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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106화 (106/156)

106화

“왜 웃어!”

“푸훗, 너무 황당해서요.”

“아니, 원래 제일 익숙한 도구부터 찾는 게 당연하잖아.”

“그건 맞죠. 저도 세계수부터 원했으니까요.”

엘프 전사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엘리스는 거의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장로와 전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모습을 감출 뿐.

혹여나 약해진 전력을 틈타 습격을 당할까 우려해서였다.

실제로 시도한 새끼들이 있기도 했고.

물론 결과는 몰살!

분노한 고요환과 나를 비롯한 군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특히 엘프족들이 막 넘어왔을 때 군부대에서 생활했기에, 군인들은 더욱 무자비했다. 단순히 그들만 처리한 게 아니라 조직까지 뿌리째 뽑아 버렸던 거다.

사실 요약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 과정이 무척 처참했다.

지금의 야당이 힘을 못 쓰는 이유가 그거였다.

그쪽 국회의원 일부가 삐뚤어진 욕망을 드러냈고, 공모하여 범죄 조직을 동원했다.

그게 밝혀진 이후, 야당 상당수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 기회를 놓칠 여당이 아니었다.

분위기를 타고 밀어붙여서 단숨에 여러 법안을 통과시켜 벼렸다.

그중 제일 중요한 건 각성자 관리법과 헌터청 설립이었다. 공식적으로 이종족을 관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함부로 한다는 건 바로 정부를 상대로 한다는 거였으니까.

물론 엉덩이가 무거운 국회의원들이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나와 고요환이 국회로 쳐들어가 아주 개박살을 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진짜 눈이 돌아갔다.

처음 엘프족들을 이쪽으로 데려왔을 때, 내가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충분한 힘과 능력이 있었고, 각성자들과 헌터 상당수가 나를 돕고 있었기 때문.

그랬는데, 분명 그렇게 약속했는데 그게 어긋나 버렸다.

당연히 빡칠 수밖에 없었지.

이제 엘리스는 세계수를 얻었다.

마녀의 신분을 확정지으며 여왕에 등극했으니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정한 것이고.

“오빠, 갑자기 왜 웃어요?”

“아냐. 별거 아냐.”

“무슨 생각 했기에…… 솔직히 말해봐요.”

엘리스가 살짝 삐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 꼬꼬마였다가 세계수로 인해 급성장했지만 여전히 가녀린 몸이었다.

그럼에도 세계수의 힘을 가져다 쓸 수 있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물론 엘리스가 웃으면서 슬쩍 흘리듯이 말한 거였다.

제대로 알게 된 건 술에 취한 라이노스 장로가 술술 불어서였다.

세계수가 있는 이상 엘리스는 무적이란다.

모든 엘프족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기에, 마녀의 능력으로 그 힘을 전부 가져다 쓸 수 있었다.

즉, 세계수 근처라면 일시적이지만 엘프 전사 모두의 전투력을 한 번에 발휘할 수 있다는 것.

그 정도라면 고요환도 그냥 발라 버릴 수 있겠지?

“아, 진짜 무슨 생각 하냐고요!”

“별거 아니라니까.”

“그러면 부탁 안 들어줄 거예요.”

“어? 내가 말했었나? 아닌데, 이상하네?”

솔직히 부탁할 게 있는 건 맞았다. 그런데 아직 말도 꺼내지 않은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잠시 의아했지만 그냥 그런가 하고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엘리스는 예지몽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감춰봐야 소용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엘리스가 심통을 부릴 것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가만히 손을 뻗어 엘리스의 머리를 만졌다. 잠시 쓰담쓰담한 뒤 검지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예상한 대로 바로 배시시 웃었다.

“헤에, 좋아요. 넘어갈게요.”

“그래.”

처음에는 엘리스가 해달라고 자꾸 졸랐다. 못 이기는 척 몇 번 해줬는데 나중에는 그 의미를 알고 나서 기겁하고 말았다.

라이노스 장로가 그러더라.

이건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서만 하는 행동이라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이란다.

듣고 나서 굉장히 당황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그냥 귀여운 막내 동생에게 하는 거라 생각하기로 말이다.

그랬더니 딱히 거부감이 없어졌다.

“그럼 계속해 줘요. 솔직히 궁금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궁금했어?”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잖아요.”

“그건…… 그랬지.”

“사실 다들 물어봐도 대충 알려주고, 사람마다 말이 다르더라고요. 특히 이상도는 맨날 오빠한테 들으라고 말을 돌리고.”

다시 엘리스가 심통을 부릴 것 같아 가볍게 웃어줬다.

“그래, 그러니까…….”

* * *

과거를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다.

아마 군에 있었든가 막 전역한 직후라면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할 수 있었다.

행복 분식을 운영하면서 즐거웠고, 이름 그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다.

정말 하루하루가 충실하고 보람찼다고 해야 하나.

황당한 건, 그런 경험 덕분에 더 강해졌다는 거다.

혹시나 하고 의심했지만 몇 번이나 테스트해 본 결과 진실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거였다.

능력을 쓸 때마다 칙칙하고 거칠었던 마력이 맑고 온순하게 바뀌었다.

아마도 마음의 안정 때문이겠지.

“그 게이트 일 이후, 각성자 부대가 만들어졌어.”

유현성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잠시지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일단 부대를 꾸리기 위해 지원자를 받았는데, 그 숫자가 의외로 많더라고. 결국 상부에서는 테스트를 해보기로 한 거지.”

어차피 목숨 걸고 게이트로 들어가니, 기왕이면 돈이라도 많이 받겠다는 심정이었을 거다.

거기에 이런저런 부가 혜택이 많았는데.

병사의 경우 일단 하사로 진급.

부사관은 일계급 특진.

장교는 직책에 따라 추가 수익 지급.

기본 월급은 동일 계급에 비해 두 배였으며 여기에 게이트 진입 수당, 생명 수당, 공적치에 따른 추가 수당 등을 보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망 시 억대의 보상금까지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군대라는 게 무조건 좋은 제안만 하는 게 아니거든. 당근이 있으면 채찍도 있는 거니까.”

각성자 부대는 임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위험도가 높다고 명시했으며, 도중 임무 포기 시 처벌을 받았다.

더욱이 그러한 행위로 인한 피해의 정도에 따라 최대 계급 강등에 군법 회의에 회부된다는 것이다.

막말로 최악의 경우, 감옥에 간다는 뜻이었다.

이는 무분별한 지원자를 막아 부대가 꾸려지는 시간이 지연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 혜택이 추가됐는데 아예 독립부대를 꾸리기로 한 거야. 그러니까…… 흐음.”

“흥, 그 정도는 알아요. 나도 반년 가까이 있었잖아요.”

“아, 그랬지. 그래서 독립부대가 뭔데?”

“그야…… 딱 정해진 직속 상관의 명령만 따른다. 타 부대 상급 간부라도 간섭하지 못한다. 그런 거잖아요.”

“오오. 엘리스, 대단한데?”

일부러 과장되게 어깨까지 으쓱해준 뒤 박수까지 쳐줬다. 그러자 엘리스는 칭찬해 달라는 듯 살짝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진짜 고양이도 아니고.

가볍게 머리를 만져준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전투 상황에선 내 말만 들으면 된다는 거야.”

“예? 왜요?”

“각성자 부대를 만들기 위한 테스트, 거기서 내 상대가 없더라고. 여기에 그동안의 공적치라고 해야 하나? 뭐, 위에서 이것저것 따지더니 실무 부대를 나한테 맡기기로 한 거지.”

추가로 외형상 국방부 소속이지만, 정식 신분은 국가기관 공무원으로 바뀌는 혜택도 주어졌다.

국무총리 산하에 한시적으로 급조한 ‘국가위기대응실’ 소속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군인이지만.

그런 꼼수를 부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무원의 경우 본인만 사고를 치지 않으면 정년이 보장된다. 거기에 연금도 받을 수 있었으니 노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여기에 유공자급의 혜택까지 더해졌다.

“어? 잘 모르겠지만 그거 어마어마하게 좋은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까지 했대요?”

“솔직히 말하면 돈 때문이지.”

“예? 돈이요?”

“어, 국무총리 정도 되면 국회 승인 없이도 일부 예산을 사용할 수 있거든. 물론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각성자 부대는 국방부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의 범주를 넘어섰다. 거기에 국회의 승인까지 받는다 치면 세월아 네월아 수준으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물론 긴급으로 처리할 수 있기는 하지만, 각종 서류나 증빙 같은 문제가 끼이기 때문에 복잡해졌다.

“한마디로 상부에서 일종의 꼼수를 쓴 거지. 그게 독이 될 줄은 모르고.”

실제로 국무총리는 헌터청이 생기면서 각성자 부대의 권한을 고스란히 넘기게 됐다.

그 이유는 기고만장한 태도 때문에 대통령 눈밖에 나서였다.

“어쨌든 뭐, 위쪽의 정치적인 문제는 나도 잘 몰라.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그렇게 각성자 부대 소속으로 옮기게 됐는데.

일단 좋은 건, 중사로 진급했다는 점. 부대원 대부분이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거였다.

나쁜 건, 내 위의 상사가 그 빌어먹을 고요환이라는 것.

나 다음으로 각성자가 되면서 대위로 진급했고, 어쩌다 보니 최종 결정권자가 된 것이다.

그건 부사관과 장교의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뭐, 그런 지랄 엿 같은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는 없었지. 그놈도 상당히 어리바리했거든. 큭큭.”

일종의 고속 승진의 폐해였다.

소위로 와서 1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바로 중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이번 일로 진급해 버렸으니, 군의 생리를 잘 몰랐던 것이다.

이후 각성자 부대를 중심으로 작전 방식이 변경되었다. 기본 화력을 쏟아붓고, 상황에 따라 각성자들이 움직이는 것으로.

최종 승인은 고요환 대위가 하되 실무적 판단은 내가 하는 걸로 바뀌었다.

아울러 작전 중에는 복잡한 계급장을 떼기로 했다.

“생각해 봐. 괴물하고 싸우는 중에, 유현성 중사님, 이상도 하사, 고요환 대위님, 이럴 수는 없잖아.”

“그거야 당연하죠.”

“그래서 그냥 ‘조장’이라 부르라고 했어. 나 역시 이름만 부르고 대답은 그냥 ‘예’로 통일시킨 거지.”

그때는 그게 맞았다.

부대 전체 인원 이래 봐야 고작 서른 전후, 그렇다고 ‘반’으로 하기에는 호칭이 이상했다.

전투 중에 반장님, 반장님 이러면 오히려 웃음이 터질지도 모르니까.

무슨 동네 이장, 반장도 아니고.

결국 ‘조장’은 쭈욱 이어졌고, 나중에 규모가 커졌음에도 그렇게 정착되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각성자 부대가 꾸려졌는데 하필 문제가 생기더라고. 제대로 된 정찰 능력을 가진 부대원들이 하나도 없었어.”

정말 어이없게도 상부에서 뽑은 각성자 대부분이 전투 계열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나마 가속 스킬이 있어 빠른 후퇴가 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만년 정찰 확정.

“사실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연구 조사반이 데이터를 수집하기 수월했거든.”

일단 게이트 입구 점령 후, 정찰.

다시 안전 구역까지 전진한 다음 진지 구축. 조사반 진입. 또 정찰. 적당한 거리까지 진입 후 또 진지 구축.

거의 이런 식이라 계속 정찰을 반복해야 했다.

한마디로 나만 죽어나는 상황이었다는 거지.

문제는 또 있었다.

정말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사나흘 간격으로 게이트들이 생기곤 했으니 거의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들어갔다 나온 거라 보면 된다.

“진짜, 그렇게 많이? 얼핏 듣긴 했는데 그 정도였어요?”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지. 근데 우리나라는 유독 지나친 감이 있었어. 게이트 하나 막으면 그에 상응하듯 또 생기더라고.”

당시 조사단 쪽에서 슬쩍 일러준 말이 이거였다.

에너지의 총량이라는 게 있다.

거대한 물줄기가 있는데 둑 때문에 막히면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된단다.

대한민국이 그런 케이스 같단다.

옆으로 흘러가면 또 막고, 물줄기가 또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면 막고.

전 세계 유래 없이 빠른 속도로 그걸 반복하니 계속 게이트가 생기는 것 같다는 것이다.

“정말 기분 더러웠지. 오히려 일 처리를 잘하니까 상사가 더 일을 몰아주는 느낌이랄까?”

좁은 땅덩어리.

하루 만에 모든 물류가 이동할 수 있는 교통망.

시골 구석까지 인터넷이 들어가 있고 활발할 SNS 덕에, 게이트가 생기면 거의 10여 분 만에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전국 곳곳에 있는 군부대였다.

5분 대기조가 게이트 대기조로 바뀐 덕에 인터넷에 기사가 뜨기만 하면 거의 한 시간 안에 저지선이 만들어진다.

그사이 각성자 부대는 헬기로 이동, 바로 조사단과 함께 투입되는 형식이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많으면 세 번씩 그 짓을 반복한다고 생각해 봐.”

“우와. 진짜 어마어마한 강행군이었네요.”

엘리스는 감탄했지만 내 얼굴은 썩어갔다.

결국 긴 한숨을 내쉰 뒤, 절규했다.

“난 그 짓을 무려 사 년 동안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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