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후련하냐?”
가볍게 묻자, 고요환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괴물이라는 걸 앞으로도 못 잊겠지.”
“잊어. 난 이제 분식집 사장이야.”
툭, 투툭.
분위기 잡고 싶지도 않은데, 뭔가 굵은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러다 이내 제대로 싸워볼 것처럼 한바탕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아, 귀찮아.”
유현성은 그렇게 말하며 고요환을 끌고 나무 그늘 아래로 피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데?”
고요환은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서로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높이에 가까스로 이르렀다.
“너, 이번 일, 정부 개입 어디까지 알고 있냐?”
“그쪽으로 손 뗐다. 관심 일도 주고 싶지 않거든.”
“그런 놈이 식당부 장관?”
“농담과 현실을 구별해.”
고요환은 잠시 유현성의 눈빛을 쳐다봤다.
진짜 대충 넘어가고 싶어 하는…… 평소의 심드렁한 반응 그대로였다.
“하아, 돌아버리겠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너네 가게 한 번 들려서 묻고 싶긴 했는데.”
고요환의 말에 유현성을 피식 웃었다.
-망해라. 망해라. 아니, 망하지 마라.
오픈 때 화환까지 보냈으니 분식집 위치는 알 거고.
언제든 오려면 올 수 있다는 건데, 지금까지 오지 않았다는 건 나름 배려했다는 의미겠지.
“오지 그랬냐. 그럼 제대로 라면 한 그릇 대접해 줬을 텐데.”
“맛있게 끓여줄 자신은 있고?”
“이 샊…… 우리 분식집 맛집으로 소문났거든?”
물론 이 녀석이 오면 맛난 걸로 해주긴 할 거다.
불라면 매운맛…… 대충 5단계 정도로.
당장은 속이 타고, 다음 날 아침에 변기에 앉으면 다른 부분이 타는 걸 느끼겠지만.
친구로서 그 정도도 못 해줄까.
그렇게 상상하고 있는데 고요환이 툭 물었다.
“얼마 전 게이트 안에서 그 나무 쪼갠 번개…… 너지?”
“그렇다면?”
“역시. 그래야 다 연결이 되지. 니가 나무 박살 내고 정수만 뽑아서 여기로 돌아온 거잖아?”
어? 해석이 그렇게 되나?
일단 맞기는 맞는데, 또 맞다고 대답하기도 애매한 그런 느낌이랄까.
결국 좋게 둘러대기로 했다.
“빨리 정리해야 오염이 안 퍼지거든. 결국 정화까지 한다고 개고생 했다.”
“왜 그랬냐? 다시는 게이트 안 들어간다면서?”
“니들이 일 처리 똑바로 안 해서잖아. 폭주하면 겨우 마련한 집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별수 있냐?”
“집?”
“그래. 서민에겐 내 집 마련이 꿈인데 말이야. 내 집 마당에 게이트가 분열했었다고.”
“……뭐? 네가 저 산동네에 집을 샀다고?”
“왜? 안 되냐?”
의외로 몰랐던 모양이다. 놀란 표정이 진심이었던 것이다.
“야, 그때 게이트 들어간 일 때문에 지금도 비만 오면 무릎이 쑤셔.”
“허, 와이번 도가니도 삶아 먹을 놈이 무슨 개소리를. 넌 나한테 물어볼 말 없냐?”
“예이~ 예이, 은퇴자가 알아서 뭐 하게? 라면에 김밥 마는 놈이라 관심도 없다.”
“크, 크훕. 컥. 하여간 엘리스 믿지 마. 아니, 저 종족을…….”
“그니까 이야기하라고.”
답답한지 고요환은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슈트는 이미 걸레짝이 됐고, 찾는 게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담배는 돌아가서 펴.”
“너는?”
“참은 지 좀 됐다. 마! 말 돌리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후우, 이건…… 너도 총리 알지?”
“알긴 알지.”
알다 마다 수준이 아니고, 흐흠, 전에 싸대기를 갈긴 적이 있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되는 것 아닌가?
대뜸 반말에 잔소리까지는 참았는데, 대놓고 커피 심부름을 시키더라.
나름 군기 잡겠다 이거지.
결국 내가 먼저 쪼인트를 까버렸다.
당장 게이트 들어가야 할 판에 기껏 불러 놓고 의전인지 뭔지 병신 짓을 하면서 시간 끌길래, 더는 참기 힘들었으니까.
“씹새야.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물론 당시 난리가 났지만, 그 뒤 인상 한 번 써주는 걸로 끝내 버렸다.
아무도 다가올 생각을 못 했으니 효과 만점!
“그 박분…… 뭐라는 놈?”
“아니, 그놈 말고, 새 총리.”
“어? 총리가 바뀌었어?”
“이 새끼는 라면 팔다가 뇌가 라면 사리가 됐나. 세상 돌아가는 거 몰라? 너 전역할 때 바뀌어서 대충 반년 좀 넘었다.”
“타이밍이 참. 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그걸 다 신경 써야 하냐?”
고요환은 피식 웃다가 당장에라도 욕을 쏟아부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용건만 간단히. 복잡한 개소리 하면 바로 간다.”
“하여간 넌 귀찮은 거 정말 싫어하네.”
“그래서.”
“이번 총리는 사별한 지 오래됐거든. 그런데 재혼을 했어.”
“그게 뭐가 문제냐?”
“엘프족과 한 거지. 근데 그 부인 나이가 300살이 넘어.”
아니, 남녀가 서로 좋으면 결혼할 수 있는 거지.
그게 왜 문제란 말인가.
“게이트가 소멸된 뒤에 중통부와 통화를 했거든. 그 전부터 찝찝한 부서가 생겨서 의심하던 때였어.”
설명하길, 원래는 중앙통제부 산하에서 이종족을 관리했다. 기본적인 식자재 납품부터 소소한 외출 허가까지 말이다.
그게 어느 순간 정부에 새로운 부서가 생기면서 이관 명령이 내려왔단다.
-이종족 관리부.
명분은 헌터청의 덩치가 너무 커져서 제대로 관리가 안 된다. 그러니 헌터 관련 일을 제외하고 조금씩 일을 나누자.
-라는 거였다.
어쨌든 헌터청은 너무 비대해졌고 청장의 경우, 어떤 부분에 대해선 대통령보다 권한이 강하기도 했으니까.
더 황당한 건 저 부서가 외교부 장관 아래로 넘어갔다는 것.
“게이트에서 세계수를 확인한 다음 전화를 했는데, 관여치 말라는 연락이 오더라. 우리보고 손 떼라는 말이었어. 알아보니 이번 엘프족 독립 건수는 총리 단독 허가더라. 지금은 이 정도로 끝내서 모르지만, 엘프족들이 뒤에서 정부를 흔들지도 몰라.”
고요환은 진지했다.
그게 더 어이가 없었다.
“너네 집안 권력 싸움 문제에 괜한 이유 가져다 붙이지 마라. 막말로, 여섯 종족 독립은 분명 예전부터 정했던 거잖아. 단지 시기가 문제였을 뿐이지.”
화이트 게이트가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종족들은 이쪽으로 넘어오길 희망했다.
정부 입장에서도 선제적으로 이종족을 받아들이는 데 이견이 없었다.
다른 국가들보다 먼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들의 무력 역시 빌릴 수 있었으니까.
이종족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백곰족만 해도 자신들의 천적인 아이스웜이 크게 늘어나면서 남은 영역을 거의 다 잡아먹혔다고 했다.
새로운 살 곳을 찾지 못하면 그대로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
그 이유로 이쪽 세계로 넘어왔으며, 이후엔 군대와 함께 게이트 토벌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때 그들의 내건 조건 중 하나는 후손을 키울 수 있는 독립적인 영역을 얻는 것이었다.
그걸 정부도 인정했고.
다만 그 시기를 조정 중이었다. 언제까지 그들의 존재를 감출 수는 없었으니까.
고요환은 미련이 남는지 다시 붙들고 늘어졌다.
“하지만 엘프족은…….”
“원인 중 하나는 너야.”
“나?”
“엘프 전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면서?”
“하아…… 그건 작전 실패라기보다, 헌터들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서였어. 손발이 안 맞았지만…… 내가 승인했으니 내 책임이지. 인정하마.”
순순히 받아들이는 걸 보면, 녀석에게도 뼈아픈 실책이 맞는 것 같았다.
고요환은 한숨과 함께, 말을 던졌다.
“헌터청은…… 이제 실권을 잃었어.”
* * *
“쓸데없이 신경 쓰이네.”
왠지 오물통에 발을 담근 느낌이었다.
엘리스는 분명 이렇게 이야기했다.
“고의죠. 원래라면 임무를 맡은 헌터들이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엘프 전사들만 들어갔대요. 이후 전투가 벌어졌고 후속 지원 부대가 오질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고립된 엘프 전사들 상당수가 사망하고 나서야 헌터 부대가 나타났단다. 특히 그들 중 일부는 여자 엘프 전사들을 유린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순간 빡침이 올라왔는데, 고요환이 말했다.
그 새끼들은 자기가 다 갈가리 찢어 버렸다고 했다.
이후 부청장의 권한으로 소속 길드를 해체시킨 것도 모자라, 전원 헌터 등록증을 말소시켰다고.
즉, 헌터라도 사고 치면 그대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다는 소리였다.
이제 찍소리 말고 죽은 듯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긴, 엘리스에게 반한 녀석이니 엘프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지.
그런 놈이 일부러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럼, 뭔가 ‘음모’가 있다는 건데…….
어쨌든 고요환이 여왕 즉위식 일에 자원한 건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 지능캐가 아닌 전투캐가 엘프 마을에 등장했던 게 그 이유였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스는 반응조차 보이질 않았다.
-부탁 좀 하자. 난 잘 지내보고 싶으니까 좀 도와줘.
“내가 무슨 수로?”
-기회가 생기면 연락만 해줘. 아니, 내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요청해라.
“그럴 일이…… 있을까?”
-아니, 분명 생겨. 이제 헌터들은 이전과 다르게 이권에 철저하거든. 과거와 달라.
……확실히 세상이 변하긴 했지.
전의 그 차 뭐시기 클랜 애새끼들도 거의 양아치처럼 굴었으니까.
길드도 아닌 고작 클랜이 그 정도면, 나머지는 아마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거다.
하아…….
겨우 법을 바꿔놓고 나왔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에휴, 참 세상 복잡하게도 산다.”
괜한 일로 거기 휩쓸리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엮인 인간관계가 있으니 무작정 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일단 엘리스 쪽은 딱, 비지니스 파트너 정도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이노스 장로도 말하길 그렇게라도 인연이 이어진다면 충분하단다.
시간은 언제나 넉넉하다면서.
심지어 악담까지 하더라.
-허허허, 오십, 육십 넘어서도 괜찮습니다. 생식 능력만 있으면 혼인은 가능하니까요.
결국 그때까지 혼자 살라는 소리에 가깝잖아!
아오, 빡쳐.
어쨌든 비공식 즉위식으로 이번 일은 끝났다.
원래라면 공식적으로 크게 하려고 했는데, 아직 마을 정비가 안 됐고 더 미룰 수 없어 진행했다고 하더라.
대신 마을이 정식으로 자리 잡으면 대외용으로 즉위식을 다시 하기로 했단다.
한마디로 가짜 행사를 하겠다는 거지.
“됐다. 이제 신경 끄자. 그 이상은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뭘 꺼요? 이 층 다락방에 에어컨하고 불도 꺼요?”
임혜리가 불쑥 끼어들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후에 단체 손님 오니까 미리 켜놔. 그리고 점심 영업 끝나고 바로 음식 만들어야 하는 거 알지?”
“당연하죠. 사실 저도 거래처 손님들 궁금하긴 했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생각해 보니 애들한테는 항상 말만 했던 것 같았다.
야채나 청과물을 받아오는 창용상회 정갑용 사장님.
어육살을 받고 있는 생신 어묵 김은희 누님부터, 새로 육수 재료를 받고 있는 형님네 냉동 사장님까지.
물론 상당수 식자재는 금치수를 통해 받았지만 치수 식품이야 원체 자주 보는 사이였으니 이번 모임에선 빠졌다.
“자! 점심 영업 시작하자!”
* * *
“누님은 더 예뻐지셨네요.”
“호호, 동생 덕분인가 봐. 요즘 아주 난리야.”
김은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남편분이 뻔히 보는데도 날 와락 끌어안았다.
다들 의외의 장면에 놀랐지만, 오히려 바깥양반이라는 남편은 매실꿀차만 홀짝거릴 뿐이었다.
“일단 올라가세요. 바로 음식 나올 겁니다.”
“그래. 기대할게.”
김은희를 선두로 생신 어묵 식구들 일곱 명이 줄줄이 다락방으로 향했다.
곧이어 정갑용 사장님의 식구들도 다섯이나 함께했고, 놀랍게도 의외의 인물이 방문했다.
오송해.
30년 경력의 호텔 요리사로, 장어묵 덮밥의 깊은 향을 내는 비법을 유일하게 알아낸 사람이었다.
지금은 간간이 방송 활동과 요리 학원을 운영했는데, 전포제 행사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었다.
“사람 섭하게시리. 미리 연락 좀 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명함은 받았지만 동네 분식집 주인이 전화를 하기에는 급이 너무도 달랐다.
병장이 사단장한테 다이렉트로 연락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오늘은 편하게 즐기다 가려고 왔다네.”
“그런데 어떻게 아시고…….”
“저기 저 친구 메뉴를 백화점 푸드코너에 있는 우리 가게에 넣기로 했거든.”
오송해가 돌아보는데 누군지 단번에 눈치챘다.
나와 같이 요리 대회에 참여했던, 해물 짬뽕 만둣국의 주인공.
바로 ‘형님네 냉동’ 의 공동 대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