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44화 (44/156)

44화

무차별 공격과 일방적인 수비였다.

남녀가 섞인 열 명의 이종족이 노인 하나를 몰아붙이는 상황.

다행히 백발의 노인은 덩굴이 엮인 것 같은 지팡이 하나로 저들의 공격을 잘 막아갔다.

물론 동굴 입구라는 이점도 있었다.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숫자는 고작 두셋에 불과했으니까.

“피부색을 보면 다크 엘프라고 해야 하나?”

어딘가 미묘하게 엘리스를 닮았다.

다만 흰색이 아닌 회색의 피부였고, 언뜻 탁기까지 느껴졌다.

“다들 돌았군.”

젊은 전사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아니, 동공 자체가 흐릿한 무언가로 덮인 듯 보였는데 거기서도 초점이 보이질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전투를 이어가는 분위기에 가까웠던 것이다.

엘리스가 정신을 차린 건 그때였다.

“도와줘요.”

“어딜?”

“노인을요.”

“확실히 그렇게 느껴졌단 말이지? 알았어.”

그 직후, 유현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타난 건 한 여성체의 뒤.

그가 단숨에 목을 잡아 꺾으려는 순간.

“죽이지 말아주시오!”

노인의 다급한 외침에 손에서 힘을 살짝 뺐다.

콰아앙!!

바닥에 내던져진 여자는 그 반발로 한 번 더 튕겨 오르더니 쓰러지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튼튼하니 죽지 않겠지.”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유현성을 향해 세 명의 이종족이 달려들었다.

손에 들린 건 팔뚝 길이의 단검들.

머리와 허리, 허벅지 공격이었다.

오른손을 돌려 허리 쪽 단검을 잡고 머리를 노리는 단검을 쳐냈다.

동시에 발을 뻗어 허벅지 공격하는 상대를 걷어찼다.

뻐억!!

거의 십여 미터를 바닥을 구르듯이 날아간 뒤, 움직임이 멈췄다.

찰나 두 이종족의 시선이 돌아갔고 목에 유현성의 수도가 작렬했다.

“정신이 흐리니 단순하네.”

게이트 안에서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상황.

중독이나 혼란, 혹은 저주에 걸리면 전투 능력이 확 떨어지게 된다.

아마 저들도 이런 상태일 거다.

타격 시 느껴지는 반발력을 생각하면 상당히 단련된 전사임이 분명할 텐데, 단순한 공격에 너무 쉽게 쓰러졌다.

남은 숫자는 여섯.

그중 둘은 여전히 노인과 싸웠고, 남은 넷은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거겠지.

“고민을 없애주지.”

딱!

손가락이 튕겨졌다.

네 이종족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무릎을 꿇고 앞으로 엎어졌다.

어느 정도의 공격에 쓰러지는지 파악했으니 굳이 치고받을 필요는 없었다.

뇌가 울리는 충격이라면 한동안 깨어나지도 못할 테고.

이제 남은 건 둘뿐.

마무리를 하려는데 노인이 나섰다.

퍼퍽!!

잠시 날 보고 당황하는 틈에 단숨에 나머지 둘을 쓰러뜨려 버린 것이다.

“대충 끝난 건가?”

“고맙소. 난 후린 일족의 장로 아이드라고 합니다.”

“잠깐만.”

유현성이 손을 뻗자 아이드의 옆구리에 박힌 단검이 뽑혀 나왔다.

그 직후, 잠깐 빛이 나더니 출혈까지 멎었다.

“상당한 실력을 가지신 것 같은데, 어쩌다가 당한 겁니까?”

“후…… 방심했소.”

“그럼 상황 설명을 짧게 해주시죠.”

엘리스가 이 방향으로 인도했다는 건 이곳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여기서 답을 찾으라는 거지.

“그대는 이계인, 일족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제대로 알아보셨네요. 그런데 그 이계인이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습니까?”

“하나 규율이 엄격한지라…….”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른 곳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하죠.”

잠시 주저하는 아이드에게 엘리스가 다가갔다.

“오염된 일족이군요.”

“설마?”

“예, 도태된 여섯 종족의 대표. 엘리스 일런입니다.”

“일런 족이라면 영도자이십니까?”

“아직이요.”

엘리스가 가볍게 웃자 아이드가 무릎을 꿇었다.

“오십육 년 만에 뵈옵니다.”

“미안해해야 하는 건 오히려 저희죠.”

항상 이런 상황은 뻘쭘했다.

사연이 있는 건 아는데 끼어들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에는 지루하고.

“엘리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아이드 장로가 설명해 줄 거예요.”

“그래. 그, 어르신? 제가 여기 오래 있기가 곤란하거든요.”

고요환이나 저들과 만나면 상당히 피곤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분명 다시 돌아오라 할 테니까.

싫다고 해도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도 분명했고.

무엇보다 이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가장 기분 나빴다.

군인으로,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으로 들어왔다가 너무 많은 죽음을 봐야 했던 그때가 떠올라서.

진짜 집이 날아갈 것 같은 상황만 아니었으면 그냥 기다렸을 텐데.

“일단 안쪽으로 들어오십시오.”

아이드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좁은 줄 알았던 안쪽 공간에 십수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아! 얘들을 지키려고 그렇게 싸웠던 거구나.

“일족의 미래입니다.”

“밖의 저들은요?”

“전사들이죠. 지금은 너무도 오염된.”

“그럼 차라리…….”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려다 멈칫했다. 아이드의 눈빛이 그걸 말리는 것 같아서였다.

“흠흠. 일단 대충 짐작은 되고요. 어떤 놈을 때려잡으면 됩니까?”

“오빠. 목적은 따로 있잖아요.”

“아! 세계수.”

아이드는 놀란 듯하다, 이내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후우, 이것도 운명이라면…… 세계수 앞을 지키는 일족의 숙련된 전사들만 서른이 넘습니다. 방금 상대한 이들과 다르게 무척이나 호전적이죠.”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까?”

“와이번 무리도 있습니다. 개체수는 열 마리 정도지만, 그중 하나는 특별합니다. 일족 모두가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죠.”

“강하다고 해봐야 가죽 포장 조류 정도인데요.”

약간 답답했다.

닭목을 비트나 와이번 목을 비트나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그 와이번 무리가 세계수를 둥지로 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특히 강한 놈이 알을 품고 있기에 위험합니다.”

아무래도 그 알이란 놈 때문에 이쪽 차원의 균형이 깨진 모양이었다.

그쪽이 게이트가 분열한 원흉이란 소리겠지.

그럼 그 정도로 강대한 존재라는 뜻인데.

“세계수는 정화시킬 수 없습니다. 너무도 오랜 세월 오염되었기에…… 이 세계가 망해가는 것이죠.”

아이드의 절망 섞인 목소리에 난 엘리스를 쳐다봤다.

이 세계의 세계수도 망한다는데, 정말 네가 꿈에서 본 데가 여기가 맞느냐는 그런 신호였다.

“맞아요. 여기서 가져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다 처리해 봐야 안다는 거잖아!”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었는데 끝까지 가야 답이 나온다는 상황.

이런 경우가 특히나 싫다.

“엘리스, 솔직히 나 속인 거 있어?”

“쟤가 왜요?”

“그럼 너도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는 거잖아. 확실해?”

엘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이 세계는 시간 흐름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빨리 정리하고 가자.”

아까 느낀 기묘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저, 아이들은?”

“마물들만 정리하면 어떻게든 살아가겠…… 아!”

본래 엘리스가 살던 세상도 세계수가 힘을 잃었다. 힘의 원천이자 종족의 근본이 시들어 버린 것이다.

“설마?”

“아마 그래야 할 거예요.”

언제나 느끼지만 엘프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 서로를 잘 안다는 교감을 바탕으로 대화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가끔 맥락이 안 맞고 일부 단어들이 빠지는 이유가 그래서였다.

“일단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느낌이 안 좋아.”

점점 더 독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그건 여기도 곧 위험해진다는 이야기.

나와 엘리스, 저 장로를 제외하면 오래 버틸 수 있는 아이들은 없는 듯 보였다.

“여기 다른 위험은 없는 겁니까?”

“수색대가 모두 쓰러졌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그럼 와이번들부터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막 몸을 돌리려는데, 아이드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사실은…….”

* * *

“마녀라…… 엘프도 마녀가 있나?”

“제 역할도 비슷해요.”

“너 마법 잘 못 쓰잖아.”

“그야 다른 세계니까요. 원래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했어요.”

그 ‘어느 정도’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그걸 빼더라도 엘리스는 강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힘을 가졌다고나 할까.

“그 시선 뭐예요? 애정 어린 눈빛?”

“아닌데. 슬슬 다 왔다. 안 지켜줘도 되지?”

“괜찮아요.”

대답과 다르게 엘리스는 조금 안색이 창백했다.

독 안개를 뿜어내는 늪지대였다. 조금 돌아서 언덕 쪽으로 움직였다고 하지만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

그사이 수색대로 보이는 이들과 수차례 전투까지 벌였다.

대충 서른 정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엘리스도 몇을 해치웠다.

그냥 주먹으로.

“마을이 이렇게 생겼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원형의 미로 같았다.

시커먼 늪지로 이어진 오염된 수로를 제외하고 중앙에 있는 세계수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골목을 조금씩 돌고 돌아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이런 형식으로 지어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같았다’.

방어를 위한 형태였는데 곳곳이 부서진 채 방치된 상태였으니까.

특히 큰 건물 같았던 곳들은 지붕이 다 드러난 채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거의 폭격 수준이네.”

엘리스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자신의 고향 마을을 떠올렸는지도.

“대충 서른 정도라고 했지.”

아마 소란이 벌어지면, 세계수 가지에서 둥지를 튼 저주받은 와이번들이 몰려올 거다.

“세계수가 살아 있어요.”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드네.”

하지만, 세계수에서 심장 박동이 들렸다.

시선을 세계수 아래에서 위로 올리자, 대충 10층 건물 정도의 높이에서 묘한 눈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게 그 위험한 놈이구만.

“오래 끌 필요 없잖아. 엘리스 넌 천천히 내려와.”

유현성은 일단 뒤로 물러나 언덕을 힘차게 달려가더니, 그 끝에서 크게 뛰었다.

한 줄기 포물선을 그린 육체는 거의 오십 미터를 날아가 세계수 근처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굉음과 진동이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당연히 적들의 시선을 끄는 행동이었다.

“침입자다!”

아이드의 말대로 오염은 되었지만 판단력은 가지고 있는 모양인지, 서른에 가까운 다크 엘프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었다.

유현성은 오른손을 우측에서 좌로 크게 휘둘렀다.

퍼퍼퍽!!! 퍽!!

달려오던 도중 뭔가에 부딪힌 것처럼, 다크 엘프 전사들이 순식간에 우수수 쓰러졌다.

다시 한번 유현성의 왼손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반대로.

“으윽!”

“으아아악!!”

신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지더니 먼저 뒹굴었던 다크 엘프들 위로 동료들이 포개지며 쓰러졌다.

곧바로 유현성은 양팔을 들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두 개의 손바닥.

쿠우우웅--!!

중력 마법이 작용한 듯, 다크 엘프들 주변 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커헉!”

쩌저적!

우지지직!

쿵!

서른 명의 다크 엘프가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이 겨우 십여 초.

지면이 움푹 들어가며 대부분 혼절했다.

무능과 만능으로 이루어낸 짧은 이능.

“어이구, 오랜만에 하려니까 삭신이 다 쑤시네.”

유현성은 엄살을 부리며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와이번들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데, 중앙의 저주받은 와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아홉 쌍의 핏빛 눈동자가, 유현성을 향했다.

그 직후, 와이번들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

끼야아아아아아--!!!

포효에 가까운 피어!

하등 생물에게 공포를 주고 굴복을 강요한다는 그 내지름이었다.

유현성은 피식 웃었다.

“허, 어딜 감히.”

와이번들의 피어는 유현성에게 닿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엔 반대였다.

유현성이 오른발로 바닥을 찌르며 고개를 드는 순간.

크아아아아아-!!!

진짜 ‘피어’가, 세계수를 때려 버렸다.

먼지 폭풍이 거칠게 일어나 와이번 무리를 덮었다.

충격 때문인지 와이번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유현성이 파고들었다.

공중에서 회전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주먹들.

퍼퍼펑!! 퍼퍽!!!

순식간에 와이번 대부분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바닥에 내려선 유현성은 살짝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너희들은 상대를 잘못 만난 거야.”

쾅--!!!!

그와 동시에, 유현성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생기더니 방금 있던 자리가 폭격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가 버렸다.

뒤로 순식간에 물러난 유현성이 상대를 쳐다봤다.

‘저게 아이드 장로가 말한 그 저주받은 퀸 와이번이구만.’

근데, 이거 너무 크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