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말도 안 돼!
공소철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부의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결국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저 분식집 사장이란 놈의 몇 마디에 다른 사람도 아닌 고요환이 된다고 했으니까.
즉, 그게 헌터청과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는 거겠지.
여기에 반발했다가는 여러모로 위험해진다.
더군다나 헌터청은, 대한민국 헌터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소 위압적인 부분도 있긴 했지만 따지면 정부와 대립해 헌터들의 위상을 이만큼 올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각종 세금 감면에 높은 위험수당과 여러 보상 등.
그건 헌터들이 뭉쳐 길드가 만들어지고, 그 길드들이 연합을 이루어 요구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었다.
‘하긴 옆 나라들만 봐도 그렇지.’
일본 헌터들은 대한민국이 이 정도인데 우리도 그 정도는 맞춰달라고 연일 시위를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콧방귀도 안 뀌고 있었다. 오히려 무시 일변도에 변명 외길로만 대할 뿐, 정작 거의 바뀐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중국의 경우 아예 길드 대부분을 공산당이 지배했다.
허가 없이 만들어진 길드라면 강제로 해체시켰고, 수뇌부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곤 했었다.
그런 현실에서 권리를 내세운다는 건, 그냥 자살 희망에 가까웠다.
동남아 일부 국가의 헌터들은 아예 군부와 결탁해 게이트 처리보다 땅따먹기에 열을 올려댔다.
거기는 권리고 뭐고, 목숨이 최우선이었다.
일단 살아야 돈이고 뭐고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대한민국은 헌터들에게 꽤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부와 대립해 거기까지 시스템을 만든 게 헌터청이었다.
괜히 고요환이 영웅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는 거지.
물론 분단국가에 적은 영토, 수도권에 인구 절반이 집약된 현실적 문제, 그 외 여러 특수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헌터청이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건 다들 인정했다.
그런 헌터청과 대립한다?
알려지자마자 길드에서 추방당할 가능성이 컸다.
‘지금은 참는다. 상대는 그저 잠시 돌아가야 하는 걸림돌일 뿐이야.’
공소철은 그렇게 판단한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유현성은 오히려 그걸 긁고 나섰다.
“남에 잔치 집에 와서 한숨 쉴 거면 그냥 가.”
“예? 아무리 협상이 잘 안 됐다고는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공소철이 반쯤 숙이고 들어가며 말했음에도, 자칭 분식집 사장은 비웃을 뿐이었다.
“넌 자기 집에서 똥개가 으르렁거리며 짖어대는데 웃음이 나오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질문에 엘리스는 슬쩍 유현성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제 이해가 되세요?”
“설마…….”
가능한 냉정함을 유지하려던 공소철도 지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엘리스 여왕은 철저하게 비호받고 있다고 들었다.
어지간한 헌터들도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무력으로 접근하려다 뒈지게 맞고 병신 된 경우도 몇 명 됐다.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헌터들이 구애를 했다고 들었지만, 모두 쓴맛만을 봤단다.
‘그랬는데, 아무리 봐도 연인의 모습이 아닌가?’
분식집 사장은 깔끔한 블랙 슈트에 머리까지 손질한 상태였고, 제법 남자다움이 전해졌다.
반대로 엘리스 여왕은 반짝이는 금발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어 잠시지만 진짜 여신 같다는 감정까지 느껴졌다.
그런 두 사람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으니,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호, 혹시 부군 되십니까?”
만약 맞다면 방금의 상황이 전부 이해가 된다.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아니.”
“맞아요.”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고, 여왕은 환하게 웃었다.
‘어, 어느 쪽이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고 괜히 머리만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혹할 만한 조건을 가져와. 그 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유현성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헤헤, 우리 가요. 오빠.”
“너도 좀…… 에휴, 아니다.”
그렇게 둘이 나가려는데 고요환이 손을 들었다.
“야! 난 술 언제 사 줄 거냐?”
“돈도 많은 놈이 알아서 마시면 되지. 으, 여기서 적당히 마시고 내 앞으로 달아 놔라.”
“OK. 박스로 마셔주마.”
“규정상 일 인당 한 병이다! 취해서 꼬장 부리면 진짜 맞는다, 너!”
“아이고, 무서워라. 술 많이 마시면 한 번 더 붙어볼 수 있겠네.”
“나한테 제대로 이겨본 적도 없는 놈이. 하여간 나 바빠서 먼저 간다.”
유현성이 몸을 돌리려는데 고우환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형님, 안녕히 가십시오.”
“뭐, 오다 가다 볼 수도 있어. 그리고 너도 적당히 먹고 달아놔. 대신 10인분 안쪽이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유현성과 엘리스가 사라지자 공소철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헌터 랭킹 1위 고요환에게 막말을 하고, 심지어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대한민국에서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거기에 고우환 헌터가 깍듯이 인사를 한다면 이건 뭔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때, 고요환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다음부터 이런 수작질 부리면 가만 안 둬.”
고요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김성우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됐고. 내 친구 말대로 혹할 만한 조건을 가져오면 자리 한 번 더 마련해 주겠는데, 그 전까지는 쓸데없는 생각 마.”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성우가 굽신거리자 공소철도 고개를 숙였다.
그조차도 마음에 안 드는지 고요환은 동생에게 손짓을 했다.
나가자는 신호였다.
문을 열며 고요환이 툭 내뱉었다.
“하! 사람을 뭘로 보고.”
* * *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김성우가 다그치듯 연거푸 물었지만 공소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긴 듯 인상만 찌푸릴 뿐이었다.
‘순서대로 되짚어 보자.’
여왕은 분명 혼자였다.
거금을 들여 인간 헌터와 혼인한 엘프를 통해 간신히 얻어낸 정보였다.
이후 부산시장과 관련 공무원을 통해 청혼 의사를 밝혔다. 물론 쉽게 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흔들 수는 있겠지, 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연락을 취한 다음 소개 받은 국회의원에게 적당한 기부금(?)을 전달함으로 마침내 고요환에게까지 연결이 됐다.
“좋은 제안이라면 한 번 정도는 만나줄 순 있다. 괜찮다면 도와줄 수도 있고.”
그게 고요환의 대답이었다.
헌데, 일이 너무 예상과 다르게 틀어졌다.
분식집 사장이란 괴물이 나오더니 아주 밥상을 엎어버리다 못해 지근지근 밟아 버렸다.
그것도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로.
“윽…….”
갑자기 손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뼈나 신경을 다친 것 같진 않지만 내일 되면 피멍이 들것 같았다.
“후우…….”
“이봐, 뭐라고 말 좀 해보게.”
공소철은 옆에서 앵알거리는 김성우를 쳐다봤다.
비굴하게 굴던 행동을 떠올리니 이젠 귀찮게 느껴졌다. 게다가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았고, 고요환의 반응을 보면 끈 떨어진 연이 될 가능성도 컸다.
즉, 더는 필요치 않다는 거겠지.
“이봐요. 부산시장 나으리. 우리 여기까지만 합시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김성우는 흠칫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린가?”
“어차피 일은 틀어졌고, 뭔가 건드릴 구석도 없지 않습니까?”
엘리스 여왕이 헌터청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면 건드리는 건 위험했다.
거기에 정체불명의 존재도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가장 큰 문제는 정보가 너무 없다는 점이었다. 명색이 부산시장이라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이번 일에 들인 금액을 생각하면 무조건 빠지기도 아쉬웠다.
동북 전망대는 포기하더라도 납품이나 다른 쪽으로도 이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 * *
“엘리스, 목적은 다 이룬 거지?”
“어느 정도는요.”
“웃지 마. 정들겠다.”
유현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스의 팔짱을 풀었다. 이제 더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걸로 청혼은 거절이 됐고, 헌터청을 통해 지원까지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동북 전망대도 이쪽에서 가져오게 된 것이다.
솔직히 이걸로 마음의 빚도 조금은 덜 수 있었고.
어쨌든 이종족들로 인해 목숨을 건진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왜요. 전 좋은데.”
“너무 매달리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명색이 여왕님인데요?”
“됐고. 가게들 돌아봐야 되니까 바빠. 근데 이상도 이 자식은 어딜 간 거야?”
정말 말하기가 무섭게 이상도가 나타났다.
당연히 등에는 커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고, 두 손으로는 박스까지 잡은 채였다.
“상사 이상도. 열심히 짐 나르고 있습니다. 지금 족발집이 터져 나간다고 해서 라이노스 장로께서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딱 보니까 노린 게 분명했다. 어디 숨어 있다가 생색을 내려고 튀어나온 것이다.
그 증거로 호흡이 전혀 거칠지 않았고, 땀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속셈이 보인다. 속셈이.”
“아닙니다. 열심히 나르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내가 너를 모르냐? 이 뺀질거림의 대명사야.”
“진짜 속고만 사셨습니까?”
이상도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는데 엘리스마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티가 나는데?”
“그, 그렇게 보입니까?”
그때 이상도의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바로 라이노스 장로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여긴가?”
“헉…… 그, 그게 말입니다. 허리가, 허리가 아파서 잠시 쉬었습니다.”
“겨우 20㎏도 안 하는 짐인데 허리가 아프다고?”
“아닙니다. 체감은 200㎏가 넘습니다. 아악!”
유현성이 이상도의 귀를 잡아당겼다. 진짜 벼르고 있기도 했지만 하는 짓이 너무도 얄미워서였다.
“감히 나를 팔아넘겨? 너는 오늘 좀 맞자!”
“에, 엘리스 여왕님. 그런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이상도가 다급히 고개를 흔드는데 엘리스가 살짝 웃었다.
“맞는데? 오빠 주소 가르쳐 준 건 너잖아.”
“아니, 그걸 여기서 말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난 일편단심 오빠 편이거든.”
“으허, 여왕님 배신자!”
딱!!
하지만 정작 이상도의 뚝배기를 깨버린 건 라이노스 장로였다.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뒤통수를 갈긴 것이다.
“이놈이 여왕님게 무슨 불경한 소리냐. 지금 다들 바쁘다고 난리인데, 하라는 배달은 안 하고 말이야!”
“악! 악, 그만요. 때린 데 또 때리지 마시고 말로, 말로 하세요.”
“말로 해서 들을 놈이면 말로 하지.”
“컥! 그러다 지팡이 부러집니다.”
“이런 지팡이는 이미 수십 개나 있다.”
라이노스 장로가 먼지가 나도록 패는데, 갑자기 이상도가 도망을 쳤다. 지팡이를 고쳐 잡는 사이 순식간에 튀어 버린 것이다.
“저, 저놈이! 감히 도망을 쳐?”
“아닙니다. 배달 갑니다. 배달!”
이상도는 인파 사이로 들어가 족발집으로 향했다. 정말 라이노스 장로가 놓칠 정도로 무척 빠른 속도로 말이다.
“하아…… 보나마나 짐만 내려놓고 튀겠지.”
그게 이상도의 전매특허였다. 짱 박히고 몰래몰래 사라지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다 같이 족발집에 도착을 했는데, 어이없는 광경을 보게 됐다.
단검으로 화려하게 족발을 써는 사람이 있었던 것.
심지어 그게 김길우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