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 아버지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연락받았습니다.”
“예? 아, 그렇군요.”
“새로 오신 컨설팅 회사 사장님이시라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들었습니다.”
엥?
이건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쳐다보니, 이 둘째 아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마흔 정도로 보이는 나이인데 강아지처럼 눈만 똘망똘망 뜨고 쳐다보더라.
아주 순진함이 몇 겹으로 입혀진 사람 같다고나 할까.
“자, 잠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요? 이번에는 저희 차례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예? 무슨 그…….”
잠시 당황해하는데 둘째 아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박수기라고 합니다. 이번에 아버지가 연락을 하면서 개인 컨설팅 붙여준다고 하셨거든요. 방금 통화했는데 보냈다고만 들어서요.”
“그게…… 그런 의미였습니까?”
“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뇨. 아니에요.”
슬쩍 두통이 치미는 걸 느꼈다.
사실 김요성한테 연락처를 받을 때는 큰 생각이 없었다. 그냥 잘 이야기해서 우리 가게 음식 베끼는 것만 안 하면 좋겠다 싶었다.
알고 보니 속사정이 있더라.
X바, 근데 내가 왜 피를 봐야 되냐고.
* * *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너희들한텐 그냥 회사 못 물려준다!”
“아버지, 장남인 제가 물려받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요. 애들한테는 막 퍼 줍니다! 인기도 많고요.”
“맛대가리 없는 거 더 준다고 좋아하더냐? 치워!”
“아 씨, 삼촌, 고모, 독립 비슷하게 나갔는데 누구 줄라고요. 그냥 정기 형님한테…….”
“막내야. 니가 덜 맞았구나. 겨우 감옥 가는 거 막아줬더니, 합의금만 오천 넘게 썼다. 이놈아, 그분들이 양반이라서 무릎 꿇고 빌었더니 겨우 해준 거야. 넌 나서지 마라. 나 죽을 때까지 창고 벗어날 생각 하지 말고.”
“아버지!”
“너 일 대충 한다고 다 들었다. 제대로 하기 전에 나올 생각 하지 마. 그래, 둘째는 어떠냐?”
“제가 무슨 생각 있겠습니까. 그저 따를 뿐이죠.”
“좋다. 결정을 내리마.”
박산기의 말에 첫째와 막내는 긴장했다.
이게 자신들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결정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반년, 나 죽기 전까지 제대로 된 메뉴를 개발해라. 저렴하면서 배부르고, 만족도가 높고. 동시에 매출을 끌어 올리면 회사를 물려주마!”
이 말이 원흉이었다.
첫째가 병신 같은 메뉴로 우리 가게 신메뉴를 베낀 게 이래서란다.
말도 안 되는 음식을, 어이없는 가격에 팔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아들 박수기의 말에 살짝 혈압이 올랐지만 각색의 가능성을 두고 조심스레 물었다.
“형제간에 사이가 안 좋습니까?”
“허~ 제가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죠.”
말 아끼는 표정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첫째랑 막내는 고쳐 쓰기도 어렵겠구나.
이후 자잘한 이야기도 들었다.
박산기는 회사 분리 신청을 했단다. 형제들도 동의해서 그 부분은 정리하고, 자식들 물려줄 부분만 조건부로 하기로 공증까지 했다는 거다.
결론. 맛있는 걸로 많이 팔면 회사를 물려주겠다는 의미였다.
“저는 컨설팅으로 오신 줄 알았습니다.”
박수기가 그렇게 말하니 일단 오해를 받더라도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가게 좀 봅시다.”
확인해 보니, 이런 FM이 있나.
진짜 깨끗했다.
나도 관리를 깔끔하게 하지만 여기는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구석구석까지 반질반질하더라.
막 상을 주고 싶어지는 수준이랄까.
“관리는 잘되고 있는 것 같네요.”
“예. 도와주는 애들이 열심히 하거든요. 졸업생 애들도 종종 놀러 와서 거들기도 하고요.”
좀 들어 보니 인망은 있는 모양이었다. 장사가 잘되어 바빠져도 인력 충원은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나름 깔끔하지만 맛은 평범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메뉴를 개발해서 준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김요성이 천만 원이나 준다고 했지만 내 메뉴와 겹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게 다 정기인가 뭔가 하는 첫째 때문이었다.
……아니지.
진짜 장어묵덮밥과 냉라면 레시피를 줘버릴까?
그럼 퀄리티에서 차이가 나니 서면점에 갈 이유가 없을 것 아냐.
형제끼리 싸움 붙이는 건 좀 아니려나?
결정은 박수기에게 맡기기로 했다.
“사장님, 돈 욕심 많이 없으시죠?”
* * *
양념어묵덮밥이 5,900원.
짝퉁 냉라면이 4,900원이었다.
마진을 1,500원 이상 남기려니 서면점은 싸구려 재료를 쓸 수밖에 없었고, 괴랄한 맛이 되어 버렸지.
하지만 부산대점이 500원 정도만 남긴다면?
“충분히 업그레이드가 가능하죠.”
“500원 마진이면…… 후우~ 쉽지 않겠는데요?”
“결정은 사장님이 하시는 거죠. 퀄리티가 올라가 손님이 많아지면 전체 매출이 상승하니까요.”
“그건 알지만…… 형하고 정면으로 붙어서 싸운다는 게 걸립니다.”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싸움이죠. 그리고 음식은 다르게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일단 좀 고민 해보겠습니다.”
“마음 정해지시면 연락 주세요.”
그렇게 부산대점을 나왔다.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사흘 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서면점 별점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악평도 자자해서 고모와 삼촌 지점까지 피해를 보고 있단다.
아마 최대 피해자는 내가 되겠지만.
이런저런 재료들을 준비해서 다시 부산대점을 들렀다.
박수기가 머쓱한 표정으로 요리모를 긁적거렸다.
“몰랐는데, 인터넷으로 유명한 가게 사장님이시라고.”
“아, 행복 분식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거기 메뉴들이 하나같이 맛있고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다 직접 개발하신 거라고요.”
“신경 많이 쓰긴 했습니다만 크게 분식집 범주를 넘어가진 않아요. 라면이 세 종류에 김밥, 그리고 덮밥 하나 정도죠.”
“그럼 거기 음식 레시피를 받게 되는 건가요?”
“아니요.”
“아, 그렇군요.”
잠시 실망한 듯하다가 박수기는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맛집 사장이 괜히 맛집 사장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근 첫째인 박정기 때문에 평가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초창기부터 소문난 식당 사장에, 무려 전포 요리 대회 우승자였으니까.
“제가 생각한 메뉴는 튀김 덮밥입니다.”
“튀김 덮밥이요?”
“예. 그 가게에 맞는 걸 해야 능률이 오를 테니까요.”
당연히 분식집이고 튀김이 종류별로 있으니 이걸 응용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튀김의 퀄리티를 올릴 필요가 있다는 것.
아무래도 옛날 방식의 두꺼운 튀김이라 덮밥 식으로 먹기는 불편했다.
이건 내가 나중에 2호점에 써먹으려 했던 건데,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라 여길 빨리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괜히 더 엮였다가는 꼬일 것 같으니까.
“일단 많이 올리진 않을 겁니다. 꽈리고추, 삶은 계란, 고구마튀김 정도만 쓰고 구운 어묵을 올릴 겁니다. 소스는 일반 간장으로 만들 거고요.”
대략적인 설명만 했는데, 박수기는 생각보다 잘 알아들었다.
아마 20년 가까이 튀김을 했던 경험 때문이겠지.
치이이이익-
묽은 반죽을 묻힌 재료들이 튀겨졌다.
이 위로 젓가락을 통해 반죽물이 뿌려지면 비로소 눈꽃이라 불리는 튀김 형태가 되는 것이지.
어차피 꽈리고추만 빼면 다 여기서 파는 것들이고, 마지막으로 가져온 구운 어묵을 올렸다. 테스트 버전이 생각보다 손쉽게 나온 것이다.
“소스는 간장에 물을 타고 흑설탕과 맛술을 조금 섞을 겁니다. 이걸 끓여서 조리면 이렇게 진한 소스가 나오죠. 비율만 맞추면 거의 비슷하게 나와요.”
원래 타레소스를 알려줄까 하다가, 그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는 게 생각났다. 대파를 태우듯이 굽고 간장 소스에 오래 졸이는 방식이었으니, 여기랑 안 맞다 싶었던 것.
어차피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요즘 텐동집들은 거의 만 원이 넘으니, 5,900원이라는 가격이면 납득할 만한 수준의 맛이 아닌가.
“양은 적지만 여기에 어묵 국물 추가면 괜찮다고 보거든요.”
“확실히 그럴듯하군요.”
구운 어묵은 생신 어묵에서 만드는 걸 받아왔다.
거기 시제품들 상당수를 먹어 봤는데 딱 어울리는 매콤 어묵이 있었다. 튀긴 게 아니라 구운 거라 담백하면서 살짝 매웠고, 색상이 붉은색이었다. 여기에 고구마의 노란색, 계란의 흰색, 꽈리고추의 초록색과 어우러지니 제법 그럴듯하게 나오더라.
“와, 이런 식으로도 될 수가 있군요.”
“좀 애매하다 싶으면 튀김 부스러기를 밑에 깔아서 식감을 추가해 보세요. 그 외에도…….”
청양고추를 써서 매운 간장 소스를 만들어도 되고, 야채 튀김과 새우튀김을 추가해 곱빼기 가격을 더 받아도 됐다.
마지막으로 팁.
“절대 체력적으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걸 생각하면 한정 판매로 돌리셔야 돼요.”
“제가 체력은 좀 자신이 있습니다. 도와주기로 한 동생들도 있고요. 일단 부산대점부터 적용하고 익숙해지면 동래점도 시작할 계획입니다.”
“흐음, 어차피 기존 튀김과 다른 방식으로 튀기지만 거의 있는 재료들이니 크게 무리가 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메뉴 하나가 늘어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일단 50그릇부터 시작하세요.”
“아, 그리고 허락받을 게 있습니다.”
“뭔데요?”
“저희 고모와 삼촌 가게에서도 같이 팔아도 될까요?”
이거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데?
“사실 정기 형이 장남이긴 한데, 사이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에 가깝죠.”
첫째도 상당한 쓰레기였구나.
고모네나 삼촌 가게가 자기 가게 근처에서 영업 못 하게 패악질을 부렸단다. 먼 하단과 서동에서 장사 시작한 것이 그런 이유였다나.
“위로 누나도 한 분 계시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에 가게 접고 가정에만 충실하시겠다고. 김요성 대표님 아시죠?”
“아, 예.”
이거 뭔가 이상하게 엮이는 분위기인데?
“저희 누님 시아버지 되십니다. 생각보다 젊게 보이시지만 환갑이 훨씬 넘으셨습니다.”
“그럼 누님 나이가?”
“마흔둘이죠. 형님이 여섯 살 연하입니다.”
이제야 김요성 대표가 천만 원이란 금액을 주려고 했던 이유가 납득됐다.
한마디로 집안일이라는 거지.
어쩌면 말을 아낀 게 그래서일지도.
“어쨌든 형과 막내 빼고 다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정기 형은 너무 막 나가요. 돈으로 물어주고 덮고는 있는데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거든요.”
젊을 때는 반건달처럼 살았단다.
지금처럼 카드를 많이 쓰던 시절이 아니었고, 매일매일 가게에 현금이 쌓이니 흥청망청했다고.
회사를 만들어 회계를 투명하게 하자 심지어 아버지한테도 대들었다나.
애초에 폭력적인 성향이었구만.
“좋습니다. 하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냥 SF 푸드에 레시피 팔았다 생각하죠. 겸사겸사 서면점도 망하면 좋고요.”
무심코 본심이 나왔다.
하지만 박수기는 씨익 웃기만 하더라.
어쩌면 같은 마음이 아닐까?
“그럼 이번에는 냉라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도 고급스럽지는 않아요.”
밀면이라는 제품이 있다.
삼용 브랜드에서 나온 건데, 여기에 양념장을 추가하고 동치미 육수와 살얼음을 넣으면 된다.
이것저것 열 종류가 넘는 제품을 테스트한 결과 이게 최선이었다. 크게 일손을 늘리지 않으면서 제법 괜찮은 맛을 내더라.
고명은 시판 무절임과 가게에 있는 삶은 계란이 끝.
4,900원짜리치고는 부족하지 않겠냐 싶은데, 확인해 보니 이 근처 일본식 냉라멘은 8,000원 이상의 가격이었다.
한마디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거겠지.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