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언제 봐도 신비로운 세계수.
그 아래 나와 엘리스, 백곰족의 족장 아만트가 자리했다.
또, 함께 따라올 두 명의 상급 엘프 전사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하고 보조를 하기 위해 동참한 것이다.
엘리스가 세계수를 바라보며 이마에 손을 대었다.
그에 공명하듯 가지들이 떨리더니 이전처럼 아름답게 분홍빛 잎사귀들을 날렸다.
그게 바람을 타고 엘리스를 휘감았다.
정말 신비롭고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오오오오-
마치 노랫소리와도 같은 울림이 퍼진 뒤.
우우우웅-
환한 분홍색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이제 들어가시면 돼요.”
“이거 진짜 안전한 거 맞지?”
“오빠, 나 못 믿어요? 설마 남편을 사지로…….”
“스탑, 알았어. 알았다고.”
빠르게 입을 막고 제일 먼저 아만트를 보냈다.
뜬금없이 게이트가 생기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튀어나오면 당연히 경계하지 않겠는가.
“다녀올게.”
엘리스에게 그렇게 말한 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훅 밀려오는 열기.
“와…… 더럽게 덥네.”
분명 나무와 수풀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악 마을이건만, 이건 3~40도 수준이 아니었다. 진짜 한증막 사우나에 막 들어섰을 때의 그런 느낌이랄까.
곧이어 엘프 전사 둘이 들어왔고, 동시에 거친 숨을 내쉬더라.
금방 적응이 되겠지만 그래도 후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가 저희 마을 입구입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아만트가 앞장서자 일단 따라갔다.
대충 돌아보는데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그냥 산골 마을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농지도 개간되었고, 심지어 밭을 가는 소까지 보였으니까.
“많이 변했군요.”
“예. 현대식 농기계들을 도입하기는 무리였지만 저희 방식으로 농지를 개간하고, 축사를 도입했습니다. 최소한 자급자족은 가능한 수준입니다.”
“사냥은 하지 않습니까?”
“적당한 수준으로 합니다. 작물에 피해를 주는 멧돼지나 위협적인 동물들은 이제 마을 인근으로는 오지 않습니다.”
“씨를 말린 모양입니다.”
“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근처에서 보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돌려서 말했지만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점점 안으로 들어가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을 왼편으로 대여섯 개의 가옥들이 박살난 것이 보였고, 아예 산산조각이 나서 잔해만 남은 건물들도 몇 채나 보였으니까.
“아직 복구가 다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럼 게이트는 어디 있습니까?”
“이쪽으로.”
아만트가 가는 길마다 백곰족들이 경례를 붙였다.
그들을 지나쳐 부서진 가옥 너머로 가자 재수 없게도 시뻘건 게이트가 보였다.
크기도 더럽게 컸는데 대충 3층 건물만 했다.
하긴, 레드 바실리스크가 튀어나오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자, 간단히 말하면 안으로 들어가 신검 오로라를 찾아오면 된다. 이거죠.”
“가능하면 게이트가 닫히는 게 좋습니다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일족의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
“최근에 조금 늘어서 오백 전후입니다.”
“흐음.”
약간 놀랐다.
처음 데려왔을 때는 고작 백여 명 정도였는데 불과 삼 년 사이에 이렇게 늘어나다니.
가만 생각해 보니 이들은 한 번에 둘 이상의 아이를 가진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지.
“오백 전후면, 하아…… 알겠습니다. 일단 게이트에 들어가겠습니다.”
상급 엘프 둘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왔던 게이트를 지키도록. 누구도 출입 못하게.”
“예, 전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헐, 누구 마음대로 나를 지들 왕으로 만들어.
어째 라이노스 장로가 기를 쓰고 상급 전사 둘을 붙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들 한통속이라는 거지.
하지만 여기서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난 들어간다.”
* * *
“후우, 덥다.”
이건 뭐, 내가 겪는 표현 이상의 열기였다.
최소 50도 이상, 어쩌면 70도 근처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 헌터가 아닌 일반인이라면 정말 10분도 못 견딜 거다.
이러니 백곰족이 그렇게 고생한 거겠지.
“어쨌든 이 도마뱀 새끼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이렇게 덥다는 거란 말이지?”
아만트가 말하길, 게이트가 처음 생성될 때 어마어마한 열풍이 몰아쳤다고 하더라.
이후, 이상 기온이 생겼다.
차츰 주변 온도가 올라가더니 서서히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X발,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니들은 다 죽은 목숨이다.”
솔직히 카페나 크레페, 짬뽕집과 본성 푸드가는 완전 실내였다. 에어컨만 빵빵하게 틀면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행복 분식 2호점은 달랐다.
일단 주요 조리대인 철판이 바깥에 있었다. 그 앞에서 누룽지 밥버거 만드는 걸 보여주면서 판매하기 위해 반오픈을 선택한 것이다.
지글지글, 지글지글.
토핑 얹고 삭삭 말아서 종이 용기에 탁.
수십, 수백 차례 연습하면서 특히 짜증 나던 게 이 빌어먹을 더위였다.
진짜 숨이 턱턱 막힌다고나 할까.
나보다 더한 건 핫도그 사장님이었다.
따로 신메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평소처럼 만들어 엘프들한테 파는데, 정말 죽으려고 하더라.
오죽했으면 후다다닥 만들고 크레페 가게 들어가서 쉬다 나오겠는가.
솔직히 오로라고 오로X민 C고 상관없이 진심으로 여길 박살 내고 싶을 정도였다.
감히 내 장사를 방해하다니.
크흠, 너무 흥분했군.
아만트에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못이기는 척 받아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이상 기후 때문에 백곰족은 탐사대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상당수가 죽어 나갔다.
동시에 신검 오로라를 회수하지 못했다.
“회수하는 겸, 아작을 내주마. 그런데 막막하네.”
곳곳에 바위산들이 보이는 걸 제외하면 정말 모래 바다였다. 사막 너머에 밀림 같은 곳이 보였고, 중간중간 작은 숲이 있는 게 다행일 정도.
“옛날 생각 나네. 일단 분석부터 하자.”
군 시절 때부터 했던 탐색의 기본이 이거였다.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일단 레드 바실리스크.
바실리스크는 많은 영화나 게임, 소설에 등장하는 놈이다.
외형은 조금씩 다른데 뿔이 있고 기다란 뱀의 몸체에 가까운 녀석이 있는가 하면, 닭대가리에 꼬리만 도마뱀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동네 바실리스크는 달랐다.
다리 짧은 갑피 도마뱀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
다만 편의상, 정부에서 그런 도마뱀 종류를 통칭 바실리스크라 명명했을 뿐.
“이놈의 특징은 화염계 내성이라는 점. 일 년에 한 번 짝짓기를 하고 끝난 직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것. 성격이 흉포해 배가 고프면 자기들끼리도 잡아먹는다는 것.”
아마도 게이트 밖으로 나간 세 마리 바실리스크는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놈들이 틀림없었다.
“그럼 놈들의 숫자는 최소 육십 개체 정도 된다는 건데. 여기서 보스급이 광란을 하면 절반 정도는 게이트 밖으로 도주할 테지.”
레드 바실리스크 서른이면, 백곰족 오백이선 감당하기 어려울 거다.
“그래, 화끈한 동네에 왔으니 기왕 하는 거 화끈하게 정리하자. 신검 오로라를 찾은 다음 게이트가 닫힐 만큼 조져 버리면 되겠지.”
보통 이런 경우는 보스를 잡으면 끝난다. 놈 속에 있는 던전 코어만 박살 내면 되니까.
“일단 무장부터.”
레어에서 전용 장비를 꺼냈다.
손맛도 좋지만 갑피 도마뱀에게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였다. 특히 화염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마법 내성이 뛰어난 놈들이었다.
슈우우욱-
커다란 대검에 긴 꼬리가 달린 흑색의 갑옷.
다만 그의 특성에 맞게 중갑이 아닌 경갑에 가까운 형태였다.
“우읍.”
실제로는 아니지만, 피 냄새가 훅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 용갑에는 과거의 기억이 깃들어있기에.
“이래서 무장하는 걸 싫어했는데.”
다시금 사막을 쳐다봤다.
“이제 사냥의 시간이다.”
* * *
검은 대검이 휙 지나갔다.
촤악!
레드 바실리스크는 갑피 도마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단숨에 두 쪽이 나버렸다.
바로 다음 대상을 물색했다.
“탐지.”
말이 끝나자마자 그를 중심으로 하얀 원이 사방으로 퍼졌다.
마침 한 놈이 겁도 없이 다가오고 있더라.
아마도 죽은 동료를 먹이로 삼으려는 모양이었다.
갑피 도마뱀이 사방으로 모래를 튀기며 버스만 한 몸통을 드러내었다.
“많이 배고팠냐? 그럼 이거나 처먹어.”
검이 바닥을 찍었다.
푸화하학-!!
모래를 가르고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하얀 선!
그것이 단숨에 바실리스크의 몸통을 두 조각으로 만들었다.
미처 괴성을 지를 사이도 없이.
“후우, 대충 서른 마리도 넘게 잡았네. 근데 대체 오로라는 어디 있는 거야.”
중심이 되는 커다란 바위산을 제외하고 이미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냉기에 대한 탐지에도 뭐 하나 걸리는 게 없더라.
“이럼 곤란한데.”
중심 바위산 부근에 보스가 있었다.
만약 오로라를 찾지 못하고 보스를 먼저 죽여 버리면 게이트가 닫힐지도 모를 노릇.
때문에 주변을 먼저 수색한 건데, 정말이지 흔적도 보이지 않더라.
“진짜 보스를 조져야 하나? 아니면 나머지를 사냥해?”
어차피 다 쓸어버리면 보스가 알아서 날 잡으러 올 거다.
해서 도망치는 놈들은 살려둔 상황.
쫓아가서 잡는 건 일도 아니지만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엉? 이건 무슨 상황?”
분명 튀었다고 생각했는데, 열 개체 이상의 바실리스크가 모래에 몸을 묻은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병신 같네. 덩치가 버스만 한 놈들이 그런다고 모습이 감춰질 것 같나.”
포위당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이럴 땐 보통 한쪽부터 박살 내고 빠져나가는 게 정석.
“이쪽이 세 마리.”
피식 웃고 그 방향을 향해 발을 내리찍었다.
쿠웅!
동시에 세 마리의 바실리스크가 하늘로 치솟았다.
무려 10여 미터나.
그들의 무게와 덩치를 생각하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유현성이 그사이로 파고들었다.
촤아악. 촥!
검은 대검이 X를 그리고 다시 한곳을 내질렀다.
두 마리는 네 조각이 되었고, 남은 한 마리는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쿵, 쿠쿵.
떨어진 바실리스크를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놈들은 배를 가르는 게 제일 쉽지.”
갑피 도마뱀의 경우 대부분 딱딱한 비늘로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복부만은 달랐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아마 소화기관 때문이겠지.
“이제 일곱인데…… 갑자기 이 지랄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지면에서 튀어나온 바실리스크 둘.
촤악!
“다섯! 원래 단체 행동하는 놈들이 아닌데.”
다른 바실리스크들이 정면에서 크게 입을 벌렸다.
유현성의 대검이 크게 휘둘러졌다.
푹, 후우우웅-!!
입안을 뚫고 들어간 대검이 왼쪽으로 휘둘러지며 옆에 있던 바실리스크 두 마리까지 쪼개 버렸다.
“남은 건 둘인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좌우에서 바실리스크들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 알겠다.”
유현성의 몸이 그 자리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검이 길게 휘둘러지며 남은 두 마리가 쪼개지는 순간.
퍼어어엉-!!!
정면에서 모래가 폭발했다.
이전과 다른, 정말 3층 건물만 한 놈이 튀어나오며 커다란 입을 벌렸다.
바로 레드 바실리스크들의 보스.
푸화하하하하학-!!!
놀랍게도 놈의 입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졌다. 후끈한 열기를 사방에 퍼트리며 그를 덮쳐간 것이다.
거의 5초 넘게 퍼부어진 브레스.
이내 바실리스크 보스가 입을 닫으며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목소리가 들렸다.
“이 도마뱀 새끼. 감히 누굴 불 마사지해.”
황당하게도 모습을 드러낸 유현성의 갑옷에는 그을린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광채가 뿜어지는 느낌까지 들 정도.
“넌 진짜 신검 찾는 것만 아니었으면 죽었다.”
파동? 살기?
그런 걸 넘어선 뭔가가 유현성에게서 뿜어졌다.
그러자 레드 바실리스크 보스는 겁을 먹었는지 몸을 바로 돌렸다.
그때였다.
유현성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