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애초에 없다고 생각한 계좌였는데…….”
전역할 때, 헌터청에서 발급해 준 카드였다.
이쪽으로 퇴직금과 연금, 공로금 등이 입금될 거라고 했었지.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옛 기억들이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동료들의 피로 번 돈이니까.
“얼마나 들었으려나. 엉?”
눈이 침침한가, 어째 0이 좀 많아 보이네.
“매달 거의 1억 넘게 들어왔다고?”
뭔가 이상해서 잠시 고민해 봤다.
비공식적으로 은퇴를 했다지만 아직 헌터청 특무 이사 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분명 고요환이 알려주긴 했었다. 월급만 나오는 게 아니라 활동 경비까지 포함된다고.
특히 헌터 관련 일을 하게 되면 비용 지출이 크다.
장비 임대나 게이트 통행료 같은 것들 말이다.
거기에 내가 얻어낸 각종 정보와 자료가 동남아나 북한 등지에 고가로 수출된다고 들었으니 그에 대한 수당도 포함될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인데, 이제야 떠오르네.
하긴 한동안 가게에만 신경 썼으니.
“이거면 투자 받을 필요는 없긴 한데.”
땅값에 공사비까지 충분히 넉넉했다.
“가만, 이 돈이면 애들 집 하나 얻어줘도 될 거 같기는 한데.”
하필 엘리스가 온 시점이라 의심 받을지도 몰랐다.
이 부분은 좀 미뤄두고.
“지르자.”
직감적으로 이게 기회란 걸 알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참에 확장하는 거지.
그렇게 마음 굳히고 나니까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조짐이랄까.
“예. 준열 삼촌, 그 집주인과 한 번 만날 수 있을까요?”
* * *
“헐, 진짜 뿌시다 말았네.”
싹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반쯤 무너진 벽 사이로 중간에 구멍이 뻥뻥뻥 뚫린 시멘 블록이 보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쓰기는 하는데 저건 거의 누런색에 가까웠다.
철근이 녹슬며 블록이 저렇게까지 물들 정도면 최소 수십 년은 썼다는 거니. 이 참에 정리하는 게 맞다.
“현성이 왔구나.”
“예. 대충 둘러봤습니다. 벽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그냥 해머로 툭툭 때려도 금방 부서질 것 같은데요.”
“맞아. 인부들도 이렇게 오래됐을 줄은 몰랐대. 진행 속도가 갑자기 올라간 것도 그래서라네.”
대충 이해가 가는 상황이구만.
“만약 제가 여길 인수하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원래 창고로 쓰던 공간을 통로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그 너머에 간이 주방, 창고, 냉장고를 넣으면 될 것 같은데.”
“다락방은요?”
“너 저녁 장사는 혼자 한다며? 그때만 쓰면 되지 않을까?”
“저도 일단은 그렇게 가닥을 잡았어요. 당분간 점심때만 확장 공간 쓰고, 저녁에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거든요.”
“직원들은?”
“아직은 좀 긴가민가한 게 있어서요. 어느 정도 요리들이 맛이 잡히면 그때 제대로 가르치려고요.”
그때는 목줄을 약간 걸어둘 계획이다.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인지 저녁 수련을 종종 빠졌고, 간섭하진 않았지만 틈틈이 밖으로 나돌기도 했으니까.
요리 대회 때문에 소홀했지만 저녁 장사 손님도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였다. 그러니 메뉴판만 만들면 정식으로 영업도 가능할 것 같았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때 웬 아주머니가 옆 골목에서 나와 인사를 하는데,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러고 보니 입대 전에 강 여사 심부름으로 음식 몇 번 가져다줬던 게 기억이 났다.
아직까지 여기 사셨구나.
“여기가 젊은 사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유현성이라고 합니다.”
“아, 얼굴 본 기억은 있네요.”
간단히 안부를 나눈 뒤, 곽준열은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금액은 일전에 이야기한 대로고요. 파실 의향은 확실히 있으신 거죠?”
“그래야죠. 대출 갚고, 전세 올려주고, 또 물어줘야 하거든요. 솔직히 조금 급해서 저렴하게 내놓았어요.”
무언가 사정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물어보는 건 과하다 싶어서 서둘러 계약을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공사하면서 이사까지 했다니 다행이기도 했고.
서류는 안면 있는 부동산 아저씨를 통해서, 나머지는 곽준열이 도와주기로 했다.
잔금은, 후다닥 진행되는 바람에 나흘 뒤에 마무리를 지었다. 서두르는 감도 있었지만, 집주인 아주머니 사정이 더 급하다고 하더라.
아들 합의금 때문이라나.
뚜뚜뚜뚜뚜-
-상사 이상도!
“엉? 네가 갑자기 무슨 일이냐?”
-부동산 계약을 하셨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헌터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세금 감면 문제라는데, 딱히 그건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제 짬에 뭘 알겠습니까만, 1조 조장이 부산으로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 아카데미가 목적지 같은데, 나머지는 극비라.
또 무슨 일이 생기나?
“아! 네가 서류 담당도 같이하지?”
-그런 건 애들 시키고요. 전 그저 꾸준한 연락과 관리만 하고 있습니다.
“빠져 가지고.”
-에이, 저도 짬이 5년 넘는데…… 어쩌면 부청장이 내려갈지도 모릅니다.
“고요환이?”
-정기 시찰이라고 하는데 쉬쉬하고 있습니다. 알려드릴 건 그게 전부고요.
“그래, 알았다. 수고!”
이상도가 직접 통화해서 이야기할 정도라면 고요환이 움직인 게 맞겠지.
설마 엘리스 때문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미심쩍은 게 있었다.
엘리스가 단호하게 이야기했단다. 고요환의 악취는 자신이 견딜 수 없다고. 이제 그만 쫓아다니라고 하고 튀었다는 것이다.
여지를 주는 것보다 확답이 낫긴 한데, 그 원인이 악취라니.
고요환 성격상 자존심이 팍 상했을 거다. 그런 쪽으로는 아주 민감한 녀석이니까.
“뭐, 알아서 하겠지. 바쁜데 내 일이나 신경 쓰자.”
* * *
“그러니까, 주방을 이쪽까지 확장하자는 거죠?”
“맞아. 그럼 따로 돌아나갈 필요 없이 바로 통로까지 이어지거든.”
“그럼 장어묵 덮밥 기계는 이쪽으로 옮겨야겠네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재오픈이 좀 길어졌지만 공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뒤편이 생각보다 넓게 나왔어. 차양막 치고 삼중창 섀시로 마무리한 다음 카페 형식으로 테이블 몇 개 놔도 될 것 같은데?”
“용도는요? 생각하신 거 있죠?”
“하여간 눈치 빠르긴. 손님 대기실로 써도 되고 브레이크 타임 때 쉬는 공간으로 놔도 돼. 너 쉴 때, 다락방 테이블 치우고 쉰다면서?”
“아늑하고 좋아서요. 햇빛도 잘 들어오고. 왜요? 뒤에 방이라도 하나 만들게요?”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결정은 네가 해야지.”
그러면서 도면을 세 장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카페, 하나는 방 구조였고, 나머지는 대기실이었다.
실제 평수는 네 평 정도?
원룸 크기라 보면 된단다.
“대기실로 쓸게요. 안 그래도 입구를 이쪽에 만들면 동선이 이렇게 나오니까요.”
남쪽에서부터 오픈 주방, 통로, 대기실, 후문 순이었고, 그 우측은 1번 홀, 화장실, 창고, 냉장고, 2번 홀이었다.
중간 통로가 넓기 때문에 주방에서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또 연장된 통로 쪽에서 바로 다락방으로 갈 수 있으니 동선도 훨씬 짧아졌고.
“그래, 결정했으면 이대로 들어가마. 철거도 끝났고 바닥 다지는 동안 실내 조감도 뽑으면 되겠지.”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근데 또 칼국숫집 가요?”
“거기도 내가 공사하니까 확인해야지. 여기는 처음부터 환기 시설까지 다 들어왔으니 특별히 손갈 건 없는데, 거긴 대공사다, 대공사.”
“가게가 50년은 됐죠? 그러면서 조금씩 이것저것 들였다고 들었는데.”
“중구난방이지. 중간에 보일러 공사는 한 번 했는데, 이번에 싹 새로 하게 생겼다. 특히 주방이 문제야.”
시멘트 화덕에 가스 화구를 연결해서 육수를 끓였고, 오래된 싱크대도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아마 테이블과 의자 빼면 전부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돈 아낀다고 정태수와 이호영, 이성남이 공사를 거들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 놀고 있는 임혜리와 임수원도 투입.
물론 이 역시 훈련이었다.
석기찬이 어묵 구이기를 만들어줄 때 같이 받은 슈트를 착용하고 움직이는 훈련이다.
적응할 때까진 고생 좀 해야 할 거다.
“그럼 난 가볼게. 추가할 거 있으면 전화하고.”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곽준열을 배웅하고 간만에 솜씨 좀 부리기로 했다.
고생하는 애들 밥이라도 해줄 생각으로.
* * *
“적응은 좀 돼?”
“오쁘아, 마 시키지 마여.”
“흐엉, 지짜 히들어요.”
임혜리와 임수원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음식을 해치웠다. 서빙과 음식만 만들다가 중노동에 가까운 공사를 해야 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지.
무엇보다 이 두 녀석은 각성자다.
다른 애들보다 힘이 좋기 때문에 일도 더 많이 했을 터.
정태수와 이호영, 이성남과 혜진 이모는 먼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이라도 누워 눈이라도 붙이겠다면서 말이다.
난 두 녀석과 이야기할 게 있다고 남겨 놨다.
“끄어억-”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라면 세 그릇에 덮밥 두 개까지 작살 낸 것 치고는 짧은 시식평이었다.
역시 고생을 해야 입맛이 생긴다니까.
“슈트는 어때?”
“이게, 신축성은 좋은데 자꾸 옥죄는 느낌이에요. 방심하면 답답하기도 하고.”
“그건 마력 운용이 능숙하지 않아서지. 최대한 가늘고 길게, 오래 뽑아낸다고 생각해라.”
“일하면서 그것까지 신경 쓰려니까…… 어우, 배 쫄려.”
“어차피 너희들은 이 방식 아니면 실력이 안 늘어. 그거 특수 제작한 거다!”
석기찬에게 부탁했다.
아주 신축성이 좋은 마력 슈트를 만들어 달라고.
다행히 기존에 있는 걸 개량하는 수준이라 오래 걸리진 않았다.
지금까지 이 두 녀석을 어떻게 성장시킬까 고민했다.
물론 슈트를 준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긴 하지만.
실력 보겠다고 괴수화를 하라고 했더니 저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체형이 바뀌니까 미리 탈의를 해야 한단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가방에 넣더니 허리에 매달고 괴수화를 하는 게 아닌가.
특히 임혜리는 부끄럽다면서 방에 들어가 10분이나 지나서야 나왔다.
이래서 무슨 전투가 되겠는가?
“아카데미 수업 때도 이렇게 했어?”
“예. 탈의실이나 화장실 썼어요. 그때는 옷도 몇 벌 없어서…….”
“알 만하다.”
싸움도 전에 궁상을 떨어야 하니 어찌 제 실력이 나오겠는가.
“전 여자애란 말이에요.”
“여자건 뭐건 게이트 안에선 그러다 죽어! 눈 한 번 잘못 돌리면 목이 날아간다고.”
“그래도…….”
“보통 괴수화하는 애들은 나체로 다니는 거 안 부끄러워해. 몸 좀 보여주는 게 목숨 위험한 것보다 낫거든.”
“진짜 그래요?”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다들 그래. 물론 풀릴 때 좀 민망해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괜찮다더라고.”
수준 높은 헌터들은, 특수 슈트 같은 걸 착용한다.
가격이 수천만 원, 비싼 건 몇억 가까이 한다는데 여벌 목숨이라 생각하면 저렴하다나.
물론 내가 그걸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애들이 맞춰 입지도 못할 거고.
결국 석기찬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건데, 여기에 약간의 옵션을 붙었다.
불어 넣는 마력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확장된다.
문제는 그 민감도를 어마어마하게 높여놨다는 것.
즉, 평소에도 아주 소량이지만 마력을 계속 운용해야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다는 거다.
이 부분에선 삼단 변신 개돌이, 고지원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
고지원 역시 마나의 총량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알뜰살뜰 끌어 쓰는 스타일로, 한계까지 쥐어짜서 전투에 임했다.
장점은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는 것.
단점은, 노화가 조금 빨리 진행된다.
물론 고지원처럼 게이트에 들어가 개고생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면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일단 슈트에 빨리 적응해. 기본은 그것부터니까.”
“형. 근데 일할 때는 벗고 하면 안 돼요?”
“안 돼! 그것도 수련의 일환이다.”
실같은 마력을 지속적으로 뽑아내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워져야 했다. 마나량을 늘리거나 다른 건 나중에 가르쳐도 되는 것이다.
여차할 때 괴수화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게 가장 최우선이었으니까.
이제 이 두 녀석은 특수 슈트의 맛을 보면 도망가지 못하겠지.
이게 내가 애들에게 채운 목줄(?) 중 하나였다.
아주 값비싼.
그 효과는 머지않아 입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