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보통 와이번들은 성체가 버스 크기 정도다.
간혹 변종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덤프트럭 크기를 넘지 못하는 것.
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상의 크기라면 저 앙상한 날개로는 몸을 띄우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마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면 상관없다.
오히려 상위종으로 진화까지 가능했다.
“퀸 와이번. 아니…… 마녀 리어시즈.”
마녀가 마력으로 와이번을 포섭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먹힌 건지, 스스로 융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퀸 와이번의 가슴 부위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말 그대로 한 몸이 된 상황.
무엇보다 그 덩치가 대충 주택만 했다.
내가 산 그 집 크기 말이다.
“근데…… 정신은 제대로 박혀 있나?”
-어리석은 이계인. 실력은 가상하지만, 이곳은 나의 세계다.
“일단 대화는 가능하네?”
-어리석은 이계인. 실력은 가상하지만…….
“엉?”
새 대가리…… 아니, 와이번 대가리인가?
“오빠, 위험!!”
엘리스의 다급한 외침에 순간 유현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 마녀가 부리는 ‘현혹의 샘’에 발가락 하나를 담갔다 뺀 것이다.
어째 말이 느릿느릿하고 고저가 거의 없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거였군.
-아깝구나. 금방 편해질 수 있었을 텐데.
“엘리스 땡스. 그리고 마녀 리어시즈. 그럴 일은 결코 없어.”
현혹은 상당히 유효한 수단이나 자신보다 더 상위종을 지배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상대의 정신세계에 잡아먹히는 경우가 더 많지.
오염된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도 녹아들면서 흔적이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잠깐이지만 방심한 건 그래서였다.
‘아무래도 한동안 너무 안일하게 살았던 모양이군.’
어쨌든 본질을 파악하는 엘리스 덕에 바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대화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거지?”
-그대들이 기다리면 된다.
“네 알이 깨어날 때까지?”
-당연히.
퀸 와이번이 기지개를 켜자, 날개가 활짝 펴지며 거대한 위압감을 뿌려댔다.
확실히 저주받은 와이번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하긴. 원래도 강했는데,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대한 마력을 빨아들였다고 했다.
그 힘으로 이 세계 전체를 오염으로 물들였을 정도니, 지금은 측정하기도 어렵겠지.
그럼 흔들어야지.
“저 알 속에 있는 게, 죽은 네 딸 제샤인가?”
* * *
마녀가 있었다.
어머니도 마녀였고, 딸도 그녀를 이어 마녀가 될 터였다.
젊은 시절, 그녀는 도전을 선택했다.
평온한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최고의 신분으로 자리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금의 세계에선 결코 최고가 될 수 없었기에.
결국 마녀는 부족을 떠나기로 한 ‘오염된 일족’들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그녀의 일상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나의 세상에는 하나의 세계수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법칙 때문.
결국 마녀는 세계수의 씨앗을 품고 고향을 떠나 게이트를 넘었으며, 용맹한 전사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의 마수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몇십 년 뒤.
세계수를 피울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찾았다.
다들 정착에 만족했고, 마녀의 어머니는 세계수를 싹 틔우기 위해 고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가로, 수명이 점점 줄어갔지만.
그때 마녀는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가 성장할수록 마녀의 어머니는 말라갔고, 딸이 태어났을 무렵엔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마녀는 어머니를 이어 세계수의 성장을 맡게 되었다.
부족 내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신성한 위치에 올랐고, 그렇게 그녀가 가졌던, 최고가 되겠다는 최초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딸을 낳고 난 뒤, 그녀는 절망에 빠졌다.
어린 제샤는 마녀의 피와 역대 가장 뛰어난 마력을 가졌기에…… 육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제샤!!! 안 돼…….”
결국 병마에 시달리던 딸은 긴 고통 끝에 죽었다.
마녀는 세계수에 신경이 쏠려 자신이 딸에게 소홀했다며 자책했다.
그리고 점점 세계수 때문에 어머니와 딸을 잃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마녀 리어시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 * *
“누구나 사연은 있는 법이지.”
-감히 이계인이 무엇을 안다고!!
리어시즈에게서 격한 분노가 전해졌다.
손을 뻗어 엘리스의 앞을 막은 유현성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저 알 속에 있는 게 30년 전 죽은 제샤가 맞다는 건가?”
-다른 이는 몰라도 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미치면 세상의 기준은 자신이 되는 법이지. 하지만 절대 죽은 자는 돌아올 수 없는 법이…….”
엘리스의 손이 유현성의 허리를 살짝 붙잡았다.
그만하라는 의미 같군.
-이계인.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이 세계를 죽음으로 물들인 건 리어시즈 당신이지.”
아이드 장로의 이야기는 과거가 전부가 아니었다.
분노와 격정에 사로잡힌 리어시즈는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부터 세계수는 서서히 어둠에 물들어갔다.
엘프들이 세계수가 오염됐음을 깨달은 건 한참이나 나중의 일.
찬란한 금발이 빛을 잃었고, 생생함 가득한 피부는 탁하게 변했다.
태양을 머금은 보석처럼 찬란하던 눈동자는 검게 물들어갔고, 지금껏 없었던 분쟁이 종족 사이에 생기기 시작했다.
변화를 느낀 장로들이 나섰다.
그들에게 세계수는 무엇보다 신성하다.
그래서 결코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할 수 없었음에도, 목숨을 걸고 세계수와 공명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절반의 장로들이 수명을 다하고서야 알아낸 것은…….
세계수의 마력이 서서히 무언가와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애는 없는데, 가족들은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 백 년 가까이 함께한 이들을 몰살시키는 건…… 아니라고 봐.”
-그래서 모른다는 것이다. 제샤는 내가 본 누구보다 강대한 마력을 가졌다.
“그 딸의 마력을 흡수해서 저주로 바꾸고, 그걸 오염시켜 세계수에 밀어 넣고, 빠져나온 세계수의 생명력을 제샤에게 줬다고 듣기는 했지.”
-너!!
“그렇게 30년이 지났는데 알은 여전히 그대로잖아. 하지만 네 일족은 모두 죽었어.”
-그만!!!
“스스로를…… [부정]하지 마라!”
우르르르르-
리어시즈의 몸이 크게 떨려왔다.
그 진동이 세계수와 공명했고, 이제 대지까지 울려댔다.
진실 앞에 이성을 잃은 듯 퀸 와이번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때 유현성이 조용히 말했다.
“엘리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도 남의 상처 후벼 파는 성격은 아니지. 알잖아.”
“근데요?”
“알이…… 곧 깨어난다.”
엘리스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소름 끼칠 정도의 악의가 이상하게도 슬프게 느껴졌다.
“예상했어?”
“……보지 못했어요.”
“그래, 네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겠지.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고. 일단 저 알이 가진 마력이 내가 생각한 그거에 가깝다면 넌 무조건 도망가야 해.”
그제야 엘리스는 유현성이 가볍게 행동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동굴로 가. 아이들과 함께 먼저 돌아가.”
“알았어요.”
-죽여 버리겠다!!!
예상대로 마녀 리어시즈의 정신 붕괴가 가속되었다.
오직 딸을 되살리기 위한 그 하나만을 위해 무려 30년을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인성이 희미해졌고, 맹목적으로 결과만을 쫓게 되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던 아이드 장로가 마지막으로 그랬다.
리시어즈는 실제로는 무척이나 나약한 여자라고.
엘리스가 물러서는 걸 확인한 뒤, 정면을 쳐다봤다.
리시어즈는 세계수가 뿌리는 어둠을 몸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다행이군.
시간 끌려던 원래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으니까.
게이트가 분열됐다.
즉, 이 세계가 버티지 못할 정도의 마력이 깨어났다는 의미다.
퀸 와이번의 존재감은 그 정도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게이트 분열의 원인은 저 ‘알’일 터.
“솔직히 중간중간 제대로 된 설명도 없고, 여기까지의 과정도 허술하긴 하지만…… 이제 고민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
바로 주먹을 뻗었다.
쾅!!
퀸 와이번의 머리가 크게 튕겨 나가고.
다시금 유현성의 두 손이 빠르게 앞으로 움직였다.
분명 수 미터 이상이 떨어져 있었지만, 퀸 와이번의 신체가 마구 휘청여 댔다.
간격을 무시한 채 큰 충격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감히!
퀸 와이번이 몸을 뒤로 날렸다.
후우웅- 후우웅----!!!
커다란 날개가 바람을 일으켜 유현성을 밀어냈다.
그 직후 퀸 와이번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쿠와아아아----!!!
브레스를 뿜는다 느껴질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다.
독액으로 된 것 같은 시커멓고 커다란 점액질 덩어리가 쏘아진 것이다.
파아아앗!!!
유현성의 오른손 주먹이 바닥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무시무시한 풍압이 실드를 만든 듯, 점액질 덩어리가 공중에서 터져나갔다.
그 파편이 지면 곳곳에 떨어지자,
치치이익---
닿은 부분에서 연기가 뿜어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산성에 가까운 독액인가? 하지만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유현성은 왼손을 뻗었다.
동시에 뭔가를 움켜쥐는 듯한 동작이 이어졌다.
우드드득.
퀸 와이번의 왼쪽 날개가 우그러졌다.
-크흑. 어림없다!!!
주변에서 끌어들인 검은 마력이 날개를 휘감더니 어느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때 유현성은 허리 뒤로 돌렸던 주먹을 강하게 내뻗었다.
쿠앙!!!!!
마치 대포를 쏘는 것 같은 굉음이 울리고.
우지직.
퀸 와이번의 가슴. 정확히 마녀 리어시즈가 파묻힌 그곳이 움푹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공격은 한 번이 아니었다.
유현성이 연이어 주먹을 내뻗자 퀸 와이번의 신체 곳곳이 푹푹 파이기 시작했다.
-크으악! 이 미천한 이계인이!!!!
“미천이 아니라 미친이다.”
쐐애애애액!
그저 팔을 내리 그었을 뿐인데, 십여 미터나 떨어진 퀸 와이번의 왼쪽 날개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아아아악!!!
퀸 와이번은 비명과 동시에 몸을 비틀었다.
다시금 검은 마력이 잘려 나간 부분에 뭉쳐지며 새로운 날개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대적이 아닌 도주였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세계수를 돌며 올라간 것이다.
유현성이 가지를 밟으며 그 뒤를 쫓았다.
-빌어먹을……!!
퀸 와이번의 입에서 다시 검은 덩어리가 뿜어졌다.
“같은 수법은 안 돼.”
유현성은 이번엔 점액질을 향해 정면으로 몸을 날렸다.
퍼억!!!
-이제 넌 죽…… 헉!
하지만 점액질을 고스란히 뒤집어썼음에도 유현성의 몸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뚫고 나가 퀸 와이번의 옆구리를 뜯어내기까지 해버렸다.
-아악, 아아아악!!!
“미안한데, 여기까지.”
-안 돼……!! 그럴 순 없어!!
발악하며 공중에서 몸을 뒤튼 퀸 와이번은 오른쪽 날개를 크게 펼쳤다.
부우우웅----!!!
막대한 풍압이 유현성을 덮치고.
그의 신형이 뒤로 밀려난 틈을 타, 퀸 와이번이 허공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쳇. 날개 없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
유현성은 그나마 크게 보이는 가지로 몸을 날렸다.
거기서 쪼그려 앉는 순간.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접혔다.
-……!!!
퀸 와이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정상에 있던 알.
거기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 저 빌어먹을 이계인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입술을 벌리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
콰르르르릉---!!
시커먼 먹구름을 뚫고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은 퀸 와이번…… 아니, 마녀 리어시즈의 심장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그때였다.
쩍!
알이 깨지고 말았다.
* * *
시커멓게 물든 세계수 정상에서 환한 빛이 뿜어졌다.
실로 성스럽다고 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 중심에서 한 쌍의 하얀 날개가 펼쳐졌다.
“소녀인가?”
현아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아이.
대충 열 살 전후 같았는데, 주변을 뿌리는 빛 때문에 훨씬 고귀하게 느껴졌다.
순간, 유현성과 소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만…… 부디…….
소녀가 움직였다.
그저 가볍게 손을 휘두르면서.
콰아아아앙-!!!!
그 순간,
아래로 떨어지던 유현성의 몸이 눈앞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닥에 처박히며 긴 고랑을 만들면서 수십여 미터나 밀려갔다.
그것도 모자라 뭔가에 걸린 듯 몸이 튕겨지더니 반쯤 무너진 집 벽에 박히고 말았다.
이후, 유현성은 몇 번 부들거리더니 더는 움직이질 않았다.
소녀는 추락하는 마녀를 붙잡았다.
-오오, 제샤! 드디어……!
“네, 엄마. 제가 돌아왔어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제샤. 제샤……!!
“죄송해요.”
-아니. 내가 미안했다. 미안했어. 엄마가…….
하지만 마녀 리어시즈는 이미 육체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
-괜찮아. 이 엄마는…… 괜찮아. 미안해 내 딸.
“아니야. 엄마. 사랑해. 사랑한다고.”
-엄마도. 언제나…….
모진 폭풍이 불어왔다.
리어시즈를 뚫은 번개는 세계수 일부를 갈라 버렸다.
그 여파로 주변의 마나들이 뒤틀리며 기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흐름이 리어시즈의 존재를 조금씩 흩날리게 만들었다.
-제샤, 미안해…….
“아니에요. 저에게 최고는 언제나, 엄마였…….”
-사랑…….
리어시즈는 곧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
소녀 제샤의 손에 한 방울의 눈물을 남기고서.
잠시 긴 정적이 흘렀다.
소녀 제샤는 무릎을 꿇었다.
속죄하듯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제샤의 머리를 가만히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