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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105화 (105/156)

105화

“오빠, 할 이야기가 우물우물, 있죠? 우걱우걱.”

“하나만 해라.”

“그러니까 우웁. 사이다. 사이다.”

“자.”

“후우웁. 꾸우웁, 꾸웁. 오빠 귀막…….”

일부러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엘리스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탄산이 만드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끄억어어억-”

나름 괴상하게 변조해서 내었다.

그 직후, 살짝 나를 노려보더라.

“흠흠,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어? 무슨 소리야?”

“현지 아가씨가 그러더라고요. 그냥 나오면 하면 된다고.”

현지 이것이 대체 무슨 소릴 했길래?

갑자기 엘리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요즘은 남자들은 솔직담백한 여자를 좋아한다더라고요.”

“으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오빠랑 저 사이예요?”

엘리스는 갑자기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손을 올려 턱을 괴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면서 왼손으로는 찰랑이는 금발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것만 배웠냐?”

“으음, 안 통하나? 이게 달수 꼬신 비법이라던데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현지랑 둘이 좋다는데 내가 뭐라 할 건 아니고, 실제로 열심히 하긴 했다.

강희 말로는 이제 누룽지 굽기도 잘한단다.

믿고 맡겨도 될 정도라나.

“오빠. 흐름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거예요. 결국은 이어질 건 이어지게 되어 있는 법이거든요.”

“너희들이야 오래 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갑자기 엘리스의 얼굴에 어둠이 깃들었다.

그 직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도 백곰족과 마찬가지죠. 세계수가 막아주고 있지만, 이쪽 세계의 흐름은 거스를 수는 없어요.”

“설마 수명이…… 줄어든다?”

“균형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요.”

엘리스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웃으며 말했다.

“아마 전, 앞으로 백 년도 못 살걸요?”

“야! 누구 놀…….”

버럭 하는데 갑자기 라이노스 장로가 떠올랐다.

대충 사백 살 정도라고 했었나?

그 기준이면 엘리스의 수명은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전 마녀예요. 세계수를 지키고 우리 종족을 지키고, 후대를 이어가게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게 제 숙명이라고요.”

“어? 어어.”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오빠는 군인이었죠?”

“그때는 그랬지.”

“군인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기본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 훈련을 받고 전쟁이 벌어지면 싸우는…… 에이씨, 솔직히 그런 게 있어.”

교육으로 배우는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처음에는 끌려왔다 생각했지. 하기 싫은 게 진심이었어. 근데 안 할 수 없는 게 군복무거든.”

“그렇다고 들었어요.”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싶었는데 황당하게도 게이트가 막 열린 거야.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라서 연구팀들이 들어갔고, 연락이 끊긴 거지.”

“그건 저희도 비슷하긴 했어요. 정신적 교감이 끊기면서 큰 충격을 받았죠.”

그런 부분에선 엘프들이 우리 인간들보다는 더 나을지도 몰랐다. 서로 간에 코드만 맞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박정철 족발 사건이랄까?

그때 라이노스 장로와 교감이 맞은 이들이 벌인 살코기 학살(?)은 한동안 시끄러웠지.

“하여간 입구를 지키다가 펑! 하면서 이상한 놈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진짜 많이 죽었어. 바로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쓸려 나가니 솔직히 정신이 나갔…… 었지.”

당시 어렸던 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고 생각했다.

피할 수 없는 교통사고나 그런 경우가 아니면 그게 보통의 삶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말 그대로 있을 법하지만 내 현실과는 먼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닥친 현실은 아니었다.

“사람이 개, 늑대, 호랑이 같은 짐승들한테 물려서, 뜯겨서, 심지어 씹혀서 죽는다는 걸 생각하진 않거든. 근데 그걸 눈앞에서 보는데…….”

나중에 듣기로 미친 듯이 총을 쐈다고 했다.

일개 병장이 탄창을 번개처럼 갈아가며 마구 갈겼단다.

더 황당한 건, 얼빠진 후임들 탄창까지 뺏어서 거의 쓸어버리듯 쏴 버렸다고.

“그 이후, 확 인식이 바뀐 거지. 만약에 저 짐승…… 아, 당시에는 그렇게 느껴서. 어쨌든 저 늑대들이 우리 강 여사, 현지, 현아를 덮친다면? 막 그런 상상이 들더라고.”

군대 교육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그런 고민을 며칠 동안 했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X발. 내 가족이 그렇게 되는 꼴은 못 본다.

“그랬는데 위에선 어떻게 본 건지, 날 뛰어난 병사라고 하더라고. 난 그냥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그때 중대장이 불러서 물었다.

일단 급하니 전시 하사로 진급, 월급은 그 기준으로 두 배를 줄 테니 게이트 커버로 나설 생각 없냐고.

“뭐, 지금이야 쉽게 말하지만. 당연히 한다고 했지. 저런 짐승들이 우리 동네를 뛰어다닌다 생각하니까 막 화가 나고 열받더라고.”

그게 시작이었다.

연구반이 다시 결성되고 그들이 게이트 입구를 조사하는 동안 난 주변을 지켰다.

그러면서 반쯤 최면에 걸린 것처럼 움직였다.

아, 이래서 군인들이 존재해야 되는구나, 라고.

이후, 게이트에 들어가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일단 초반은 입구 점령. 딱 거기서 조사 연구반을 지키는 거였다.

그다음은 조금씩 정찰 임무가 내려왔고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서른 번이 넘어갈 무렵.

“정말 이상한 세계로 넘어간 거야. 거긴 총도 포탄도 안 통하더라고.”

“우리도 그랬죠. 마력이 안 통하는 세상이 있다니 많이 당황했어요. 여기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요.”

엘리스는 날 생각해서인지 장난스레 웃었다.

세계수 덕분에 이전 세상과 비슷한 환경이 되었지만, 그 범위 너머는 여전히 마력 운용이 힘들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생각해 봐라.

밀림 입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십여 미터가 넘는 파란색 지네들.

그 징그러운 놈들이 스물은 넘어 보였다. 기습적으로 달려드는데 정말 환장할 뻔했다.

문제는 동물형 마수들한테 통했던 총 사격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점.

그런 지네들이 조사반을 덮치기 직전.

각성했다.

“내가, 그다음은 당시 중위였던 고요환에 후임 병장 이상도까지. 그리고 일부 인원들도.”

고요환이 코드 01.

내가 코드 00.

당시는 급한 대로 그렇게 정했는데, 이걸 확정 짓는 사건은 나중에 생긴다.

참고로 EX2 First.

이게 엘리스의 코드다. 이종족 중 첫 번째란 의미였다.

“난 마력 운용과 가속의 능력을 얻었고, 고요환은 힘을, 이상도는 은신에 가까운 능력을 얻었어. 대충 동화에 가까운 스킬이라고 짐작하거든.”

“섞여 들어가는 거요?”

엘리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실 처음에는 은신 계열인 줄 알았는데, 그걸로는 설명이 안 되더라.

아마도 뺀질뺀질 미끄러지듯 빠지는 성격 때문에 생긴 능력이겠지.

“그래서 작정하고 숨으면 못 잡는 거지!”

이 망할 놈이 내 손에서 지금껏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 * *

“미, 미친!”

“총알이 안 통해!!”

“일단 갈겨!!”

타당탕!! 타타타탕-!!!

“전방 1열 물러나고, MG50 사수들 준비!”

트르르르르륵.

투투투투투투!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철갑탄 수백여 발이 동시에 쏘아졌다.

“효과가 있다. 계속 쏴!”

“총열이 녹습니다.”

“조사반이 후퇴할 때까지 진격을 막는 게 우선이다. 갈겨!”

또다시 이어진 연사.

하지만 2분도 채 되지 않아 사격이 중단되었다.

달궈진 총열 때문에 철갑탄이 나가지 않게 된 것이다.

다행히 전방의 지네 다섯 마리 정도가 벌집이 되었고, 저들의 돌격 속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MG50 사수들은 후방으로, 견인포 직사 장전.”

“조준은 어떻게…….”

“눈이 없냐. 이 새꺄!! 그냥 때리라고!!”

다섯 대의 견인포가 포신을 내렸다.

그 즉시.

퍼펑, 펑, 펑--!!!

요란한 굉음이 터지며 지네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전진 속도도 한결 줄었다.

하지만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전탄 소진!!”

“전원 후퇴!! 남은 수류탄 모두 투척하고 빠진다!!!”

원래 차가 끄는 게 견인포인데, 게이트 안에서는 병사들이 직접 끌어서 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포는 버려!”

고요환이 명령을 내리고 몸이 돌린 순간.

지네 다섯 마리가 게이트 입구 앞을 막았다.

“제길. 양동이었나?”

“어떻게 합니까?”

“뚫고 나가는 것 말고 방법이 없잖아.”

최고 책임자인 대위의 명령에 고요환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후우우우웅-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치고 병사들 무리 속에서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생전 처음 보는 현상에 다들 놀라는 가운데, 그 중심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뛰어올랐다.

손에 들린 건, 달랑 대검 한 자루.

이후에 벌어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스각!

대검이 하얗게 빛나더니 지네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흐릿해지더니 등 위에서 나타나 그 중심부를 갈라 버리는 게 아닌가.

크르르르르…….

성대를 긁는 듯한 비명이 들리고.

지네 하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병사는 다음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썰린 두 마리 지네.

“와…….”

“고 중위,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다. 후미에도 지네들이……!! 어, 자네 몸이…….”

“예?”

고요환이 놀라는데, 그의 몸에서도 환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런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각성!

고요환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변화를 깨달았다. 수십 차례 게이트로 들어올 때마다 느껴졌던 이질적인 기운이 가슴에서 폭발한 것이다.

그게 마력이었다.

고요환은 몸을 돌렸다.

그런 뒤 달려드는 지네들을 향해, 무식하게도 견인포를 집어 던졌다.

지네들의 갑각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2톤짜리 포를 버틸 리가 없었다.

쿠웅.

콰직.

그다음 고요환은 포신을 붙잡더니 몸을 두어 바퀴 돌렸다.

부우우웅- 붕붕--!!

그런 뒤 손을 놓자 견인포가 직선으로 날아갔다.

콰지지직!!

크뢰애애액……!!

2톤짜리 무쇠 덩어리는 놀라운 속도로 지네 세 마리를 무식하게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우와아아아!!!”

환호성이 울린 건 그때였다.

게이트 입구가 열린 것이다.

고요환은 남은 견인포 세 개를 순차적으로 전방으로 던진 다음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떻게 정신없는 상태에서 힘을 끌어내 쓰긴 했는데.

“이 이상은 무리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현기증까지 느껴졌다. 몸도 휘청거리는 것이 걸음마저 위태로웠다.

그때, 누군가 쓰러지려던 자신을 붙잡았다.

“고 중위, 잘했다.”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 * *

“기록은 그렇게 남긴 했는데, 나도 그때 기억은 잘 안 나더라고. 이상도 녀석이 말하기로 하나는 자기가 잡았다고 하는데…….”

입구를 막은 마지막 한 마리를 놔두고 대검이 빛을 잃었다고 했다. 지네 등을 뚫기만 하고 갈라 버리지 못했다는 거다.

이상도가 거기에 잽싸게 수류탄을 집어넣고 날 안고 튀었다고 했다.

“견인포들이 방벽이 되는 사이 다들 무사히 게이트를 빠져나왔다는데, 다행히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전차들이 뒤따라 나온 지네들을 다 처리했다고 했어.”

“운이 좋았네요.”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해.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나와 고요환이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래 게이트에 있었거든.”

“아마 이질적인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육체가 된 걸 거예요.”

“맞아. 총알이 안 통할 정도의 마수들이 있다면 마력 역시 충분할 테니 각성의 조건이 다 갖춰진 거야. 거기에…….”

다시금 느낀 죽음의 공포.

그게 방아쇠가 된 게 분명했다.

이후의 수십 번이 넘는 실험에서도 상당수 병사들은 각성자가 되지 못했으니까.

“오빠, 근데 왜 대검이었어요?”

“흐음, 그건…….”

유현성을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인 뒤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주방 칼로 착각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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