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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53화 (53/156)

53화

“예? 신메뉴를 만든다고요?”

임수원은 기겁을 했다.

뭔가 하나씩 만들 때마다 거의 인체 실험 수준으로 개고생을 한 경험 때문이었다.

차라리 임혜리의 반응이 귀여울 정도.

“쉬운 걸로 가요. 제발 쉬운 걸로.”

“안 그래도 그렇게 가려고.”

“메, 메뉴는 뭔데요? 느끼한 것만 아니면 돼요.”

“행복 분식 특제 냉라면.”

임수원과 임혜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설마 차가운 냉육수 통에 빠져서 질식사할 때까지 얼음물 마시는 생각 하는 건가?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맛만 보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너네 냉라면 먹어본 적 있어?”

“그야, 있기는 하죠. 몇 번 만들어 먹어 봤어요.”

헐, 들어 보니 상상을 초월한 레시피였다.

편의점 온수기 물로 라면을 불려서 정수기 차가운 물로 식힌 다음 스프 조금과 간장만 넣어서 비벼 먹는단다.

대체 그게 무슨 맛일까?

“그냥 간장 냉라면?”

“말은 맞는데, 맛이 있냐고.”

“그럭저럭 먹을 만하긴 하더라고요. 편의점 맞은편에 유명한 간장 비빔냉면집이 있어서 호기심에 만들어 본 거거든요.”

“그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간장 비빔냉면은 면 자체의 맛을 강조하기 위한 부분이 컸다. 일반적인 비빔냉면의 경우 고추장 계열의 양념이 강해서 메밀 향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어서다.

농담 삼아 계란 간장 비빔밥과 일본식 소바의 절충으로 그 메뉴가 만들어졌다고는 하는데…….

뭐, 진짜 이유는 나도 모르지.

어쨌든 유명 가게 사장들이 말하는 포인트는 메밀 향과 은은한 간장, 소량의 신맛이 느껴지는 달달한 매실청, 고소한 참기름의 조화였다.

근데 다 빼고 간장과 라면 스프라니.

아무래도 냉라면에 한해서는 얘네들에게 조언을 받는 건 무리 같았다.

그래도…… 그 고생을 했으니 대충이나마 제대로 된 맛을 느끼게는 해줘야겠지?

“내가 금방 만들어 줄게.”

먼저 작은 냄비를 꺼내 찬물을 붓고 얼음 한 주먹을 집어넣은 다음 냉동실에 넣었다.

다시 큰 냄비를 꺼내 물을 채워 화구에 올렸다.

화르르륵.

업소용 급이라 그런지 물이 순식간에 끓어오르더라.

면은 양념이 잘 배이라고 얇은 소면을 꺼냈다.

끓는 물에 넣은 다음 적당히 삶기자 바로 건졌고 찬물에 박박 씻어 채반에 담았다.

그다음은 양념장.

빈 그릇에 적당한 비율로 간장, 설탕, 매실청에 소량의 식초와 물을 추가, 잘 섞으면 끝이었다.

“으음~ 적당하군.”

마지막 과정은 냉동실에 넣은 냄비를 꺼내 국수를 잠시 담갔다 물을 꼭 짜면 된다.

임수원이 감탄한 듯 물었다.

“우와, 형. 진짜 뚝딱뚝딱이네요.”

“집에서 간단히 후루룩 먹는 거니까 조리법이 복잡하면 안 되지. 물론 팔기 위해 공들여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그릇에 면을 담고, 양념장을 조금 넉넉히 넣었다.

어차피 이건 메밀향으로 먹는 것도 아니고 간장도 덜 짜게 만들었으니까.

갑자기 놓친 게 떠올랐다.

바로 선반에서 마른 김 반 장을 꺼내 접어서 가위로 가늘게 잘라 면 위에 적당히 뿌렸다.

“자, 마지막은 참기름.”

한 바퀴 반 정도 돌리자 그릇에서 고소한 향이 훅 피어올랐다.

“이제 살살살 비벼서 먹으면 돼.”

“우와…… 오빠. 향 죽인다.”

“그러게. 우리가 먹던 거랑 너무 다른데?”

후루룩. 후루루룹.

한입에 크게 밀어 넣으니 딱 네 젓가락 만에 그릇이 비더라.

결국 내 그릇에 있는 절반을 덜어서 나눠줬다.

그 직후, 나도 맛을 봤다.

처음에는 고소한 향이 그다음 간간한 짠맛과 단맛이 올라왔다.

김 고명도 약간이지만 제몫을 했고.

실제 마트에서 파는 제품보다는 나았다.

가장 중요한 간장과 참기름, 매실청이 일반 제품들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어쨌든 한 번씩 별미 정도로 만들어 먹을 만 한 수준.

“맛이 어때?”

“상상 이상으로 맛있어요! 이게 진짜 간장 비빔면이었구나 할 정도로요.”

“그치? 누나가 해줬던 맛에 비하면 이건 천상계야.”

“그럼 내가 해줬던 건 지하철 수준이야?”

“아니, 지옥계 정도.”

“이게 죽을라고!”

둘이 틱탁틱탁 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자식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맛을 보고 밸런스를 잡으려면 최소한 기본적인 경험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두 녀석에게는 전무…… 에 가까웠다.

그래, 적어도 한 입보다는 세 입이 낫겠지.

“됐고, 당분간 가게 마치면 영업 전후로 먹으러 다니자.”

두 녀석의 얼굴에 사색이 깃들었다.

* * *

“대충 어느 정도는 돌아본 것 같은데.”

딱 일주일.

아점 시간이나 영업 이후, 정호석과 이호영에게 가게를 맡기고 하루 한두 번씩 맛집을 돌아다녔다. 부전동, 전포동 일대의 유명한 밀면집과 냉라멘으로 알려진 곳을 들러 분석한 것이다.

“오빠아아~ 진짜, 이제 안 다녀도 되는 거죠?”

“형…… 이제 밀가루만 봐도 신물이 올라와요. 제발 살려주세요…….”

“크흑, 주말에만 일곱 곳이라니…….”

“형은 정말 면발의 악마가 분명해요…….”

살짝, 내가 너무 괴롭혔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 손강희 추천 맛집 투어였는데.

크흠, 어찌하랴.

슈트 노예의 인생은 그런 것을.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자료도 모았고, 너네 경험치도 올렸으니 더 안 다녀도 될 것 같아.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나올 때까지는 쉬어.”

“가닥이…… 나올 때까지요?”

오우…… 임수원, 많이 똑똑해졌다.

내 말속에 숨은 뜻을 제대로 캐치했군.

“그래, 어느 정도 메뉴 방향이 정해지면 당연히…….”

“다, 당연히?”

임수원과 임혜리는 내 눈치를 보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분명 앞으로의 과정을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두 녀석을 보며 사악하게 웃어줬다.

“냉라면 지옥이 시작되는 거지.”

* * *

“하아…… 쉽지 않네.”

밀면과 냉라멘의 조합.

처음에는 기발한 아이디어라 생각했는데 이게 예상보다 큰 벽이었다.

일단 실제로 하는 가게가 없었다.

차가운 국물 면 요리라는 걸 제외하면 아예 노선이 다른 맛이라고나 할까?

“일단, 가이드 라인을 정하자.”

먼저, 조리법이 복잡하면 안 된다.

지금도 점심에는 손님이 넘쳐났다.

수시로 조정을 하면서 정한 시간은 오픈 10시 50분, 클로즈 3시.

물론 재료가 떨어지면 솔드 아웃이었다.

문제는 애매한 평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약간씩 남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봄장마 때는 좀 어중간했지.”

비가 오다 말다 했던 것도 있지만, 돌풍이 몰아치는 날은 거의 재료가 20% 정도 남았다.

여기에 정호석의 의견도 있고 해서 최종 주문을 2시 30분까지로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 3시를 넘겨서 일이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최근에 다시 계산해 보니 거의 하루 300명 선의 손님을 받고 있더라.

거의 한 시간에 70명 전후.

장어묵 덮밥이 하루 100 그릇 한정이라는 걸 감안하면 거의 라면만 200그릇 가까이 팔린다.

그만큼 이쪽 주방 라인이 복잡하다는 의미였다.

즉, 직원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다음은 우리 가게만의 음식이지.”

안 그래도 이예지가 그러더라.

행복 분식을 카피하려던 가게들이 몇 개 보였다고.

다행히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다.

퀄리티가 현저히 떨어졌고 특히 라면의 경우 5,000원이란 가격으로 마진을 남길 수가 없어 포기했다더라.

거기에 일전에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장어묵 덮밥에 관한 것.

“대회에서 우승한 요리를 여러 가게에서 너도나도 만든다면 희소성이 떨어지죠. 물론 다들 개인 사업자이기에 강제로 제한할 순 없지만, 가능하면 피해달라고 요청하긴 해요.”

“그래도 하겠다면요?”

“말리진 않아요. 오히려 그걸 바탕으로 더 나은 요리를 만들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묘하게도 웃는데, 바로 느낌이 왔다.

조합에선 우승 요리에 한해 1년을 메뉴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비슷한 인근에 직영점을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붙이고 말이다.

그럼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거겠지.

즉, 최소 1년은 비슷한 요리로 경쟁할 일이 없게 해주겠다는…… 일종의 보장이란 뜻.

하지만 그걸 100% 믿을 수는 없었다.

“확실히 우리 가게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어야 해.”

고민하는 이유가 그래서였다.

부산은 더운 남부 도시기에, 특히나 차가운 면 요릿집이 상당했다.

일단 유명 밀면 전문점만 백여 곳이 넘었다. 중국집 냉면이야 당연했고, 돈가스, 돼지국밥, 비빔밥, 심지어 닭갈비집에서도 밀면을 팔았으며, 여름이면 동네 분식집에도 차가운 면 요리가 나올 정도다.

그만큼 맛과 형식이 다양할 만큼 친숙한 음식이라는 거다.

“확실히 친숙하면서 새로운 냉라면을 만든다는 게 참 쉽지가 않네. 무엇보다…….”

손강희가 그러더라.

알려준 유명 맛집 말고, 혹시 근처에 있는 가게들을 다녀봤냐고.

거기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일단 라멘집들이야 가격이 워낙 비싸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밀면집들이란 말인데?

* * *

“하, 여기서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네.”

행복 분식 10분 거리 안쪽에 밀면집이 두 개나 있었다.

특히 제일 가까운 쪽의 밀면집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여름이면 20여 분씩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하더라.

일명 육전 밀면.

면과 육수는 부산 식에, 진주 냉면 식의 고명을 올린 방식이었다.

당연히 초창기에는 생소했지만 그 익숙한 맛에 다들 쉽게 적응을 했고, 고명의 푸짐함에 반하게 됐단다.

내가 이 가게를 몰랐던 건 당연했다.

하절기, 5월부터 9월 말까지만 장사를 한단다.

나머지 기간은 쉬고 장사 시작 전 두어 달 동안은 육수만 만든다는 거다!

내가 전역하고 한창 이래저래 바쁠 때 영업을 쉬었으니 알 리가 있나.

무엇보다…… 직접 보니 더 황당했다.

“이, 이게…… 입구라고?”

분명 2차선 도로변이긴 한데, 골목의 너비는 고작 성인 남성이 한 팔을 들었을 때 정도의 좁은 간격이었다. 그 안쪽으로 쭈욱 들어가 막다른 곳에 이르러야 가게가 있는 것이다.

그냥 길 가다 이 집을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

“이러니 동네 사람들도 모르지. 그런데 어떻게 여름 장사가 잘된단 말이야?”

폰으로 이래저래 더 검색해 봤다.

“아, 영업 시기에 옆 주차장에 현수막을 크게 거는구나. 확실히 이쪽에선 몰라도 저쪽에선 보이겠네.”

더 살펴보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금 서 있는 골목 입구 머리 위에 천으로 된 간판을 건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쉴 때는 간판도 안 건다는 거구만. 와, 진짜.”

호기심에 검색을 이어나갔다.

오픈 기념으로 밀면을 3,000원에 팔았단다. 그러자 손님이 터져 나갔고, 일정 기간 이후에 정상가로 올렸다는데.

가격은 6,000원.

당연히 맛의 퀄리티가 높으니 손님들이 자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년 장사하다 가격을 올렸고, 작년까지는 6500원이라고 나오더라.

“그럼 난 그 이하로 내놔야 한다는 거잖아?”

이 가게의 특성이 바로 박리다매.

막대한 충성 고객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게다가 밀면만큼이나 왕만두도 잘 나갔고, 그게 저녁 장사까지 이어져 갈비탕도 엄청 판다고 하더라.

밀면에서 부족한 수익을 제대로 뽑아 버린다나.

“확실히 우리도 김밥은 거의 안 남지만 손님들 만족도 때문에 계속 팔고 있는 거니까.”

라면 손님이 꾸준히 찾아주는 이유도 거기에 일부 있었다.

라면+김밥 조합이 가지는 힘 때문.

실제로 가장 남는 건 역시 장어묵 덮밥이었다.

폭식 자매들의 권유로 1,000원 올린 것이 오히려 신의 한 수가 됐다고나 할까.

한 그릇 팔면 대충 라면 두 그릇보다 더 남았다.

“돌겠네.”

근데 진짜 돌아 버릴 일이 또 있었다.

상권이 참 애매하게 겹치는 곳에 가게 하나가 더 있었다.

무려 30년 전통.

심지어 사장이 건물주란다.

거기에 황당한 건, 밀면이 고작 5,500원이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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