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어허, 확인해서 빼먹은 게 나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제, 제가 아는 건 전부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빠진 게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아는 건 이,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전부, 라니…… 까요?”
“확!”
“흐억!”
어르고 달래고 지지고 볶고.
조이고 풀고, 조지고 닦고.
하여간 그 귀찮고 즐거운 과정을 거쳐 가는데, 의외로 재밌었다.
차일수는 자신의 기억을 모조리 긁어가며 어떻게든 자신의 범죄 이력을 한 줄이라도 더 써내려고 발악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면에 매달린 샌드백 때문이었다.
대충 서른 개가 넘는 나무젓가락이 샌드백에 박혀 있었다.
그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할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 것이다.
그때마다 차일수는 오금이 지려왔고.
“정말 다 쓴 거 맞아?”
“예에에…….”
이제 차일수의 목소리는 거의 바닥으로 꺼져갔다.
‘무조건 꿇어야 해. 어쨌든 이렇게라도 해서 풀려날 수 있으면 돼……!!’
일단 살아나가기만 하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복수할 수 있을 터.
가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대가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헙!!”
“강압에 의한 자백이 어쩌고 할 생각인 모양인데, 난 그렇게 무르지 않아. 그건 평범한 국민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지만, 각성자는 예외거든.”
“예? 왜…… 왜죠?”
빡! 빡! 빡!
분명 후려친 건 종이였는데 나무 몽둥이로 패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차일수의 머리가 세 번이나 좌우로 흔들리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보통 사람은 이 정도면 죽거든.”
“커헉, 헉. 허어억……!!”
“봐, 넌 살아 있잖아. 그 차이라고 보면 돼.”
“마, 말도…… 안 돼…….”
이런 미친 비유라니.
차일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숙이고 있다가 맞으면 이대로 목이 떨어질 것 같아서다.
“흐어. 각성자란 이유로…… 허…… 권리가 무시되어선 안 된다고…… 새, 생각합니다.”
“이미 나라에서는 충분한 권리를 줬고, 그걸 평범한 사람들 괴롭혀서 돈 뜯어내는 데 쓴 건 벌을 받아야지.”
“겨, 경찰…… 에 자수하겠습니다.”
“그래. 현명한 선택이야.”
“제발, 풀어주…… 세요.”
“풀어준다고 했잖아. 자, 여기 마지막으로 서명하면 끝이다.”
유현성이 종이를 쓰윽 내밀자, 차일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펜을 들었다.
가까스로 서명을 마친 후 유현성이 종이를 가져갔다.
“그럼 이제 깔끔하게. 신체적 정신적 피해 보상에 대해 위자료만 정리하자.”
“예?”
“엥? 사람에게 상해를 입혀놓고 배 짼다 이거야?”
“그, 그건.”
“일단 나부터 10억.”
“도, 돈이 없…….”
차일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는 탐색전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유현성이 폰을 들었다.
-상사 이상도.
“전에 이야기한 거 리스트 보내라.”
-바로 쏘겠습니다.
“은근슬쩍 니 계좌번호 넣으면 죽는다.”
-…….
“대답.”
-보냈습니다. 확인하시면 됩니다.
“어이.”
뚜뚜뚜뚜…….
“하하, 이 녀석. 갈수록 재롱이 느네.”
유현성은 피식 웃은 뒤 폰에 들어온 내용을 확인했다.
거기에 있는 건 지금껏 삼차 클랜에 들어간, 앞뒤 맥락 없는 이체 기록들이었다.
아마도 대부분 협박에 의한 것이겠지.
이제 차일수의 자백 기록과 대조하면 이번 일은 끝이었다.
“후우, 정말 마음 편하게 라면만 끓이면서 살고 싶었는데.”
유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차일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표정 풀어. 이거, 위자료 정산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다고.”
“저 모릅…….”
쾅!
책상이 두 동강 났다.
고작 종이로 내려쳤는데.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하자!”
“예. 옙……!”
차일수는 바로 폰 비밀번호를 풀었다.
이후 작업은 순조로웠다.
이체, 이체, 이체, 이체.
대충 들어온 금액 두 배로 해서 돌려보냈더니 금세 잔고가 바닥 나더라.
그렇게 삼차 클랜의 통장이 거덜 났다.
“……이제 거지입니다. 더는 없어요.”
“뭔 개소리야.”
“잔고가 0원입니다……?”
유현성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차일수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았다.
“이제 네 통장 까야지.”
* * *
“아! 개운하다.”
구름 한 점 없는 싱그러운 여름 아침 햇살이 그렇게…… 앗, 뜨거!
흐어, 아주 사람 잡는 날씨네.
진짜 이상 기후, 이상 기후 그러는데 환장하겠다.
“오전 9시가 39.5도라니. 이게 날씨냐? 이게 날씨냐고!”
진짜 더럽게 더웠다.
한낮에 44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진짜 지옥 불반도일세.
덕분에 가게 매출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냉라면이 버텨줘서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그건 왕왕 떡볶이 역시 마찬가지였고. 냉라면과 야채덮밥의 인기 덕분에 매출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박 사장님도 답답하겠군.”
박산기는 수술도 아주 잘됐고, 후유증도 거의 없다고 했다.
문제는 날씨 때문에 퇴원이 계속 연기가 되고 있다는 점.
폐암 수술 환자에게는 지열 때문에 타고 올라오는 수증기가 썩 좋지 않다나?
반대로 알고 있었는데, 아마 환자마다 케이스가 다른 모양이었다.
뭐, 의사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어쨌든 별장 초대 건은 무기한 연기네.”
아무래도 여름이 끝나고 나서나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일단 SF푸드 일은 좀 미뤄도 되겠지.
뚜뚜뚜뚜뚜-
“이 시간이면…… 호석이인가?”
역시나 맞았다.
조온달이 점장이지만 실질적인 주방 관리는 정호석이 맡고 있었다. 매일 장을 보는 것부터 메뉴 배정까지 전부 그의 주요한 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오전마다 보고 전화를 했다.
“어, 어? 그래도 될까? 흐음. 일단 알아서 해보고, 괜히 버리는 거 부담 가지지 말고. 어, 그래 알았어.”
대수롭지 않게 통화했지만, 살짝 겁이 났다.
라면이나 불라면을 한정 수량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그걸 확 줄이겠다고 헀다.
대신 당분간은 냉라면에 올인하겠다나.
“참 복잡미묘하네.”
계속 자신이 정하다가 이제 정호석이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시원하면서 섭섭하면서 불안하기도 하고, 뭔가 심장에서 조각 하나가 빠진 느낌이랄까.
“그래도 뭐, 할 건 다 처리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삼차 클랜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됐다.
이 병신 같은 놈들, 특히 차일수가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변호사들을 대동하고 경찰서에 쳐들어갔다.
날 고소하겠다고 아주 방방 날뛰면서.
결과는 ‘그 자리에서 철컹철컹’이었다.
미리 경찰서장에게 자료를 보내놨는데, 하필이면 영장 나오는 그 시각에 당당히 들어간 것이다.
정말 나이스 타이밍이라고나 할까.
원래라면 구속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놈이 그렇게 나오자 경찰서장이 직권으로 바로 수갑을 채워 버렸다.
아마도 나에 대한 오해(?)로 인해 과잉 충성을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녀석들은 운이 아주 좋았다. 피해자들에게 뜯은 돈을 두 배로 돌려줬다는 부분 때문에 가까스로 풀려난 것이다.
물론 무죄라는 건 아니니 재판은 받아야겠지.
이후 경찰서장이 연락이 오더라.
정상참작, 혹은 집행 유예 정도로 떨어질 것 같다고.
증거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나.
특히 삼차 클랜 측의 주장이 ‘오해로 인해 받은 돈을 배로 돌려줬으니 혐의가 없다’라는 거였다.
“참 멍청하단 말이지. 조언까지 해줬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으니.”
차일수의 예금 하나하나까지 친절하게 거덜 낸 뒤, 불쌍해서 경고를 남겨줬다.
“너네 빨리 짐 싸서 도망가라. 이 동네에서 얼쩡거릴 생각 말고 저 어디 시골이나 다른 도시로 숨어 들어가 살라고.”
왜냐.
일문 길드의 잔당(?)들이 너희들을 노릴 테니까.
거기까지 설명해 줬는데도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한마디를 더 덧붙여줬다.
“삼차 클랜과 경찰이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면 어떻게 될까?”
-라고 말이다.
뭐, 친절은 거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지 팔자대로 가겠지.
잡혀서 뒤지게 처맞든가,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 사라지든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게, 일문 길드는 아작이 난 상태였다.
경찰이 사무실을 뒤져서 무수한 불법을 확인했고, 여기서 성일태가 순순히 조사에 협조해서 길드 수뇌부들이 모조리 잡혀 버렸다.
당연히 남은 이들은 뭘 하겠는가.
복수를 꿈꾸겠지.
내 개입은 없는 걸로 되어 있으니 지들끼리 아주 지지고 볶고 싸우고 터질 테고.
어쨌든 이젠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찰서장이 그러더라.
용감한 시민상 받을 생각 없냐고.
당연히 거절했다. 어으, 체질상 그런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자자, 정신 차리자. 이제 시간 얼마 안 남았다고.”
그리고 곧바로 이사(?) 준비에 들어갔다.
당분간 엘리오스 마을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으니 간단한 옷가지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챙긴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정말 마지막 일뿐이었다.
* * *
“황 실장. 잠시 이야기 좀 하지.”
김요성이 이런 식으로 한 번씩 부를 때마다 황무기는 약간 긴장이 됐다.
애초에 자신을 다시 고용한 그 의도가 문제였다.
분명 이야기 못 하는 건이라고 말했는데도, 상관없다는 듯 적절히 선만 긋고 있었던 것이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 사이에 좀 편해지면 안 되나?”
“제 일이 경호입니다. 대상에 대해 편해져서 마음을 놓게 된다면…….”
“그만하지. 자네 우려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김요성은 그렇게 말한 뒤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결국 황무기는 그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 반응은 충분히 이해를 하네. 하지만 내가 사업가라는 걸 잘 알지 않는가?”
“예.”
“그래, 지켜보니 어떻던가? 물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건 내 잘못이지만, 서서히 맞춰간다는 느낌 아니던가?”
“확실히 그렇기는 합니다.”
황무기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막 자대 입대한 이등병에서 여유가 생긴 병장처럼 팔도 풀고 등받이에 살짝 기댄 듯 움직인 것이다.
“솔직히 다시 절 부르셨을 때 의심한 건 사실입니다.”
“인정하네.”
“제 입장을 아시기에 그걸로 협박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만,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황무기는 이전처럼 딱딱하게 말하지 않았다. 감정이 바뀐 만큼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것이다.
사실, 좀 어이없기는 했다.
자신은 경호원이다.
하지만 행복 분식에서의 그 사건으로 임무를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목숨은 하나니까.
아니, 그 하나를 살려준 상대였으니까.
전역 아닌 전역을 한 이후, 그 연줄로 들어간 곳이 양현 길드였다.
최저가 D급, 평균 C급 이상의 소수정예 길드.
덕분에 갈매기 길드에서 일정 부분 일을 받게 됐는데, 수익은 썩 좋지 않았다.
결국 양현 길드는 길드원을 임대(?) 형식으로 팔았고, 그때 황무기는 오가 길드의 일을 맡게 되었다.
기꺼이 응했고, 오담비 또한 황무기의 입장을 신중히 고려해 김요성 대표의 경호를 맡겼다.
그럼에도 그 일을 접어야 했다.
“조일섭 본부장이 실수했다고는 하지 않겠네. 결국은 내 불찰이니까.”
중간 소통에 문제가 있었음을 김요성은 솔직히 인정했다.
심복에게 너무 믿고 맡기는 바람에 당시 경호팀과의 대화가 거의 없었으니까.
솔직히 그들이 행복 분식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은 김요성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때까지는 대부분 조일섭 선에서 일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경호팀은 돌아오자마자 바로 턴을 해버렸다.
유현성이 괴물이라는 이유로.
그런 판단을 내린 이가 다름 아닌 황무기였고.
“어쨌든 깨달은 바가 많았네.”
“다시금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도…… 감사합니다.”
“허허, 자네만 한 실력자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네. 심리적인 안정은 특히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해.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지.”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황무기는 진심이었다.
사실 양현 길드의 존속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양현의 이명인 ‘괴이한 불사자’.
길드원들 대부분이 그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
타 길드에 임대를 가는 방식도 다들 납득한 게 그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파견 나가게 된 오가 길드.
재정의 상당 부분이 김요성에게서 나오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임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제대로 한다고 하도 불가능한 일이라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음에도 김요성은 계약을 유지했고, 다시 자신을 불러들였다.
당연히 처음에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지난 오해는 풀었으면 하네. 어차피 지금은 그때와 상황도 다르고 자네의 조언이 꽤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니까.”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
황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웃은 김요성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물었다.
“자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이미 몇 차례 말씀드렸지만…….”
“아니, 그냥 자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거야. 기밀이야 당연히 안 되는 거지만, 본인 과거 이야기는 문제가 안 되지 않는가.”
“……그건 그렇습니다.”
김요성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말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네. 그럼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