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하아~ 의외로 일이 커진 것 같은데요?”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알음알음으로 몇 명한테 연락한 게 다인데.”
김요성 대표도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분명 추첨은 300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물고, 또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물고 하는 식으로 오다 보니 인원이 훨씬 늘어났다.
중복도 있지만 당장 유현성이 아는 사람만 거의 오십 명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일단 400명은 확실히 넘었습니다만.”
“음식 준비는 차질이 없겠나?”
“재료야 조금 간당간당하지만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관리 인원은 좀 더 늘려야겠네요.”
유현성은 천천히 엘리오스 마을을 돌아봤다.
근처를 산책한다는 핑계로 벌써 이곳저곳을 기웃 기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안쪽 마을 결계 쪽으로도 일부 헌터들이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 중 일부는 분명 염탐이 목적일 테지.
“오빠.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말 괜찮은 거야?”
“라이노스 장로님부터 고위 전사들까지 전부 경계서고 있거든요.”
으음, 엘리스 얼굴에 심통이 어렸네?
아마 자기 빼놓고 족발 축제를 벌였다는 것에 화가 난 거겠지.
어째 행사의 주축 인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안쪽 마을로 끌려간 모양이었다.
하긴, 오늘 하루 고생 좀 해보라지.
듣기로 박정철은 그날 하루만 2㎏가 빠졌다고 했다.
족발 삶은 뒤에도 꼬박 세 시간을 열기 가득한 주방에 붙들려 있었으니 죽을 맛이었겠지.
그래놓고 정작 본인은 음식이 제대로 됐는지 맛밖에 못 봤다더라. 다만 엘프들이 환호하는 걸 보고 솜씨가 녹쓸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날 밤 꿈에, 엘프들이 원시인 복장으로 족발 뼈를 들고 뛰어다니며 자신을 사냥하는 악몽을 다 꿨겠는가.
솔직히 갓 짠 참기름처럼 고소한 기분이었다.
“자네는 전체적으로 돌아보면서 여왕님을 도와주게. 어차피 음식은 각 식당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어? 그건 좀…….”
“오빠, 모자라는 재료는 저희 쪽에서 바로 지원 가능하니까요.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일 사람만 뽑아주세요.”
엘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슬 내빼려는 이상도를 쳐다봤다.
이미 낙점이라는 뜻!
생각해 보니 뺀질뺀질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인물로 적당하기는 했다. 게다가 우리 식구와도 안면이 있었고, 임혜리와도 서류 때문에 여러 번 통화했다고 하더라.
그러니 모쏠 학부모라고 놀려댔지.
“그럼 다른 식당들 쪽은 어떻게 할까요?”
“오빠는, 강희가 있잖아요. 걔가 전부 친하니까 그쪽으로 맡기면 되죠.”
“그럼 누룽지는 누가 굽는데?”
“조달수요!”
“컥!”
“강희가 열심히 가르쳤고, 죽어라 연습 많이 했다니까 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요?”
순간 상상이 되긴 하더라.
뒤쪽에서 엘프 애들이 짐 나르고 재료 밑준비하고.
조달수가 누룽지를 굽고, 그걸 현지가 포장하고.
그렇게 행복 분식 2호점은 그 부부(?)에게 강탈당하고.
썩 그림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왜 내키지 않는 거지?
이게 여동생 결혼시키는 오빠의 심정이라는 건가.
“일단 이상도 상사가 왔다 갔다 하면서 체크하고 강희가 각 식당들 하고 연락하면 재료 쪽은 문제없을 거예요. 계속 분식점 비우는 것도 아닌데요.”
“그런 방식이라면 다들 납득하긴 할 건데…… 왜 불편한 기분이지?”
“그냥 기분 탓이죠. 헤헤.”
달리 방법이 생각나질 않으니 일단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엘리스 말로는 이참에 조달수도 나름 얼굴 알리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말이다.
확실히 차기 장로 후계자란 의미겠지.
“달리 자네 말고 적당한 사람이 없으니 오늘 하루만 여왕님 곁에 붙어서 고생하게.”
김요성 대표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엘리스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나 모르게 윙크를 날린 것 같은데.
으으~ 왠지 당하는 느낌이 강했다.
“자, 오빠 가요. 먼저 어머님께 인사부터…….”
“안 됩니다. 여왕님. 격식에 맞게 먼저 만나볼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조온달, 이 자식은 여기서도 집사 모드였다.
하지만 방금만큼은 썩 마음에 들었다. 첫 코스를 고요환으로 잡은 것이다.
“으, 솔직히 불편한데.”
“원래 불편한 걸 먼저 처리하는 게 좋은 겁니다. 이쪽으로.”
엘리스가 마지못해 따라가는데 조온달이 나한테 한마디를 더했다.
“뭐 하십니까? 사장님.”
“왜? 뭐? 무슨 일 있어?”
“여왕님을 에스코트 하시는 분이 복장이 그게 뭡니까? 저쪽에서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어? 어어~”
졸지에 카페 안쪽 휴게실로 끌려가게 됐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그냥 딱 봐도 고급 정장 한 벌과 구두가 있었다.
어이없게도 사이즈도 딱 맞더라.
“역시 잘 어울리시네요.”
조온달의 말이 조금 이상했지만 밖으로 나가 보니 알 것 같았다.
내가 입은 건 약간 광택 나는 검은색 정장이었는데, 그게 엘리스의 하얀 드레스와 멋진 대조를 이룬 것이다.
“이제 그대로 예식장으로 들어가시면…….”
“야! 너까지 그러기냐?”
“농담입니다. 농담. 카페 안쪽 방에 헌터청 부청장 일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전에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조온달은 가볍게 손뼉을 치더니 내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가볍게 슥슥 터치하는 것 같은데, 어느새 이마가 다 드러났다.
“저만 못하지만, 나름 괜찮네요.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솔직히 반쯤은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안내받은 곳으로 향하는데, 엘리스가 팔짱을 끼더라.
“갑자기 왜 이래?”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왜요?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
너무 속 보인단 말이지.
“그냥 나 좀 도와준다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래. 그러자.”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고요환, 고우환 형제와 함께 다른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얼굴 아는 중년인이 엘리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더라.
당연히 그걸 내가 가로챘다.
“부산시장 김성우라고 합니다.”
“예. 유현성이라고 합니다.”
그때 다른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 보니 이름이 익숙하더라.
“갈매기 길드 부길드장, 공소철이라고 합니다.”
그래! 네놈이란 말이지?
* * *
“따라와!”
“아씨, 알아서 한다고~”
“너 나랑 있을 때는 말이 무지하게 짧아진다?”
“그야 아저씨가 그렇게 만드는 거 아냐!”
김길우의 투정에 우현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그때 더 두들겨 맞게 놔뒀어야 했나? 저승 문턱 밟았다가 나왔는데도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면 아직 멀은 것 같은데?”
“그때는 내가 좀 회까닥 해서 그런 거고. 제대로 작정하고 붙으면…….”
“그땐 염라대왕 만났겠지.”
“그 정도는 아니거든? 나도 비상용 회피 스킬 같은 거 있어.”
“길우 네가 그 녀석 안 본 지 좀 됐다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모양인데, 네가 단검을 하늘로 던져서 피한다고 해도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그건 말이 안 되지.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라. 엄연히 다른 존재다.”
우현필의 너무도 진지한 표정에 김길우는 약간 긴장했다.
“세상에는 말이다.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단다.”
“…….”
“네 당숙이란 사람이, 그런 존재의 친구를 건드린 거고.”
“그, 그건…….”
“그러니 사과하러 왔으면 잔말 말고 고개 숙일 생각이나 해. 그리고 말 함부로 하면 이번에는 나한테 맞는다. 난 그 친구처럼 조절을 못해서 지옥 바닥까지 파묻을지도 몰라.”
우현필을 중심으로 묵직함이 깔렸다.
그 때문인지 주변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자, 들어가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거다.”
“아, 알았다고.”
김길우는 우현필을 따라 족발집으로 향했다.
근데 간판에서 어이가 터지고 말았다.
-맛있어서 쫓겨나온 족발집
“이, 이게 무슨…….”
황당해하며 우현필을 쫓아 안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사연이 적혀 있더라.
-10여 년 이상을 번화가에서 족발을 팔았습니다.
많은 단골들이 맛있다고 칭찬했고, 그 손님들 중에 집주인 아저씨가 있었죠.
인자하신 그분은 무려 10여 년 가까이 월세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새로운 집주인을 맞이하게 됐는데 월세가 인근과 시세가 맞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쫓겨나게 됐습니다.
얼마나 맛있었으며 그 오랜 시간 월세를 올리지 않았겠습니까?
그 맛을 여기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거 맥이는 거지?”
“푸하, 가볍게, 가볍게 보라고. 그냥 웃자고 쓴 글처럼 보이잖아.”
우현필이 등을 두드리자 김길우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현필은 안쪽으로 향했다.
“오, 저기 한 자리 비었다. 사장님, 여기 족발 중자 하나 주시고, 소주도 한 병.”
바로 주문부터 박아 버리니 김길우는 돌아가기가 난감했다.
결국 족발과 소주가 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있는데, 우현필이 강제로 쌈을 싸서 내밀었다.
“먹어봐. 쫓겨나온 족발이니까.”
“이~ 씨.”
“입에 처넣기 전에 먹어라.”
명백한 살기에 결국, 김길우는 족발 세 점에 마늘, 새우젓, 고추 쌈장이 들어간 쌈을 입에 넣었다.
잠시 후.
“맛있네. 맛있어. 으으, 내가 왜 이 맛을 보지 못한 거지?”
“그랬으니 내보냈겠지.”
“아저씨는 먹어봤어?”
“나도 처음인데…… 호오~ 이거 제법 괜찮은데? 요즘 잘 먹기 힘든 쫀득쫀득한 시골 도축장식 족발이네.”
“좀 알아듣게 이야기해!”
“한마디로 시골 장터 국밥처럼 푹 고은 느낌의 족발이라고.”
“씨~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됐고, 너 당숙네 프랜차이즈 족발집 욕 좀 먹어야겠다. 간판하고 돈으로 치대서 이런 가게 문 닫게 했으니까.”
“……나도 잠깐 그 생각 했어. 그 가게 문 닫으라고 하고 싶네.”
“야! 그러면서 네 점 싸지 마라. 술도 안 마시는 놈이…….”
그때 박정철이 가게를 돌다 우현필 앞에 이르렀다.
“손님. 입에는 맞으십니까?”
“아~ 진짜 맛있네요. 간만에 옛날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주 한 병만 더 주시죠.”
“저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1인당 소주 한 병입니다.”
“그럼 두 병까지네요. 쩝. 조금 부족한데.”
“마을 방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만, 편법이 없으란 법은 없죠.”
박정철은 가볍게 웃으며 그 밑에 다른 걸 가리켰다.
1인당 맥주 한 병, 소주 한 병.
“저게 왜?”
“가격은 같으니까. 맥주 시켜놓고 나중에 소주로 바꿔달라 하시면…… 아시죠?”
“아따. 거 사장님 장사 잘하시네. 그래서 선물 하나 준비했습니다.”
“예?”
박정철이 황당해하는데 우현필이 김길우를 노려봤다.
미적거리던 김길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박정철도 먼발치에서 봤던 김길우를 알아봤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하하하, 이 친구도 사정을 잘 몰랐답니다. 좀 단순하고 무식한 놈이라 그냥 그런가 했다죠.”
웃으며 말하는데도 박정철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현필이 쐐기를 박았다.
“그냥 미안해서 사과하러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 * *
“공소철이라고 합니다.”
손을 내미는데,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외모였다.
헌터라기보다 사업가 느낌이랄까.
깔끔한 명품 회색 정장에 올백으로 넘긴 머리, 거기에 유들유들한 표정이 더해지니 각성자처럼 보이지 않더라.
하지만 유현성 기준에서 재수 없음, 포인트는 급상승했다.
“갈매기 길드에서 부길드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오른손을 가볍게 흔드는데, 악수를 받아달라는 의미 같았다.
그래, 해달라는 대로 해주마.
엘리스 대신 유현성이 그 손을 붙잡았다.
꽈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