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레드 바실리스크 보스.
도망치는 녀석의 오른 뒷다리에서 잠시 빛이 번뜩였다. 아마도 햇볕에 반사된 거겠지.
중요한 건 거기서 피어오르는 미세한 냉기였다.
그건 곧 오로라라는 증거.
“열사의 사막에서 처음 느끼는 기운이니, 분명하겠지.”
유현성은 앞뒤 가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모래들이 솟구치며 파도를 일으켰다.
“저 새끼 저거, 겁나 빠르네.”
지금까지 겪었던 바실리스크들과 달리 거의 두 배 이상의 속도였다.
하지만 몇십 초 정도면 충분히 따라잡을 것 같았다.
“에이씨, 하필.”
거의 열 마리 정도 남아 있던 나머지 바실리스크들이 앞을 막아선 것이다.
보스의 지시인지, 혹은 보스가 죽으면 이 세계가 붕괴한다는 걸 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놈들은 이지보다 본능이 강했다.
“비켜.”
유현성의 대검이 아래에서 위로 크게 휘둘러졌다.
퍼어엉!!
모래가 산처럼 솟구쳤고, 대여섯 마리의 바실리스크가 거기에 휘말렸다.
그놈들을 무시하고 남은 놈들에게 집중했다.
다시 대검이 사선으로 바닥에 박혔다.
쿠우우우웅!!
커다란 파동이 일대를 휘감았고 순간적으로 지진이 온 듯 바닥이 흔들렸다.
그 직후, 나머지 바실리스크들이 튕겨나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목표는 오직 보스뿐이니 치워 버린 것이다.
파앙!
유현성의 신형이 한 줄기 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레드 바실리스크 보스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잡았다.”
그렇게 반쯤 박힌 오로라의 손잡이를 잡은 순간, 곧바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쩌정-!
단숨에 보스의 다리가 얼어붙자 더 강하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대로 얼음이 된 바실리스크 보스.
유현성은 신검 오로라를 단숨에 앞으로 휘둘렀다.
콰장창-!!
바실리스크 보스의 커다란 육체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핵심이 되는 코어조차 남김없이.
“역시 술래잡기 같은 게 제일 귀찮단 말이야.”
정면에서 치고받고 하는 거야 어떻게든 결판이 나게 되어 있지만, 상대가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면 쉽게 끝을 보기 어려웠다.
물론 놈이 부하들을 동원해 단 한 번 승부를 걸어왔다.
“하필 그 최후의 수단이 나한테는 가장 별 볼 일 없는 공격이었다는 게 실패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서서히 세계가 무너지려는 징조가 보였다.
“역시 여기는 바실리스크가 주축인 세계라는 거군.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어.”
그렇게 안도하는데, 뭔가가 떠올랐다.
“근데…… 들어온 게이트가 어느 방향이지?”
열사의 사막.
중심의 커다란 바위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모래 지평선뿐.
간간이 밀림이 보이긴 했지만, 그걸로는 방향을 찾기 어려웠다.
“으아아 X발!! 진짜 망했네!!”
* * *
“아만트 님, 변화가…… 보입니다.”
기괴할 정도로 열기를 내뿜던 게이트가 갑자기 요동을 쳤다.
그 진동에 근처에 있던 이들이 휘청거렸고, 그건 일족의 최강자인 아만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직후, 무시무시한 열풍에 게이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부우우우우웅-
“으헉, 폭풍이다!! 모두 엎드려!!”
아만트의 말에 다를 몸을 바닥에 던졌고, 일부는 근처 파괴된 집들의 잔해를 붙잡았다.
다들 가까스로 버텼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들린 기이한 울림.
파아아앙-!
게이트 전면으로 커다란 원형의 파동이 퍼졌다.
그 직후, 단말마와 같은 느낌의 열폭풍이 파동의 흔적을 따라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휘잉-
짧지만 위력은 강력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집채들의 흔적까지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 시간은 수초에 불과했다.
곧 먼지가 걷히고 상황이 드러났다.
정말 처참했다. 마치 허허벌판이나 된 듯 인근 30미터 가까이가 평지로 바뀐 것이다.
겨우 몸을 일으킨 아만트가 주위를 둘러봤다.
“끄으윽…… 이건 심각하군.”
아만트는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재해급의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오기 전 뿜어내는 일종의 알림이자 경고.
‘내가 곧 너희 앞에 모습을 보이니 대항할 생각하지 마라’.
하지만 정반대도 있었다.
게이트 너머의 주인이 죽음을 맞으면서 그 세계의 마력이 폭주하는 경우였다.
‘이미 세계를 제패했으니 다른 차원을 열겠다’.
그런 의지로 쏟은 마력은 곧 게이트로 이어진다.
하지만 주인이 죽으면 그동안 쏟아부은 마력의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게이트의 에너지가 폭주한다는 의미.
물론 이건 수많은 가설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게이트에 대해 함부로 정의 내리지 마라.
이게 현재 가장 통용되는 말이었고, 실제로도 예측을 벗어난 경우도 많았다.
이러이러한 현상이 많이 벌어졌으니 그렇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었으니까.
“실패인가, 성공인가.”
아만트는 진심으로 성공을 기원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 말이다.
그건 부친 아루가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루가는 현존하는 다섯 영웅에 필적하는 능력자였다.
인간들 기준으로는 거의 S급 정도.
그런 부친이 신검 오로라를 가지고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
드드드드드…….
게이트의 흔들림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었다.
진동은 조금씩 커져 갔고, 이제는 지면이 물결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흑, 아만트 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기다리는 것뿐. 아쉽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다. 그냥…… 마음 편하게 먹도록.”
성공이면 모를까, 실패의 경우 대피는 의미 없었다.
일반적으로 재해급 몬스터가 게이트를 나오면 그 일대는 모조리 증발하는 법이니까.
그때, 다른 일족 하나가 다가왔다.
“아만트 님! 게이트가 또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만트는 다시금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정말 미세하지만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면서 크기까지 조금씩 줄고 있었으니…….
그때였다.
뭔가가 게이트 밖으로 쏘아지듯 튕겨 나왔다.
동시에 욕설이 들리더라.
“X발. 죽는 줄 알았네.”
* * *
“둘이서만 이야기하죠.”
그렇게 말하자 상급 엘프 둘이 손을 이마에 대었다.
“예, 전하. 뜻대로.”
“나 아직 결혼 안 했다. 멋대로 니들 왕으로 만들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전하.”
“아오, 확!”
“바로 나가겠습니다.”
상급 엘프 둘은 진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직후, 아만트가 한마디 하더라.
“크흠…… 저희 일족에도 제법 괜찮은 여식들이…….”
“오로라 안 줍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그런 이야기는 지겹거든요. 당신네들이야 오래 살아서 그런 거 모르겠지만, 인간들은 달라요. 수명이 짧기에 보다 열정적인 사랑을 한다고요.”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인간들보다 수명이 길다.
그렇다고 사랑을 안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정말 느긋한 편이었다.
엘리스에게 듣기로 연애만 200년 하다가 결혼한 부부도 있다고 했으니.
어우, 징글징글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보통의 이종족들은 한창 연애를 하다, 이제 당신 이외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을 때 결혼식을 한단다.
연애하고, 사랑하고, 결혼한 뒤에 바람도 피우고 이혼도 하는, 우리 인간들과 아예 정서적으로 다른 것이다.
솔직히 엘리스가 특이한 편이지.
“괜한 이야기로 사람 붙잡아놓을 생각하지 마시고,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예? 오히려 제가 상황을 묻고 싶습니다만?”
“게이트 입구요. 완전히 뭐가 박살 났던데.”
“아, 제 짧은 견해는 이렇습니다.”
아만트는 게이트가 터지기 전의 현상이라고 짧게 설명했다.
게이트를 만든 이가 죽게 되면서 거기에 쏟아부은 마력이 통제를 잃고 폭주했다는 것.
“흐음, 그거 이상한데요? 아무리 봐도 그렇게 강한 개체로 보이진 않았습니다만.”
“예에? 그럴 리가요. 전조 증상만 봐도 충분히 그 이상이었습니다. 최소 S급의 헌터 스물 이상이 들어가야 겨우 막아설 정도라고 저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만.”
“뭐, 그건 맞긴 한데…… 가만? 따지면 재해급…… 일지도 모르겠군요.”
아주 쉽게 처리하긴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설마 나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건가?
“대체 어떤 놈이었습니까?”
“레드 바실리스크 보스죠. 크기는 대충 3층 건물 정도는 되는 것 같고, 좀 특이한 건 브레스를 뿜었다는 거…….”
“브, 브레스요? 그럼 거의 아류 드래곤이…….”
“감히 그딴 도마뱀과 비교하지 마시죠.”
유현성과 시선이 마주친 아만트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자신 역시 아버지에 비해 모자라지만, 인간들 기준으로 A급은 넘은 실력자였다. 이번의 경우야 환경적인 문제 때문에 능력의 절반도 발휘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자신이 눈빛 한 번에 석상처럼 굳어 버리다니.
“위대하신 분이시여. 노여움을 푸소서.”
“나 별로 안 위대하거든요. 그냥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하여간…… 어? 설마 그런 건가?”
유현성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다.
레드 바실리스크 보스는 불 속성이었다.
반대로 오로라는 얼음 속성.
그게 한쪽 다리에 절반쯤 박혀 있었으니 제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즉, 게이트에 마력을 쏟아부은 이후 신체에 약점이 박혔으니 원래 예정과 어긋났을 거다.
아마도 다시 힘을 비축한 뒤 바깥으로 나가려 한 거겠지.
그렇게 말하자, 아만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맞습니다. 당신의 부친이자 내 친구였던 아루가는 아주 용맹한 전사였습니다.”
레어에서 신검 오로라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당연하게도 내 손은 멀쩡했다.
하지만 커다란 신검의 손잡이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걸 본 아만트의 눈빛이 서서히 흔들렸다.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유현성이 밖을 나갔다.
곧, 통곡의 외침이 마을을 뒤흔들었다.
* * *
“반드시 약속 먼저 지키겠습니다.”
유현성을 보는 아만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그게 솔직히 조금은 부담스럽더라.
어쨌든 이번 임무는 아주 손쉽게(?) 끝났다.
이제 엘리오스 마을로 돌아가 비만 한바탕 쏟아붓기만 하면 여름의 끝자락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겠지.
아울러 바로 장사 개시다!
그런 마음으로 상급 엘프 둘과 아만트와 함께 게이트로 들어갔다.
우우우우웅-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지고 풍경이 바뀌었다.
세계수가 환영하듯 따뜻한 잎사귀들을 사방으로 퍼트렸고, 그 앞에서는 엘리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잘 다녀왔어요?”
“그래. 다녀왔어.”
“역시 우리 남…….”
“앵기지 마라.”
손으로 가볍게 이마를 밀자 엘리스가 삐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걱정했단 말이에요.”
“미래를 꿈꾸는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벌써 사흘째인걸요?”
“어? 그게 무슨…….”
잠시 이해가 안 됐다. 분명 게이트 안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 정도였고, 아만트가 감정 추스르는 걸 기다린다고 보낸 시간도 겨우 한 시간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어이가 없어서 아만트를 쳐다봤다.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예.”
“위대하신 분께서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이틀 반 정도가 걸리셨습니다.”
“예에? 그렇게나요?”
“게이트마다 시간 흐름이 다른 경우는 상당수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확실히 그런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바깥하고 거의 열 배 이상 차이가 나다니, 이건 좀 너무한데.
정말 재수 없으면 결혼하고 들어갔다 나왔더니 와이프가 할머니가 되어 있는, 그런 케이스가 될 수도 있었다.
어우, 소름 끼쳐.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그 오로라의 능력을 보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이제 비 좀 내려 보자, 이 말이다.
다행히 아만트는 군소리 않고 신검 오로라를 꺼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그걸 나한테 내밀더라.
“주문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직접 해보시는 것도 하나의 경험이 될 겁니다.”
“마력을 넣고 주문을 외우면 된다는 겁니까?”
“예. 그 직후 검을 바닥에 박으면 그 기준으로 반경 십여 키로 일대에 비가 내리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를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다음에요. 아직은 좀…… 흠흠.”
슬쩍 엘리스를 쳐다보니 이미 적당한 장소를 알아 놓은 것 같았다.
그게 하필 세계수 뒤편이었다.
“괜찮은 거야?”
“세계수도 반기는걸?”
“알았어.”
엘리스가 정한 그곳.
나는 오로라에 마력을 주입하고, 아만트가 가르쳐준 주문을 외웠다.
그 직후, 오로라를 힘껏 바닥에 박아 버렸다.
아! X발.
그게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