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냉라면이라.
단순히 풀어서 이야기하면 차가운 라면이다.
아니, 딱히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라면으로 만드는 차가운 요리 정도?”
“그 범위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조금 난감해하자 손강희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 기준으로 잡으면 비빔라면, 냉면, 밀면, 냉칼국수, 냉라멘, 중화 냉면 정도겠네? 근데, 그게 엄청 넓어요.”
“대부분 라면이 아니잖아?”
“왜요?”
“그야 면이…….”
막상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라면 제품군으로 분류된 것 중에 저것들이 전부 있었다.
대형 마트에 가면 라면, 비빔면, 밀면, 냉면, 소바 등등 종류별로 회사별로 대부분 존재했던 것이다.
손강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냉라면에서 ‘라’ 자를 빼면 냉면이지. 그럼 쫄면은 냉라면이에요? 아니에요?”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손강희가 질문하는 의도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뭔가 가닥이 잡힌다고나 할까.
“오…….”
“스탑. 잠깐만 기다려 봐.”
손강희가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걸 일부러 잘랐다.
이건 내가 풀어가야 할 문제니, 답부터 알면 재미없지 않겠는가.
아까 생각하길, 차가운 라면 요리라고 했었다.
‘라’를 빼면 차가운 면 요리.
중간에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들면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대충 답이 나왔다.
“강희야. 크게 봤을 때 차가운 면 요리 안에 냉라면이 들어간다,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정답!”
합격을 받았으니 여기서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내 고민과 손강희의 질문 사이의 접점이었다.
“그다음 단계로 가자. 진짜 묻고 싶었던 게 뭔데?”
“오빠는 왜 비빔면을 쓴 건데?”
“그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거든.”
행복 분식에서는 기본적으로 찐라면을 쓴다. 여기에 육수로 향을 더해 스프의 맛을 덮고, 계란에 파 토핑, 고기 대신 베이컨이 들어가는 것이다.
때문에 5,000원이란 가격은 합리적인 정도를 훨씬 넘어서 손님들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그게 다시 찾아오게 되는 비결인 것이다.
역시나 그런 방식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시판 제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고명과 육수는 미리 준비되어 있으니까.
고르고 고른 끝에 선택한 건, 최초의 비빔면.
국민 모두가 다 알며 대부분의 분식집에서 사용하고, 집에서도 쉽게 해 먹을 수 있으며, 일단 맛에서 거부감이 없다는 게 제일 중요해서다.
“아아…… 그런 부분도 있구나. 하긴, 난 음식 하는 거랑 식당 거들기만 했지, 그런 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거든. 오빠, 잠깐만.”
손강희는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주방으로 돌아왔다.
손에 들린 건 노트와 펜이었다.
슬쩍 펼치는 걸 보니, 식당 리뷰나 요리에 대한 것들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하긴, 얘도 요리 쪽으로 열정 폭발이었지.
“오빠, 다시 불러줘요.”
“그러니까…….”
행복 분식의 정체성.
주방의 동선과 조리의 편의성, 주문받고 나가기까지 과정들과 그걸 생각했을 때 어떤 제품을 선택하는가.
또, 기존의 육수를 응용한 이유 등에 대해 내가 이해하는 정도 수준에서 풀어서 이야기해 줬다.
“그래서 고명으로 이걸 쓴 거구나.”
“냉면이나 밀면집처럼 고기 육수를 안 만드니 어쩔 수 없어. 그렇다고 따로 수육을 삶아서 올릴 수도 없잖아.”
사실 차가운 국물은 돼지고기와 잘 맞지 않았다.
실제로 어떤 라멘집은 냉라멘을 내면서, 위의 차슈는 오래 놔두면 굳으니 덜어 놓고 먹으라고까지 하더라.
즉, 아무리 잘 삶고 구워도 차가운 육수와 만나면 맛과 질감이 박살 나게 마련이라는 것.
대부분의 냉라멘에 돼지고기가 잘 들어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뭔가가 떠올랐다.
난, 지금 ‘복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아차 했던 사고들과 여기서 이랬으면 더 나았을 텐데 등, 실수했던 경험들을 떠올린 것이다.
이건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이 아는 걸 가르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런 것 같았다.
일정 수준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과거의 실패들이 보인다고나 할까.
“오빠, 아직 시간 있으니까 우리 이 앞에 카페나 가서…….”
“강희야. 미안! 나 갑자기 뭔가 떠올라서.”
“응? 뭐가?”
“나 가게 가봐야 될 것 같아.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괜찮지?”
“어, 어, 괜찮아.”
“그럼 오빠 간다!”
유현성은 그렇게 후다닥 짐을 싸더니 배웅도 받지 않고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손강희는 두통을 느꼈다.
“아휴…… 저 바보.”
* * *
큰 스테인리스 그릇.
잘 삶긴 면이 흐트러지게 놓이고, 양념장이 올라갔다.
그 위로 무채와 특제 고명, 계란 반 개가 덮였다.
채 썬 적양배추가 면 우측에 소담하게 담기고, 반대편에 깻가루가 뿌려졌다.
마지막으로 냉육수가 부어지면 끝.
“완성이다.”
거의 한 달 가까이 고민하고 씨름하고 삽질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자! 네가 첫 번째야.”
“정말 처음이라고?”
“약속했잖아.”
그날 이후, 유현성은 손강희에게 몇 번 전화를 했다.
근데 통화할 때마다 뭔가 대화가 딱딱 끊어지는 데서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 실수한 게 있나?’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해 현지를 소환했다.
“빙시가!”
“뭐가?”
“에휴…… 말을 말지.”
“아니, 설명 좀 해줘 봐.”
“됐다!”
역시나 비협조적인 현지에게 특효약은 이거겠지.
“하아…… 필요한 게 뭐 있는데?”
“없다.”
“말 안 하면 진짜 없다? 여기서 일하는 것도 취소? 졸업하면 니 갈 길 알아서…….”
“나, 차 사도.”
“엉? 뭐, 녹차, 홍차, 보이차?”
“장난하나! 그리고 어이, 장남 씨. 장사한다고 요즘 집에도 잘 안 들르고 그러니 모르재. 우리 집에 차가 있나? 딸랑 여자 셋인데, 짐은 누가 나르고 일 있으면 누가 힘쓰는데?”
“어, 그…… 그게…….”
“시장 보면, 마트 갔다 오면, 그거 누가 다 들고 나르는 줄 아나?”
“한 번씩 내가…….”
“돌돌이고 똘똘이고 나발이고 간에, 경차라도 하나 뽑아내라. 중고라도 좋고, 삐까뻔쩍 필요 없고 굴러다니기만 하면 된다.”
“정말 그거면 되지?”
“약속해라.”
“아, 알았어.”
현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폰을 꺼냈다. 그 직후 뭐라 뭐라 하더니 바로 끊었다.
“거 뭐냐. 냉라면 완성되면 처음 먹게 해준다 해라.”
“뭐,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약속!”
“약속.”
결국 그런 과정을 통해, 손강희가 첫 시식자가 되었다.
안 그래도 한 번 부르기는 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지.
“오빠, 이거 예쁘다. 나 사진 찍어도 돼요?”
“당연하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강희가 카메라를 꺼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아주 꼼꼼하게도 찍어대더라.
잘 퍼지지 않는 면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윽고 첫 평가가 나왔다.
“외형은 얼핏 보면 일본식 냉라멘과 비슷하네.”
보리차 색의 육수, 그 위를 떠다니는 채 썬 적양배추와 참깨.
삶은 계란만 제외하면 농담 삼아 유명 가게의 냉라멘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손강희는 일단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 이거…….”
“전의 육수를 조금 더 손 본 거야. 어때?”
“이거 밀면 육수인데? 냉라멘처럼 약간 새콤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백하고 시원하고 깔끔해요.”
“잘 나왔지?”
손강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아보니, 부산에서 처음 냉라멘을 내놓은 가게가 있었다.
곰라멘이라고 있는데 여기서 내놓은 냉라멘이 의외의 호평을 받았고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가 됐다.
이후 여러 라멘 가게들이 냉라멘을 내놨는데, 이 가게랑 전체 느낌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새콤달콤한 육수가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손강희가 놀란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약재도 써봤는데 안 맞더라고, 딱 이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서 이쪽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이스. 의외로 여자들 중에 한약 냄새 나는 밀면집을 꺼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휴우~ 다행이네. 일단 양념장도 풀어서 마셔봐.”
손강희는 시키는 대로 양념장을 살살 풀어서 다시 육수를 마셨다.
“깔끔하고 살짝 매콤하네요. 진짜 유명한 밀면집의 딱 그 맛이에요. 오히려 감칠맛이 더 있는데…… 흐으, 이건 진짜 나도 모르겠다.”
“후후훗. 양념장의 비밀은 바로 이거지.”
툭 하고 앞에 놓은 건 라면 스프였다.
순간 손강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라.
“고춧가루 풀 때, 라면 국물을 약간 섞었어. 물론 색을 깔끔하게 내는 효과도 있고 감칠맛이 더해지더라고.”
“헐, 말도 안 돼.”
“안 되기는, 따지면 이것도 조미료나 마찬가진데.”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던 손강희는 정신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유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식해 보라고.”
“알았어요.”
손강희는 비밀을 파헤치겠다는 듯 섬세하게 맛을 보기 시작했다.
무채와 함께 면 한 젓가락.
채 썬 적양배추를 감싸서, 또 한 젓가락.
중간중간 계란도 먹고 특제 고명도 한 입씩 물면서 씹고 뜯고 맛보고 하더라.
조금 놀란 건 다 먹기엔 좀 많은 양이었는데, 정말 남은 국물까지 깔끔하게 다 마시더니 설거지가 필요 없게 만들었다는 것.
“후…… 맛있다.”
“딱히 고칠 건 없고?”
“오빠는 날 속였어.”
“내가?”
“이 면…… 라면 아니죠?”
“아~ 쫄면이야. 라면군 제품으로 나오니까 라면이라 봐도 무방하지.”
처음에 비빔면 류의 제품들을 사다가 실험했을 때, 쫄면 제품은 없었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때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 했다. 그건 내 얄팍한 지식의 한계 밖이었던 거다.
어쨌든 손강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육수와 양념장, 그리고 고명과 어울리는 면을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쫄면류 제품들.
하나하나 사다가 실험을 해 봤는데 약간 미묘했지만 밀면의 면을 대체하기 충분했다. 심지어 어떤 건 면이 좀 더 굵어서 양념장과 더 어울릴 정도였던 것이다.
확인해 보니 오뚝이 원조 쫄면이었다.
그때 갑자기 중화면 이야기가 떠오르더라.
방송에서 유명 요리사가 짜장을 만들면서 언급했는데 집에서 수타로 뽑기 어려워서 면은 사서 쓴다고.
대기업에 납품하는 면 전문 회사라 품질은 아주 괜찮다고 했었다.
역시나 확인해 보니 원조 쫄면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인터넷으로 쫄면 사리를 팔고 있었다.
2㎏씩 파는데, 확인해 보니 10인분이었다.
즉, 1인분으로 계산하면 650원 전후.
여기에 육수를 좀 더 진하게 우려야 해서 500원 정도, 양념장은 400원 꼴이었다.
적양배추야 저렴한 편이고, 가격이 문제가 되면 그냥 양배추를 쓰면 된다. 한 그릇에 50원, 100원도 안 되는 금액인 것이다.
고명도 단골 할인 덕에 400원 선이고 계란 반 개 포함하면 한 그릇당 2,200원이 조금 넘는 셈.
이 정도면 5,000원이란 가격에도 맞았고, 충분한 수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는데?”
“아! 미안.”
설명을 해주려고 면에 대해 잠시 생각했는데, 그동안의 고생이 떠오르자 의식이 그대로 쭈욱 흘러 가버렸다.
아무래도 그 시간이 제법 길었나 보다.
“그러니까 쫄면을 어떻게 쓰게 된 거냐면…….”
“아. 그렇게 된 거네.”
“그래. 어차저차해서 이렇게 완성하게 된 거지.”
“으음…… 그런데요. 이제 뭐 할 거예요?”
“어? 저녁 영업 준비해야지.”
“지인~ 짜?”
손강희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들렸다. 그러자 뭔가 의아함이 들었다.
얘는 왜 존대말과 반말을 섞어서 하는 거지?
“아! 맞다. 안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 뭔데요.”
“일단 시간을 줄 테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아, 알았어요.”
손강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현성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의외로 진지한 표정으로 나온 말은 이거였다.
“그러니까 부탁이 있는데…….”
* * *
<행복 분식, 신메뉴>
행복한 여름나기, 행복한 냉라면.
-5월 20일부터 개시합니다.
-그 준비로 인해 16일부터 휴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근데 사장님. 왜 20일부터예요? 우리 준비 거의 다 끝났잖아요.”
임혜리가 궁금한 듯 묻자, 유현성의 시선이 슬쩍 돌아갔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아주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