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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33화 (33/156)

33화

“정 사장님 얼굴 봐서 보여주는 거니까 똑똑히 배워.”

생신어묵 대표. 김은희.

근데 정갑용 사장님은 은자라고 불렀다.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라는데 지금 이름은 혼인 전 개명한 거라더라.

사실 이번 부탁은 쉽지 않을 거라 봤었다.

일단 정갑용이 부전시장에서 30년 넘게 장사했다고 하지만, 주로 취급하는 건 야채 청과물 쪽이었다. 관련된 업체면 모르지만 이건 방향이 아예 달랐던 것이다.

그래도 살짝 기대를 걸어봤다.

이유는 있었다.

창용상회는 농산물 도매에 가까워서 개인 간의 거래는 잘 하지 않았다. 그나마 우리는 기존의 거래처였고, 손이 많이 가지 않아서 겨우 가능했다.

딱히 정갑용이 뭘 하는 게 아니라 선별 과정 중에 내가 알아서 적당히 골라 가는 거니까.

또, 현금 주고 사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 대표가 잔돈 들고 계산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전역하고 첫 거래 이후, 대충 얼마 장부에 기록해 놓으면 정해진 날짜에 입금하면 된다.

즉, 일 돌아가는 거 지켜보다 짬 내면 쏠쏠한 용돈이 생기니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법적으로 세금 신고는 다 한다.

다만 부인님한테 신고하지 않을 뿐.

어쨌든 꾸준히 용돈벌이를 해줄 사이니 조금은 편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심리에서 부탁한 것이다.

물론 안 될 가능성도 컸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해놨고.

운이 좋게도 정갑용 사장님은 조건부로 인맥을 소개시켜 줬다.

그건 앞으로도 잘하라는 의미였다.

문제는 김은희란 분이 이모라고 하기에는 젊었고, 누님이라 하기에도 좀 애매한 외모라는 거다.

아버지뻘과 형님뻘의 중간이라고 할까.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쉽게 쉽게 가기로 했다.

“예. 누님.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니 호호 하고 웃더라.

“올해 몇이니?”

“얼마 전에 스물일곱 됐습니다.”

“딱 띠동갑이네. 그래, 누나라 불러. 일단 저것부터 나르자.”

탑차 뒷문이 열리고 작은 박스가 가득 보였다.

그걸 이쪽 냉장창고로 나르란다.

군대에선 일 잘하면 일이 더해진다.

하지만 배우는 입장이니 눈도장 찍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힘 좀 써보겠습니다.”

남자 직원 둘, 여기에 탑차 기사까지 물건을 내려주러 가세했다.

직원 둘이서 두 박스씩 들고 움직였다.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기에는 거리가 멀었고 통로가 넓어서 그게 편하단다.

잡아 보니 한 박스가 대략 10㎏ 정도.

저걸 꾸준히 나르기 위해 무리하지 않게 드는 모양이었다.

“네 박스 올리세요.”

“어이, 아저씨. 되겠어요?”

“저 3 대 600 칩니다.”

“그건 또 뭔 소리요?”

아, 헬스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동네지.

“그냥 힘이 아주아주 좋다고 보면 됩니다.”

“허, 골병 날 텐데?”

“저 군대 7년 있었습니다.”

“아! 그럼…… 해 보고 힘들면 말해요.”

역시 남자들은 군대로 통하는구나.

그렇게 네 박스씩 들고 살랑살랑 움직이자 일이 순식간에 끝났다. 원래 둘이서 하던 걸, 넷이서 하는 셈이었으니까.

그제야 나이 좀 있는 직원 하나가 따뜻한 캔 커피를 내밀었다.

“아따. 자네, 힘 좋네. 잠깐 하다 퍼질 줄 알았더니. 덕분에 수월하게 끝났어.”

“아닙니다. 배우러 왔으니 열심히 해야죠.”

“생각도 바르고…… 잠깐 쉬다 들어와. 근데 담배는 피우나?”

“음식 만지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흠. 맞아. 그 말이. 요즘 좀 쉬다 오라고 하면 담배부터 피고 오더라고. 그럼 우리 대표가 바로 욕 박거든. 그게 옳지. 옳아.”

그러면서 스윽 안으로 사라졌다.

“헐, 설마 이거까지가 시험이었나?”

* * *

“이게 어육살이야.”

아까 나른 박스에서 나온 건 몇 겹이나 비밀 포장된 하얀 덩어리였다.

다른 말로 연육이라고도 하는데 생신 어묵에선 그냥 어육살로 쓴다고 했다.

“일정 규모 이상이 안 되는 대부분 어묵 회사는 이걸 쓴다고 보면 돼.”

“수입…… 인가요?”

“그건 회사마다 다른데, 브랜드 어묵집 알지?”

“삼호, 삼진, 미도, 범표 이런 거요?”

“그리고 이 밑에 고래집이 있지. 그런 직영 가게들은 본사에서 직접 어육살을 가져와서 만들어.”

들어 보니 어느 정도 구분이 갔다.

제일 큰 회사는 공동어시장 같은 곳과 계약해 생선을 가져와서 분류하고, 그걸로 어육살을 만든다. 또, 동남아 쪽 회사들과 계약을 해서 받아오기도 하고 아예 대기업은 지사를 차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육살을 자기네 브랜드 가게에 납품해 규격대로 어묵을 제조하고 판매한다.

그다음은 그 큰 회사를 통해 어육살을 구매해 여기처럼 자체 제조를 하는 곳이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 제조 공장에 위탁 생산을 하는 방식이고, 그 마지막에는 그냥 공장제를 받아 적당히 포장을 바꿔 판다고 했다.

“우린 브랜드 공장에서 받아오거든. 물론 몇 가지 규칙은 있지. 공장에서 만드는 어육살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국내산 100%부터 수입산 섞은 비율이 있거든. 그중…… 이건 회사 비밀이니 알려줄 순 없어.”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제 가게 음식 맛의 비밀은 며느리도 안 가르쳐줄 거니까요.”

내 또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재 소리 듣겠지만, 누님 나이라면 피식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역시나 살짝 웃긴 하네.

“가능하면 국내산 어육 비율이 높은 걸 가져와. 그건 단가 문제 때문이야. 100%는 시장에 납품할 수 없거든.”

“그럼 안 팔리는 거 아니에요?”

“그건 브랜드 회사에서 고민할 일이지. 하지만 고급일수록 비싸고 마진이 좋아서 수익 면에선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고.”

“고급이고 비싸면 역시…….”

당장 떠오르는 건 당연히 호텔일 거다.

아니면 재벌들이 사 가겠지.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유명한 일식 음식점들은 그런 걸로 만든 어묵을 쓴다고 하더라고. 어묵탕 한 그릇에 십만 원씩 받는다고 들었어.”

“헐.”

“장어 순살로만 만든 어묵이 들어가면 그 정도는 나오겠지.”

“장어살로도 어묵을 만들어요?”

“생선이니 뭐든지 가능하단다.”

김은희는 장난치듯 유현성의 허리를 툭툭 두들겼다.

“거! 젊은 친구한테 장난치지 말고. 좀 신경 써줘.”

“피이, 댁이나 잘하세요.”

아까 커피 줬던 아저씨가 쿡쿡 웃더니 일보라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누구…….”

“우리 집 바깥양반. 집에선 남 보듯 하면서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질투를 사람들 앞에서만 하더라고.”

“컥.”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진행하자.”

간단히 소독 절차를 하고 위생복을 입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냉장창고 기준에서 의외로 작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거기다 동영상으로만 보던 반죽기 비슷한 기계만 다섯 개나 되더라.

“여긴 야채 어묵. 사실 이게 제일 잘나가.”

어육살이 들어가고 당근, 조각 파 같은 것들이 첨가되자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당히 섞이면 큰 통에 땀에 손수레로 나르고 다시 어딘가 붓더니 덜컥덜컥거리더라. 그 직후 우리가 흔히 아는 핫바 형식으로 모양 잡히면서 튀김기로 들어갔다.

“최근에 수량이 늘고 있는 게 땡초 어묵이고, 그 외 안에 크게 들어가는 건 수작업을 해야 해.”

프랑크 소시지에 모짜렐라 치즈, 떡, 절지 오징어 같은 건 익숙한데 그 외 듣도 보도 못한 것도 몇 가지나 있었다.

“일반적으로 튀기는 걸로만 알고 있는데 어육살과 재료의 비율, 점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 스팀으로 찌는 경우 부드럽고 생선살 본연에 가깝게 나오는 편이지.”

그다음 코스는 뭔가 달랐다.

“이건 구운 어묵. 향이 좋고 특히 색감이 고급스럽지. 근데 단가가 비싸. 생선살의 밀도가 조금 다르거든. 하지만 꽉 찬 쫀쫀한 맛이라고 해야 하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안 되면 다 해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돌아보고 나오는데, 김은희가 씨익 웃었다.

“근데 참 신기하단 말이야.”

“예? 뭐가요?”

“나도 아버지한테 여기 물려받고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런 생각은 못 해봤거든.”

“아. 그게…… 일단 도전입니다.”

살짝 민망하기도, 부끄럽기도 했다.

따지면 눈앞의 누님이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어투나 표정에서 칭찬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하긴, 말해놓고도 민망하긴 했지.

물론 그 덕에 견학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김은희가 뭐라 뭐라 하자 아까 바깥양반이란 직원이 뭔가를 돌돌 끌고 왔다.

아까 날랐던 박스 하나.

그 위에는 랩 포장이 된 작은 박스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

“아! 감사합니다.”

“잘 해보라고. 젊은 사장님.”

김은희가 장난치듯 한 팔로 내 목을 휘감았다.

아니, 남편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못 볼 꼴 봤다는 듯 아저씨가 고개를 돌렸다.

“흐음. 끄음.”

꼭 남들 앞에서만 질투하는 척한다더니.

역시 부부가 맞구나.

* * *

“옜다. 가져가라.”

점심 영업이 끝나자마자 박씨 아저씨의 전화를 받았다. 어째 고물상 구석에서 하나 나왔는데 찾아가라는 것이다.

“오! 이거 생각보다 깨끗하네요?”

“거, 윤가 놈이 크흠, 네가 쓴다고 하니까 미친 듯이 다 헤집더라고. 아주 전쟁통이 따로 없었어.”

진상에서 진화해 단골이 된 그 아저씨였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박문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그냥…… 그거 깨끗이 닦은 다음 토치로 확 태워서 검댕이 다 떼어내고 기름칠까지 해서 주더라.”

“헐. 진짜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다음에 오시면 서비스 안주도 팍팍 드린다고 해주시고요.”

“나는?”

“에이, 아저씨야 VIP죠.”

“그렇지?”

“그럼요. 하하하. 이건, 제가 안에 가져다 놓을게요.”

돌돌이 뒤편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 고물상 한편의 컨테이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당연히 매실 꿀차였다. 정갑용 사장님에게 드린 것과 같은 양이었으니 이 정도면 새벽부터 유령처럼 나타나진 않겠지.

솔직히 그럴 때마다 얼마나 철렁했는지 모른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그때 박문수가 물었다.

“근데, 그거 어따 쓸라고? 설마 겨울도 다 끝나 가는데 가게에서 팔 거야?”

“아뇨. 이건 신 메뉴를 위한 테스트용이에요. 이걸로 확인해 봐서 된다 싶으면 제대로 된 장비 마련하려고요.”

씨익 웃는데, 박문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 메뉴에…… 왕잉어 빵틀을? 대체 뭘 만든다는 거지?”

* * *

속전속결.

시간이 빠듯했기에 점심 영업을 마치자마자 바쁘게 뛰어다녔다.

다행히 견학은 잘 마칠 수 있었다.

특히 김은희 누님께서 어육살 한 박스와 맛보기로 어묵을 종류별로 담아줘서 머릿속 구상과의 오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여기에 고물상 아저씨를 통해 왕잉어 빵틀까지 손쉽게 구했으니.

이게 다 내가 평소에 성실하게 살아서 가능한 거겠지.

“진짜, 하루이틀 사이에 이렇게 착착 들어맞다니. 이건 분명 잘 풀릴 징조야.”

미리 집 앞마당에 준비를 다 해놨다.

공간을 재서 천막을 치고, 안쪽에 고화력 캠핑 버너를 준비했다.

그다음 잉어빵 틀을 분해해서 몇 개만 떼어냈다.

“후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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