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참, 인연이란 묘한 것 같습니다.”
“뭐가?”
“그게 무슨 말이냐면요.”
군부대 있을 때 한참 아래 후임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번화가에서 술 마시고 양아치들과 시비가 붙어서 싸운 적이 있었단다.
“진짜 겁나게 터졌습니다. 그 새끼가 얼마나 쨉실하게 싸우는지, 지 친구들도 욕할 정도더라고요.”
“어떻게 했길래?”
“좀 처맞으면 튀고, 끝났다 싶으면 달려들고. 몇 대 더 팼더니 항복했다가 갈라고 하니까 뒤통수를 까더라고요.”
“하, 뭐 그런 양아치 새끼가.”
“제 말이 그겁니다.”
후임은 피식 웃었다.
몇 달 뒤, 아버지한테 이끌려 생전 처음으로 친족 모임에 나갔다고 했다. 거기서 정말 십여 년 만에 만난 고종사촌 형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사촌 형 아들이더라고요. 그 양아치가.”
“뭐?”
“통수 치고 튀었던 그놈이 거기 딱!”
“허, 헐. 진짜 원수는 외나무 다리가 아니고 가족 모임에서 보는구나. 근데 정말 몰랐어?”
“예. 큰집에 큰형님이라서 결혼 일찍 했다고 아버지가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진짜 제가 꼬꼬마일 때 몇 번 본 건 기억나고요. 저 초딩 때 우리 집 놀러 와서 용돈 쥐어준 게 마지막이었거든요.”
“그래서?”
“눈 마주치자마자 비는데, 뭐라 하겠습니까.”
“왜 죽빵이라도 갈기지.”
“에이, 따지면 오촌 조카인데요. 제가 당숙인데 거기서 그럴 수는 없죠. 근데 사촌 형이 눈치챘더라고요.”
들어 보니 그쪽 집안이 정말 엄하단다.
“사촌 형님이 아마 복싱 선수였다고 했거든요. 아주 그냥 조카는 죽을 날 받아놓은 거죠.”
“겁나게 터졌겠네.”
“며칠 있다가 연락이 오긴 왔어요. 사촌 형님이 머리 다 밀어 버렸다고. 그리고 바로 입대 신청해 버렸데요.”
“큭.”
“근데 그거 아십니까?”
“또 뭔데?”
“그 조카가 이상도 일병입니다.”
“뭐? 이상도 이 새끼가 침 찍찍 뱉고 다니던 양아치였다고? 근데 너보다 늦게 들어왔잖아.”
“사촌 형님이 부사관 지원 신청시켰는데 거기서 개기다가 떨어졌어요. 결국 끌려가서 또 두들겨 맞고 육군으로 뒤늦게 들어온 겁니다.”
“하. 어이가 없네.”
이후 이상도를 겁나게 갈궜다.
적어도 사람 하나 만든다는 심정으로 교육시켰던 것이다.
암, 진짜로.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는데, 황송하게도 ‘형님네 냉동’ 대표님께서 다가왔다.
“하하, 동생. 참말로 인연이 묘하재.”
“그, 그렇죠. 형님.”
“그라도 좋은 일로 봤으니 계속 좋은 인연 아니겠나?”
“맞습니다.”
자칭 타칭 사장인 강성곤이 유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형님 말대로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이런 식으로 가까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진짜 첫 인상은 별로였는데, 어쩌다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는지.
이상하게도 피식 웃음이 나왓다.
처음 강성곤이 돌돌이를 보고 무시하듯 말하자, 거기에 발끈해서 힘껏 달렸다.
하지만 돌돌이는 돌돌돌돌거릴 뿐, 제대로 된 바이크에 이길 수 없었지…….
크흑, 갑자기 눈물이 다 나네.
어쨌든, 그날 가득 실은 짐 때문에 형님 오토바이가 넘어갔고 그게 어머니를 덮칠 뻔했다. 다급한 마음에 오토바이를 걷어차서 구했는데, 대신 그 친구(?)는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더라.
수리하고서 얼마 달리지도 않고 뻗어버렸다나.
그렇게 끝날 것 같았던 인연이었는데…….
전포제 요리 대회 때 옆에서 장사하던 가게와 음식을 나눠 먹었었다.
해물 짬뽕 만둣국.
짬뽕과 짬뽕밥에서 면과 밥 자리를 물만두로 대체했는데, 이게 참 묘하게 일품이었더랬다.
커다란 숟가락으로 만두를 뜰 때마다 불향 가득한 야채와 해물들이 듬뿍듬뿍 퍼졌던 것이다.
특히 짬뽕 국물을 머금은 만두피가 예술이었고, 국물은 최상급이었다.
비결을 물으니 거래처 사장님이 좋은 걸 줘서라고 했다.
나중에는 사실 자기랑 형이 하는 ‘냉동식품 회사’‘라고 고백했고.
당시에는 민망해서 그렇게 둘러댔다나.
하긴, 명함 줄 때 이미 거기에 ‘형님네 냉동’이라고 적힌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었지.
어쨌든 동생이 장사한다고 독립하는 바람에 ‘형님네 냉동’은 형인 강성곤 혼자 이리저리 납품하고 뛰었단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어머니가 따로 가게를 봐줬던 것이고.
어머님의 오토바이 사고(?)가 날 뻔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머님은 괜찮으시죠?”
“하아~ 바지런한 성격 때문에 뭘 자꾸 할라고 한다. 좀 쉬라 해도 그게 안 되네.”
그때 뭔가가 떠올랐다.
“그럼 가끔 이 동네 놀러 오시라고 해주세요.”
“여 오면 뭐 있나?”
“맞은편 칼국숫집 할머님도 계시고요. 여기 마트 아주머니부터 소소하게 말벗이 될 만한 분들 많으세요.”
덕순 할머니를 중심으로, 우리 강 여사님이 행동대장이 되어서 모임을 주도했다.
가끔 음식을 가져와서 나눠 먹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 치매에 좋다는 핑계로 점백 고스톱도 치고.
뭐, 하여간 그런 평범한 모임이니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이제는 모임 장소가 칼국숫집이 아닌 새로 이사 간 집이긴 하지만.
때로는 본가이기도 했고.
“형. 슬슬 올라가자. 유 사장 바쁜데 오래 잡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려. 그건 나중에 통화하고. 물건은 괜찮지?”
“당연하죠.”
현재, 형님네 냉동은 우리 분식점의 수산물을 책임지고 있었다.
단순히 냉동만 취급하는 게 아니라 멸치, 디포리, 홍합 건새우 등의 건어물, 여기에 기장 미역 같은 지역 특산물도 취급했다.
덕분에 육수 맛을 안정적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의외로 몰랐던 사실 중 하나가 그거였다.
꽃게의 경우, 제철에 산지에서 바로 먹는 게 아니면 오히려 냉동이 맛있었다. 살아서 돌아다니는 애들은 수조에 가둬 놓으면 조금씩 살이 빠지면서 맛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오래된 생물 꽃게의 경우 가격도 비쌌지만 맛이 천차만별이더라.
어쨌든 냉동 꽃게 상품을 받게 되면서 육수의 맛이 더욱 깊어졌고, 기복이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야그하고. 나 올라갈게.”
“아. 형, 나는 저분하고 잠시…….”
해물 짬뽕 만둣국 사장 강종곤의 시선이 오송해에게 향했다.
“아, 맞다. 하여간 잘해라.”
강성곤은 오송해에게 인사를 한 뒤 다락으로 올라갔다.
오송해와 강종곤이 깊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난 요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는 건 잊지 않았다.
치이이익-
이제는 저녁 영업의 인기 메뉴가 된 감자전이 기름에 튀겨지듯 지져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정호석이 미니 장어묵덮밥을 만들었고, 임수원도 김치제육볶음에 돌입했다.
당연히 사이드는 요구르트 계란말이.
여기에 부추 겉절이를 더했는데 의외로 궁합이 잘 맞더라.
그렇게 착착 준비하는데 오송해의 목소리가 귀에 곶혔다.
“백화점 푸드코너에 들어가게 되면 사실 수익은 크지 않다네. 기본적으로 거기서 가져가는 게 있거든.”
“예. 알고 있습니다.”
“대신 자네 가게 홍보가 될 거야. 이거는 너무 기대할까 봐 미리 알려주는 거라네. 어차피 시스템상 몇 그릇 나갔는지는 나오니까, 그만큼의 수수료는 투명하게 지급될 거야.”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조금 고급스럽게 포장할 필요가 있어. 단가가 다른 음식에 비해 저렴한 편이거든.”
“전 8,000원도 비싸다고 생각했거든요.”
“자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가도 되긴 하겠지. 하지만 백화점의 경우, 같은 프랜차이즈라 해도 판매가를 높게 책정하는 편이기는 하네만.”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긴 했지.
백화점 코너의 장점은 한 곳에서 각 지역 유명한 식당들의 맛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대신 가격이 10~20% 정도 비싼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중요한 건, 거긴 가격 경쟁보다 맛으로 살아남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한번 고민해 보게. 정 불편하다면 거기에 맞게 사이드를 내든가, 미니 밥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가도 될 거라네.”
“아, 그렇군요.”
흐음, 백화점 입점은 저런 식으로 진행되는구나.
솔직히 분식집 사장 입장에서 언제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겠는가.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우는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오송해와 눈이 마주쳤다.
“강 사장은 먼저 올라가 보게.”
“예, 선생님.”
그렇게 강종곤이 사라지자 오송해가 주방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뭔가를 살피는 척하면서 슬쩍 묻더라.
“혹시 자네도 생각이 있나?”
* * *
“이야~ 음식 하나하나가 다 기깔나네.”
“어우, 씨. 배불러 디지겠는데도 자꾸 먹게 되네.”
“여긴 주당 사육소다. 일주일에 한 번 오면 돼지고, 두 번 오면 소가 될 것 같아.”
“근데 또 묘하게 계속 들어간단 말이지…….”
“하~ 난 이거 장어묵덮밥 먹으러 꼭 올 거다. 말리지 마. 말리지 말라고!”
“난 라면. 다른 건 모르겠고. 국물이 꼭 술을 불러.”
다들 그렇게 알코올에 절은 채 감상평을 내놓는데, 어느 것 하나 나쁜 구석이 없었다.
그걸 보며 정갑용이 미소를 지었다.
작년만 해도 유현성은 막 제대한 뽀송뽀송한 애송이었다. 아버지 가게 물려받아서 장사한다고 했을 때도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어떤가.
음식 하나하나가 다 맛있었고, 다들 즐거워했다.
손님 많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도 혹시 반짝이 아닐까 걱정까지 들었는데.
어느 순간 저 건너 테이블에 있는 한약방 사장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더니, 맞은편에 있는 김은희까지 연결되었다.
얼마 뒤, 전포제 요리 대회 대상 소식을 듣게 되니 왜 자신이 흐뭇한 건지.
하긴, 저놈 애비도 정말 열심이었지.
진짜 별것 아닌데…….
순간, 전갑용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십호흡을 한 정갑용은 슬쩍 옆자리의 오송해를 쳐다봤다. 이대로 있다가는 감정에 휩싸일 것 같아서였다.
“오 선생님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허허, 맛이 아주 재밌습니다.”
“그런 평가도 있습니까?”
“좋은 재료를 쓰고, 고급스럽고, 그래서 비싼 음식만이 맛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솔직히 먹을 때마다 신이 납니다. 이게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오송해는 짧게 음식을 평가했다.
“김치제육볶음은 정석에서 조금 벗어났습니다. 적은 양을 만들기에 가능하지, 이 두께를 튀기듯이 굽는 건 시간이 많이 걸려요.”
“흐음.”
“한마디로 돈을 벌기 위한 장사로 치면 점수를 짜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만, 이 정도 규모라면 감당할 만한 수준입니다.”
“많이 안 남는 겁니까?”
“손님이 주당이면 남는 거고, 딸랑 한 병 마시고 가면 애매한 정도입니다. 하지만 가게 규모나 본인 혼자서 운영한다면 나쁘진 않겠죠.”
정갑용이 듣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보기에는 평범한 김치제육볶음이지만 상당한 정성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으니까.
“떠 먹는 요구르트를 올린 계란말이. 이게 참 재밌단 말이죠. 단일 메뉴로 치면 술안주보다 디저트 느낌이 강한데, 앞서 나온 음식들과 묘하게 잘 맞아요.”
“듣다 보니 그렇군요. 확실히 입안이 정리되는 느낌이긴 합니다.”
“웃긴 건 라면입니다. 솔직히 이런 건 잘못하면 잡탕이죠. 요리사들끼리 말하면 정석이 아니라 사짜라고나 할까.”
“하하! 사짜라. 표현이 재밌습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그 정석 코스를 밟은 사람은 이렇게 만들기 쉽지 않습니다. 이건 분식 중에서도 독특하다고 해야 할까. 유 사장 강박관념의 결정체 같습니다.”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지만 오송해는 진심으로 놀랐다.
분명 육수만 가미된 베이컨 라면인데 파와 실파, 삶은 계란 등의 밸런스가 절묘했다. 약간 짜다 싶지만 그 선을 너무나 잘 맞췄던 것이다.
싱겁다, 간간하다, 간이 맞다, 짭쪼롬하다, 짜다.
일반인들에게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간의 단위가 이거였다.
하데 이 라면은 간이 맞다와 짭쪼롬의 딱 중간이었다.
여기에 베이컨의 기름 맛이 섞여 향이 훅 올라왔고 그 적절함이 식욕과 감칠맛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오는 대부분의 안주가 음주에 적당했다.
안 맞다 싶은 것도 앞에 나온 걸 생각하면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딱 들어맞았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분식이라는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는 음식들이긴 합니다. 김치제육볶음도 한 발 슬쩍 걸쳐 있는 느낌이랄까.”
“호오, 어째서입니까?”
“사람들은 간단한 면 요리만 분식에 넣는데, 넓게 보면 아니에요. 식사를 제외한 그 사이에 먹는 음식을 분식이라 하거든요. 한자로는 나눌 분分을 쓰는데 밀가루 분粉으로 오해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삼시 세 끼를 제외하고 먹는 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야식도 따지면 식사이긴 하지만, 보통 자기 전의 그 시간에 밥, 반찬, 국, 찌개 다 차려 먹는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허허. 그렇게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 음식이 다 그래요.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거죠.”
그러면서 오송해는 감자전을 한 점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보세요. 이건 이거 자체로도 괜찮은 맛입니다. 근데 뭔가 약간은 부족함이 느껴지거든요.”
“그래요?”
“근데 소주 한 잔 딱 들어가면, 크하아~ 이렇게 맛이 배로 살아납니다. 물론 막걸리의 산미와도 잘 어울리고요.”
오송해는 그런 식으로 이것저것 다 먹고 마시면 평가를 내리다가.
결국 취했다.
“흐으어음, 너무 급하게 먹었나…… 큼큼. 어찌 했든, 이 느낌이 잘 표현이 안 되네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분식 코스 요리입니다.”
“허허, 분식 코스 요리라니.”
정갑용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으니까.
밑에서 그걸 듣던 유현성도 피식 웃었다.
“현성 형님? 뭐 좋은 일 있습니까?”
“아, 아냐. 신경 쓰지 말고, 마지막 준비 다 됐지?”
“예. 구운 거 절반씩 나눠놨습니다.”
“자, 마지막 나갈 거 준비하고.”
“옙.”
정호석은 분주히 쫄면을 삶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릇에 들어갈 냉육수를 확인했다.
분식 코스 요리라.
솔직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더 메뉴가 늘어날 때야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건 그렇고, 백화점 입점이라니.
아까 오송해가 던지듯이 말했지만 이상하게도 끌리는 게 있더라.
당장은 아니지만 도전해 볼 만한 목표라고나 할까.
“집중하자. 집중.”
유현성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조리에 들어갔다.
면을 담고, 고명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냉육수를 넉넉하게 부었다.
그 직후,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게 오늘의 결정타가 되겠군.”
살짝 기대가 되더라.
과연 오송해가 어떤 평가를 내릴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