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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41화 (41/156)

41화

“엘리스!”

다행히 멀리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는 게 맞겠지. 일전의 그 양아치 셋이서 엘리스를 가로막고 있었다.

금발 녀석이 차태명이라고 했던가?

“이 동네에서 못 보던 아가씨인데, 시간 괜찮으면서 카폐 가서…….”

“얘들아, 꺼져라.”

“헉, 분식집 깡패!”

“그냥 말로 할 때 가. 아니면 다시 소금 맞아볼래?”

그날의 기억이 돌아왔는지 양아치 셋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잽싸게 도망쳤다.

“쯔,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니.”

엘리스의 외모라면 이런 일이 흔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호위대랑 같이 다니거나 후드라도 깊게 눌러쓰라고 했는데, 이렇게 꼬여 버리네.

“너 일부러 그랬지?”

“이렇게 해야 오빠가 봐주잖아요.”

“하아, 장난 그만치고.”

“진심인데. 그리고 이거요.”

엘리스가 꺼낸 건 황당하게도 민증이었다.

“정식으로 받았어요. 이제 저도 성인이라고요.”

“우리 나이로 스물 한…… 살? 너 백 살도 넘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여기 현실에 맞는 나이도 필요하죠. 따지면 비슷한 수준이기도 하고요.”

세계수와 함께하던 시절은 삶에 큰 변화가 없었다고 했다. 그 기준으로 치면 아이로써 백여 년을 산 셈이니, 이제 성인이 되는 게 맞겠지.

“하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공주님. 투정은 그만 부리시고요. 진짜 호위대는 어디 두고 온 거야?”

“헤헤, 비밀요.”

“설마 진짜 가출한 거 아니지?”

살짝 굳어지는 표정을 보니, 맞나보네.

“요환이 녀석한테 전화해야겠네.”

“안 돼요. 그리고 그쪽도 우리 일에는 관심 없다고요.”

“규정이 있어.”

“은퇴했다면서요. 그럼 무시해도 되잖아요.”

생각해 보니 엘리스의 말도 맞았다.

“하지만 요환이가…… 널.”

“제 외모만 보고 쫓아다니는 거죠. 진짜 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아, 골치 아프네.

고요환이 엘리스에게 한눈에 반한 것도 사실이다. 몇 년째 계속 구애를 했는데 실패한 것도 맞고.

“많은 거 부탁 안 할게요. 딱 한 달만 보호해 줘요.”

“정말 한 달이면 돼?”

“예.”

엘프 장로들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잠시 데리고 있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겠지.

무엇보다, 강 여사와 주변의 오해도 풀어야 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잘 설명해야겠지.

“일단 집으로 가자.”

* * *

“엘리스라고, 사정이 있어서 한 달만 데리고 있을 거야.”

“저희는 상관이 없는데요. 근데 진짜 무슨 사이에요?”

임혜리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말하자면 긴데…….”

수명이 다한 세계수가 시들어가면서 마지막 힘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게이트를 열었다.

하필 그때 거기를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결국 엘프들은 종족 보전을 위한 선택을 했고, 이 세계로 넘어왔다.

정부와의 협상은 잘됐다.

자신들 세계의 정보를 건네주고 남해 쪽 섬 하나를 분양받은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고위층들이 엘프들의 미모에 반해서 그렇게 된 거지만.

어쨌든 몇몇 엘프들은 인간과 혼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종족 자체가 도태된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거다.

“게이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고요?”

“원리는 나도 몰라. 마수들만 있는 곳도 있고, 이종족이 사는 곳도 있었지. 엘프들도 딱 그 정도라고 보면 돼.”

“신기하다.”

임혜리는 엘리스의 외모를 뜯어보겠다는 듯 볼도 만지고 머리도 쓰다듬었다.

의외로 엘리스는 얌전히 말했다.

“오빠, 의외로 인기 없네요. 하긴 나만 있으면 되니 상관없지만. 한국은 일부일처제라고 들었거든요.”

“너 진짜 진심인 거야?”

“몇 번을 말해요. 우린 운명이라니까요.”

“생각 없다. 그리고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엘리스가, 아니, 엘프들이 나한테 호감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들만이 맡을 수 있는 향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것일 뿐.

“엘리스, 부탁이야. 제발 얌전히 있어 줄래.”

* * *

“하아, 정신없어.”

엘리스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일단 일정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먼저 칼국숫집부터.”

벌써부터 시작했는지 입구에서부터 막걸리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 여사는 이미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혜진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오! 우리 대상이 왔어.”

“축하한다. 축하해.”

“자, 한 잔 받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성남이 막걸리 잔부터 챙겨주더라.

“우리 조카 대단해. 그 대회 상당히 힘들었다는데 대상이라니.”

“예. 감사합니다.”

간간이 잔도 받고 인사도 다녔는데,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대충 막걸리 두 병 정도 마시니까 분위기가 살살 정리됐다.

“중대 발표가 있겠습니다.”

그때, 정태수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덕순 할머니를 쳐다봤다.

“내일부터 가게 수리에 들어갑니다.”

“엉? 갑자기?”

좀 황당해서 태수를 봤는데 덕순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현성아, 나 이제 쉰다.”

“그럼 가게는요? 태수 혼자 하는 거예요?”

“이 서방하고 혜진이가 다음 주부터 같이 살면서 가게 나오기로 했어.”

“아!”

이미 이야기가 다 됐는지 금치수가 끼어들었다.

“형, 저도 이제 정식으로 아버지 일 돕기로 했어요. 태수 도와주고도 싶은데, 아무래도 바쁠 것 같아서요.”

“저도 아카데미로 들어가게 돼서요.”

임민혁도 그렇게 말하며 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새 학기 새 시즌이네.

그래, 이렇게 바뀌는 게 맞다 싶었다.

사실 미리 이야기를 해놓기는 했다. 서서히 일손이 부족해서 호영이를 불렀는데, 본인도 행복분식에서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단다.

태수에게도 말해놨다고 하는데 괜히 사람 빼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더라.

“이제 이 서방하고 혜진이도 정착할 때가 됐지. 언제까지 남의 가게 일만 해주고 살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럼 할머니는요?”

“이제 밀가루 냄새 지겨워서. 천천히 여행이나 다니면서 살려고. 태수랑 따로 살 집도 구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게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될 줄은 몰랐다.

뭔가 서운하고 허전하기도 했고.

“형, 저는 며칠만 더 태수 돕다가 다음 주 부터 정식으로 분식집으로 출근하겠습니다.”

이호영도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자.”

그때 갑자기 칼국숫집 문이 열리면서 길쭉한 팬더가 나타났다.

바로 곽준열이었다.

“어, 삼촌.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

곽준열은 슬그머니 맞은편에 앉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현성아. 너 돈 좀 있냐?”

* * *

“땅을 사라고요?”

칼국숫집에서 이야기하기 그렇다며, 곽준열과 함께 행복 분식으로 들어갔다.

“요점은 의외로 간단해. 여기 뒤에 가게 땅 있지?”

“그 자투리 말하는 거죠?”

“어, 그 집 주인이 여기 분식집 보고 부러웠는지 뜬금없이 장사를 하겠다네. 우리 회사에서 여기 공사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아, 그래서요.”

“당연하게도 땅 주인이 엄연히 있다고 허가가 안 날 거라고 했어.”

곽준열은 매실 꿀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옛날이면 모를까, 요즘은 어림도 없지. 남에 땅에 집 짓는 건 불법이라고. 문제는 어느 정도 벽을 철거한 건데.”

“예? 그게 말이 돼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아는 지인에게 맡겼대. 어차피 싹 부수고 짓겠다고 하니, 인부들이 서두른 거지.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뒷집도 사서 확장할 생각 없냐?”

안 그래도 가게가 좀 좁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좋은 기회였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리다니.

“근데 좀 비싸게 불러서.”

“얼마 달라는데요?”

“빚이 좀 있나 봐. 열아홉 평인데 십 억 부르더라고.”

“흐음, 십억이라!”

어떻게 만들려면 만들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니, 연금 계좌를 까면 그 정도는 있을 것 같은데.

“그 돈, 제가 투자할게요.”

“예에?”

이예지와 박종후가 어느새 가게 안에 들어와 있었다.

분명 만날 약속을 하긴 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훅 들어오다니.

“십억 정도면 부담 가는 금액도 아니고요. 지분만 좀 나눠주시면 돼요.”

이예지는 씨익 웃었다.

“잠깐만요. 좀 생각 좀 해보고요.”

분명 좋은 일이긴 한데, 기분이 묘했다.

나는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 주변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랄까.

“오래 고민하실 필요 없어요.”

“그 투자, 목적이 있겠죠?”

“일종의 선물이라 보시면 될 거예요. 대회 일도 있고,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2호점 낼 수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

“2호점이요?”

“미래를 보는 거죠.”

이예지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확장할 계획이었으니까.

그때 곽준열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거 기회야. 지금 아니면 못해. 나야 뭐, 공사비만 받으면 되긴 하는데, 아깝단 말이지.”

“공사는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요?”

“이주면 충분할걸?”

어차피 지금 행복 분식에 화장실이니, 주방이니, 필요한 건 다 있었다. 뒤편 담을 허물고 통로와 공간만 만들면 되니 금방이라더라.

“흐음, 나도 약속도 있고, 잘 생각해 보고 나중에 연락 줘.”

왠지 곽준열이 자리를 피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배웅하고 돌아왔는데, 박종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투자 받으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일단 그 부분은 좀 제외하고, 원래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김요성 대표가 조일섭을 퇴출시켰습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약간 놀랐다.

“다른 건 몰라도 김요성 대표는 요리에 진심인 사람입니다. 불량 발전기를 고의로 설치한 게 들킨 거죠.”

“그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거군요.”

“예. 김병철 대표와 이철구 대표님이 범인을 찾아서 알려줬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대회 체면이 있는데, 발전기에서 불이 났으니 의심스러웠답니다.”

“조일섭이란 사람이 나한테 무슨 원한을…… 아!”

이제야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김요성과 한 세트로 온, 그 헌터인 모양이었다.

“저, 거제도 남쪽 가게로 보냈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부산에서 볼 일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솔직히 크게 관심도 없어서 대충 넘겼다.

“상금은 세금 제외하고 입금될 거고요. 3구역 일부를 우리가 가져가기로 했어요.”

“거기가 어디서 어디까지죠?”

“한라산 아파트 바로 위까지라 보시면 될 겁니다. 넓은 구역은 아니지만, 쏠쏠한 가게들이 제법 있습니다.”

“괜찮네요.”

“내년에 거기 김치찌개 집도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연락 왔더군요. 혹시 아시는 분?”

“아, 손강희.”

대회 끝나고 연락이 오긴 했다. 축하한다며, 자신도 요리 의지를 불태우겠단다.

무언가 핀트가 어긋난 것 같기도 한데, 나쁜 일은 아니겠지.

이후 박종후가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일단 이걸로 중요 사항은 다 전달한 것 같습니다.”

“후우~ 이제 요리 대회가 끝났다는 게 실감이 되네요. 사실 한동안 얼떨떨했는데.”

물론 지금도 정신없었다.

덕순 할머니와 태수 일도 그랬고, 엘리스에 곽준열 삼촌에…… 뭔가 하루 만에 태풍이 몰아쳤다.

정리할 일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는 게 맞겠지.

그래야 다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어쨌든 가게 확장은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이예지와 박종후가 가게를 나섰다.

* * *

그날 저녁, 다락방에서 하루를 보내며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결론은, ‘지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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