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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54화 (54/156)

54화

누가 그랬던가?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라고.

밀면 5,500원이란 가격이 가능한 이유가 저거였다.

심지어 저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올린 가격이란다.

그렇다면 적어도 4~5년은 유지가 되겠지.

“하, 심지어 이름조차 4대 밀면 라인이라니.”

한때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밀면 가게들을 모아 4대 밀면이라며 방송을 타 버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짜처럼 퍼지면서 정착이 된 것이다.

그게 벌써 20년도 전의 일.

그 이름 중 하나가 거기 붙어 있었다.

특히나 무서운 점은.

“30년 동안 저 자리라는 건, 그만큼 내공이 있다는 거겠지. 어쩌면 40년이 훌쩍 넘었을지도 모르겠네…….”

30년 전통 원조 밀면!

이 간판 색도 한참이나 바래 있었다. 바꾸나 안 바꾸나 의미가 없으니 그냥 놔둔 거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자신감의 증명사진’ 같은 거겠지.

멀리서 슬쩍 보니 손님은 다섯 테이블이었다.

오후 5시라는 시간. 아직 5월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제법 장사가 잘되는 가게일 거다.

“다만 고객층 연령이 높다, 라는 건데. 그런 부분에선 조금 안심이 되네.”

어쨌든 결이 다른 음식을 낸다고 해도 손님들이 비슷하게 느낀다면 같은 음식이다.

밀면이라 생각하면 밀면이고, 라면이라 생각하면 라면이 되는 거니까.

잠시 생각해 보니 손강희의 걱정이 이해가 됐다.

이번 냉라면의 콘셉트를 밀면에 가까운 거라고 말했더니, 나름 신경 써서 알려준 게 틀림없었다.

솔직히, 좀 고맙네.

“그래, 욕심내지 말자. 어떻게든 5,000원에 맞추면 되잖아.”

* * *

“으아아아악!!!”

머리를 쥐어뜯어도 안 나오는 건 안 나왔다.

이래저래 궁리를 하면서 만들어 보는데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올랐다.

일단 제일 저렴한 버전 1.

마트에서 매운 비빔면을 산다.

면을 삶아 차게 식히고 액상 소스와 비벼서 그릇에 담은 다음, 우리 가게 살얼음 육수를 붓는 방식.

“확실히 기본적인 맛은 나. 아니, 의외로 괜찮은 조합이지.”

여기에 고명을 올려 잔뜩 올려 장식을 하면?

집에서 해 먹는다 치면 의외로 고퀄리티의 냉면이 맞았다.

물비빔 같은 느낌에 가성비가 좋으니 충분히 먹을 만한 게 된다.

“문제는 외식이라는 거지. 오천 원이면 한 번 정도는 사 먹기는 하겠지만, 과연 밖에까지 나와서 그 가격을 주고 두 번이나 먹을까?”

나 역시 고개가 저절로 저어지더라.

따지면 익숙한 맛이었다. 시원한 살얼음 육수가 맛을 가려준다고 해도 몇십 년 먹어왔던 그 매운 소스의 기억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걸 비싼 돈 주고 먹는 기에는 뭔가 꺼려진다고나 할까.

“이건 패스.”

다음, 버전 2.

비빔면을 삶아 면을 차게 식힌다.

그릇에 담아 냉육수를 부은 뒤, 하루 숙성시킨 양념장에 액상 스프를 일부 넣은 걸 올린다.

“4분의 1 정도만 섞었으니 모르겠지?”

살살 풀어서 먹어 보니 아까보다는 훨씬 낫더라.

여기에 식초와 소량의 겨자를 추가하니까, 대충 시장표 5,000원짜리 밀면과 거의 비슷한 맛이 났다.

다만 그것뿐.

특색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저렴한 이미지만 강해질 뿐이었다.

동시에 매출 하락이 눈앞에 보이더라.

“적어도 행복 분식에선 이런 퀄리티는 내면 안 돼.”

다시 새로운 버전 3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육수에 양념장을 풀어 버렸다.

당연히 면도 액상 스프 절반 정도에 비빈 상태였다.

그렇게 섞어 먹었는데…….

“웁. 이건 절대 안 돼.”

일단 짰다. 그리고 화끈하게 매웠다.

사실 어느 정도의 매운맛으로 묘한 애매함을 잡으려고 했는데, 아예 매운맛이 육수의 감칠맛과 여러 요소들을 다 덮어 버렸다.

그냥 맵기만 한 비빔국물면이 된 거다.

이후, 미묘한 조절로 행복 분식 특제 냉라면 버전 12까지 테스트해 봤지만.

전부 꽝이었다.

“흐아아…… 미치겠네.”

내가 절망하는 이유는 있었다.

일단 육수가 아주 잘 빠졌다.

사실 장사하면서 중간중간 육수에 여러 변화를 줘봤다.

멸치 양을 조절하고, 다시마를 뺐다가 넣었다가 해보고, 여러 채소들도 몇 개만 넣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임수원을 혹사(?)시킨 끝내 나온 것이 지금의 해물 육수였다. 멸치와 해물 향이 은은하며 라면 특유의 마지막 기름 맛을 줄이는 쪽으로 약간 바뀐 것이다.

이걸 얼렸더니 제법 그럴듯한 육수가 나오더라.

여기에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같이 대회에 나갔고, 음식을 나눠 먹었던 해물 짬뽕 만두국 사장님의 도움이 있었다.

진짜 세상일은 모른다더니.

여하튼 그렇게 완성된 육수에 맛간장을 더해 얼린 게 이번 냉라면에 쓰일 육수였다.

이걸로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 냉라면을 만들었더니 확실히 고급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딱, 3,500원짜리였다.

그다음은 양념장.

라면 스프에 고춧가루를 넣고, 여기에 무와 양파를 갈아 넣은 뒤, 비싼 배 대신 안정적인 맛을 내는 배 음료와 사이다를 섞어 농도를 맞췄다.

간은 심심하지만 많이 맵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먹어봤는데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지간한 시판 매운 양념장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이었고, 치수 식품에서도 괜찮다고 하더라.

단점은 스프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는 것.

장점은 생각 이상으로 감칠맛이 생겼다는 거다.

하긴, 종합 조미료 다시다 효과를 내는 라면 스프가 왕창 들어갔으니 맛이 없을 수는 없겠지.

물론 이번에 만든 건 그 비율을 조절한 것이긴 했다.

어쨌든 육수와 양념장…… 심지어 고명까지 완성이 됐는데, 이 조합을 짜는 게 환장할 것 같았다.

어떤 건 면에 빨리 스며들고, 어떤 건 아예 겉돌아서 밍숭맹숭하고, 어떤 건 사람 잡는 불 맛이 나왔다.

“그냥 집에서 해 먹는다 치면 충분히 맛있지…… 판다고 쳐도 나쁘지 않아. 근데 그 수준을 넘어야 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더라.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혼자 고민할 일이 아니야.”

* * *

“어머, 오랜만이네. 좀 자주 놀러오지 그랬어.”

“예. 그래야 하는데 일이 좀 바빠서요.”

“아, 강희한테 들었어. 현성이가 올해 대회 우승했다면서? 그것 때문에 자기도 나가겠다고 벼르고 있더라고. 호호호.”

사모님이 환하게 웃는데 살짝 섬뜩해졌다. 예전에는 저 미소 뒤에서 쇠국자가 날아왔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님이 안 보인다는 거.

“허어흠. 자네 왔나?”

진짜 말하기, 아니, 안심하기 무섭게 아버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유현성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예. 자주 못 들러서 죄송합니다.”

“난, 그닥일세.”

“예?”

“하여간 몰라. 어쨌든 식사 안 했으면 같이 반주나…… 됐네.”

그러면서 스윽 지나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이상하게 몸이 떨렸다. 아마 어릴 적 도마로 맞았던 기억이 불쑥 떠올라서인가.

어쨌든, 이미 사모님이 차려주신 목살 김치찌개 한 냄비를 비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또 먹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이고, 우리 남편이 저래도 자네 같은 사람을 좋아해.”

“예? 저, 저를요.”

“남편도 힘들게 자수성가해서 이만큼 이뤘잖아. 일 열심히 하는 남자 싫어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

“아, 예. 예.”

무슨 따님 주십시오, 인사하는 자리도 아닌데 괜히 이 분위기가 숨 막혔다.

강희 녀석, 왜 하필 가게로 오라고 해서.

물론 이해는 됐다.

점심 장사가 끝날 시간인데도 여긴 손님이 바글바글했으니까.

“거 크흠. 그래. 자네 장사는 잘되나?”

주방으로 들어가신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구만.

아버님이 다시 나오더니 묘한 시선으로 내려봤다. 뭔가 딱, 재촉하는 눈빛인데.

“예. 먹고살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자고로 남자라면 꿈을 크게 가져야지. 먹고살 정도가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고…….”

제가 부양하고 있습니다만?

“집도 큰 걸로 사고…….”

저 집 두 채에 가게도 하나 있는데요.

“차도 고급스러운 걸로 하나…….”

전기자전거 돌돌이지만, 걔가 수억짜리입니다.

“자식도 넉넉…… 아얏!”

“아우, 진짜 아빠는……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역시나 손강희였다.

한때 내가 너의 라면 천사였지만, 지금은 니가 나의 구세주다.

순식간에 갑갑한 분위기가 발랄해졌으니 말이다.

“빨리 주방 들어가요. 저녁 장사 준비해야죠.”

“그, 그래. 알았다. 험험. 자네도 잘 만나야…….”

“하여간 좀!”

결국 손강희의 손에 이끌려 아버님은 그렇게 주방의 이슬로 사라졌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

“늦게 와도 돼.”

“그럼 진짜 외박한다!”

“호호호, 언제는 엄마 말 잘 들은 줄 알겠다. 됐고, 어여 나가!”

이번에는 손강희의 패배였다.

역시 딸바보 아빠는 딸에게 못 이기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진리다.

그렇게 가게를 나오자마자 손강희가 툭 하고 물었다.

“오빠, 힘들었지?”

“아, 아니. 별로.”

“요즘 극성이셔. 내가 나이가 몇인데 벌써 남자 데려오라고 성화야.”

“뭐?”

얘가 이제 21살 아니었나?

그런데 벌써 결혼하라고?

“어디서 이상한 이야기 듣고 와서 그래. 에휴~ 의사 샘도 이제 나 건강하다고 했는데…….”

들어 보니 그 나이대 어르신들이 혹할 만한 이야기이긴 했다.

지인 딸 중에 유독 병약한 여성분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고를 치고 말았다. 스무 살에 덜컥 임신해 버린 것이다.

상대는 휴가 나온 남친이었단다.

어쨌든 제대하고 바로 식을 올렸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를 낳자마자 건강해졌다는 거다.

“몇 년 전인데 지금은 애 낳고 잘 살아.”

“그, 그럼 다행이네.”

“애가 넷이라는 게 문제지.”

“애, 애국자네.”

“근데 또 임신했대.”

“쿨럭.”

더 이상 맞장구 쳐줬다가는 머리가 살짝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강희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미리 통화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뚝딱, 뚝딱.

제일 완성도 높은 버전의 냉라면을 준비했다.

커다란 그릇에 삶아서 씻은 면이 올라갔고, 그 위에 양념장과 각종 고명이 놓인 뒤 가져온 살얼음 육수를 부었다.

의외로 조리 과정은 간편했고, 특히나 힘준 고명은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일단 비주얼은 합격!”

손강희는 먼저 사진을 찍더니 고명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그런 뒤, 제일 먼저 육수 맛을 보더라.

“크흐…… 해장된다. 이거 진짜 시원하고 깔끔해.”

“다행이네.”

“어지간한 밀면집 수준은 확실히 넘어.”

당연하지.

내가 저것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일단 사골 계열은 아니고, 닭이나 양지로만 뺀 육수도 아니네?”

“우리 가게에서 그걸 우리는 게 가능하겠니?”

“아! 맞다. 가만.”

손강희는 숟가락으로 육수를 떠서 섬세하게 맛봤다.

“차가워서 못 느꼈는데 해물 계열이구나. 여기에 간장으로 색과 맛을 냈지?”

“80%는 맞췄다고 하자.”

“나머지는?”

“비밀.”

손강희는 살짝 삐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본격적으로 맛을 보기 시작했다.

양념장을 풀어서 다시 육수 한 모금, 그 직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번에는 면발을 후루룹 하더니 또 육수를 마셨다.

확실히 이번 선택은 옳은 것 같았다.

손강희 하면 면, 면 하면 손강희 아니겠는가.

고민 끝에 연락을 했더니 아주 좋아 죽는 목소리로 당장 오라고 하더라.

엘리스가 ‘매사’ 몽땅 직진이라면, 손강희는 ‘면’에 직진이었다.

“맛은 합격! 이 정도면 냉라면으로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

“정말?”

“어. 오빠는 대체 뭐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고민하다 여기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조용히 이야기했다.

육수를 내고, 양념장을 만들고, 분식집 특성상 조리의 간편함 때문에 비빔면을 쓰고…….

근데, 중간에 손강희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툭 묻더라.

“오빠는 냉라면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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