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축하 사절단으로 온 건가?”
등에 실린 짐을 보니까 뭔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모양이었다.
전에 얼핏 라이노스 장로가 알려줬다.
엘리스의 여왕 등극 선물로 각 종족들이 이런저런 걸 보내왔다고. 그리고 공식 행사를 하게 되면 축하 사절단이 방문하기로 했단다.
“아마도 그런 쪽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누룽지 주먹밥에 열중했다.
이게 참 해보니 응용 방법이 넘쳐났다.
따지면 내용물만 바꾸면 새로운 음식이 되니 의욕이 폭발하더라.
“일단 열 가지 다 하기는 좀 무리고, 종류를 줄여야 할 것 같은데?”
“주력으로 나가는 게 여섯 종류고요. 나머지는 마니아 층들이 좋아해요. 특히 엘프들은 느끼한 걸 좋아하더라고요.”
“치즈 두 배랑 마요네즈 불고기?”
“근데, 그게 우리 쪽 입맛하고는 거리가 있잖아요. 단가도 애매하고요.”
손강희의 평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치즈 두 배는 진짜 애매했다.
모짜렐라 치즈와 체다 치즈를 듬뿍 올려 토치로 살짝 그을려서 녹인 뒤 불고기를 올리는 거였는데, 솔직히 한식파인 내 입맛에는 상당히 느끼했다.
거기다 문제는 치즈 가격이 비싸다는 것.
특히 우리나라는 외국보다 치즈 가격이 사악했다.
근데 또 팔리니 안 팔 수도 없고, 찾는 엘프들이 제법 있어서 빼기도 애매했다.
“그냥 과감하게 빼버릴까?”
“전 찬성. 사실 손이 많이 가는 메뉴이기도 하니까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대부분은 밥을 구워 준비한 토핑을 올린 뒤 말아 버리면 끝이었다.
몇몇 메뉴는 거기에 소스가 들어간다는 정도?
“그럼 정리하자. 일단 메인이 제육, 소불고기, 간장 어묵이고, 다른 하나는 스폐셜이면 되겠지?”
“그리고 계란말이하고 샐러드면 충분할 것 같아요.”
“남은 건 가격인데, 원가 생각하면 어느 정도면 괜찮을까?”
“본성 푸드가의 경우, 슬쩍 보니까 밑에서 파는 것보다 500원씩 올렸더라고요. 관광지 요금이라 생각하면 납득이 되니까 그 정도에 맞추면 될 것 같아요.”
본성 푸드가의 주력 김밥인 본성 김밥은 3,500원이었다. 거의 일반 김밥인데도 들어가는 게 많았고, 두께도 커서 푸짐했던 것이다.
스폐셜은 5,500원.
아주 그냥 이것저것 다 때려 넣은 김밥이라고 보면 됐다. 한 줄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으니 가성비도 좋은 편이었고.
“그럼 우린 스폐셜 빼고 3,000원으로 통일하자.”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손강희도 아마 원가 계산을 해봤을 거다.
대충 밥은 양이 적으니 150원 정도, 양상추에 양배추는 시세 변동에 따라 100원에서 250원 정도 나온다.
메인 토핑인 고기 종류는 500원 이하.
이래저래 다 포함해도 1,000원이 안 넘으니 3,000원이면 적절하다 볼 수 있었다.
왜냐. 우리는 박리다매로 갈 예정이니까.
“오케이, 그럼 그렇게 정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짜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해 둔 거 있어?”
“인원수 말하는 거죠?”
“난 여기 계속 붙어 있을 수 없잖아. 최소 네 명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있나?”
갑자기 손강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지 싶었는데, 저 뒤에서 일하고 있는 현지를 쳐다보더라.
“아마 엘프족에서 지원자가 있기는 한데…… 크흠.”
“미리 말하는 게 좋지 않아?”
“그게…… 현지 남자 친구.”
“뭐?”
이건 또 무슨 뒤통수에 못 박는 소린가?
“현지가 남자 친구가 있다고? 그것도 엘프?”
“나중에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아니, 이게 일하라고 보냈더니 연애질만 한 거야?”
“그냥 먹을 거에 낚인 케이스에요.”
“어우, 머리야. 언제부턴데?”
“그게…… 치킨 튀길 때부터요?”
“미친.”
대충 치킨으로 엘프를 꼬셨다는 말인데.
순간 황당함이 느껴졌다.
듣기론 현지도 대학에 들어가서 잠깐 남자 친구를 사귄 걸로 알고 있었다.
근데 한 달도 되지 않아 헤어졌다.
그 남자 친구라는 놈이 자꾸 이 여자 저 여자 찝쩍거리다 걸려서, 현지가 거시기를 까버렸단다.
그게 전치 2주였나?
치료비를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냥 훌쩍 일본으로 유학을 가버렸단다.
겁나게 쪽팔리다는 이유로.
이후 현지는 잠깐 잠깐 썸을 탔지만 연애는 하지 않았었다.
근데 엘프 남자 친구라니.
“좋아. 그 부분은 내가 나중에 물어보면 될 거고, 어쨌든 엘프 두 명은 확실한 거야?”
“엘리스 여왕님께서 부족한 인원은 지원해 준다고 했어요. 아마도 인원 부족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아! 일단 오케이.”
안 그래도 엘리스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밀어줄 땐 확실하게 해주는데, 곤란한 부분도 적지 않았던 거다.
사실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이유도 엘리스 때문이 아닐까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 있었다.
가게에서 썸 비슷한 게 들어와도 슬쩍 한 번 왔다 가면 다 사라지더라.
하긴 그런 외모에 엘프족 여왕이라는 위치, 재력은 말할 것도 없고, 능력 역시 평범한 여자들과 달랐으니까.
어쨌든 엘리스가 주변을 맴도는 이상, 그리고 대놓고 결혼하자고 조르니 누가 달라붙겠는가?
심지어 손강희조차 엘리스가 다가오면 얼어붙을 정도니 말 다했지…….
“그럼 나랑 결혼하면 되잖아요.”
어느 순간 나타난 엘리스가 말했다.
인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불쑥 나타날 줄은 진심으로 몰랐다.
“너 독심술 쓰냐?”
“오빠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죠. 헤헤.”
“나 결혼 생각 없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될걸요?”
어우, 소름.
가끔 미래를 보는 엘리스이기에 그 말이 더욱 섬뜩했다.
무엇보다 결혼을 하게 되면 엘프족들을 이끌어야 한다.
딸린 식구들이 수백 명이나 되니 당연히 꺼릴 수밖에.
“됐고, 무슨 일인데?”
“잠깐 저 따라가요.”
“왜?”
엘리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
* * *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분명 회의실이건만 분위기가 자못 심각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백곰족이 있었다.
“위대하신 분이여. 잠깐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되십니까?”
“종족의 새 족장 아만트라고 합니다.”
“원래 족장은 아루가 아니었던가요?”
“제 부친 되십니다.”
세대 교체가 있었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데.
가만히 아만트를 쳐다봤다.
처음 이들을 게이트 밖으로 인도했을 때는 지금보다 체구가 컸다. 평균 2미터 전후에 진짜 곰을 연상시킬 정도의 덩치.
특히 백곰족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하얀 털이 거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많이 바뀌어서, 이제는 조금 큰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마도 이 시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조금씩 변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부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상하다.
저들의 평균 수명은 120살 정도로 알고 있는데, 아루가는 아직 80살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죽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가?
“저희 쪽에 게이트가 생겼습니다. 부친께서 들어가셨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요?”
“문제는 일족의 신물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신검 오로라입니다.”
윽.
일전에 우리 집 거실에서 뒹굴면서 엘리스가 예지몽을 꾸었지.
그때 분명 ‘오로라’라고 웅얼거렸다.
“자세한 사정이나 들어봅시다.”
“예.”
백곰족 탐색대가 게이트로 들어갔는데, 그 너머의 세상은 열사의 사막이었단다. 레드 바질리스크 무리로 인해 밀림 상당수가 불태워진 후 그런 환경으로 바뀐 것 같다는 것이다.
문제는 백곰족들이 열에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결국 일족의 신물을 가지고 들어가게 됐는데…….
“신검 오로라는 냉기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음을 다스릴 수 있고, 일정 기간마다 비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루가가 그 검을 들고 게이트로 들어갔다 사고를 당한 거군요.”
“맞습니다. 부친의 사고는 괴롭습니다만, 저희는 반드시 오로라를 회수해야 합니다.”
“왜죠?”
“최근 이상 기온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평균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상황이니 진짜 미친 날씨였다. 나름 바닷바람으로 인해 시원하다는 부산조차 그럴 정도였고, 저 위 동네는 45도 이상을 찍었다고 들었다.
설마 오로라가 사라져서 그렇다는 건가?
“저희 백곰족은 열에 취약합니다. 오로라가 없으면 이 나라를 떠나든가 가만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마디로 종족의 존망이 달린 것이죠.”
“그래서 오로라가 필요하다?”
“예. 그리고 지금의 이상 기온 현상을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습니다.”
그 신물이 그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나?
“오로라로 저희 쪽에서 산만 한 얼음을 만들면 그게 바람을 타고 인근을 휘감습니다. 그걸 반복하면 한반도 인근의 공기가 상당히 내려갑니다.”
“그래도 여기까진 미치지 않을 텐데요?”
“그럴 땐 먹구름을 불러와 비를 뿌립니다. 대충 강원도 절반 정도는 커버할 수 있습니다.”
“헐.”
괜히 신물이 아니었네.
근데 이게 내가 나설 일인가.
“대충 이해는 합니다만,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헌터들을 고용하든가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레드 바질리스크가 수십, 어쩌면 백여 개체에 이릅니다. 게다가 헌터청 고위층에게 도움을 청했음에도 거의 한 달째 연락이 없습니다.”
“고요환 헌터는요?”
“지금 남해 쪽 게이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최소 보름은 넘어야 가능하다고 하네요.”
“그럼 기다리면 되지 않습니까?”
아만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미 게이트에서 레드 바질리스크 세 마리가 나온 상황입니다. 겨우 처리하긴 했지만 일족의 피해가 상당합니다. 게다가 언제 게이트가 터져서 저들이 나올지도 모르고요.”
“흐음…….”
“마지막으로, 부친께서 이야기하신 게 있습니다.”
갑자기 슬쩍 불안해졌다.
아만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분과 일족이 맺은 약조가 있다고, 한 번 정도는 도와줄 거라 하셨습니다.”
하아, 왜 이 이야기가 안 나오나 싶었다.
엘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곰족, 혹은 다른 종족들에게도 빚이 있기는 했다.
게이트 토벌 과정에서의 실수로 위기에 처했을 때, 저들이 뒤늦게 나타나 큰 도움을 주었다.
거의 절반 이상의 헌터들이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여섯 종족이 아니었다면 전부 몰살당했을 터.
이후 몇 가지 조건만 맞으면 돕기로 했는데, 그걸 이렇게 쓰다니.
“골치 아프네.”
“오빠. 도와줘.”
“아니, 언제 태백산맥까지 가서 게이트 처리하고 신검 오로라를 찾고 돌아오냐고. 곧 장사 시작인데…….”
“그건 내가 해결해 줄게.”
“어떻게?”
“세계수의 힘을 빌리면 백곰족 마을까지 게이트를 열어줄 수 있어. 인근에 통로를 만들어놓으면 돌아오는 것도 문제는 없을 거야.”
확실히 엘리스와 세계수라면 불가능하진 않겠네.
하지만 다시 게이트로 들어간다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생전의 아루가와 인연이 있으니 백곰족의 상황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어차피 레드 바질리스크 정도면 문제없잖아.”
“그 숫자가 백이 넘어가면 상당히 피곤해지거든. 적어도 며칠은 나도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무장하면 금방일 텐데?”
“으으으, 넌 너무 나를 잘 알아서 문제야.”
확실히 그렇게 하면 문제는 없겠지만, 더 강렬한 피 냄새를 맡아야 한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위대하신 분만이 저희 일족을 구해줄 수 있습니다.”
“대신 조건 하나만 겁시다.”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신검 오로라를 가져오면, 이 동네부터 비를 내리게 하고 싶습니다만.”
나 역시 최근의 더위에 짜증이 폭발하던 터였다. 이게 더워도 보통 더운 것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장사에 영향이 컸다.
“그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 그럼 바로 출발하죠. 저 바쁘거든요.”
그때 엘리스가 말했다.
“그럼 게이트를 열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