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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111화 (111/156)

111화

“그냥 생활이라고요.”

엘리스가 웃는데 뭔가 섬뜩함이 전해지더라.

최면도, 세뇌도 아닌데 다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고 하니 믿기질 않았던 것이다.

“으음, 오빠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일단 제 손을 잡아요.”

엘리스는 그렇게 말한 뒤 나를 이끌었다. 그런 다음 조용히 속삭이더라.

“그냥 분위기라는 게 있어요. 남들 다하니까 저절로 따라하게 되는 그런 거요.”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기는 한데…….”

“제가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일족들은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더라고요.”

엘리스가 지나가면 다들 무릎을 꿇는다. 그런 광경과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식당 사장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엘리스는 불편해했지만, 그게 몇 번이나 명령을 했지만 고쳐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랜 기간 동안 몸에 배여 버린 습관이기에 말리기도 애매하다나.

“저로써는 마음 편한 대로 하는 게 좋기는 한데, 격식이 좀 과하기는 하죠. 제가 밖을 잘 안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고요.”

“그럼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뭘 하기 어렵겠네.”

“헤헤, 그래서 종종 위장하고 다니는 거죠.”

엘리스는 웃으며 말했지만 난감함을 감추진 못했다.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이끄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엘리스의 옆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이거 괜히 이용당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걸 본 식당 사장들이 놀라기는 했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서 이야기하진 않더라.

엘리스가 세계수를 배경으로 축복을 뿌리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몇몇 정부 관계자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느 정도 건강 회복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니, 변화를 체감한 것이다.

그때 라이노스 장로가 소리쳤다.

“세계수의 축복이 일족의 영광과 함께하리라.”

그렇게 라이노스 장로까지 무릎을 꿇자 엘프족의 모든 전사들까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무슨, 21세기에 독재국가, 아니 왕정국가도 아니고!

막말로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요즘 같은 시절에 대통령이 지랄 발광했다가는 그냥 칼 맞아 죽는다. 특급 헌터들이 떼거지로 몰려가면 청와대 경호원들도 막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괜히 헌터청의 권한이 강한 게 아닌 것이다.

때문에 고요환은 국가 행사 때마다 불려 다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상징성이랄까!

그냥 고요환 건드리면 헌터청 소속 애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조져 버린다. 그러니 헌터 랭킹 1위이자 헌터청 부청장을 갖은 로비를 해서라도 참여시키는 것이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녀석이 최고였으니까.

거기에 고요환이 있다는 건, 이쪽을 건드리면 뭐가 된다는 의미도 있었다.

어쨌든 그런 자존심 덩어리 고요환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휩쓸릴 수밖에.

후우, 고요환.

친구지만 애증이 없을 수 없었다. 실제로 내가 전역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뭔가 감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대 일어나라.”

엘리스의 손짓에 고요환이 앞으로 다가와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런 다음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말하더라.

“대한민국은 그대의 일족이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을 잊지 않을 겁니다. 조건이라 하기는 많이 부족하나, 공식적으로 자치 도시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목소리가 생방송으로 전국에 울린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이는 헌터청의 공식적인 입장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가 엘프족을 인정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게, 홍콩과 중국 정도라고 해야 할까.

공생!

지금 고요환은 그걸 당당하게 알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대표로.

솔직히 황당하긴 하더라.

국무총리까지 참여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이건 정부에서 인정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 엘리스 옆에 서 있는데, 의외로 무감각해지더라.

아니, 솔직히 현실감각이 많이 떨어진 거겠지.

“오빠도 한마디 하세요.”

“내가?”

“후훗, 식당부 장관이잖아요.”

“아니, 그, 그건…….”

대체 나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둔 것도 없었고, 애초에 분식집 사장에 불과할 뿐이라 이런 자리도 낯설었던 것이다.

근데 묘한 게, 손님들과 수다 떨었던 경험이 많아서인지 크게 떨리지 않더라.

“예. 맛있는 다양한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라면 드시러 오세요.”

* * *

“푸하하하하. 제대로 미친놈.”

고요환은 진짜 방이 터질 것처럼 웃어댔다.

아니, 이대로 더 소리쳤다가는 진짜 집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전국 생방송인데, 라면 먹으러 오라니. 그것도 네 가게도 아니잖아.”

“아니, 그게…….”

김요성 대표랑 이야기해서 메뉴 조정에 들어가긴 했다. 본성 푸드가에서 행복 분식의 라면과 불라면을 팔기로 정한 것이다.

그 이유는 변고웅 조리장의 볶음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였다.

한강에서도 라면을 파는데, 여기에도 필요하다나 뭐라나.

애초에 너무 포장 판매에만 집중하다 보니 전체적인 밸런스에서 아쉽다고.

하긴, 행복 분식에서처럼 라면에 김밥은 진리지.

여기에 라면 국물에 철판 볶음밥도 상당히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정호석과 의논했던 신메뉴.

그걸 생각하니 라면은 빼놓기가 어렵겠더라.

국수집이나 강종곤 중국집 짬뽕도 뭔가 아쉬움이 있어서였다. 또, 박정철이 뼈해장국에 사리면을 냈지만 라면은 아예 다른 음식으로 봤던 것이다.

이건 엘프 시식단을 불러 수시로 확인한 결과였다.

하지만 행복분식 2호점은 누룽지 버거에 올인 했고 판매도 제법 괜찮아서 신메뉴를 늘리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김요성 대표의 제안대로 본성 푸드가에서 판매하기로 결정한 거였다.

“크흐흐흐, 아마 전국 생방송에서 라면 먹으러 오라고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고요환이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웃는데 순간 울컥했다.

아오, 저거 한 대 팰 수도 없고.

“흠흠! 나도 얼떨결에 그렇게 한 거야.”

“아니지. 넌 이제 뼛속까지 분식집 사장이 된 거라고. 세상에,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가 라면 먹으러 오라고 하다니. 너, 그때 총리 아저씨 얼굴 못 봤지?”

“어? 뭐, 다른 일 있었나?”

“최소한 우리나라 홍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라면 먹으러 오라는 말에 기겁을 하더라. 물론 그 덕에 라면 회사들 주식은 미친 듯이 올랐지만. 어이가 없잖아.”

“하, 검색어에 라면이 터진 게 그래서였나.”

포털 대부분 라면이 실시간 검색어 최고를 찍었다. 덩달아 행복 분식의 불라면도 상위에 랭크된 것이다.

“이거 전국 생방송이긴 한데 뉴튜버 통해서 전 세계까지 퍼졌다고. 그 파급력은 나도 몰라!”

엘프족들의 자치 도시를 인정한다는 것부터 파격적이었단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데, 거기서 내가 라면 먹으로 오라고 했으니 다들 멍해졌다는 것이다.

“아, 몰라. 어쨌든 홍보만 제대로 되면 됐지. 엘리스도 원한 건, 크게 이슈가 되는 거였고.”

사실 엘리오스 마을이 대단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세계수가 있고, 애메랄드빛 호숫가 있으며 마음 편해지는 산책로가 있다는 정도.

여기에 엘리스가 과하게 힘을 써서 세계수의 축복을 내린 것도 있었다.

벌써 요양원 관련 문의가 마구 밀려들 정도라나.

이거 아무래도 식당가 라인을 확장하는 것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게 다 수익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충대충 음식을 내놓는 건 자존심상 용납하기 어려웠다.

“하여간 너 때문에 골 때리게 됐다. 거, 파견 용역 계약 없으면 우리랑 추가 하자.”

“그게, 좀 회의하고 나서.”

심처 경비는 엘프족이, 마을 경비는 헌터청이, 외부 경비는 갈매기 길드에 맡겼다. 우현필 라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일부를 고용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김길우와 그 검술 사부라는 인간의 입김이 일부 작용했다.

의외로 성격이 호쾌해서인지 자신처럼 놀고 굴러다니는 종자들 좀 써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엘리스와 상담했는데 오히려 잘 됐다고 했다.

일단 외형상 갈매기 길드가 있는 이상, 어정쩡한 각성자들은 사고 칠 생각도 못 할 거라고.

그때 고요환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근데 너, 진짜 여기 국왕 같다.”

“뭐?”

“아니 그렇잖아. 말로는 분식집 사장이나, 식당부 장관이니 뻘소리하는데, 정작 중요한 대소사는 거의 다 관여하잖아.”

“아니 그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엘프족에게 진 빚, 물론 이건 대부분 갚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만약을 위한 대피소를 생각하면 적극 도우는 게 맞겠지.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흠, 잃었던 열정을 다시 되찾는다고나 할까.”

“그렇게 보여?”

“너 군에서 나가기 직전까지는 반쯤 폐인이었잖아. 매사에 귀찮아했고, 당장 내일 죽어도 괜찮다는 느낌이었거든.”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기는 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눈앞의 이 새끼였지.

수백 번이나 작전을 함께했던 친구는 영웅이 됐다.

그건 헌터청의 홍보 계획이었는데, 사회적으로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란다.

이해는 되었지만, 동시에 상실감이 들더라.

정말 죽어라 전투에 임한 건 나와 부대원들이었으니까.

수차례 대판 싸운 게 그래서였다. 실제 부대원 대부분이 자신을 따르는데, 고요환은 그걸 못 마땅해 했던 것이다.

동시에 무리한 작전까지 강요해 희생자가 늘기도 했었다. 물론 나중에는 사과했지만, 그건 나한테 겁나게 쥐어 터진 뒤였으니까.

마지막으로, 그 사건이 있었다.

무려 수백이 넘는 헌터들이 투입된 작전이었다. 당연하게도 선발대를 이끄는 건 나였고.

거기서 특이 변이종이 나타났다.

대충 비슷한 외형을 따서 코드명 베나레스라고 붙이긴 했는데, 정말 상식을 뛰어넘었다.

거기에 수백의 드레이크 무리까지.

어느 정도 들어온 상태에서 포위당한 터라 결국 저지선을 만들어 후속부대를 기다려야 했었다.

하지만 고요환의 윗선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후발대는 오지 않았다.

절반이 넘는 이들이 죽은 뒤에야 이종족 연합이 나타났고,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상당히 오래갔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였다.

전역을 결심하고 조리사 자격증을 딴 뒤 돌아보니, 고요환도 정말 개처럼 구르고 있었다.

각성자 부대를 위해 예산을 따오고 일정을 조율하고, 표면적으로 영웅 행세를 해야 했다. 그 뒤로 수많은 계산이 오갔으며 의도하지 않은 일에 끼어야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헌터청의 꼭두각시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나에게 무척 고마워하더라.

한쪽 팔이 없어도, 두 다리가 먹혔어도 이렇게 숨 쉬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고, 감사함을 표시한 것이다.

아마 그들이 아니었다면, 난 미쳤겠지.

하지만 그 전까지는 고요환의 말대로 거의 폐인처럼 지냈었다.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완수할 거라는 임무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2차 3차에서 마무리 짓기는 했지만, 당시 나는 영혼이 빠진 상태였다.

열정, 그딴 건 개나 줘 버리라지. 라는 심정이랄까.

“하하, 뭔가 생기가 도는 느낌이야.”

“뭐, 네 말대로 이 마을, 아니, 도시의 국왕이 되는 것도 좋겠지.”

“정말?”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난 지금은 내 가족과 우리 가게 식구들이 더 중요해.”

“그럼 엘리스는?”

“막내 동생 챙기는 느낌? 딱 그 정도로 관여하는 정도라고. 그러니까 너무 과하게…… 오해하지 마라.”

그렇게 선을 그었음에도 고요환의 표정은 미묘했다. 웃는 듯, 아닌 듯, 입꼬리가 꿈틀거렸던 것이다.

“흐흣, 아무려면 좋겠지.”

“너, 이 새끼. 덜 맞았구나.”

“아이고, 친구님. 그때 옆구리 터진 게 아직도 쑤셔요. 그 주먹은 접으시고, 이마의 혈관도 불끈불끈하는데 무섭습니다요.”

고요환이 엄살을 부리며 일어서는데, 저 대갈통을 날려 버릴까 싶었다.

근데 진짜 그럴만한 일이 일어나더라.

벌컥 문이 열리며 라이노스 장로가 뛰어 들어온 것이다.

“위대하신 분…….”

“그냥 이름 부르라고요!”

“예? 제가 감히…… 어쨌든 일이 생겼습니다. 잠시 도와주시면…….”

호들갑에 가까운 분위기였지만, 왠지 나서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직감이, 그래야 한다고 팍 쏘더라.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예. 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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