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컥!”
“흐어억……!!”
“끄윽…….”
세 녀석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 직후, 흰자위를 보이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라.
“분명 경고했었다. 다음은 없다고.”
유현성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려는데, 정면의 덩치가 소리쳤다.
“너 뭐야?”
“몰라. 이 새끼야!”
앞서 손목을 풀던 덩치는 당황했다.
지금껏 자신의 체격을 보고 겁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인상이라도 쓰면 다들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한데, 고작 욕 한마디 들었음에도 이상하게 움츠러드는 게 아닌가.
‘분명 마력도, 살기도 아니고…… 위압 스킬 같은 것도 아니다.’
자신은 길드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무엇보다 탱커 역할을 맡고 있기에 어느 정도 상대의 능력을 간파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절벽을 앞에 둔 것 같은 이 막막함이라니.
슬쩍 뒤를 돌아보자 도복 사내가 눈짓을 했다.
일단 달려 들어가라는 신호.
“이 씨!”
덩치가 달려들며 몸을 던졌다.
고작 성인 서너 명이 좌우로 설 만한 공간.
팔을 활짝 펼치면 결코 피할 수 없으리라.
“하아…….”
귓가에 박힌 짧은 한숨과 동시에 시야가 흔들렸다.
뭔가 툭 발목을 건드린 것 같은데 그대로 왼쪽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열받은 덩치는 눈이 돌아갔는지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상대가 죽든 말든 커다란 팔뚝으로 졸라 버릴 생각으로 말이다.
툭.
콰아아앙!!!
덩치는 손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먹이 건물 외벽을 파고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콘크리트 안쪽의 철근까지 휘어 버린 채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말았다.
아무리 마력으로 강화했다 해도 한계는 있는 법.
“으아……!!”
주먹이 완전히 아작 나버렸다. 손목 바로 위까지 뼈가 보일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시끄러.”
“컥!”
뭔가 힐끗 공간을 긋는다 싶더니 덩치의 턱이 휙 돌아가고 풀썩 쓰러졌다.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것이다.
유현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툭툭 털었다.
“괜히 사람 짜증 나게 하네.”
그렇게 내뱉은 뒤, 정면을 쳐다봤다.
별것 아닌 놈들을 보니 더욱 감정이 울컥했다.
전부 죽여 버릴까?
* * *
엘프들의 힘을 빌려 순식간에 가게를 철거했던 그날.
“참 사람 사는 게 묘하단 말이지.”
박정철은 살짝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소주 두 병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벌써 취했나?
슬쩍 떠보기 위해 물었다.
“뭐가 묘해?”
“몰라. 그냥…… 이렇게 된 게 우스워서. 크흐, 쓰다.”
“안주도 먹어. 그러다 속 버린다.”
“체, 내가 인마…… 해장국집 사장이야! 속 푸는 건 너보다 잘한다.”
어이없는 대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근데 더 웃기가 어려웠다.
박정철의 눈가가 조금씩 젖어 드는 것 같아서.
“새끼. 취했으면 자라.”
“야! 남의 가게에서 어떻게 자냐? 아무리 다락방이라도.”
“어차피 내일 영업 안 하거든? 나도 인마 옆에서 잘 거야.”
“그럼 소주나 더 가져와!”
“야. 오른팔. 옆으로. 그래, 거기 냉장고.”
“허. 맞네?”
“확실히 취했네. 취했어.”
“내가 너보다 속 푸는 건…….”
갑자기 박정철의 고개가 크게 끄덕였다. 취기가 확 올라온 모양이었다.
잠시 버티던 박정철은 결국 테이블에 두 팔을 포개더니 그 위로 머리를 박아 버렸다.
“하아. 좀 미리 연락하지. 괜히…… 미안하다.”
“흐으으. 술이나…… 술이…….”
구석에 준비한 고스톱 전용 담요를 가져와 대충 어깨에 걸쳐줬다.
잘 자라고 등을 토닥토닥해 주는데 예전 기억이 불쑥 나더라.
사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박정철을 보니 불쑥 아버지 생각이 났다.
임무 중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에 앞서 녀석은 양친의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사회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장례를 치른 이후 어려서부터 도왔던 식당을 물려받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배울 건 다 배웠으니 숙련만 되면 어려울 게 없다고.
무엇보다 군대 있는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고, 짧은 휴가로 다 정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잘한 선택이었지.”
당시에는 함께 못 하는 게 약간 서운했었다.
솔직히 아래 후임이 나간다고 해서인 것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은 잠시였다.
휴가 나와서 족발집이 바쁜 걸 볼 때마다 녀석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으니까.
식당을 이어감으로써 부모님을 추억한다는 것!
굳이 말로 하지 않았지만 그런 묘한 감정을 자신에게 전해줬던 것이다.
이후 종종 휴가 나와 만났고, 그러다 몇 가지 요리를 배우게 되었다.
행복 분식 저녁 영업의 간판 메뉴인 챠슈, 그다음은 비슷한 소스로 만드는 족발.
그 외에도 식당에 대해 여러 가지를 배우고,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행복 분식을 오픈한 후 거의 일여 년 정신없이 바빴다.
녀석도 연락이 점점 뜸해져 그런가 싶었는데…….
“그래.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해 버릴 줄은 나도 몰랐네.”
최근 일 년.
정철이는 족발보다 뼈해장국을 메인으로 밀기로 했다.
또, 보다 장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큰돈을 들여 부분 리모델링까지 해버렸다.
하지만 취중진담이라고 박정철이 술김에 꺼낸 이야기는 참 지랄 같았다. 그 건물주란 새끼가 상황을 이 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들어 보니 참 기도 안 차더라.
매년 슬금슬금 월세를 올렸고, 그럼에도 버티자 아예 프랜차이즈 족발집을 들여버렸다.
박정철은 이미 대부분을 눈치챈 상태였다.
영업 방해하러 오는 놈들도, 그들이 원하는 것도 전부 말이다.
하지만 녀석들도 종일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전 장사 때는 해장하러 온 손님들이 제법 찼고, 저녁 피크 시간에는 취한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거기서 깽판을 부리면 당장 신고 크리가 터진다.
손님 얼마 못 받았다고 했지만 그건 날 생각해서 했던 거짓말이었을 뿐.
어쨌든 박정철은 오전 손님과 저녁 손님을 받는 것으로 가까스로 가게를 꾸려는 나갔다.
하지만 각성자도 아닌 놈이 체력이 무한일 수는 없는 법.
그렇게 서서히 지쳐갈 때 내가 들른 거란다.
어쨌든 일이 희한해진 것이 내가 그 세 놈을 집어 던지고 식대를 받아낸 뒤었다.
녀석들도 쫄았는지 며칠은 입을 다물었던 모양.
하지만 길드에서 추궁하면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터.
결국 사실을 듣게 된 건물주가 나서서 자신에게 직접 요구했다.
완전 철거!
한마디로 들어올 때 수준으로 전부 원상복구 시켜놓고 나가라 통보한 것이다.
그게 뭐가 문제냐 하겠지만, 실제 법으로 정해지길 임차인이 복구 비용을 내지 않거나 거부하면 건물주는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모두 놔둔 채 철거비를 제외한 보증금만 받고 빠져나가든가, 혹은 제대로 원상복구하고 보증금을 다 돌려받든가.
하지만 상황은 전자를 선택하게 종용했다.
박정철이 말하길 철거비 견적은 600만 원 정도. 여기에 폐기물이 서너 트럭 나오면 처리 비용 몇백이 더 붙겠지.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게를 살리기 위해 기껏 있는 거 없는 거 탈탈 털어 투자했다. 시설을 고치고, 보다 맞게 설비를 들이고, 마지막에는 간판까지.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건물주도 그걸 알았다.
거리낌 없이 월세 인상을 요구한 것도 그래서란다.
사실 박정철도 법대로 따지면서 시간을 끌면 된다.
20% 인상은 엄연한 불법이니까.
하지만 반쯤은 포기했다더라. 몸도 마음도 이미 지쳤다나.
“그래도 좀, 맨정신일 때 이야기하지.”
박정철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시간도 일부 맞지 않았고, 술김이라 했던 이야기를 서너 번 반복하기도 했다.
방금 이해한 부분도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가며 겨우 해석한 거였다.
어쨌든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어차피 철거는 다 했고, 오늘 하루 미묘한 부분까지 마무리한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니까.
그 때문인지 코까지 골고 있었다.
“넌 내일 네 일만 해라. 나도 내 일을 하련다.”
박정철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 길드 애들을 조질 생각이었다.
* * *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현성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건물주란 새끼가 버럭 버럭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내 건물이라고! 손상이 가면 어떻게 해!”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그나마 여기 영웅문 길드에서 가장 마력이 강해 보이는 사내가 툭 건드리면 죽을 것 같은 건물주에게 연신 굽실거렸다.
순간, 실소가 나오더라.
고작 저딴 녀석들이라니.
아주 찰나지만 감정이 끓어올라 확 짜증이 날 정도였다.
뭐, 이젠 괜찮지만.
“미안한데, 거기 아저씨는 뒤로 좀 빠져줄래요?”
“뭐, 이…….”
“안 그러면 아까 내기한 건 없는 겁니다.”
“그, 그건 안 되지.”
“그럼 물러나세요. 나야 아저씨가 괜히 싸우는 데 휩쓸려서…….”
유현성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골로 가면 좋고.”
“이, 이 새…….”
김창주는 얼굴이 벌게진 채 삿대질을 하다가 도복 사내가 말리자 겨우 물러섰다.
그런 다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저 새끼 죽여! 죽여 버리라고!!”
쯔,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오히려 나로서는 잘된 일.
“당신 누구야?”
앞으로 나선 건, 그 도복 사내였다.
영웅문 길드에서도 제법 마력을 가졌으니 아마 길드장 정도는 되겠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놈의 무장은 다른 놈들과 다르게 독특했다.
무슨 무공을 수련했는지는, 아니,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량 한복도 아니고 도복도 아닌 어중간한 복장.
더 어이없는 건, 무기라고 빼 든 게 징이 세 개나 박힌 너클이라는 거다.
허, 진짜 영웅문 소설에 저런 캐릭터가 있었나?
어쩌면 있을 수도 있겠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3류 엑스트라급으로.
유현성은 상대를 향해 검지를 튕겼다.
쉭!
“컥!!”
도복 사내는 곧바로 가슴을 부여잡더니 두어 걸음 밀려났다.
에휴, 수준하고는.
“비, 비겁하게 암습을 하다니.”
“너희들이 더하지, 이 새끼들아. 멀쩡히 장사 잘하고 있는 가게 뺏으려고, 쌍팔년도 조폭들이나 하는 영업 방해 짓이나 해?”
“우, 우린 잘 모른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할 뿐.”
“그게 제일 나쁜 놈이지. 범죄인지 알잖아. 알면서도 한 거고. 진짜 몰랐어?”
도복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일일 뿐이다.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그럼 대가리는 장식이냐?”
“익!”
“병신들, 화났으면 덤벼. 안 그러면 나 이 새끼들 먼저 죽일 거야.”
유현성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는 제일 처음 쓰러졌던 세 명이 있었다.
아직 기절도 못 한 채 바들바들 떨어댔는데, 유현성이 다가서자 경기까지 일으켰다.
나락(那落)!
보통 내 레어에 의식이 던져졌다 나온 이들 중 일부가 표현하는 단어다.
그 안은 허락받지 않은 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곳!
때문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정신이 붕괴된다.
난, 그 흩어지는 의식 사이로 나만의 암시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임민혁에게 했던 것처럼 아주 가볍게.
혹은 성일태에게 했던 것처럼 절대 거부할 수 없게.
경찰에 잡혀갔음에도 따로 뒷말이 나오지 않은 게 그래서였다. 다시금 무한히 떨어지는 그 공포를 느끼고 싶지 않아서.
물론 치열한 전투 중에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 역시 반쯤은 무방비 상태가 되니까.
결국 영웅문 길드가 움직이지 않자 녀석들의 등에 손을 대었다.
동시에.
“크아아아아아!!!”
“사, 살려…… 으어어어…….”
“우윽, 우으으…….”
손을 대자, 처절한 비명이 번갈아 골목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수초, 아니, 수십 초 정도가 흘렀다 느꼈을 정도로 길게.
물론 미리 공간 차단을 해놨으니 바깥으론 퍼지진 않을 거다.
손을 떼자 한 녀석이 가까스로 말했다.
“가, 감사…… 쿨럭. 컥.”
이 새끼는 그냥 감사하다고만 하면 되지 왜 피를 토하는 거야.
그건 다른 두 놈도 마찬가지였다.
“살려주셔서…….”
“다, 다시는 나쁜 짓 안 하고 착하게 살…… 푸훕.”
한 놈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고, 마지막 놈은 어마어마한 양을 토하더니 그 위로 엎어져 버렸다.
에이, 더럽게.
유현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까 그 도복 사내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