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잠시 멍해졌다.
저게 지금 정부 대표로 와서 할 소린가?
일단 개입 안 한다는 말은 여길 치외법권으로 두겠다는 말이었다.
진짜 개소리지.
그럼, 민간인…… 아니, 헌터들이 들어와 약탈, 방화, 살인에 준하는 범죄를 일으켜도 잡아가지 않겠다는 말인데.
특히나 이들이 엘프인 걸 따지고 들면 진짜 미친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납치해서 노예로 삼아도 불법이 아니라는 말이었으니까.
“허허, 진정하시지요.”
“아니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죠.”
“됩니다. 그리고 그건 저희 쪽 요구사항이기도 합니다.”
라이노스 장로는 의외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고요환을 쳐다봤다.
“반대로 일족의 마을에서 일족의 규칙을 무시하면, 철저하게 우리 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겁니다.”
“그건 맞긴 한데…….”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와 저들은 시간 개념이 다릅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속죄의 시간이 무척이나 짧은 형벌이죠. 하지만…….”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라이노스 장로가 그랬다.
일족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처벌은 죽이지 않고 가급적 오래 살려두는 거라고.
자유를 속박한 채 희망만이 주는 삶.
그게 수십, 수백 년이 이어지면 단순히 정신이 망가지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자연의 순환에 속하지 못함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기에 영겁에 해당하는 고통을 받는단다.
유일한 가능성은 일족에 위협이 닥쳤을 때다.
스스로 앞에 나가 전투에 임하는 걸로 속죄의 기회를 삼는 것이다.
죽어도 좋다!
차라리 죽어서라도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다.
긴 속박의 시간은 그런 생각이 영혼을 지배하게끔 만들기에, 일족의 광전사가 되는 거다.
순간, 라이노스 장로의 생각이 읽혔다.
“예. 맞습니다. 일족은 범죄자 인도 같은 걸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음이 이쪽 세계의 이치라고 느꼈으니까요.”
“그 위험성은 고려하지 않습니까?”
“허허, 우리 식당부 장관님이 계신데 무슨.”
라이노스 장로가 그렇게 말하며 고요환을 쳐다봤다.
어? 어라?
이게 그런 식의 협박이 되는 건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렇습니다. 물론 비공식적인 부분은…… 실무진들과 다시 협의하시면 됩니다.”
고요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아, 씨바.
대충 돌아가는 그림이 보이는구나.
인간의 탐욕과 그걸 이용하려는 라이노스 장로.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고 분명 어느 정도 피해는 생기겠지.
하지만 없었으면 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 양측이 적절한 선을 긋게 될 것이다.
“그럼 이렇게 마무리 짓겠습니다. 더 이상의 추가 요구는 없으십니까?”
“그동안의 배려만 해도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예. 그렇게…… 될 겁니다.”
“허허허, 이렇게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입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몸을 돌리기 직전, 고요환은 엘리스를 쳐다봤다.
엘리스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둘이 나가자마자 엘리스가 추욱 늘어지더라.
“오빠, 나 힘들어.”
“하긴 피곤하기도 하겠지.”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엘리스가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했다.
즉위식 이전의 행위부터 마지막까지.
힘의 흐름을 보는 내 눈이 진실을 알려줬다.
세계수 자체는 그저 단순한 마력과 신념의 덩어리였다.
거기에 의지를 심어주는 건 엘리스 그 자신.
이백에 가까운 엘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던 거다.
그런 상황에서 고요환까지 찾아왔으니 당연히 힘들겠지.
그런데 그게 착각이었다.
“아니, 죽이고 싶은 걸 참는다고 힘들었거든.”
“뭐?”
“라이노스 장로가 아니었다면, 세계수 안에 가둬 버렸을 텐데.”
아무리 엘리스라 해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때 들려온 말이 충격적이었다.
“저 인간이, 일족의 전사 절반을 죽음으로 내몰았어.”
* * *
“진심으로 방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라이노스 장로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 덩굴 벽이 열리면서 길이 만들어졌다.
이거 왠지 쫓겨나는 느낌인데?
“예. 저도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걸 봐서 즐겁기는 했습니다.”
솔직히 엘리스의 여왕 즉위식이라고 하지만, 무슨 퍼레이드나 거창한 행사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일족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신비의 일부분을 엿본 기분이랄까.
특히나 마력의 흐름이나 그 변환 같은 건 진짜 신기했다. 엘리스의 의지에 세계수가 공명을 하더니 현상으로 바뀌어 흩날리는 잎으로 증명을 하더라.
그제야 엘프 일족의 ‘마녀’에 대해 일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분명 엘리스가 지나가듯 말했지.
하나의 일족에 한 명의 마녀.
때문에 가장 받들어지고 신성시되는 존재라고.
순간, 다크 엘프들의 오염된 세계가 떠올랐다.
마녀만이 세계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그런 의미였구나.
“허허허, 생각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니요. 전, 앞으로도 제 일만 할 겁니다. 그럼 고생하시고, 다음에 좋은 일로만 보죠.”
단칼에 잘라 버리고 엘리오스 마을을 나왔다.
“머리가 복잡하네.”
아직 길은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엘프들은 등산로를 평소의 세 배 이상으로 만들어 놓아 산복도로까지 내려가는 건 크게 불편하지 않더라.
그렇게 5분 정도 내려왔을 때.
휙.
퍽.
핑~
몸을 돌리고, 동시에 뒤쪽의 나무에 구멍이 파여 나갔다.
소리가 지나간 건 그 이후.
다시 유현성이 몸을 숙였다.
퍽, 퍽!
피이잉-!!!
소리보다 빠른 공격, 바로 저격이었다.
유현성이 시선이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유인인가?”
퍽, 피잉-!!
울리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 유현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퍽!! 퍽!!
거의 백여 미터 단위로 나무가 터지고 땅이 파였다.
그건 거의 수초 단위로 유현성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흐릿하다 싶으면 뒤가 터졌고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 수백 미터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벌써 튀었나?”
하지만 유현성은 걱정하지 않았다.
순간, 두 눈이 번쩍이더니 이동된 방향을 따라 마력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엘리오스 마을을 돌아 산을 넘는 코스였다.
“자신 있다. 이거지?”
유현성의 모습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황령산 벚꽃길을 넘고, 몇 개의 사찰을 지나쳤다. 나무가 무성하고 경사가 심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이동했다.
그렇게 가다 멈춘 곳은, 금련산 북쪽.
재개발을 시도하다 게이트가 터지는 바람에 폐허가 된 동네였다. 이제는 텅 빈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옆까지 와서야 상대가 보인 것이다.
“역시 어설프네.”
“무슨 분식집 사장이 씨바, 현역보다 빠르냐!”
“전직이 있잖아. 잊었어? 내 보직.”
“그래, 정찰병.”
“그 정찰병한테 좆나게 처맞은 게 너고. 너 그때 전투조 조장이었지?”
“아픈 이야기 그만해라!”
“그럼 꺼내질 말든가.”
“하여간 드래곤도 주둥아리로는 널 못 이길 거다.”
“잘 아네.”
둘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유현성과 고요환.
“고환아, 여전히 부랄 간수는 잘하냐?”
“그렇게 부르지 마라.”
“우환이가 내가 준 칼 다 조져놨다더라. 진짜 제대로 안 할래?”
“그건 할 말 없다.”
확실히 마무리 짓고 끝낸 모양이네.
아마도 고우환은 이후에 끔찍한 수련을 겪어야 했을 거다. 차라리 지옥에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로.
고요환은 그런 녀석이었다.
어쨌든 정리했다니 더 이야기 꺼낼 필요는 없겠지.
“그래, 여기까지 날 불러낸 용건이 뭐냐?”
“간만에 실력 한번 보려고.”
‘휙! 텅……!’이 되어야 하는데, 녀석의 도끼가 나무 허리를 쪼개고 뒤에 것까지 터트린 뒤 사라졌다.
이게 고요환의 본모습이었다.
조원들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스마트하고 여유롭겠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은 다들 이렇게 말한다.
무식한 새끼.
이번에 꺼내 든 건 장검이었다.
손가락 세 개 두께의 얇은 검인데 날 길이만 1m가 훌쩍 넘었다.
“이런 나무 많은 곳에서 그런 게 통……!”
휙. 서걱-
장검은 나무를 베고도 유현성의 허리를 갈랐다.
당연하게도 이미 피한 뒤.
“……하네.”
“시끄러워!”
휙, 휘익-!!
장검이 순식간에 공간을 갈랐고, 그게 열두 번이나 이루어졌다.
하지만 유현성은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모조리 피해냈다.
고작 세 걸음 물러선 게 전부였을 정도로.
“야, 야! 진정……!”
목으로 단검이 날아왔다.
파삭!
아니, 뚫린 건 나무였다.
몸을 빙글 돌린 유현성이 어느새 그 뒤로 숨어 버린 것이다.
“너! 제대로 안 할래?”
순간, 고요환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맹렬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짧은 단검 역시 그 기운을 머금어 한 뼘이나 자란 것처럼 보일 정도.
미친놈이 돌았나?
저건 진짜 같이 죽자는 거잖아!
정부 소속 국가 공인 헌터.
일단 공식 랭킹 1위였다. 물론 비공식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지.
저놈은 보통 만능 전투 캐릭터라 불렸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저격 총과 단검을 애용했다.
최근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어떨 때는 장검 하나만으로 어지간한 무리들은 다 쓸어버린다.
어쨌든 그 이상의 무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저 폭발적으로 넘치는 마력 때문.
단검 하나로 전차까지 조지는 놈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실제 녀석의 특성은 웨폰 마스터.
자신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다면 뭐든지 다룰 수 있었다. 숙련도고 뭐고 필요 없이 무기의 기억을 읽어내니까.
따지면 진짜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단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이 적을 뿐.
그런 놈이 진심을 보이고 있었다.
“야 이, 자식아! 진짜 제대로 해보자는 거지?”
“왜? 쫄았냐?”
“나 분식집 사장이다.”
“그래서?”
“쇠국자로 처맞기 전에 힘 빼라.”
순간, 고요환의 얼굴에 황당함이 피었다.
이 진지한 상황에서 머릿속으로 쇠국자를 떠올린 것이다.
찰나, 유현성이 움직였다.
고요환 역시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고.
번쩍!
콰아아아앙!!!!
* * *
“어! 뭐야?”
“씨발, 게이트라도 터진 거야?”
“야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대피, 대피.”
지하철역 남쪽, 재개발로 반쯤 철거가 진행된 상황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빈집을 은신처로 삼던 빌런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게이트가 터졌다.
그건 길드 소속 헌터들이 몰려온다는 의미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면서 튀어나온 빌런들은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일대의 마력이 잠시나마 모두 소멸되었음을 느꼈던 것이다.
“야! 저기 봐. 저기.”
“왜? 어…… 어어?”
“저, 저게, 말이 돼?”
“씨바, 몰라!”
십수 명의 빌런들은 멘탈이 나가 버렸다.
산 한쪽이 움푹 파여 있었다.
옆구리가 날아간 수준이 아니라, 지면 깊숙한 암반까지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대충 아파트 단지 하나는 들어갈 어마어마한 크기.
더 충격적인 건.
커다란 괴수가 손톱으로 후려갈긴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툭툭.
“어이.”
툭툭.
“야. 살아 있냐?”
“쿨럭. 컥…… 푸훕.”
“안 뒤져서 다행이네.”
유현성은 굳이 회복을 걸어주지 않았다.
슈트에 그 기능이 설정되어 있었으니 귀찮아서였다.
어? 근데 반쯤 박살 났네.
“에휴, 손 많이 가는 녀석.”
유현성이 손을 움직이자 황금빛 광채가 고요환의 몸을 휘감았다.
“커헉, 크윽.”
신음으로 고통에 견뎌낸 고요환은 곧 정신을 차렸다.
“그거 자동 호출 기능 있지?”
“어…… 어.”
“그럼 난 간다.”
“야, 야 이 X발 놈아!”
“왜 또? 귀찮게.”
“후우, 이야기 좀 하자고. 이야기 좀.”
“불러놓고 칼부터 휘두른 새끼가 무슨. 그래,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해봐라.”
고요환은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잠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듣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여긴 금련산 정상이었다.
사방이 훤히 보였고 어떤 마력도 감지되지 않았다.
고요환도 그걸 파악했는지 씨익 웃더라.
“이 괴물 새끼.”
“괴물이지 새끼는 아니다.”
“너, 진짜 엘리오스 마을에 들어갈 거냐?”
이걸 질문이라고 하나?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긴 했다.
“어, 거기 2호점 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