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검증은 끝났다.
“수원아, 김밥 두 줄 추가.”
“옙.”
금치수가 염려했던 대로, 그냥 벌겋기만 한 김밥은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초록색을 깻잎으로 내려 했는데 향이 너무 강했고, 다른 재료를 찾다가 부추가 눈에 띄었다.
“흐음~ 맛있다.”
“그러게. 좀 이상할 것 같은 조합인데 잘 어울려.”
“김밥에 부추 겉절이라니.”
그게 제대로 먹혔다.
부산 사람들에게 부추 겉절이는 무척 친숙한 음식이었다. 달리 정구지라 부를 정도인 데다 어지간한 국밥집에 가면 항상 나온다.
그 결과.
“이상하게 김밥에서 고기 쌈 맛이 나다니.”
“그러게. 이게 이럴 수가 있나?”
매콤새콤한 겉절이에 소고기 느낌이 나는 김밥.
그러니 습관적으로 고기를 싸 먹는 기분이 드는 것이겠지.
물론 간을 좀 더 삼삼하게 잡아서 라면과도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사장님. 김밥 대박! 재료 다 떨어졌어요.”
“벌써?”
“아무래도 주문 못 받을 것 같은데요?”
“미쳤구나.”
고생한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몇몇 손님은 예약이나 포장이 되냐고 물어보는데 최대한 정중히 사과했다.
겉절이는 바로 먹어야 한다. 시간을 두면 수분이 생기면서 제맛을 잃어버리니까.
단순히 김밥 하나만 추가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손강희의 아이디어를 받아 라면 하나를 더 늘린 것.
“사장님, 불라면 둘요!”
“오케이!”
원래라면 신 메뉴는 아주 신중하게 정해야 하는데, 사실 불라면은 큰 고민이 되지 않았다. 의외로 많은 가게들이 기본 라멘에서 매운 맛만을 추가해 팔았으니까.
또, 손님들도 취향껏 맵게 먹으니 일단 익숙하다는 점이 좋았다.
가장 중요한 건 조리의 간편함.
기존 라면에서 양념장과 매운 김치를 약간 추가한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 다진 마늘 한 스푼 듬뿍.
그럼 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라면과 뭐가 다르냐 하겠지만, 가루와 장은 다르다.
풍미를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물과 섞여서 더욱 진한 맛을 내는 것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추운 계절은 때론 불라면이 더 많이 나가기도 했다.
“사장님. 주문 마감요?”
“그래. 주방은 마감이다.”
육수통도, 밥솥도 텅텅 비었고 손님들도 전부 빠져나갔다.
동시에 내 영혼도 빨려 나갔다.
“휴우, 이제 두 시인데.”
벌써 영업이 끝났다.
재료가 다 떨어졌기에 더 이상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
‘이제는 속도를 좀 내도 되겠지.’
사실 지금까지 나는 꽤 신중한 행보를 걸었다.
리모델링부터 메뉴 선정, 개발, 그 사이에 처리해야 했던 사건 사고까지.
하지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행복 분식의 성공이 목표니까.
“지금 같은 흐름이라면 저녁 장사를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딸랑.
도어벨이 울렸다.
* * *
“흠흠, 슬슬 결정해 주셔야 됩니다.”
“솔직히 내키진 않네요.”
김밥이 완성되고 영업 열흘도 안 되어서 이예지가 브레이크 타임에 찾아왔다.
솔직히 까맣게 잊고 있어서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사실, 조바심이 나서요.”
“예? 왜요?”
“장사가 잘된다는 가게를 먼저 섭외하는 것도 능력이거든요.”
“우리…… 가게가요?”
“사장님은 잘 모르시나 본데, 여기가 최근에 가장 핫한 가게랍니다. 보통 분식집은 천천히 손님을 늘려가면서 자리 잡아가는데, 라면, 김밥 조합만으로 이렇게 웨이팅이 긴 가게는 잘 없어요.”
김밥을 개시하고, 손강희의 블로그를 시작으로, SNS에 행복 분식에 대한 글이 많이 올라온단다.
특히 가게 오픈하고 5분 안에 줄 서지 않으면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장사한다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 정도로 인기 있었나?
이예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저도 몇 번 왔는데, 튕겼어요.”
“예? 정말요?”
“요즘 인터넷 트렌드는 유니크거든요. 이 가게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라면이라는 게 매력 있는 거죠.”
“그 정도나 된다는 거군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프랜차이즈를 해보고 싶을 정도랍니다.”
이 정도면 극찬이 맞겠지?
뿌듯함과 묘한 충족감이 찾아왔다. 동시에 내가 고민하고 준비한 게 정답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섭외하러 온 거죠.”
“흐음,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여기 동부 쪽, 4구역 대표로 요리 하나를 내시면 됩니다.”
무려 1년간 조합비가 면제라고 했다. 내년에도 수상하면 계속 낼 필요가 없고.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박종후가 나섰다.
“상금은 이번에 조정해서 천만 원 정도입니다만, 가게 홍보를 생각하면 충분히 남습니다. 3등 정도만 되도 손님들이 줄을 설 테니까요.”
“우리 가게는 이미 줄 서고 있는데요?”
박종후는 살짝 당황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장사 더 잘되면 좋죠.”
“솔직히 포화 상태이긴 합니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행복 분식의 다락방은 여전히 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 운영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솔직히 번거롭기도 했다.
홀 장사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겠는가.
단, 저녁 장사는 다르다.
작은 냉장고에 각종 음료수와 주류를 넣으면 알아서 가져다 마실 테니, 안주만 넉넉하게 올리면 되겠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이예지를 쳐다봤다.
“일단 구체적인 일정은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설 연휴 일주일 전에 대회를 열 겁니다. 보통 그 해에 가장 인기 많은 식당들을 섭외하는데, 저희 4구역은 현재까지 두 곳이 참가 의사를 밝혔어요.”
“제가 참가하면 세 팀이 되겠군요. 그럼 상금하고 조합비 면제 말고 다른 혜택은 있습니까?”
“일단 동네 양아치들이나 주사를 부리는 손님들이 현저히 적어질 겁니다.”
잘나가다가 옆길로 새는 느낌인데?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시선을 돌려 박종후를 살폈다.
이전에는 그냥 비서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경호원 같았다.
그것도 아주 잘 단련된.
“혹시 전직 헌터였습니까?”
슬쩍 떠보니 박종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부상 때문에 은퇴했습니다. 헌터들에게 흔한 마력 소실이죠.”
“실례가 안 된다면 원인을 물어도 될까요?”
“과욕을 부린 거죠. 감당 못 하는 무기를 들었으니까.”
대답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전직 헌터 박종후, 그는 아마도 헌터 길드와 인연이 있을 테지.
그럼 어떤 식으로든 구역을 대표해서 나가는 식당에게 영향을 미칠 테고.
또 소문이 퍼지면 어지간한 조폭들은 함부로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는 납득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모종의 불편함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뭔가가 있기는 있는데.
“제가 나가서 수상하면, 두 분한테는 어떤 이득이 생기는 겁니까?”
“일단 행복 분식이 유명해지면 근처 상권들이 조금은 살아나겠죠. 애초에 그렇게 해보려고 대회를 여는 거니까요.”
“그리고요?”
“당연히 장사가 잘되면 월세와 조합비를 편하게 받을 수 있고. 건물주들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결국 이 지역의 가치가 올라간다?”
이예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오히려 수상하게 보였다.
분명 알아보긴 알아봐야 하는데, 우리 가족들이나 태수, 그리고 할머니는 이런 쪽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졸업하는 학생들도 당연히 모르겠지.
‘역시…… 손강희밖에 없나?’
아니지.
이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일단 사흘 정도만 시간을 주시죠. 그 안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사흘이요?”
“예, 적어도 출품할 메뉴에 대해서 생각은 해보고 결정을 내려야 될 것 같아서요.”
“아! 알았어요.”
“그 외 다른 건 알아야 할 거 없나요?”
이예지가 잠시 머뭇거리자 박종후가 슬쩍 끼어들었다.
이어진 말에 조금 당황스럽더라.
“아마~ 최소 삼십인분일 겁니다.”
“예?”
“보통은 오십인분 정도를 준비하더라고요.”
허, 이거 생각보다 난관이었네.
* * *
“형, 정리 안 하고 뭐 해요?”
임수원은 점심 장사를 마치고도 이것저것 준비하는 유현성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녁 장사 준비해 보려고.”
“진짜 해요?”
“어. 언제까지 저녁에 쉴 수는 없잖아.”
이제 임혜리와 임수원도 가게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다. 게다가 각성자라 일반인보다 체력도 좋으니 좀 더 강하게 부려먹을 계획이었다.
졸업만 하면 빡시게 훈련도 시킬 거고.
음흉한 유현성의 눈빛에, 임수원이 살짝 떨었다.
불길함을 느낀 거겠지.
“차, 차라리 점심 장사를 더 늘리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안 그래도 그냥 돌아가시는 손님들도 많은데.”
“아냐. 체력 유지가 중요해.”
막상 장사를 해보니까, 라면을 200그릇까지 늘리는 건 살짝 부담이 컸다.
내가 아니라 얘들이.
결론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서 메뉴를 더 만들어야 하는데, 솔직히 점심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럴 바엔 저녁에 하고 싶은 요리를 마음껏 해보면서 테스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요리 대회 메뉴에 단서가 붙어 있었다.
향후 가게에서 팔 수 있는 음식.
해서 임혜리와 임수원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더니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라.
무조건 밥!
절대 면은 안 됨.
첫 메뉴가 라면으로 정해지면서 수백 그릇은 족히 먹었기에 나온 반응일 테지.
솔직히 나 역시도 중간중간 개량하면서 면이란 면은 엄청 먹었기에 물리기도 했으니, 한 끼 식사다운 밥을 만들고 싶었다.
저녁 메뉴로도 응용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고.
“저녁 장사는 당분간 나 혼자 해볼 거야.”
“그럼 뭘 하시려고요?”
“그때그때 손 가는 대로 한두 개만 만들어서 팔 생각이거든.”
일명 사장님 마음대로.
따로 메뉴판을 만들기도 귀찮고, 애초에 동네 어르신들도 그런 걸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또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마시는 가게도 여럿 있으니 상관없겠지.
“오늘은 먼저 들어가.”
그렇게 애들을 보낸 뒤, 다락방을 가볍게 청소했다.
그게 끝나자마자 미니 냉장고가 왔고, 시간을 잘 맞춘 듯 주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접이식 상을 두 개 펼치는 걸로 마무리하고 나니 벌써 저녁 준비 시간이 다 되었다.
“뭔가 일이 착착 들어맞네. 그럼 첫 번째 메뉴부터 시작해 볼까?”
* * *
“아저씨, 오셨어요?”
조리모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들어온 손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주었다.
이예리와 박경후가 돌아간 뒤, 바로 전화를 했다.
조만간 저녁 장사를 시작할 예정인데 한 번 와서 맛 봐주실 수 있냐고.
당연히 박씨 아저씨는 허락을 했고 고물상 식구들과 함께 들르기로 했다.
인원은 모두 다섯 명. 딱 적당한 숫자였다.
“오늘부터 장사 시작하는 거야?”
“아뇨. 일단 메뉴부터 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저녁 장사도 매일 하는 건 아니고 수요일하고 금요일만 7시부터 서너 팀만 받을 예정입니다.”
“흐음, 수요일하고 금요일이라.”
“혼자서 하는 장사라고? 그럼 같이 일하는 애들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힐 것 같으면 부르려고요.”
솔직히 메뉴 때문이었다.
조언을 구하면 걔들은 솔직히 말하겠지.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방향이 잡힌 뒤의 이야기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가 스스로 혼란을 느끼면 도로 원점에서 시작하게 될 테니까.
“아따~ 형님도 참. 사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죠. 안 그래도 몇 달 만에 가게 이만큼 대박 냈는데 그 정도 계산이 없을까.”
전에 소주 없다고 진상 부린 그 아저씨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오다 가다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했더니 정이 들은 모양…….
아, 아닌가.
아저씨는 연신 주방 안쪽을 기웃거리며 군침을 다셨다.
“그래, 맞다. 우리는 어디 앉으면 되냐?”
“다락방 올라가세요. 저 문 열면 계단 있어요.”
“아! 좋지.”
표정을 보니 박씨 아저씨도 다락방을 알고 있었나 보다.
거 신기하네.
궁금했지만 지금은 요리가 먼저였다.
“일단, 올라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