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읍.”
짧은 신음.
공소철의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의 혈관이 도드라졌다. 잠시 떨기까지 하더니 이까지 악물더라.
으음, 몸이 살짝 부푸는 것 같은데 착각이려나?
공소철이 발악을 하듯 버티는 것과 다르게 유현성은 아주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김성우가 뭐라 하려는데, 고요환이 슬쩍 끼어들었다.
“야, 장난 그만하고. 앉아.”
순간 공소철의 눈이 커졌다.
X발! 이게 장난이라고?
전신의 마력을 쥐어짜지 않았으면 손이 가루가 됐을 텐데?
그때 유현성이 고요환을 쳐다봤다.
“이게 장난으로 보여?”
“그럼 어린애 손목 비트는 게 장난이지 뭐냐?”
“하긴, 장난도 재미있어야 치는 거지.”
유현성이 손을 놓자 공소철은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하지만 애써 힘든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대화를 유도했다.
“어,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아, 분식집 사장입니다.”
“노, 농담하시는 거죠?”
“그런 농담을 왜 합니까? 자그마한 분식집 두 군데 운영하고 있습니다.”
공소철은 진심으로 상대가 조롱하고 있다고 느꼈다.
헌터청 부청장 고요환, 그는 공식 1위 헌터였고 게이트 초창기부터 많은 활약을 펼쳤다.
때문에 고요환을 영웅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그런 이와 편하게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분식집 사장이라니 어찌 믿을 수 있으랴.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야, 우환아.”
상대가 부르자마자 고우환 헌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예. 형님.”
“보면 재깍재깍 인사부터 해야지. 너 군기 빠졌다.”
“죄송합니다. 윗사람들 인사에 끼지 말라고 들어서.”
“그건 맞네. 근데 너, 내가 준 성운검 조져놨다며?”
“크으, 죄송합니다.”
“기찬이가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더라. 쓸데없이 귀찮은 일 안 생기게 욕심부리지 말고.”
“옙.”
고우환은 임무 때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조급함도 있었다.
그건, 형 고요환과의 격차 때문이었다.
둘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요환이 아버지처럼 동생을 과보호를 하기에 생긴 자연스러운 독립심이랄까?
하여간 그런 감정에서 오는 조바심이 무리한 임무에 지원하게 만들었다.
“됐고. 앉아.”
유현성의 말에 고우환이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고, 공소철은 또 한 번 당황해야 했다.
순위가 20위 안쪽에서 왔다 갔다 하긴 하지만, 고우환 역시 초창기 헌터였다. 그런 그가 깍듯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대체 이 새끼 뭐지?
그게 공소철의 뇌리를 채운 생각이었다.
특히, 도도하기로 유명한 엘리스 여왕이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으니…… 보통 사이가 아닌 게 분명했다.
‘어째서 저런 자가 있다는 걸 몰랐던 걸까?’
공소철은 당황함을 감추려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잡히자 김성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찾아뵌 건, 다름 아니라 동북 전망대 관련해서 예산 계획을 짜기 위해서입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터라 부산시에서 지원할 여력이 많이 없더라고요.”
결국 엘프 왕국에 협조할 테니 돈 좀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어차피 시설이 지어지면 엘리오스 마을에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일부는 저희도 공용으로 활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니들도 혜택을 보니 더 내놓으라는 말이겠지.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부분이라 조심스럽습니다만, 내년에 선거가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 선거 이후에 지방 선거 말입니다. 저도 다시…….”
말은 길었지만 다시 부산 시장에 나오니 지지해 달라는 거였다.
하긴, 아리따운 엘프들이 선거 운동에 함께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그래서 제 재량껏 최대한 예산을 짜내고는 있습니다만, 조금 미흡해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성우가 굽신거리는데, 엘리스가 물었다.
“그 예산이 얼마나 되나요?”
“올해 말까지 단계적으로 200억 정도를 투자할 계획입니다. 부산 시민공원 4분의 1정도 면적이니…….”
“시민공원 초기 공사비가 얼마였죠?”
“그, 그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성우는 땀을 흘리며 가져온 서류를 살폈다. 그러다 겨우 뭔가를 찾았는지 더듬거리며 말했다.
“초기 예산이 6,500억 정도 됩니다.”
“그 4분의 1은 얼마나 되죠?”
“1,600억 정도…… 될 겁니다.”
“그런데 부산시 예산은 200억이라면, 뭔가 맞지가 않는 것 같네요.”
엘리스의 지적에 김성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요환을 쳐다봤다.
좀 도와달라는 신호겠지.
하지만 고요환도 고우환도 입을 다문 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때 공소철이 나섰다.
“그 예산의 상당수가 정부에서 나오는 겁니다. 거기에 인근 지역 재개발 등을 감안해서 지원받은 겁니다.”
“그게 뭔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눈치챘다.
엘리스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떠보듯이 묻는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시민공원 인근, 부암동, 전포동, 범전동 일대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예정이 있었습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건설사 다섯 곳이 총 35만평 규모를 개발하기로 합의를 봤죠. 최저 5조가 넘는 투자금이 들어 온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아직 조합과 협의가 안 되어 시민공원이 들어서고도 십여 년 가까이 멈춘 상태였다.
더군다나 시민공원에 들어갈 추가 사업비 총액이 5000억이 훌쩍 넘었다. 그게 마무리되어야 가까운 곳부터 소규모로 개발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쪽에 들어갈 예산 일부를 이쪽으로 돌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저희 길드에서 초기 비용 500억 정도를 동북 전망대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민간 투자 형식으로 향후 10년간 운영하는 조건입니다.”
흐음, 아까 생각한 게 잘못됐다.
엘프들한테 돈을 뜯어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 투자를 받아들이라는 압박이 메인이었다.
이제야 그간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나왔네.
부산시가 예산 지원을 꺼려한 것도, 반드시 갈매기 길드를 통해 시설은 운영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겠지.
그냥 쉽게 표현하면 갈매기 길드와 부산 시장이 손을 잡았다는 거다.
아마도 갈매기 길드는 뒷구멍으로 김성우의 선거 자금을 대어주겠지.
대신, 동북 전망대의 운영권을 손에 넣을 것이고.
“동시에 여기 엘프 마을이 정식 자치 도시도 승격될 수 있도록 부산 시장의 이름을 걸고 이쪽 갈매기 길드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일전에 이야기하신 조건도 상당수 수용할 예정입니다.”
“으음, 이거 기분 나쁜데?”
유현성의 말에 고요환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
“너무 티가 나잖아. 정부에서 인정했고, 대통령과 합의 끝에 국무총리령으로 허가가 떨어졌단 말이지.”
“일단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또 국가 기여도 면에서도 엘프족은 많은 공적을 세웠으니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산골 마을 정도는 충분히 내어줄 수 있다고. 무인도를 내어준 것처럼.”
백곰족의 경우도 그랬다.
겁나게 싸우고 피 흘려가며 얻은 정착 마을이 태백산맥 깊숙한 구석이었다. 가끔 맹수가 나온다고 심마니도 들어가기 꺼려 하는 그런 곳인 거다.
그에 비하면 여긴 도심이긴 하지만, 인적도 거의 없고 개발 계획조차 없었다.
크게 손해 볼 일이 아니라는 거지.
“그걸 일개 부산 시장과 순위 10위 안에도 못 드는 길드의 부길드장이 되니 마니 한다는 게 어이가 없잖아.”
순간, 공소철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갈매기 길드가 규모 면에서는 작은 건 맞았다.
그건 자신들의 불법 행위로 인해 행여나 있을 적대적 길드의 연합을 의식하여 일부러 축소한 거였다. 때문에 10위 이내는커녕 20위 정도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대로 김성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집권여당 소속이기에, 대통령과 총리의 말이 가지는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선거에는 아예 나오지도 못할 가능성도 컸던 것이다.
“헌터청, 아니, 이종족 관리부라고 했나? 거기선 뭐라고 그래?”
“당연히 프리패스지. 아직은 거기도 정비가 제대로 안 됐으니까, 이걸 떠안는 건 큰 부담일걸.”
현재 외교부 장관은, 이전의 특무부 장관이 이어받았다고 했다. 임무의 특성상 그게 맞다며 헌터청의 권한을 갈라간 거다.
‘여기까진 이해가 돼. 원래 특무부의 임무 중에 대한민국 헌터 시스템을 외국에 세일즈 하는 것도 포함되니까.’
외교부 장관 입장에서는 엘프 왕국도 외국이니 이종족 관리부를 산하에 두는 것도 맞았다.
“정부 내부의 기 싸움인가?”
“그렇게 보는 것도 맞는데, 그냥 좋게 표현해서 효율화가 덜 된 거야.”
“그놈의 효율화는 개뿔. 괜히 더 복잡하기만 해지잖아.”
국방부 권한 일부를 가져와서 만들어진 게 헌터청이라 초반에는 조직과 세력이 작았다.
하지만 시대가 격변했다.
연일 게이트가 터지고, 군대가 동원됐으며 각성자들이 출현했다. 또, 특수한 능력을 가진 여러 영웅들까지 등장했으니 헌터청의 권한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게이트에 한해서는 총리급보다 높은 권한을 가지는 게 헌터청 청장인데, 장관급으로 올려 버린다?
‘거의 대통령급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 하나가 더 생긴다고 보면 되지.’
때문에 청장은, 황당하게도 자신보다 직급이 위인 특무부 장관을 아래에 두고 있었다. 장관 역시 자신의 일을 하려면 헌터청에 적극 협조해야 했으니 그런 괴상한 조직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외교부 장관으로 독립(?)했으니 적극 권한을 행사하려 할 터.
“근데, 요환아. 외교부 장관이 누구냐?”
유현성의 질문에 고요환은 황당해했다.
저 새끼, 진심으로 묻느냐는 그 표정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알면 묻겠냐?”
“하아, 이제 라면밖에 모르는 바보가 됐구나. 우리 작은 삼촌이잖아.”
“작은 삼촌이면…… 아, 쏘리.”
헌터청 청장은 고요환의 아버지 고종규였다.
고요환이 부청장이 된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다.
물론 초창기에 많은 공을 세웠고, 영웅이라 불리며 무수히 많은 헌터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에 큰 잡음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헌터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가 부청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걸 환영했다.
그 헌터청 청장의 배다른 형제가 작은 삼촌 정덕봉이었다. 조부가 바람 피운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모친 쪽의 성을 따르게 한 것이다.
그게 밝혀진 건 한참이나 뒤였다.
조부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 비밀이 까발려졌으니까.
둘 사이는 썩 좋다고 할 수 없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정치적 성향의 관료들은 이익에 따라 적과도 손을 잡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럼 이번 일까지는 헌터청에서 관리하는 거네?”
“일단은 그렇지.”
“부산 시장이 가지는 권한은 없는 거고?”
“그렇게 봐도 좋지 않을까?”
고요환의 말이 끝나자 유현성은 엘리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럼 이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냐? 바빠 죽겠는데 괜히 시간만 낭비했잖아.”
“아직 저희 투자 건이…….”
공소철이 다급히 말했지만, 유현성은 그냥 무시했다.
뭔가 대단한 놈인 줄 알았는데 고작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 동네에서 제멋에 취해 살던 딱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소철은 끈질겼다.
“저희가 더 많은 투자를 하겠습니다. 1,000억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흐음, 1.000억 받고 3년 운영권. OK?”
공소철은 다급히 계산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원래 계획은 운영권을 빌미로 엘프 마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 갈매기 길드 아래 두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 분식집 사장이 뜬금없이 툭 튀어나왔다.
심지어 처음 협상과 다르게 고요환까지 저쪽 편을 들고 있었으니, 뭔가 단단히 꼬인 상황이었다.
“그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입니다.”
“그럼 그냥 돌아가. 뭐하러 이딴 헛지랄에 시간 낭비하고 있어?”
“투자 협상이라는 게 그렇게 말 몇 마디로 간단히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서로 충분히 대화를 하면서 조절을 해야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 몇 마디? 해볼까?”
“예?”
유현성은 고요환을 쳐다봤다.
“야! 내 이름 팔고 정부 지원 얼마나 뜯어낼 수 있냐?”
“내가 받은 권한은 2,000억 정도?”
“공짜는 아니지?”
“네 권한 10년 정도 양도하면…….”
“어차피 잡힌 예산 있잖아. 속시원하게 털어.”
“눈치 빠른 새끼. 4년으로 하자.”
고요환의 툭 까놓자 유현성은 공소철을 향해 웃어줬다.
이어진 말이 공소철의 가슴을 푹 파고들었다.
“봐. 몇 마디로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