔다.
“삼촌, 이 형이랑 그런 사이가 아니라요.”
“됐고. 내가 이 가게 5년 단골이다. 어지간한 사람들 다 봤거든? 그리고 보니까, 너도 그렇고 애들 막 휘어잡더라. 이건 아니지. 할매 없다고 이러는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저거 넙죽 받아먹으면…… 에휴~ 아니다.”
“아니, 삼촌! 진짜 그런 게 아니라.”
“됐고. 계산이나…….”
드르르륵.
평소보다 문소리가 요란했다.
그 때문인지 가게 안의 대부분 사람들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고, 할매 오셨소.”
방금까지 막 싸울 듯이 이야기하던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건 덕순 할머니였다.
저녁 시간에는 태수에게 장사 맡기다시피 하고 종종 어르신 쉼터에 가서 쉬신다고 들었는데, 이 시간에 오실 줄은 몰랐다.
“어이구, 이 서방. 이 시간까지 있을 줄은 몰랐네.”
“하하! 할매요.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나서요. 아이그 참.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아저씨가 날 슬쩍 보는데 아주 대놓고 이놈 뭔가 하는 투였다.
하지만 덕순 할머니는 웃으면서 다가와 유현성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 손주가 뭐 실수했어?”
“예? 소, 손주요?”
“그려. 우리 손주.”
“아니, 할매. 저기 태수 말고 손주가…….”
“아이고~ 이 서방. 여도 우리 손주여. 거 군대 오래 있어서 내가 말하는 걸 까먹었구먼.”
순간 이 서방이라 불린 아저씨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근데 덕순 할머니가 아니라 왜 그 뒤를 보는 건가 싶었다.
덩달아 내 시선도 돌아갔는데, 헐. 왜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거지?
“혜진 이모?”
“어, 현성아.”
순간 혜진 이모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이 서방이라 불린 아저씨를 보니, 이 아저씨도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만.
혜진 이모는 내가 전역하고 처음 분식집에 갔던 날, ‘이 아저씨가 내 오빠야?’ 하고 물었던 은희의 엄마였다.
우리 강 여사님이 종종 가게도 맡기고, 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오기도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고.
혼자 딸을 키우는 것 같았는데 뭐, 실례일 수 있으니 자세한 가정사까지는 묻지 않았고.
근데 이 서방이라니. 이건 무슨 분위기란 말인가?
“에이구. 이 서방. 거 나이도 있는데 날 잡았으면 좀~ 우리 가게는 그만 와.”
“아이고. 할매요. 맛있는 걸 우짭니까.”
“뻘 소리 말고. 슬슬 들어가 살든가, 뭘 좀 정리하든가. 아이고, 내만치 나이 들어봐라. 이리 하루하루 보내는 것도 아깝다.”
“하하. 하. 그, 글쵸. 근데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나서 일하는 동생하고 좀…… 그리 됐습니다. 근데 이 옆에…… 손주는…… 크흠.”
이 서방 아저씨는 방금과 다르게 말을 많이 더듬었다.
더 황당한 건.
어이, 아재요. 와 내 눈치를 봅니까?
그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하지만 이럴 땐 선빵 필승.
“제가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군대 갔다가 얼마 전에 전역한, 맞은편 행복 분식을 하고 있는 유현성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그, 그 은하 누님 큰아들. 맞지?”
“예. 맞습니다. 하하하.”
“그래, 우리 혜진 씨가 이야기 많이 하더라고. 거…… 누님이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했고. 크흐흐흠. 나 이성남이라고 하네. 반갑네. 내가 방금 좀 그랬지? 허허.”
“괜찮습니다. 다 우리 태수랑 애들 아껴서 그런 건데.”
유현성이 연신 굽신굽신거리는데, 이 아저씨도 거의 자동으로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러니까, 크흠, 오해는 사과하지. 거~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태수가 막 각 잡고 하는 게 좀 그래서…….”
아! 확실히 오해할 만했다.
애들만 넷이라,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통솔하기보다 딱 ‘너, 뭐해’, ‘너, 여기’, ‘넌 이쪽 정리’ 이런 식으로 하는 게 효율적인 것 같았는데 좋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확실히 이 부분은 좀 고쳐야겠네.
“괜찮습니다. 제가 괜한 오해를 만든 거죠.”
“어? 어어~ 그렇긴 하…… 더라.”
“그냥 빨리 마무리하고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제가 좀 딱딱 시킨 편이라. 어쨌든 죄송합니다.”
유현성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데, 이성남도 다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친하게들 지네. 하루 이틀 얼굴 볼 사이도 아니고. 근데 현성아. 이건 뭐라냐?”
덕순 할머니의 시선은 막 은박지를 까고 나온 김밥을 향했다.
“이번에 새로 메뉴로 낼 김밥입니다. 한번 드셔보시라고 가져왔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저쪽에서 웁웁 하면서 엄지 척 모션이 들어왔다.
이럴 땐 눈치도 있고 기특한 놈들이군.
“이 서방, 하나 들어보게.”
“옙.”
군말 없이 맨손으로 김밥을 하나 입에 넣은 이성남은 잠시 우물거리다 멈칫했다.
어라? 입에 안 맞나?
잠깐 의심했는데 그 직후 이성남이 김밥을 하나 더 집어 들더니 덕순 할머니를 향했다.
“내는 잘 모르겠는데 할매요. 함 드셔 보이소.”
손으로 내미는데 덕순 할머니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이 서방, 명심해라. 니는 앞으로 죽어도 마누라가 우선이다.”
“아! 그쵸. 그래도 할매 먼저…….”
“내는 우리 손주들하고 먹을란다.”
덕순 할머니는 웃으며 시원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그 직후, 이성남이 김밥 하나를 내밀었다.
“자기야, 아~”
“오빠, 좀…….”
“보면 어때? 아~ 아~”
“어우, 쫌~”
“괜찮아. 괜찮아.”
에이 씨.
아주 그냥 손발이 오그라들어 불판에 올라간 오징어가 될 것 같구만.
차마 말은 못하겠고, 혜진 이모 입에 김밥이 들어가는 것만 보고 시선을 돌렸다.
이성남의 부사수로 보이는 직원 역시 애써 고개를 돌리더라.
“형, 농담이 아니라 맛있어요. 정말 이게 몇 시간 만에 뚝딱 새로 만든 거라면 형님은 진짜 천재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평생 가는 겁니다. 형님은 만들고, 필요한 건 제가 맡아서 하고!”
금치수의 아부 필터를 무시하고 임민혁을 쳐다봤다.
“맛있네요. 기왕이면…….”
“패스. 태수 너는?”
“형, 이거 맛있어요. 우리 가게에서 예전에 팔던 김밥도 괜찮았는데, 이건 충분히 먹힐 만해요. 거기다 색감이 이게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다 할머니 덕이지.”
“그래도 이렇게 응용하는 건 잘 없는데, 진짜 맛있어요. 이건 진심.”
“오케이. 호영이는.”
슬쩍 돌아봤는데 녀석은 말이 없었다.
그저 고민하는 듯 고개만을 숙인 채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맛이 없나?
하지만 이어진 대답은 의외였다.
“형! 혹시 직원 모집해요?”
* * *
몇 달치의 혼란이 한 번에 몰려왔다.
일단 혜진 이모.
이 서방, 아니, 이젠 이모부라 불러야 하나 싶은 이성남의 존재부터 시작하자.
결론, 김밥이 맛있다고 우걱우걱 먹다가 목에 걸려 결국 칼국수 국물을 쭈욱 마셨다.
문제는 끝까지 트림을 참지 못했다는 거다.
“끄어어어억!”
다들 질색했고, 이성남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혜진 이모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다워서, 시원해서 좋네요.”
어우씨, 눈 꼴시려워라.
누군 왕년에 연애 안 해봤냐.
어째든 그 커플을 제외하고 다들 토할 뻔했다.
달달 달달이 건강에 안 좋다면, 저 달달은 정말 치사량이었다.
아! 오해 마라.
내가 아니라 상대를 치사로 만들 정도로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게 된다는 소리였다.
다음으로, 임민혁은 정말 괜찮다고 했다.
라면과 어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밥만 놓고 치면 딱히 흠잡을 정도는 아니라더라.
정태수는 간이 조금 강한 것 같지만 칼국수에도 어울리니 라면하고도 맞을 것 같단다.
그러면서 단무지는 빼도 괜찮지 않을까 넌지시 말했는데, 금치수가 펄떡펄떡 뛰었다.
“너 단무지 안 들어간 김밥 본 적 있냐?”
-라고 말이다.
금치수는, 몇 개 먹은 뒤로 아주 김밥을 해부할 듯 펼쳐서 분석했다.
당연하게도 난 녀석의 머리를 도시락통에 박아 버렸다.
맛본다는 새끼가 왜 김밥을 혓바닥으로 핥냐고!
호영이…… 솔직히 성은 까먹었다.
아니, 듣기나 했던가 싶을 정도로 얘는 존재감이 좀 희미했다.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제자로 삼아 가르쳐만 달란다. 그래서 잠시 고민 좀 해보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덕순 할머니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
“예? 맛이…… 없나요?”
“간이 맞으면 다 맛있는 거지. 근데 깊은 맛이 없어.”
잠시 헛갈렸다.
욕심이 많다는 건 재료를 많이 썼다는 거고, 돌려서 들으면 일단 간은 맞다는 거였다.
근데 김밥에 깊은 맛이라는 게 뭐지?
“현성아. 너 라면 팔잖아. 그럼 김밥도 거기에 더 어울려야지. 우엉도 적당히 빼고 당근도 더 빼!”
“그래도 괜찮을까요?”
“간장도 빼고 설탕도 더 빼라.”
“정말요?”
덕순 할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냉정한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긴장되더라.
“맛이라면 맛은 있는데, 김밥인데 왜 김하고 밥맛은 안 느껴지니? 이 좋은 쌀로 지은 밥인데, 양념 맛 범벅이야.”
“그 정도로요?”
유현성이 당황해하자 덕순 할머니는 나지막이 웃으셨다.
“뒀다 뭐 해? 육수를 써.”
짧은 그 말에,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치더라.
육수. 육수라…….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애초의 목적이 라면과 어울리는 김밥이 아니었는가.
확실히, 내가 생각한 유부의 담백 쫄깃에 고기 감칠맛은 라면에 없는 식감을 대체하기 위한 거였다.
난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대놓고 물었다.
“할머니, 그럼 육수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