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40화 (40/156)

40화

“자기야!!”

순간 소름이 후욱 올라왔다.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너무하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사정이 좀 있거든. 당장 내 동생만 봐도…….”

“이제 안 떨어질 거야!”

그러면서 와락 안기는데, 미치겠구만!

“진정하고, 좀! 오해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잖아. 어이, 이봐. 엘리스, 자기.”

“엉. 자기요. 진짜 이 냄새가 얼마나 그리웠는데요.”

“난 향수가 아니거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쫌!”

막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임혜리랑 맞은편에서 정태수가 튀어나왔다.

“사장님?”

“형!”

“오해다. 오해야!”

“오해는 무슨. 우리 자기, 자기 자기 하는데.”

“떨어져. 떨어지라고!”

가까스로 엘리스를 떼놓고 한숨을 내쉬는데 정태수가 울먹이면서 사라졌다.

대체 뭔 오해를 하는 거냐.

“사장님. 가게 정리 끝났거든요.”

“어, 그래 혜리야.”

임혜리는 엘리스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마무리하러 들어갔다.

곧 임수원과 함께 가게를 나서더니 바로 집으로 올라가더라.

“엘리스.”

“응. 자기.”

“대체 한국말을 어디서 배운 거야?”

“어학당?”

“거기서 자기라는 말이 있어?”

“내 거라는 의미라는데? 나는 자기 거, 자기는 내 거.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아! 두통이 지끈지끈했다.

한글 신생아라 그러려니 하려 해도, 이쪽은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이야기해.”

“자기가 좋다면 언제나…….”

“자기 금지. 오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 힘들거든.”

엘리스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아니 보는 척만 한 거겠지만 어쨌든 순순히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앉히고 매실 꿀차를 내눴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괜히 가짜 신분 유지하고 피해 다닌 게 아니었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본인은 아무 문제 없어도 옆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지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일단 금발. 하늘하늘한 몸에 무시무시한 동안이다.

어지간한 연예인도 보는 순간 넋을 잃을 정도의 외모인 거다.

참고로 엘리스가 지나가면 그 일대 교통마비는 기본이었다. 정신없이 보다가 난 교통사고도 대충 수백 건은 넘을 테지.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엘프라는 것!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귀는 뾰족하진 않지만.

“어떻게 왔어?”

“유튭 보고요.”

“하아…… 너네 보호 체계 있을 거 아냐?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을 텐데?”

“장로들이 좀 뭐라 하긴 했는데, 종족 보존이라고 하니까 그냥 보내주더라고요. 자기 같은 강한 유전자가 좋다고…….”

“쿠헙!”

“아 왜! 프로포즈한 건 자기잖아요.”

“아니, 그건 사고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

“우리는 그런 거 없어요. 사고든 뭐든 내가 받아들였잖아요.”

미쳤다, 정말!

* * *

대략 3년 전인가?

“새로 열린 게이트라고?”

“예. 현재 최초의 미등록 파장으로 분류됩니다. 일단 큰 위험은 없을 거라 봅니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이상도 하사는 잔뜩 긴장하며 보고를 이어갔다.

결정은 내가 내렸다.

“플랜 B. 돌입 후 카운트 60초. 탐색 무장.”

“예! 준비하겠습니다.”

“5분 대기, 근처 조준하고. 게이트 나오고 10초 안에 식별 안 될 시 무조건 사격. 인원 15분 안에 소집하도록.”

지시가 끝나자마자 온 사방에서 콜이 정신없이 울렸다.

정확히 13분 뒤, 선발대가 모두 모였다.

“항상 그렇듯 내가 먼저 돌입한다. 60초 뒤 들어오도록.”

“예. 조장님.”

고요환, 고우환 형제가 제일 우렁차게 소리치고, 나머지가 복창했다.

그렇게 게이트 안으로 몸을 욱여넣는 순간.

꽝!!

“어욱…….”

“악!”

이마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본능적으로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당연히 군용 대검이 역수로 들린 상태.

한데 박치기 후 바닥에서 뒹굴던 인영은 무시무시한 마물이 아닌, 웬 금발의 가녀린 미소녀(?)였다.

“아우…… 아아!”

“저기…… 괜찮아?”

“흐으으으…… 안 괜찮아요.”

일단 주변을 둘러봤다.

특별한 위험은 없어 보였고, 오히려 너무 평온해서 의심이 갈 정도였다.

슬쩍 타이머를 보니 20초 정도가 지난 상황.

선발대가 돌입할 걸 예상하면 일단 주변 정리는 해야 한다.

“저기 학생, 아니, 아가씨. 크흠, 그러니까 여긴 어디…….”

“씨이……!! 책임져요!”

“엉? 아니, 그래. 다친 건…… 책임지고 치료해 줄게.”

“그게 아니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소리 좀 그만 질러.”

“진짜죠?”

“하아. 그래. 책임지마.”

아무래도 게이트 나오면서 박치기를 한 것 같은데, 애가 충격이 좀 큰 모양이었다.

근데 둘러보니 조금 이상했다.

원래라면 게이트 주변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다. 몬스터건 사람이건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에 매번 거의 공터에 가까웠던 것이다.

특히 이런 식의 접촉은 처음이었다.

“정말이죠? 우기는 거 없죠?”

“알았다니까. 그런데 여긴…….”

“애는 셋 정도가 좋겠죠?”

“응?”

“저는 다섯도 괜찮은데.”

뭐지? 이 신빡한 미친년은?

문제는 저게 진심이었다는 것이지.

* * *

“하아…… 엘리스.”

“예. 자기.”

“자기 금지라고. 그냥 오빠라고 불러.”

“아! 오빠가 아빠 된다고 들었어요.”

“아오…….”

진심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류 코드 EX2 First.

이들은 현 정부와 정식으로 교류한 첫 번째 이종족 엘프였다.

아니, 정확히 엘프가 맞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자신들이 최대한 쉽게 구분하란 의미로 그렇게 칭하더라.

어쨌든 엘프들이 게이트를 넘어온 이후, 엘리스는 결혼하자고 무지하게 쫓아다녔다.

몰랐는데, 이들은 성인식도 세계수에 이마를 대고 교감하는 걸로 시작할 정도로 신성한 의식이라고 했다.

마빡 키스가 진짜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후우, 동안인 터라 고딩 정도로 보이는 외모는 그렇다 치자. 나이도 실제로는 100살 넘으니 괜찮다고.

진짜 문제는…….

“여섯 종족이 합의했어. 자기만 괜찮다면 영도자가 돼도 된대.”

“내가 왜!!!”

이게 문제다

그래. 남녀가 연애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고, 애도 낳을 수 있지.

근데 이 엘프 공주와 결혼하면, 그 종족의 미래까지 책임져야 했다.

무려 300명이 넘는 엘프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정부 지원금이 나오긴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

“됐고, 가!”

“안 갈 거야. 나 같은 며느리가 어디 있다고요.”

“대체 그 말은 어디서 배운 거…….”

“찬성!”

순간 행복 분식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범인은 강 여사!

“어우, 귀여워.”

“웁뿌, 우부우부.”

“우리 딸도 귀엽지만, 인형이네, 인형.”

“우부부, 움무 움무.”

갑자기 나타난 강 여사가 와락 끌어안고 좌틀 우틀 하는데, 웃긴 건 엘리스가 얌전히 잡혀 흔들렸다는 거다.

엄마! 저거, 엘리스 괴물이야! 그러지 마.

“어우, 귀여워. 근데 아들. 일단 이야기부터 해야 하지 않나?”

“뭘요?”

“예. 미성년자 아니지?”

100살 넘은 미성년자라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 강 여사님 생각하는 거 그런 거 아니고요. 전 쟤랑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약간의 사고가…….”

“어머? 사고! 나 할머니 되는 거야?”

“제발!!!”

“괜찮거든. 이렇게 이쁜 며느리면 손주도 이쁠 것 같은데.”

“우우, 어머니, 진짜 괜찮아요?”

“어우. 이뻐라. 당연히 괜찮지.”

영혼이 안드로메다로 가출하는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이런 미친 분위기는 빨리 정리하자.

“엘리스는 일단 저쪽에 앉고, 우리 강 여사님. 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으음, 아쉽네. 별건 없고, 이따가 앞에 나와.”

“예? 뭐 있어요?”

“아이고, 우리 아들 대상 축하한다고 그냥 동네 아짐끼리 보자네.”

막걸리 박스에 화투 끼고 보는 모임이면 뻔하지.

근데 덕순 할머니하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게 있었다.

당연히 불참하면 내 목 참수니 안주는 넉넉히 만들어 가야 할 것 같군.

“태수는요?”

“칼국수 빼면 다 꽝이더라. 혜진이한테 좀 가르치라고 해야겠어. 이상하게 간이 안 맞더라고.”

강 여사님 요리 학원 끊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네.

어쨌든 결론은 와서 음식 만들라는 이야기였다.

“근데 인형 같은 이 애는 안 와?”

“절대, 네버, 제 눈에 흙이 들어와…… 아악, 그렇다고 왜 때리…… 아니, 안 된다고요.”

“아들, 돌았구나! 니 생에 언제 저런 미인을 만날 수 있다고?”

일부는 인정하지만 슬픈 것도 사실이다.

그때 엘리스가 끼어들었다.

“어머니, 제가 잘할게요.”

뜬금없는 사극 모드에 어이가 없어지는데, 우리 강 여사님이 확 답을 찍어버렸다.

“다 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슬슬 손주 볼 준비 해야 하나…… 현지도 조카는 잘 챙길 것 같은데.”

“강 여사님. 제가 안주는 푸짐하게 만들어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얘는 잊어주세요. 정리하고 갑니다. 가요.”

그렇게 강 여사를 보내고 나서야 이 혼돈이 끝났다.

“엘리스.”

“예. 오빠!”

“장난치지 말고. 진짜 왜 왔는지 이야기해 봐.”

“꿈을 꿨어요.”

“…….”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엘리스가 꾸는 꿈은 거의 예언에 가까운 예지몽이었고, 섬뜩하게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세계수, 피워줘요.”

분명 저쪽 게이트 너머에 있던 세계수는 시들었다.

그게 엘프들이 이쪽 세상으로 넘어온 결정적인 이유였다.

세계수가 시든 이후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자기밖에 할 수 없대요. 이쪽 말로 치면 신탁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오빠 옆에 붙어 있으면 한 달 안에 세계수를 피울 수 있대요. 하여간 무조건 그렇다네.”

“난 이미 은퇴했다고. 너 좋다는 애들이 몇 박스인데 그쪽에 부탁하면…….”

“다…… 죽는대요.”

순간 멈칫했다.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진실일 테니까.

“그래서 날 찾아온 거야?”

“애 다섯도 괜찮다니까요.”

이게 문제다.

이상하게 엘리스랑 대화를 하면 자꾸 뭔가 말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엘프들은 아주 오래 살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어, 대화의 앞뒤가 안 맞아도, 허술해져도, 중간을 건너뛰어도 알아서 잘만 이해했다.

하지만 난 평범한 인간이니 이런 맥락 없는 대화는 쉽지 않다고.

“난 이제 분식집 사장이야. 거긴 은퇴했고, 이제 게이트 쪽으로는 가고 싶지도 않아. 너 나랑 결혼하면 하루 종일 설거지하고 음식 청소해야 하는데, 그게 되겠냐?”

“…….”

“그래. 그게 현실이라고. 투정은 받아줄 수 있어. 내…… 죄업이긴 하니까.”

“아뇨. 우리가 넘어온 건 우리 결정이에요.”

“어쨌든 내가 계기가 된 건 부정할 수 없지. 그러니까 엘리스, 돌아가!”

냉정하게 말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찔리는 것도 사실이다.

“오빠. 그냥 옆에 있으면 안 돼요?”

“무슨 이유로?”

“운명이래요.”

엘리스에게 말려 툭탁거렸지만, 이건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바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결국은 되게 된다는 말.

이래서 내가 엘리스를 피했던 건데.

“나 바빠. 지금 할 일도 많고.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알았어요.”

의외로 엘리스가 순순히 물러났다.

이상한 건, 가게 밖으로 나갔는데도 호위대가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어쨌든 그 후 후다닥 부추전과 감자전을 지지고, 장어덮밥 소스를 응용해서 밥전까지 푸짐하게 부쳤다. 여기에 겉절이까지 대충 무치는 중에…….

“……하아, 신경 쓰이네.”

사연이 있는 사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기에 더욱 고민이 들었다.

베나레스가 그랬지.

운명 따윈 믿지 말라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그나마 맞단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어떤 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나.

그러니 해보는 게 후회가 적을 거라고.

“하!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결국 태수한테 만들어놓은 거 챙겨 가라는 톡을 보냈다.

그리고 불을 끄고, 앞치마를 벗었다.

잠깐이지만, 아무래도 과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