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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56화 (56/156)

56화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만큼 마을은 너무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일단 복잡한 이야기는 제외하고.

안으로 안내하며 라이노스 장로가 말했다.

“일단 큰 부분에 대해선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아마도 공식적인 선포는 대략 두어 달 뒤가 될 겁니다.”

“뭐, 개국 선언, 이런 겁니까?”

“비슷합니다. 그때는 정식으로 방송국도 부르고 우투브나 SNS로도 홍보할 예정입니다.”

“허어…….”

“왜 그러십니까? 우리 아이들 중에는 꿈이 아이돌이 애들도 있는데.”

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법적으로는 다른 나라지만 외형적으로는 자치 도시 형식을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외부인이 많이 드나들면 곤란할 텐데요?”

“마을을 둘로 나눴습니다. 거주 구역과 관광 구역으로요.”

확실히 이전에도 그랬지.

남해 쪽의 섬 하나를 맡았을 때도, 결계 비슷한 걸로 외부인의 침입을 막았었다.

물론 거의 무인도에 가까운 섬이었지만, 어부들이나 해녀, 낚시꾼들이 종종 들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엘프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저 주변만을 빙빙 돌다가 돌아갈 뿐.

“아마 징표가 없는 이들을 제외하면 거주 구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아! 당연히 영도자께선…….”

“아! 안 한다고요! 자꾸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묻어가려 하는 모양인데, 세계수 건으로 없는 일로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제가 위대하신 분께 실수를 했군요.”

분명 라이노스 장로는 올곧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몇 년 안 본 사이 이렇게 능글능글해질 줄이야.

이것도 이쪽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습득한 능력인 건가.

“우린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내어준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저 상부상조죠.”

말하고 나니 씁쓸하다.

엘프들은 세계수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분명 용병 집단처럼 협조를 했다.

이들의 등장으로 부족한 상위 헌터 숫자가 상당수 해결됐으며, 추후로 등장한 종족들 덕에 군인 헌터들도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됐다.

군 출신 헌터들이 본격적으로 사회로 나온 것도 거의 그 시기였다.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각성자들이 생기긴 했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로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까불면 끌려가거나 뒈진다는 걸.

어쨌든 이들은 나름대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대한민국 법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하더랍니다. 결국 완전한 국가를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만, 그래도 다행히 공식 명칭은 정해주더군요.”

“명칭…… 이요?”

“예. 황령산 엘리오스 마을입니다.”

주소까지 읊어주는데, 부산시 진구 황령산로 산마을 00-XX란다.

“택배 보내실 수 있으면 이쪽 주소로…….”

현대 문물에 찌든 엘프라니.

무수히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박살 내는 만행을 저지른 느낌이군.

물론 이들은 정확히 엘프라는 종족은 아니었다.

편의상, 아니, 일반인들의 인상에는 그게 제일 적합하다 싶어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렇게 칭할 뿐이었다.

곧이어 라이노스 장로는 나름 거창한 도시 개발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자봉 인근을 거주 구역으로 그 위쪽 세계수 앞부터 황령산 공원까지 도로가 놓일 것이며, 여길 기점으로 등산로 겸 관광지를 만들겠다고.

카페를 비롯해 식당가도 정해진 구획대로 지을 예정이란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뭘요?”

“여성 엘프들이 서빙을 하고, 커피를 드립하고,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피워 중화 요리를 만들고…… 마치 꿈같은 그림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수많은 커플을 헤어지게 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분명 장사는 잘되겠지.

“글쎄요. 긍정적이라고 보긴 합니다만 사고 예방은 충분히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세계수 덕분에 전사들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수련 엘프들도 빠르게 전사급에 이르렀죠.”

살짝 놀랐지만 가급적 내색하지 않았다.

엘프들의 강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특히 전사급으로 분류가 되면 그 기초 수련 기간만 최소 백여 년.

거기에 하위, 중위, 상위, 고위 단계로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대충 하위 전사가 C+급부터 시작한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실로 무시무시한 전력인 거다.

다만 인구수가 부족하다는 게 문제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라이노스 장로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 왔습니다. 들어가시지요.”

* * *

별천지.

정말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외각의 덩굴처럼 꽉 막혔다 싶었는데 라이노스 장로가 다가가자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길이 열렸다. 막 그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별세계에 온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입체적인 녹색의 마을.

수풀이 정갈하게 자라 있었으며 정해진 구역마다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색과 노란색, 보라색이 조화를 이루었고 그 사이로 난 길 끝에는 덩굴로 된 흙집들이 보였다.

하지만 원시적이란 느낌보단, 마치 유럽의 목장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답네요.”

“예. 이게 저희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라이노스 장로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마을의 북쪽에는, 커다란 세계수가 있었다.

그때는 밤이라 잘 못 느꼈는데, 지금은 싱그러운 초록빛과 편안해지는 분홍빛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게 실로 신비롭기까지 하더라.

엘리오스 마을은 그 세계수를 중심으로 반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 빛 따위를 무시한다는 듯 모든 집들이 그 방향으로 향했다.

마치 신전을 중심으로 지어졌다는 듯.

잠시지만, 다크 엘프 마을이 떠올랐다.

그것도 세계수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된 마을이었었지.

“저쪽 너머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부는 담장을 낮게 해서 외부에 노출 시킬 겁니다. 단 일정 거리 이상은 접근을 못하게 해야죠.”

“혹시나 불손한…….”

“상위 전사들이 돌아가면서 경계를 설 겁니다. 당연히 더 앞쪽에는 수풀로 조경을 이루어 최소 20m 이상은 못 들어오게 해야겠죠.”

듣기로 부산에서 손꼽히는 강자인 갈매기 길드장이 A급이라고 했던가?

그보다 강한 상위 전사가 둘, 거기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결계라면 어지간한 길드 전체가 달려들어도 막을 수 있을 터.

여기에 세계수 버프까지 더해진다면 방어는 충분할 것 같았다.

“전사들의 숫자는 충분합니까?”

“허허, 궁금하시면 일족의…….”

“몰라도 됩니다. 제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천천히 세계수를 향해 나아가는데, 그 앞에 엘리스가 보였다.

이거 반칙이잖아…….

바로 그 생각이 들 정도로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화려한 금발에 순백으로 이루어진 드레스.

대충 여신이라 사기 쳐도 될 정도.

엘리스 주위로 흩날리던 꽃잎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무릎 꿇은 여자 엘프의 이마로 가져다 대자 순간, 빛이 뿜어지며 꽃잎이 이마로 스며들었다.

“생산의 의식입니다. 이제 그녀는 아이를 가지는 게 가능하게 됩니다.”

라이노스 장로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진 느낌이 들었다.

엘프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많았다. 얼핏 봐도 이백 가까이는 되어 보였는데, 이상한 건 여자 엘프들이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외부로 나갔던 이들이죠.”

“그렇…… 군요.”

“스스로 선택한 삶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나중에 알아보니 인간과 결혼한 엘프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졌단다.

그 때문에 기회가 있음에도 맺어짐을 포기한 이들도 제법 됐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뭐, 이들의 일은 이들의 일.

내가 관여할 건 아니지.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의식이 끝나가는 가운데, 또 한 명의 손님이 도착했다.

딱 얼굴을 보자마자 녀석은 똥 씹은 표정을 짓더라.

녀석이 먼저 물었다.

“은둔자가 어쩐 일이냐?”

“일단 초대를 받아서?”

“계속 짱박혀 있을 것이지.”

“나도 그렇고 싶다, 이 새끼야.”

파지직, 파직!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마력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옆에 있던 라이노스 장로는 불꽃이 튄다고 느꼈다.

한쪽은 대한민국 공식 최강의 헌터.

다른 한쪽은 그저 위대한 존재.

둘이 이 자리에서 맞붙는다면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진정하시지요.”

“앗, 죄송합니다. 장로님.”

헌터청 부청장 고요환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유현성은 그걸 보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이 씨…….”

“이게 너와 나의 입장 차이다. 그리고 이제 진짜 즉위식이니까, 남은 용건은 나중에 풀자고.”

고요환은 잠시 씩씩거렸지만 라이노스 장로의 안내에 애써 화를 억눌렀다.

유현성은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유들유들하고 여유를 부리지만, 타오를 땐 누구보다 화려한 불꽃을 피워내는 녀석.

그러다 식으면 아주 유쾌한 놈이 되지.

그게 저, 고요환이란 친구였다.

* * *

“저 엘리스 일런 엘리오스. 일족의 영도자가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기꺼이 소명을 받들겠습니다.”

엘리스가 두 손바닥을 내보인 뒤 오른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동시에 세계수가 공명했다.

우우우우웅--

마음이 편안해지는 진동에 이어 무수한 잎들을 흐트러졌다.

초록색과 분홍색의 기묘한 조화.

잎들은 저마다의 축복을 머금고 일족들의 이마에 떨어졌다.

잠시 후, 공명이 그치고 여왕의 즉위식이 끝났다.

정말 아름다움으로 시작해서 아름다움으로 마무리되는 행사였다.

그렇게 엘프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직후.

“오빠!”

엘리스가 막 뛰어와 안기려고 했다.

“어딜 감히.”

슬쩍 피하며 물러서려는데.

“어이쿠.”

라이노스 장로가 넘어지는 척 뒤를 막았다.

텁!

이런 데 당할 내가 아니지.

곧장 고요환의 손목을 잡아끌어 방패로 삼았다.

동시에 엘리스가 딱 멈춰 섰다. 당연하게도 삐친 표정으로 말이다.

“으, 으으으…….”

고요환은 부들부들 떨고, 엘리스는 고개를 휙 돌렸으며, 라이노스 장로는 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난 한 발 물러선 채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유치한 인간과 종족 같으니라고.

“험험.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시죠.”

라이노스 장로의 권유에 따라 엘리스의 집으로 향했다.

궁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화려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소박했다.

딱 내 집 크기의 2층인데 황당하게도 1층이 반지하였다. 근데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넓고 묘한 안정감이 들더라.

더 놀라운 건 환하다는 거였다.

“일종의 회의실 개념이라 보시면 됩니다.”

라이노스 장로가 지팡이를 들자 벽이 확장됐다. 심지어 공간이 나뉘어지더니 하나의 방이 형성된 것이다.

거기에 벽에 기대어놨던 나무판 비슷한 게 테이블로 바뀌었고, 의자까지 만들어졌다.

최신 기술 인테리어도 이 정도는 못 만들 것 같은데?

“장로로서 일족을 대표하여 감사 인사드립니다.”

라이노스 장로가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동시에 고요환도 같은 행동을 보였다. 그러면서 슬쩍 나한테 눈치를 주는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짧은 격식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서 왔습니다. 먼저 엘리스 여왕님의 즉위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흥, 그러거나 말거나.”

“흡. 예.”

고요환이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또다시 날 쳐다봤다.

넌 여기 왜 있느냐는 그런 의미였다.

“나야 불러서 왔지.”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아, 몰랐어? 나 여기…… 그러니까 비공식 ‘식당부 장관’이다.”

“뭐?”

중간에 잠깐 엘리스가 분식집에 들렀다.

언제부터 알바하면 되냐고 하기에, 제발 사양한다며 용건만 말하라 했다.

결국 즉위식 관련 일정만 알려줬는데, 그때 농담 삼아 오간 말이었다.

“장관, 몰라? 아…… 넌 차관급도 안 되니 당연히 모르겠네.”

헌터청 청장이 차관급이니 부청장은 당연히 그 아래.

물론 실제 파워는 그 이상이었지만 국가에서 정한 체계는 그랬다.

“장난칠 분위기 아니다.”

“농담할 분위기도 아니야.”

“너……!”

“잡담은 나중에 둘이서 하고. 자,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부터 들어보자고.”

일부러 녀석을 자극하려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엘리스의 뒤에 섰다.

고요환이 부들부들대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런 자리에 왜 고요환을 보낸 건지 모르겠다. 지능캐가 와야 할 자리에 전투캐가 왔으니까.

뭔가 알력이 있는 건가?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의외로 엘리스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 거리를 두긴 했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고요환은 그걸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뭐,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겠지.

잠시 심호흡을 하던 고요환은 어느 틈에 가방에서 책자 비슷한 걸 꺼냈다.

그걸 테이블에 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먼저 대한민국 정부 대표로서 공식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엘리오스 일족의 요구 조건 중에 하나인 자체 무력을 인정하겠습니다.”

“허허, 감사합니다.”

“아울러 국경 라인에 군부대가 아닌 경찰 병력이 상주할 것도 약속드립니다.”

“그 역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정부 입장에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아니, 돌려서 생각해 보면 그게 맞겠다.

군부대가 경계를 선다는 건, 진짜 국경이 된다는 거다. 말 그대로 엘리오스 마을을 하나의 국가, 아니, 왕국으로 인정한다는 거니까.

이어 고요환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단,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개입하지도 않겠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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