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게 무슨 난리래!”
임혜리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날은 정말이지 가게 오픈한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일단 제대로 된 첫 실전.
걱정하지 말라는 유현성의 말과 다르게 진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아카데미에서도 배웠던 부분이지만 이론과 실제는 달랐다.
다행히 슈트를 착용한 뒤, 유현성이 몇 번 실전 연습을 시켜줬다. 물론 크게 다치지 않는 선이지만, 거의 섬뜩할 정도로 살기를 뿌려댄 것이다.
아마 그 경험이 아니었다면 몬스터들을 보자마자 굳어 버렸을 거다.
일단 괴수화 상태로 대기하던 중이었지만, 현성은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가라고 했다.
“딱 할 수 있을 정도만 해라.”
조금은 안심했다.
사실 찡하기도 했지.
거기에 집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긴 이제 우리 집이니까!’
진심으로, 떠돌아다니다 빈집 구석에서 떨면서 자는 건 이제 결코 사양이었다.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사장 오빠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그게 용기를 줬다.
“정면으로.”
“예!”
덩치를 키운 늑대가 정면에서 으르렁거리는 사이,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광폭 토끼들을 짓눌렀다.
혼란에 빠져 도망가려 하면 늑대의 송곳니가 목을 물어뜯었다.
콰직!
광폭 토끼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애초에 하위의 몬스터이기에 일격에 숨이 끊어진 것이다.
괴수화한 임수원은 잠깐은 질색을 했지만 임혜리는 여유를 두지 않았다.
“다시 정면으로.”
“알았어.”
늑대가 바로 게이트 앞으로 움직였다.
막 나온 고블린들은 다급히 옆으로 이동했지만, 호랑이는 그 틈을 이용했다.
길어진 발톱이 고블린들을 후려쳤다.
파삭!!
“크아아악!!”
굴러간 고블린들을 기다린 건 커다란 늑대.
훌쩍 뛰어 내려친 발이 그들을 짓눌러 버렸다.
“끄억!”
그렇게 둘은 몬스터들을 하나하나씩 해치워 버렸다.
“집으로는 못 들어가게 해. 밖으로도!”
“나도 안다고!”
일반인보다 조금 강하고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정도의 F급.
그게 임혜리와 임수원의 평가였다.
괴수화 능력에 광폭화 이능을 더해도 고작 E급에 비벼볼 수준에 불과했지만, 진짜 어떻게 하다 보니 스물이 넘는 몬스터들을 해치웠다.
한계까지 이 악물고 싸운 결과!
황당한 건 그 이후였다.
“아, 돌아왔어.”
“사장님!!”
유현성의 모습이 보이자 진심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그 뒤로.
“하나, 둘, 셋, 네…… 열셋?”
아이들이 퐁퐁퐁 하고 튀어나오더니, 마지막으로 엘리스가 튀어나와 손을 살랑 흔들었다.
그 직후, 지지직 하고 스파크가 튀었고 주변의 공기를 빨아먹으면서 게이트가 소멸됐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근데 웬 애들이 이렇게 많아요……?”
그리고 뜬금없이 지시가 떨어졌다.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일단 애들부터 씻기고 먹이고 보자.”
“네?”
그 덕에 임혜리는 졸지에 보모가 되어야 했다. 이 층 샤워실에서 벌써 두 시간째 애들만 씻겼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새로운 환경이라서 애들이 얌전하게 따라줬다는 것.
“크흐, 악취!”
임수원 역시 고문이나 다름없는 상황.
후각이 예민한 그에게 있어때에 찌든 막대한 양의 빨래는 충격과 경악, 공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탁기가 어마어마한 놈이라는 거.
일전에 유현성이 저거 헌터 전용이라면서 모드만 바꾸면 된다고 했었다. 무려 600만 원짜리.
“으어, 업소에서나 쓸 만한 세탁기를 왜 쓰나 했더니…… 형은 이런 상황까지 예측한 건가?”
어쨌든 임수원은 코를 부여잡고 특수 모드로 애들과 유현성의 옷까지 한꺼번에 돌려 버렸다.
딱 한 시간 만에 악취는 사라지고 깨끗해졌으며, 피 얼룩까지 모조리 지워졌다. 심지어 무슨 기능인진 모르겠지만 빨래가 뽀송뽀송해져서 나왔다.
이대로 입어도 좋을 수준으로 말이다.
물론 그사이 임수원은 애들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었지만.
그렇게 두 남매가 끙끙 씨름하는 사이, 유현성은 엘리스와 마주했다.
문제를 풀었으니 해답을 들어야겠지.
그 전에.
“고생했어.”
임혜리와 임수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솔직히 기특하잖아.
“헤헤헤.”
“가, 감사합니다.”
아, 내일은 폭식 자매네 가게에 들러서 특제 조리퐁 과일 더블 스폐셜 파르페도 주문해 줘야겠다.
원하면 좀 더 비싼 걸 사줄 수도 있고!
* * *
“자, 엘리스.”
“예. 오빠!”
“이거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보니 그러네요.”
“좀 터놓고 이야기하자.”
“오빠한테 시집간다는 거 진짜인데.”
“말 돌리지 말고. 언제부터야?”
엘리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툭 던졌다.
“오빠 제대하고요.”
“왜?”
“국가 군대 귀속.”
훅 오는 게 있었는데 엘리스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군대 소속 헌터는 사냥을 통한 습득물은 일단 국가에 귀속한다. 그에 해당하는 보상금은 지불하지만 우선 권리는 정부에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설마 국가 헌터들이 아니고 날 찾아온 이유가 그거야?”
“예. 이제 오빠는 은퇴했으니까요. 저희한텐 세계수가 생명이나 다름없어요. 인간들은 그걸 사용하지도 못하겠지만 절대 돌려줄 리 없죠.”
“인질…… 인 건가?”
엘리스는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치권 놀음 따위가 성질 서 국회 일부를 개박살 내고 나온 유현성이니, 충분히 이해했다.
지금 엘프 전사들은 게이트가 열리면 인간들과 함께 토벌 적극 참여했다. 실제로 도움도 많이 받았고 그들의 희생도 컸다.
하지만 정부가 세계수를 잡게 되면, 일족들은 거부하지 못하고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지.
“예. 저희들이 게이트에 전사들을 적극 파견하는 이유는 세계수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정부가 결코 돌려주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고요환을 못 믿은 거야?”
“그건 취향 차이!”
“뭐 좋아. 그럼 이 세계수는 내가 알던 세계수와 다른 게 있다는 건데. 원래는 마력을 모으는 나무 아니었던가?”
“보면 알걸요?”
드드드드드드---
“엉?”
갑자기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아니, 주변 산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진동은 크게 뭔가를 박살 내진 않았지만 거의 십여 분 넘게 주변을 울려댔다.
“이게 뭐……! 하아, 씨.”
부산에서 시가지 전체를 볼 수 있는, 다른 장소보다 높고 시야가 확보된다는 황령산 전망대 중앙에.
나무가 자랐다.
“헐.”
대충 버스 서너 대만 한 굵기에 높이만 100미터 이상.
아파트 삼십 층 좀 더 넘는 정도인 데다, 산 정상 전망대에 자랐으니 어지간한 부산 시민들은 나무를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저 정도면 광안리에서도 보일 것 같은데.
“……엘리스, 머리가 아파서 정리가 안 되는데 요약.”
“저쪽 세계의 세계수를 정화시키고 부활시킨 거죠. 원래 살던 사람들도 살아가고, 마수들을 잡아야 다시 게이트가 열리지 않을 테니까요.”
“그건 대충 감으로 이해했어.”
“우리가 나온 통로 말고도 게이트가 여럿 존재한다는 건 눈치챘죠?”
“뭐 토벌대가 들어가는 바람에 도망친 마수들이 집 앞을 엉망으로 만든 건 알았어.”
“예. 그중 하나의 통로로 세계수가 부활하면서 외형을 보내줬어요.”
아마도 그 외형이란 게 산 정상에 자란 저 나무 같았다.
이후 엘리스가 품에서 꺼낸 건, 그 반짝이는 나뭇가지였다.
“정수. 그리고 종족을 이어갈 생명.”
이후에도 설명이 이어졌는데, 솔직히 다 이해는 못 했다.
그냥 정리하면.
제샤의 시간대와 우리의 시간대는 다르다.
한데 그 제샤가 알 속에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른 마녀에게 뭐, 일종의 텔레파시? 아니면 메시지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보냈단다.
“제가 듣기 시작한 건 일 년 정도 전인데, 특정도 못 했고 불안했던 거죠.”
“어딘지 몰랐다는 거지?”
“게이트가 여기뿐이 아니니까요.”
하긴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니 단순한 예지몽으로 뭔가를 찾기는 어렵겠지.
“근데 왜 날 찾은 거지? 너네 전사들도 있잖아.”
“그 정도로 안 된대요.”
……이해가 되긴 하네.
제샤가 있던 세계의 독과 악취는 어지간한 수준으로 버텨내기 힘들 정도였다. 이상도 녀석이 한 시간 정도 숨 쉴 수 있으려나 싶을 정도로 지독했던 것이다.
나름 깔끔 떠는 엘프들이라면 더 하겠지.
특히, 안 봐도 훤하지만 고요환 녀석도 아마 꽤나 고전했을 거다.
“제가 아는 가장 강한 존재와 오라고 하더라고요.”
“꿈에서?”
“마녀들은 그렇게 암시를 줘요. 제샤는 세계수에서 받은 마력을 다 돌려서 마지막으로 저와의 약속을 지킨 거죠.”
죽었다는 거구나. 그 아이드 장로와 함께.
짐작하기로, 둘은 마지막 수명을 이용해 그 세계의 세계수를 부활시켰을 거다.
그 세계가 더욱 마지막으로 간다면, 또다시 게이트가 만들어지며 폭주하는 일이 생길 테니까.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엘프들의 기준은 인간과 다르니 뭐라 할 수 없지만, 엘리스의 말은 그런 의미에 가까웠다.
“하아, 머리 아프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데?”
“다시 시작하는 거라 보면 되죠.”
“뭔가 다 이야기 안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답답한데.”
“진실은 겪어보면 알 거예요.”
“뭐?”
“오빠랑 결혼하고 싶다는 건 진짜인데.”
아오, 두통이 치민다.
“전 종족의 공주이자, 여기선 부족하지만 마녀이기도 해요. 세계수와의 교감이 필수적이죠. 동시에 권리와 의무도 있어요.”
“야! 그게 결혼이냐!”
“여긴 저희에게 이세계잖아요. 우월한 존재와 공존하는 건 당연한 거죠.”
살짝이지만 이해는 됐다.
우리야 그냥 살지만, 저들은 종족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가…….
“오빠, 보러 가요.”
* * *
“하아, 이게 잘한 짓인가 모르겠다.”
부산의 제일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동네.
물론 거기서 등산을 한 시간 이상 해야 갈 수 있는 전망대지만 대충 중심가는 다 보이는 산이었다.
날 좋을 때면 부산 시청 넘어서 부산역 영도까지 볼 수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사실 생각보다 인기가 없어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잘 와보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결국 엘리스를 업고 날듯이 왔지만 야밤에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집에 애들도 있는데.
“봐요.”
엘리스는 그 작은 나뭇가지를 꺼내더니, 놀랍게도 세계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녀는 세계수의 정수를 관리하고, 장로는 그 외형을 지켜가죠.”
헐, 미쳤다.
“우아아악!”
세계수에서 초록색 빛이 뿌려졌다.
너무도 환해서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더니, 뜬금없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벚꽃 비슷한 꽃이, 바람이 불자 일대를 덮을 정도로 몰아쳤다.
꽃비라고 해야 할까.
“아…… 예쁘다!”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환한 풍경이었다.
잠깐이나마 동심으로 돌아가는 기분까지 들 정도로 심장까지 떨려댔다.
빛이 뿌려대는 녹색의 싱그러운 봄날.
거기에 떨어지는 흩날리는 벚꽃들.
잠시 저거 청소는 누가 하나, 하는 현실적인 생각은 했지만, 그걸 읽은 듯 엘리스가 웃었다.
“풋, 진짜 꽃잎은 아니고요. 일종의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보면 돼요. 일정 범위 이상 날아가면 증발하죠.”
“그런 거야?”
“거기까지가 결계라 보시면 돼요. 쉽게 이해?”
“몰라. 기준이 다르니.”
“와! 현세 규격 외의 존재가 그렇게 말하니 더 당황스러운데요?”
“나라고 모든 걸 아는 게 아니잖아!”
엘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유현성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흠흠,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엘리스가 세계수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샤아아--
“흡! 미친…….”
순간, 현아보다도 어려 보이던 엘리스가 갑자기 불쑥 자랐다.
불과 십여 분 사이 성숙한 미모의 엘프가 나타난 것이다.
손을 잡은 상태에서 엘리스가 바로 성장하니까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신 같은 느낌도 살짝 들었지만, 이건 비밀로.
“이게 오빠한테만 말하는 비밀이에요. 세계수는 우리들을 성장시키고…… 흠흠, 이제야 임신이 가능해요.”
“그, 그런 의미였나?”
도태된 일족이니, 오염된 일족이니 했던 것이……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느낌은 오더라.
“오빠 덕에 이쪽으로 넘어왔지만 그동안 엘프 중 아이를 가졌다는 이가 없는 게 그래서죠. 세계수가 우리에게 생명이니까요.”
단순히 인간과 혼인해서 종족 차이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이게 세계수의 비밀이었다니.
엘리스와 엘프 전사들이 목숨 걸고 게이트를 탐사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건 정말 일족의 미래가 없다는 말과 같았다.
특히나 수명은 길지만 크흠, 버, 번식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분이 좀 있어서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겠지.
“오빠.”
“어? 어?”
“이젠 좀 봐줄 만하지 않아요?”
“이 꼬맹이가 무슨.”
꿀밤을 때리려고 했는데 이전에는 명치까지 오던 키였다면 지금은 거의 목까지 올 정도로 훌쩍 컸다.
쉽게 장난치기 애매해서 정말 진지하게 물었다.
“이번 일로 빚 하나 정리했다고 보고. 진짜 나랑 살고 싶냐? 하루 종일 음식하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오빠는 핵이잖아요?”
“그건 뭔 소리야?”
“핵폭탄 있으면 거긴 전쟁이 없다고 하잖아요.”
잠시 멍하게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 핵폭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