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오빠, 그거 고백이야?”
“하아, 넌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애써 피했던 과거 이야기를 꺼낸 건 나름대로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앞으로의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솔직히 이기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모든 사람을 챙길 수는 없었다.
나와 내 가족, 행복 분식 식구들과 지인들을 챙기기만 해도 벅찬 게 사실이었으니까.
“직감이야. 아마도 당분간 게이트가 터질 일은 없겠지. 그런 일이 언제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미리 준비해서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러니까, 엘리오스 마을에 대피소를 만들자는 거잖아.”
“일단은 그래.”
게이트 안정화 이후로 대피소는 서서히 사라지는 추세였다.
이 인근에서 기껏해야 지하철과 지하상가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되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엘리스와 세계수가 있었다. 고위 엘프 전사들까지 있으니 수비적인 측면에서 이만한 곳이 없다고 보면 된다.
실제 게이트가 생기더라도 최근에는 몬스터 웨이브 같은 현상은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느낌이 좋지 않은 것이 고요환의 경고 때문이었다.
3차 변이를 염두에 두고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나.
“그게 쉽지는 않아요.”
“대피소를 짓는 게 쉽지 않다고?”
“일단 허가, 그 부분이야 오빠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상관은 없는데, 그런 건 부족 회의에서나 결정해야 되거든요. 그에 상응하는 게 없으면 어려울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뭔데?”
“일족은 가족만 받아들인다고 보면 되죠. 그러니까 오…….”
“거기까지. 너 자꾸 그러면 진짜 손 떼버린다?”
“치이!”
엘리스가 할 말은 너무 뻔해서 바로 멈추게 했다.
사실 대안이 없지는 않았다.
단지 원만하게 처리하고 싶어서 엘리스와 이런저런 대화를 한 거지, 정 안 된다 싶으면 동북 전망대 쪽에 지어도 상관은 없었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 난감하다는 거였다.
서면 일대에서 엘리오스 마을을 거쳐서 산을 넘고 들어가야 했으니까.
그 길을 제외하면 부산 시청 방면으로 가서 연산동을 거쳐 올라가든가, 광안리 인근까지 가야 한다. 아니면 등산로를 걸어서 한 시간 가까이 산을 타야 하는 것이다.
“엘리스, 정말 안 돼?”
“돼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냥 지하에 공동 하나만 만들면 되는 건데.”
“그럼 한 건 낙찰.”
의외로 일은 수월하게 풀렸다.
감히 여왕님이 하겠다는 일을 반대할 엘프들은 없을 테니까.
하여간 여기에 대피소가 지어진다면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걸 염두에 뒀기에 엘리오스 마을에 공을 들인 건지도 몰랐다. 일단 식당가가 있다는 건 식자재를 비축한다는 의미도 있었으니까.
“일단 내가 생각한 건, 안쪽 마을 아래쪽에 지었으면 좋겠어.”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지만 대략적인 계획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눈치를 봤는데, 딱히 엘리스도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따로 뭔가를 생각하는 게 있겠지.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재수 없는 놈’ 바로 조온달이었다.
“어, 여보세요?”
-사장님.
“무슨 일인데?”
-호석이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지금 병원인데…….
잠시지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분식집 장사고 나발이고 간에, 애가 쓰러졌다니 머리가 멍해지더라.
“거기 어디야!”
* * *
“예. 과로입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뜨려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입원실을 옮기자마자 방문객들이 들이닥쳤는데, 면면이 심상치가 않았다.
마침 가게에 방문했다는 황무기 실장.
군인으로서, 헌터로서 오래 일을 했기에 뿜어지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여기에 김요성 대표부터 이예지에 박종후까지.
따로 떼놓고 보면 별것 아니겠지만 함께 있으니 은근한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여기에 각 구역 대표인 김병철과 이철구까지 더해지니 의사로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잘 부탁한다고 한마디씩 하는데, 지역 유지들의 말이라 그런지 부담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따지면 이들 역시 유명인이었으니까.
아니, 가장 큰 문제는 환자였다.
딱 한마디만 하자면 정호석이 눕기에는 침대가 비좁았다.
괜히 곰 같은 덩치라고 말하는 게 아닐 정도로 꽉 차 들어갔고 드러난 팔뚝의 근육조차 어지간한 성인 허벅지보다 두꺼웠던 것이다.
“그런데 다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나서 슬쩍 물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 시선을 피하더라.
이거 분명히 뭔가 있는데?
“아, 저는 대표님 따라서 왔습니다.”
“크흠, 난 지나가는 길에 라면 생각이 나서…….”
“이쪽에 처가가 있어서.”
“난 이 친구 따라가다 보니.”
각기 변명이라고 하는데,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조온달이 슬쩍 끼어들었다.
“호석이가 그러더군요. 자기는 다른 가게 갈 생각이 없다고 몇 번이나 사양했다고 합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다른 가게?”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답니다. 아무래도 그게 스트레스가 된 것 같은데…… 물론 저도 제의 받았습니다.”
일단 조온달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혹여나 문제가 생겨도 엘리스, 아니 라이노스 장로 선에서 정리가 가능했으니까.
아마도 수십 개나 있다는 지팡이가 불을 내뿜겠지.
“다아른~ 가아게~ 스카웃!”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김병철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 제안은 그런 게 아니었다네. 나중에라도 가게 차리고 싶으면 연락하라는 거였어.”
“나는 다른 가게에서 연락했다는 말을 듣고 좀 알아봐 주고 있었을 뿐이야. 거기 의외로 안 좋은 식당이더라고. 직원 빼서 레시피만 알아내면 쫓아낸다고 해서 조언해 주러 간 것뿐이라고.”
이철구가 그렇게 말하며 이예지를 쳐다봤다.
딱 보니 도움을 구하는 눈치였다.
“저희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요. 정말 아빠 말대로 순수하게 알아봐 준 것밖에 없어요.”
그 말에 박종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희 쪽에서도 피해 입은 식당이 한둘이 아니라서 주시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하필 정호석 씨가 그쪽 사장하고 만났다는 이야기 듣고 움직였던 겁니다.”
“호석이가 그쪽 사장을 만났다고요?”
“예. 퇴근하고 바에서 같이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입이 무거운 박종후가 단언할 정도라면 사실일 게 분명했다.
물론 진실은 정호석이 깨어나면 알게 되겠지만, 나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불과 어제만 해도 새로운 메뉴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라면, 불라면, 냉라면.
이 세 개의 라인과 김밥, 장어묵 덮밥이 핵심 메뉴였다.
그걸 정호석이 내 허락을 받고 조금씩 연구하고 개량하고 있었다.
물론 맛이 아니라 양적인 부분이었다.
그건 곱빼기 메뉴가 없다는 손님들의 불만 때문이었다.
해서 몇 번 내려와서 맛을 보고 같이 조절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스카우트라니.
그때 김요성 대표가 나섰다.
“자네와 나는 동업하는 사이지 않나. 굳이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 이유는 없지.”
“그건…… 저도 압니다.”
“우리도 직원 빼돌리는 걸 극도로 혐오하네. 하지만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어.”
“거기가 어딥니까?”
진심으로 가서 깽판치고 싶었다. 아주 그냥 다 엎어버리고 사장 놈 모가지를 틀어 버리면 좀 속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이성이 있으니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만.
“마성 분식이라고 있다네.”
“예? 무슨 이름이 그따위입니까?”
솔직한 발언에 다들 멍해지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그게 좀 당황스럽더라.
“설마, 배우 김마성 모르나? 시청률 27% 찍은 닥터 임성구 드라마 말이야.”
김요성 대표가 말하길, 김마성 배우를 메인으로 광고하는 회사라고 했다.
당연히 김마성은 가명, 본명은 김오성이고 실질적인 운영은 동생 김한음이 한단다.
허, 오성과 한음이 이런 데서 나오다니.
“울산을 기반으로 체인점이 여덟 개나 있다네. 이번에 부산으로 진출한 거긴 한데, 평은 썩 좋지가 않아.”
“역시나 가격 문제죠?”
“흐음, 예리하군.”
부산은 임금이 저렴한 만큼 물가도 싼 편이었다.
당연히 음식점도 동네 장사의 경우 비싸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공업도시 울산은 유동 인구가 많아서인지 가격이 좀 쎘다.
그쪽 프랜차이즈나 체인점들이 같은 금액으로 부산에 왔다가 줄줄이 망하는 이유가 그거였다. 같은 업종 같은 음식이 10~15% 이상 비싸니 손님들이 찾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마도 일반 분식이 아닌 고급화 전략으로 나가려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새로 개발하는 것보다는 직원을 빼 가는 게 낫다고 보는 모양이야.”
“접촉한 식당이 여러 곳이겠네요.”
“맞아. 그런 문제 때문에 우리가 행복 분식을 찾아간 거라네. 근데 이 친구가…… 잠시 조는 것 같더니 그대로 기절하더군. 여기 황 실장이 겨우 업고 여기까지 온 걸세.”
“감사드립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솔직히 최근에는 엘리오스 마을 식당 라인에 집중한다고 행복 분식에 소홀했다.
물론 매일 통화하고 외부적인 일은 내가 처리했다.
식자재 주문이라든가, 매출 상황, 거기에 진상 손님 대처까지 말이다.
이걸로도 부족하다 싶어 정호석의 월급을 대폭 올려줬다. 전담하다시피 맡고 있으니 순수익의 일부를 추가 보너스로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동시에 조온달 빼고 다들 월급까지 올려줬다.
물론 정호석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입금은 사장 마음 아니겠는가?
대충 저번 달에만 해도 오백 조금 못 된다.
그걸로 어머니 여행 보내 드리고 좀 더 모으면 이사도 가겠다고 했었다.
그런 정호석이니 분명 스카우트 이야기는 거절했을 거다.
동시에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해놨는데 불과 하루만에 과로라니.
아마도 누적된 부분이 있겠지.
“일단 자세한 건 본인이 일어나 봐야 알겠죠. 자, 오해는 풀었고, 환자는 안정이 중요하니까…… 다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금 고개를 숙이자 다들 분위기를 눈치챘다.
김요성 대표가 먼저 나가자고 했고, 그렇게 병실은 조용해졌다.
가만히 보조석에 앉아 정호석을 보는데, 이 자식, 몸이 더 좋아졌다.
이전에는 약간 투실투실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곰 같은 덩치에 날렵한 근육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그냥 딱딱 각이 잡힌 걸 보니.
“진짜 고생 많이 한 모양이네.”
녀석 성격상 내색은 안 할 것 같아서 몇 번이나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힘들면 가게 문 닫고 쉬어도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조온달에게도 당부해 놨다.
정호석을 좀 살펴봐달라고.
“에휴, 미련한 놈.”
가만히 앉아서 깨어나길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왔다 갔다. 링거액이 다 됐다면서 간단히 조치하더니 한숨 자고 일어나면 될 거라더라.
그사이 행복 분식 식구들도 가게 정리하고 왔다.
호영이가 정호석의 빈자리를 메웠다고 하는데 자신 없는 부분은 주문을 안 받았다고 하더라.
결국 라면과 냉라면, 김밥, 장어묵 덮밥만 팔고 끝냈다고.
확실히 불라면은 매운맛 조절이 쉽지 않았단다. 그래서 두 그릇 내간 뒤로 손님 반응보고 접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요금은 받지 않았다고.
그 대응에 잘했다고 칭찬해 주니 오히려 쑥스러워하더라.
이후 임혜리와 임수원의 주접이 이어졌고, 바로 내쫓아 버렸다.
“아오, 정신없어.”
하여간 병실이 조용해지니 이상하게 생각이 깊어지더라.
엘리오스 마을 일만 끝나면…….
“근처에 가게라도 하나 차려줘야겠어.”
메뉴는 좀 고민해 보더라도, 호석이 녀석이 보여준 의리를 생각하면 조금 이르지만 3호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스카우트 이야기는 좀 더 해봐야 알겠지만, 솔직히 전혀 걱정되진 않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법이 아니라고 하더라.
그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정호석이 보여줬던 모습은 믿음이 갔고, 자연스레 믿어졌으며, 가게를 믿고 맡길 정도였다.
오히려 스스로 점장 자리를 스스로 고사할 정도로 겸손하기까지 했다.
알고 있는 걸 모두 가르쳐 준 게 그래서였다.
특히 조온달이 그러더라.
자신이 아는 인간 중에 등을 맡길 사람을 고른다면, 정호석이라고.
그때였다.
“으흐…….”
작은 신음과 함께 정호석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