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제발…… 제발.”
유현성은 간절히 빌면서 뉴스를 쳐다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이 커져도 너무 커져서였다.
아주 그냥 무더위에 짜증이 나서 홧김에 마력을 다 때려 넣은 것뿐인데, 자칫 홍수가 나게 생긴 것이다.
미리 알았다면 조심했을 텐데.
* * *
-예. 19일 부산 날씨 예보입니다.
정말 오랜 무더위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간만에 시원한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그동안의 열기가 한층 가시는 기분인데요.
보시는 대로 아직 상층의 비구름이 계속 몰려오고 있어 내일까지 간간이 소나기가 내릴 예정입니다.
-20일 부산 날씨 예보입니다.
여름의 막바지에 내린 소나기가 점점 더해가는 추세입니다.
내일 새벽부터 본격적으로 호우가 예정이니 미리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21일 부산 날씨 예보입니다.
이번 비는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만, 아직 비구름이 여전히 머물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22일 부산 날씨 예보입니다.
벌써 사흘째 내리던 비는 여전히 그 기세를 잃지 않고 점점 더 거세어지는 추세인데요. 온천천 일대와 생태 공원 등, 낙동강 유역 인근에 계시는 분들은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하, 미치겠네.”
유현성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분명 아만트가 말하길 길어야 24시간이라고 했다. 아루가가 제대로 집중해 온 마력을 더해도 그게 한계라는 것이다.
근데 사흘째 내리는 이 폭우는 뭐란 말인가.
심지어 빗방울도 굵어서 어쩌다 맞으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아주 그냥 재해네, 재해.”
유현성은 하늘 가득 모인 비구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좀 꺼져라.”
그런다고 하늘이 움직일 리는 없겠지.
더욱 어이없는 건, 오히려 엘리스는 아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저 요망한 것.
“꺄하하하!!”
아니, 미친년인가 싶을 정도였다.
실패할 리가 없다면서 내가 게이트에 들어간 사이 엘프들을 시켜 산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놨다.
비만 제대로 내리면 적당한 저수지가 되지 않겠느냐면서 아주 그냥, 학교 운동장 서너 배나 되는 면적에 5m 정도의 깊이의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에 물이 다 차면 적어도 호수라 부를 정도는 될 터.
“엘리스, 고인 물을 썩는다는 거 몰라?”
“헤헤, 오빠. 세계수도 나무야.”
“그, 그야 그렇긴 하지.”
“직접 봐서 알잖아. 세계수는 수원을 오염시키기도 하지만 정화시키기도 해. 결코 그럴 일은 없다고.”
“쩝.”
확실히 저번 게이트에서 겪었다.
마녀가 작정하고 의지를 부으면 확실히 세계수는 연결된 수원으로 그 일대를 오염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엘리오스 마을의 마녀는 엘리스.
결코 그런 일을 할 리는 없겠지.
“오빠, 따라와요.”
못 이기는 척 우산을 들려 했더니 엘리스가 만류하더라.
자연은 그대로 맞아들이는 게 좋다면서 거의 두어 달 만에 내리는 비니 함께 맞자는 거였다.
쏴아아아아-
좀 당황스러운 건, 분명 비를 맞았는데 찝찝함보다 상쾌함이 앞선다는 거였다.
순식간에 다 젖는다는 게 문제였지.
“오빠, 나 잡아봐라.”
“잡히면 죽는다.”
엘리스는 장난치듯 폴짝폴짝 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차라리 안 잡는 게 덜 피곤하겠다.
그렇게 따라간 저수지는 벌써 절반 이상이 찬 상태였다. 게다가 한쪽으로 길게 이어진 고랑이 세계수 근처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설마 여기까지 예상한 거야?”
“아니. 그냥 세계수가 속삭여 줬어. 아마 이대로 한 달 정도 가뭄이 지속되면 많은 소리 없는 생물들이 힘을 잃을 거래.”
“엉?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람이 숨을 쉬듯이 그들도 숨을 쉬어야지. 솔직히 좀 오래되긴 했어.”
엘리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세계수가 여기에 자리 잡은 이후, 비는 단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이후 무더운 여름까지 맞았으니 아마도 많이 괴롭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려도 너무 많이 내려. 갑자기 내린 것도 아니고 예보가 이어졌으니 피해랄 건 없지만, 솔직히 곤란한 것도 사실이야.”
“치, 그래서 쫓아낸 거 다 알거든?”
“엉?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내일 되면 알겠지.”
그러면서 뽀뽀하려는 듯 달려들어 가볍게 이마를 밀어 버렸다.
엘리스는 그대로 주저앉아 우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그냥, 발연기를 해라.
유현성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여전히 먹구름은 가득했는데, 이번 일로 당황한 아만트의 얼굴색을 연상시켰다.
분명 그랬었지. 마력 주입 과다라고.
내일 되면 알겠지.
* * *
-23일 부산 날씨 예보입니다.
연일 내리던 폭우가 서서히 가실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내일 오후부터 비구름은 서서히 북상하면서 그동안 달궈졌던 대지를 식힐 걸로 보입니다.
“다행히 재해는 피했구나.”
-24일 부산 날씨 예보입니다.
한동안 계속되던 이상 고온 때문에 시름 했던 농민들에게 정말 가뭄의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말라가던 저수지마다 물이 가득 차고 있는데요. 당분간 농업용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25일 날씨 예보입니다.
부산 인근에서 갑자기 시작된 비가 폭우로 바뀌었는데요. 서서히 북상하면서 가뭄 해갈에 큰 역할을 하고…….
“다행이다. 진심으로 다행이야.”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게 살짝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뭔가 가슴에 차오르는 게 있더라.
설마? 이런 감정들이…….
날 강해지게 한 건가?
* * *
“어우, 긴장돼.”
손강희는 손을 풀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스스로 처음 전면에 나서는 거니 떨리기도 할 거다.
하지만 어쩌랴.
행복 분식 2호점 점장은 그녀인 것을.
오늘은 일종의 심사평이 있는 날.
심지어 그 대표가 김요성과 오송해였다.
물론 대회도 아니고 점수를 내는 자리도 아니었다.
단지 팔아도 괜찮은 수준이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거였고, 마지막 수정에 앞서 필요한 조언을 하는 정도였다.
“긴장하지 마. 평소대로 그냥 하면 된다고. 우리 누룽지 주먹밥은 딱 분식집 콘셉트 그대로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엘리스 여왕님이 오시잖아요.”
“그게…… 문제가 되나?”
“휴우, 진짜 오빠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손강희는 뭔가 크게 걱정이 된다는 듯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날 노려보더니 갑자기 손을 휘휘 젓더라.
그건 꺼지라는 신호…… 가 맞는 것 같았다. 눈빛에서 금방이라도 레이저가 나올 기세였으니까.
“나도 슬슬 갈 시간 됐거든? 하여간 파이팅.”
“그건 제가 알아서 잘할 수 있으니까, 제발 그냥 가요. 괜히 심란하니까.”
“눼~ 마님. 돌쇠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유현성이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왜냐면, 그 역시 심사위원 중에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에휴, 저 바보.”
손강희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더니 조리 순서를 복기했다.
결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뒤에서 그걸 보던 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여간 아빠 닮아서 눈치 하나는 꽝이네.”
* * *
“오셨습니까?”
유현성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오송해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일세.”
“예. 저도 오랜만에 뵈어서 아주 좋습니다.”
“오늘은 어떤 음식으로 날 놀라게 해줄지 기대가 아주 커. 사실 한 방면에서 30년 정도면 고인물이 아니라 그걸 넘어 썩은 물이 되거든. 때론 자극이 필요하다네.”
“어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겁이 나는데요?”
“애초에 자네가 내건 조건 중에 하나가 각 가게마다 여기서만 파는 메뉴를 만들라는 거였지?”
“예. 각 가게 고유의 스타일은 유지하면서 다른 지점에선 팔지 않는 그런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여기 엘프 마을을 위해서인가?”
“그런 것도 있지만 여기 와야만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이 필요하다 싶어서요.”
오송해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맛이든 간에, 갑자기 먹고 싶어지면 여길 올 수밖에 없게 되겠군.”
“그걸 노리는 것도 있긴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니라는 뜻이니까요.”
오송해는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심사 전에 한 번 둘러보시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권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일단 그러지.”
오송해가 허락하자 안내를 시작했다.
엘리오스 마을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게 했고, 중간중간 쉬면서 몇 번이나 심호흡을 권했다.
오송해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저번처럼 마지막에는 다 알려줄 테니 말이다.
또, 그 과정에서의 호기심은 나름의 즐거움이었으니 굳이 스스로 산통을 깰 필요는 없겠지.
“산책로 절반 정도를 도셨는데 어떠십니까?”
“기분이 이상하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쾌하다네. 묘하게 식욕까지 도는 기분이고.”
“그럼 마지막 코스만 돌면 되겠네요. 천천히 움직여도 시간 맞출 수는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러지.”
유현성이 안내한 곳은 며칠 전의 그 저수지였다.
신기한 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흙탕물에 가까웠던 빗물의 색이 변해 있었다. 마치 제주도 바다처럼 오묘한 에메랄드빛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세계수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명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여긴 통제 구역입니다.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허락된 사람을 제외하고 출입할 수 없죠.”
당연하게도 엘리스의 명령이었다.
어렵게 얻은, 세계수를 위한 수원이기에 엘프 장로급을 제외하면 다들 허가를 받아야 하는 거다.
“통제 구역인데, 자네는 어떻게…….”
“크흠, 그건 비밀입니다.”
사실 엘리오스 마을 어디를 다녀도 무사 통과였다. 심지어 숨겨진 엘프 안쪽 마을 통로도 알아서 자동으로 개방이 될 정도였으니.
엘리스 말로는 내 신체 파장을 세계수에 등록시켜 놨단다.
반쯤은 어느 정도 능력을 끌어쓰는 것도 가능하다나?
“포인트는 이 중요한 자리에 선생님을 모시고 왔다는 거죠.”
“하, 그렇긴 하지. 그런데 정말 감탄스럽군. 이런 맑은 물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네. 신비롭기까지 하다네.”
그 순간, 세계수가 호응하듯 가볍게 흔들렸다.
아름다운 핑크빛 잎사귀들이 바람에 흩날려 유현성과 오송해를 천천히 휘감고 저수지로 떨어진 것이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넋이 나간 듯 오송해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허허, 허. 이러한 이유였군.”
“느끼셨군요.”
“자네가 말한 바를 깨달았다네. 자~ 이제 천천히 내려가세나.”
이번에는 오송해가 앞장서고 뒤를 따랐다.
그렇게 내려온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 김요성이었다.
“즐거우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럼 자네도?”
“예. 시간 여유가 있어 먼저 다녀왔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슬슬 다녀오면 될 것 같습니다.”
김요성은 그렇게 말한 다음 황무기를 쳐다봤다.
“황 실장, 지금 연락하면 될 걸세.”
* * *
“일단 본성 푸드가 엘리오스 분점을 시작으로 행복 분식 2호점, 강종곤 짬뽕집 순서입니다. 아무래도 덜 자극적인 가게부터 선정했습니다.”
“식사류는 그게 전부인가?”
“아무래도 본성 푸드가에서 대부분의 메뉴를 커버하고 있으니 충분할 것 같아서요. 이후 들어올 가게들은 버거 샌드하고, 국숫집 하나가 잡혀 있는데 아직 이야기 중이긴 합니다.”
그걸 전담하는 건 이예지였다.
하필 김요성 대표가 선수 치는 바람에 이번 일에서 밀려 버렸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이예지 라인 쪽에도 비슷한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본성 푸드가에 비해 퀄리티가 조금 떨어졌다.
식당부 장관으로서 친분만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는 일.
어쨌든 조금 미안해서 스카우트 부분에 대해 부탁했더니 아주 고맙다면서 자신이 책임지고 맡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상황 봐서 들어온다고 하는데, 아마 그렇게 되면 본성 푸드가가 일부 양보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김요성을 쳐다보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렇게 이야기된 상태로 들어왔으니 감수해야지. 그렇다는 건…… 비빔밥 전문점이라는 말인가?”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성 푸드가는 비빔밥류를 빼고 돌솥으로만 가야겠죠.”
“그 정도는 여유롭다네. 어차피 이윤이 크게 남는 부분이 아니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나머지 순서는 어떻게 되나?”
“핫도그집 다음에 크레페입니다.”
“이유는…….”
“너무 달아서요.”
어우, 진짜!
시식할 땐 정말 좋았는데, 그게 진짜 테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