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괜찮아?”
“예.”
“재회가 너무…… 짧았지?”
“아니요. 오히려 그편이 나았어요. 엄마라면 곧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했을 테니까요.”
제샤는 의외로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미세한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고백을 이어나갔다.
긴 시간.
리어시즈는 알 속의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래서 제샤는 모든 내막을 알고 있었다.
엘프의 육체는 나약하다.
결국 리어시즈는 와이번 무리를 선택해 제샤가 깨어날 때까지 보호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용맹한 엘프라도 하늘을 날 수는 없으니 알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본 것이다.
그 대가로 리어시즈는 엘프의 육체를 잃었다.
이후 세계수 정상에서 모습을 숨긴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딸이 깨어날 때까지.
“정말 죽은 게 아니었나?”
“마지막 호흡 전에, 엄마가 마력으로 시간을 되돌렸어요. 제가 아주 작고 작아질 때까지요.”
그게 되는 건가 싶었는데, 제샤가 마음을 읽은 듯 대답했다.
“일족의 마녀만이 계승받게 되는 숭고한 능력이에요.”
작아진 제샤는 알이란 형태로 변했다.
그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육체가 회복되면서 기억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가 스스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더라고요.”
세계수가 오염되면서 일족 대부분이 그 영향을 받았다.
또, 상당수는 리어시즈의 마력에 현혹된 상태였다.
자신이 알에서 깨어나면 잠깐은 행복하겠지.
하지만 곧 리어시즈는 자괴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고고한 마녀답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테고.
“결과를 얻는 순간 과정을 돌아보게 되는 이가 마녀죠. 엄마는 아마 와이번과 동화된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 거예요.”
리어시즈가 죽으면 머지않아 일족도 멸망할 것이다.
살아난들 이 넓은 세계에서 혼자가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샤는 그제야 ‘유현성’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기적이지만…… 제가 깨어나는 순간이 엄마에게 제일 행복한 시간일 거예요. 그때 보내 드리고 싶었어요.”
미래를 알기에 남겨질 슬픔을 짊어지다니.
“그럼, 엘리스를 부른 게 너야?”
“예. 그분이 속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분과 동행해 달라고 부탁드린 거예요.”
엘리스가 날 선택한 건 그래서였나?
어쨌든 제샤는 결과를 이루긴 했다.
리어시즈가 죽기 직전에 깨어나, 아주 잠깐이지만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니까.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렸죠?”
“뭐…… 그럴 수도 있지.”
유현성이 리시어즈의 공격을 맞아주고 죽은 척한 건, 제샤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잠깐이지만 시간을 달라는 부탁.
다친 척, 그렇게 죽은 척하려고 했는데…… 아오! 그렇게 강하게 후려칠 줄 몰랐다.
아직도 삭신이 다 쑤시네.
어쨌든 내막을 듣고 나니 차마 뭐라 하기 어려웠다.
딸 가진 부모 마음은 모르지만, 나 역시도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으니까.
하아.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네.
* * *
“오빠!”
엘리스가 아이드 장로와 일족의 아이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너 안 돌아……! 됐다.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저 아이가 그 아이야?”
“그래. 나머진 맡긴다.”
유현성은 제샤를 살짝 떠밀었다.
싸움이야 어쩔 수 없으면 하겠지만, 이런 복잡한 일은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엘프끼리라서 대화에 끼기도 어려우니 한 발 물러나는 게 맞다.
엘리스가 제샤의 손을 잡았다.
“날 부른 게 너구나.”
“죄송해요.”
“아니, 그럴 일은 아니야.”
엘리스는 제샤의 몸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둘은 곧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저 행위는 엘프들한테는 아주 신성한 거다. 일종의 공명이라고나 할까.
서로 간의 감정과 의지를 전함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없앤다. 긴 대화로 인해 만들어지는 불필요한 소모를 차단하는 것이다.
곧 둘이 떨어지고 엘리스가 물었다.
“정말 되돌릴 생각이야? 죽은 이들은 돌아올 수 없어.”
엘리스의 시선이 쪼개진 세계수로 향했다. 이제는 시커먼 흉물이 된, 남은 건 서서히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커다란 덩어리를 말이다.
“아무도 없지만 해야 해요. 세계의 붕괴는 연결된 세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법이니까요.”
“세계수가 없는 세상은 오래 갈 수 없는걸.”
“그건 우리 엘프에게만 적용되는 법칙이죠.”
“그럼 넌!”
“애초에 제 것이 아니잖아요.”
제샤는 그렇게 말한 뒤, 엘리스에게서 떨어졌다.
“약속은 지킬게요.”
고개를 돌린 제샤는 곧 아이드에게 향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아버지.”
응? 저 둘이 부녀…… 라고?
유현성은 당황해하며 두 엘프를 살폈다.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아빠와 딸이라 보기에는 차이가 무척 컸다.
노인정 최고 어르신이 초등학생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이드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네 덕에 저 아이들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았더냐.”
“좀 더 일찍…… 아니, 제가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우리에게 후회는, 때론 삶의 의미가 되는 법이지.”
“이제 되돌릴게요.”
“……잠시만 시간을 다오.”
아이드는 제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뒤 엘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대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요. 남은 이들에게 변화를 이끌었으니까요. 파장이 흐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파장이라…… 그렇군요.”
아이드는 조금은 밝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약속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뇨. 그저 다시 함께하는 것일 뿐.”
이미 엘리스와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제샤와 아이드가 손을 맞잡자, 동시에 아이들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슬퍼하지 말거라. 이건 단지 하나의 선택일 뿐이야.”
아이드는 그렇게 말한 뒤, 앞으로 나아가며 제샤의 걸음을 이끌었다.
세계수의 바로 앞에서 아이드가 손을 들었다.
덩굴 모양의 지팡이에서 눈부신 녹색의 빛이 뿜어졌고, 잠시 후 바닥에 깊게 박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무언가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지팡이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지면으로 들어가더니 수십 개의 덩굴이 되어 자라났다.
그게 점점 두꺼워지고 개수를 늘려가면서 아이드와 제샤를 휘감아 버렸다.
동시에 세계수까지 한꺼번에.
“저게…….”
“나중에. 나중에요.”
엘리스는 숭고한 의무인 것처럼 한시도 세계수의 변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결국 난, 입을 다무는 수밖에.
덩굴과 아이드, 제샤, 그리고 세계수까지.
모두 하나가 되었다.
파앗!!!
그 중심에서 갑자기 파란빛이 뿜어지며 하늘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엘프 마을을 덮고 있던 불길한 검은 구름에 구멍이 뚫리더니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구름이 흩어지고, 빛은 점점 강해졌다.
빛은 온전히 세계수만을 위한 것처럼, 그렇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오…….”
상황은 모르겠지만, 상태는 명확했다.
덩굴에서 초록색 새순이 나고, 순식간에 잎이 되었다.
그 하나가 수십이 되더니 수백이 되었고, 검고 흉측했던 부분을 모조리 덮어나가기 시작했다.
세계수가 살아나고 있었다.
“와아……!”
“정말, 돌아오는 거야?”
“이제 우리도…… 될 수 있어.”
“다시! 다시!”
아이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내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잔디가 피어났다.
검고 오염된 대지를 물들이듯 수풀이 되더니 순식간에 허리춤까지 자라났다.
그 파도가 조금씩 주변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수백 번 게이트를 돌아다녔던 유현성도 처음 보는 광경.
몇 분 만에 썩은 나무가 되살아나고, 십여 분도 안 되어 오염된 대지가 생명을 얻기 시작했다.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되살아난 자연의 물결은 어느새 마을을 덮었고 시야가 닿는 모든 일대를 녹색으로 물들여 갔다.
그때, 세계수 한쪽이 열리더니 한 아이가 튀어나왔다.
고작해야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모습. 하지만 제샤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아이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심장 어림에서 나온 것은, 작은 나뭇가지.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
엘리스는 나뭇가지를 받아 들고 더 어려진 제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세계수가 지켜봐 줄 거야.”
엘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린 제샤의 몸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는 느낌.
“…….”
엘리스가 몸을 돌렸다.
“오빠. 돌아가요.”
* * *
“제길, 파장에 미묘한 노이즈가 있다더니.”
“방비는 했습니다만 범위를 넘었습니다.”
“조원들은?”
“피해는 크지 않지만 더 이상 접근은 무리입니다. 대기를 하든가 돌아가야 됩니다.”
보고자는 답답한 표정으로 1조 조장을 쳐다봤다.
곧 조장 역시 고개를 돌려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흐음. 역시 아직은 무리였나?”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확실히 그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1조 조장은 전신을 검은 방호복으로 덮고 있었으며, 나머지들은 무장 슈트 외에도 특수 방독면까지 착용한 상태.
하지만 그는 깔끔한 흰색 정장이 전부였다.
“그럼, ‘나는 괜찮다’ 손들어봐.”
“저는 괜찮습니다.”
“형, 나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저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겠습니다.”
그는, 이후 몇몇을 더 둘러보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오십두 명 중에 전부 일곱인가? 하긴, 그것만 해도 어디야. 자,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니까, 부조장이 복귀까지 통솔해.”
“예? 그냥 돌아가란 말입니까?”
“애들 아프잖아. 숨도 못 쉬고 컥컥거리는데 여기서 대기하다 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
“그야 그렇지만…….”
보고자였던 부조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게이트에 들어왔을 때, 일단 큰 문제는 없었다.
우거진 밀림.
간간이 몬스터들이 나왔고 아카데미 측의 자료와 오차도 크질 않았다. 게이트가 분열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진입한 건데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 이미 인근에는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밀림을 빠져나와 뭔가 시시하다고 생각한 순간.
조원 하나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코드명 무지개 랫 맨.
신체를 쥐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고, 보호색을 사용한 위장술에도 뛰어난 조원이었다. 때문에 탐색계에서도 손꼽히는 능력자였는데 제일 먼저 쓰러진 것이다.
그 직후 부청장이 그를 구해서 뒤로 물러났다.
바로 무장 형태를 바꾸고 다시 진행을 이어나가려는데 이번에는 다섯이나 되는 조원이 쓰러졌다.
독이었다.
단순한 악취라 생각했는데 마력 코팅을 뚫을 정도로 치명적인 독.
이후 탐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 됐다. 보이질 않으니 방향조차 잡기 어려웠으니까.
“부조장이 날 걱정해 주는 거야? 고마운데 접어둬. 나도 내 목숨 귀한 거 아니까 적당히 둘러보고 복귀할 거야.”
“부청장님!”
“여기선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저는 그저 일개 헌터일 뿐입니다.”
부청장, 고요환은 경박스럽게 웃으며 함께하기로 한 일곱을 쳐다봤다.
“자, 다들 무리하지 않는 선까지 가보…….”
그때, 갑자기 고요환이 몸을 돌렸다.
정면의 늪지 너머였다.
무언가 굉음이 터지더니 날카로운 비명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대체 무슨…….”
“쉿!”
고요환의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변화가 벌어졌다.
죽음의 대지처럼 느껴지던 검게 물든 땅이 방금 헤치고 나온 밀림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더 황당한 건.
“어? 어…… 이럴 수가…….”
제일 먼저 기절했던 무지개가 정신을 차렸다.
그 직후, 독에 당했던 조원들까지 벌떡 일어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회복이군.”
“다, 다행입니다.”
“아니, 더 위험한 거지.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고요환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단순한 회복이라면 힐러 계열의 헌터들도 가능했다.
실제로 지금도 해본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그저 통증의 진행만 늦출 정도였다.
그만큼 지독한 독과 악취였는데.
일순간에 모든 것이…… 정화된 것이다.
“전원 퇴각 준비!”
“예? 예. 퇴각 준비!”
“난 남는다. 상황만 보고 올 테니…… 아, 빌어먹을.”
“무슨…….”
“추방이다.”
고요환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간이 일렁거렸다.
말 그대로, 이 세계가 이질적인 존재들을 읽어내려 하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졌다.
“전속력으로 돌아간다!!”
* * *
“누나, 정말 괜찮은 걸까?”
“믿어.”
“형이 강한 건 알지만, 그래도 분식집 사장님인데…… 사실 제대로 능력 쓰는 건 본 적도 없고.”
“믿으라고.”
“그야…… 요리 실력은 믿는데.”
임혜리는 자신도 모르게 풋, 웃었다.
지금 둘은 괴수화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여기에 추가 무장까지 더했기에, 아카데미 때보다는 월등히 무력이 강해졌다.
문제는, 진짜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는 거다.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말과 다르게.
지금 임혜리와 임수원은 벌써 스무 마리가 넘는 몬스터를 해치운 상황이었다.
물론 광폭 토끼나 길 잃은 고블린 같은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게이트를 막 빠져나와 혼란스러워할 때 기습한 게 주효했다.
임혜리의 지시에 따라 임수원이 움직였고, 남매라 그런지 손발이 딱딱 맞았다.
하지만 그저 그런 수준임에도 일반인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놈들.
“또 나온다!”
시커먼 게이트가 또다시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임혜리와 임수원은, 다시금 슈트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유일한 이능이라 할 수 있는 광폭화를 발동시켰다.
임혜리의 눈에서 불꽃이 튀고 발톱이 날카로워졌다.
마찬가지로 임수원의 송곳니가 더욱 길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게이트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사람 손?”
모습을 드러낸 건 유현성이었다.
“아!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