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흐음, 상징성이라.”
식당가 라인으로 가면서 라이노스 장로가 한 말이었다.
동시에 아까의 행사에서 엘리스가 날, 자신의 옆으로 끌었던 게 이해가 되더라.
엘리오스 마을의 첫 번째 사건.
이걸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대중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마을 경비를 헌터청에서 한다고 하지만, 사실 형식상에 가까웠다. 큰 문제가 생겼을 때 공식적으로 개입할 명분을 만드는 수준에 가까운 것이다.
결국 엘리오스 마을은 엘리스가 선포한 대로 거의 엘프들이 관리한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이번 일은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단다.
“그래서 저희도 나서지 말라고 한 거군요.”
고요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뭔가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라이노스 장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헌터청의 위신이 좀 깎일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로써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 맞다 생각합니다.”
원래라면 라이노스 장로는 고요환에게 말을 놓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한 일족의 장로라는 위치상 편하게 대한 것이다.
근데 나랑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진 않더라.
이유를 알기에 굳이 그 부분을 따지진 않았다.
“그래서 결론은 뭡니까?”
* * *
“야! 우리가 어려운 거 말하냐? 그냥 옆에 앉아서 이야기나 같이 하자고.”
“저, 그게…….”
엘프 여성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잔뜩 무장까지 한 헌터 여섯 명이 주변을 노려 보니 다들 시선을 돌렸다.
다들 괜히 엮이기 싫다는 얼굴이었다.
식당가, 박정철의 족발집.
갑작스럽게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정신없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입구 앞에서는 김길우의 사부였다는 이현식이 족발 써는 데 집중했고, 박정철은 주방에서 손강희와 함께 정신없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홀에 신경 쓸 여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사이 엘리스가 보낸 여자 엘프들이 희롱을 당했다.
헌터 새끼들이 처음에는 은근슬쩍 건들더니 술기운이 올라오자 과감하게 병신 짓을 시작한 것이다.
그걸 본 손님 몇 명이 식당가 입구를 지키는 헌터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게 라이노스 장로를 통해 온 것이고.
“야, 그냥 이런 거 하지 말고. 어때, 나랑 사귀는 거! 그러면 내가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줄게. 이런 족발집 내가 몇 개라도 차려줄 수 있다고.”
헌터 강구식은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 엘프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그런 뒤 힘으로 옆에 앉혀 버렸다. 그리고 은근슬쩍 몸을 더듬더라.
“자, 여기 술이나 한 잔 따라봐.”
“가, 가게 규정상 그렇게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아흐, 한 사람당 한 병이고요. 저희는 그냥 서빙만…….”
“이씨, 손님은 왕이거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그리고 이것도 서비스야. 서비스! 이 정도는 해야 장사가 되는 거라고.”
강구식은 그렇게 말한 뒤 맥주 컵을 내밀었다.
“꽉 채워봐.”
엘프 노아스가 잠시 주저하는데, 강구식은 강제로 손을 잡아서 술을 따르게 했다.
그렇게 컵에 소주가 가득 차자 그걸 앞으로 밀더라.
“마셔!”
“예?”
“손님이 주는 술이잖아. 한 잔 정도는 마셔야…….”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뒤늦게 소란스러움을 느낀 박정철이 소리를 질렀다.
물론 손에 무기라고 들고 온 게 족발 뼈라는 게 황당하긴 했지만.
“넌 뭐야?”
“이 가게 사장입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은 명백히 성희롱입니다.”
“하! 미친 새낀가?”
강구식의 노아스의 몸을 더듬던 손을 떼고 자신의 도끼를 붙잡았다.
“야, 사장 새끼. 너 죽을래?”
박정철은 잠시 움찔하면서 손을 뒤로 돌렸다. 손강희에게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손강희는 순간 감정이 흔들렸지만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식칼로는 저 커다란 도끼와 대적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물론 다른 걸 봐서이기도 했다.
“저기 사장님.”
손강희가 살짝 박정철의 앞치마를 잡아 끌었는데, 오히려 박정철은 그 손을 뿌리쳤다.
“여긴 내 가게고, 내가 사장이야. 너 같은 손님 받을 생각 없으니까 그냥 나가줘.”
용기를 내서 말했지만 강구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끼를 놓더니 노아스를 와락 끌어당겼다.
“뭐, 어쩔 건데?”
“조금 있으면 경비대가 올 겁니다.”
“푸하, 여긴 법이 다르다며? 근데 난 대한민국 공식 헌터라고, 재판을 받아도 여기선 안 받아. 그리고 돌아가서 받아봐야 뭐, 벌금 조금 나오고 말겠지.”
강구식은 그렇게 말하며 소주가 가득 잠긴 잔을 들었다. 강제로 노아스에게 먹이려고 입가로 들이민 것이다.
“그만!”
박정철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족발뼈를 둘 사이로 휘둘렀다.
쩡.
깨진 건 맥주잔.
동시에 강구식이 벌떡 일어나 박정철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가 돌았나!”
그 한마디에 동료들로 보이는 헌터 다섯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즉시 무기까지 뽑아 들고 주변을 위협했다.
“새끼들아, 불구경하냐? 다들 꺼지지 못해!”
“오늘부터 여기 문 닫는다.”
“다들 죽고 싶은 모양이네. 이 새끼들이, 어딜 감히 헌터한테 대들어.”
강구식은 말리는 척 손짓하면서 말했다.
“야야, 적당히 해라. 너무 그러면 안 돼.”
“형님. 형님이 그렇게 무르니까 그런 겁니다. 요즘 우리 보는 시선이 거지 같습니다.”
“알아. 진짜 씨바. 몇 년 전 같으면 우리 헌터들 눈도 못 마주칠 새끼들이, 아예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지만, 그래도 막 죽이면 곤란해.”
“누가 죽인답니까? 그냥 팔다리 몇 개 꺾어놓는다는 거지.”
“일반인들은 그거 치료도 쉽게 못해. 그냥 병신으로 살아야된다고.”
“형님. 우리는 목숨 걸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럼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죠. 가령.”
헌터의 시선은 다른 엘프 직원에게 향했다.
그 음침한 눈빛이 전신을 훑어보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앞을 박정철이 막아섰다.
“이 새끼들아. 막말로 니들이 헌터라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냐?”
“오, 이젠 손님도 아니다 이거지.”
강구식이 턱하고 가슴을 밀치자 박정철이 넘어졌다.
아무리 단련한다고 해봐야 일반인이 헌터의 힘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마력까지 실었으니 당연히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 우리도 손님이야. 당연히 대접 받을 권리가 있다고.”
“손님은 개뿔. 넌 손놈 새끼야.”
갑자기 뒤쪽에서 목소리가 울리자 강구식이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커다란 주먹이었다.
빠악.
그대로 적중한 펀치에 강구식이 날아갔다. 턱을 제대로 갈겼기에 치아 몇 개를 흩뿌리면서 주방 입구에 쳐박힌 것이다.
“아주 그냥 지랄을 해요. 지랄을.”
“너, 넌 뭐야.”
“야이, 새끼야.”
강구식의 동료 헌터들이 무기를 빼들고 유현성의 앞을 막아섰다.
그 즉시.
빠바바박.
“크헉.”
“윽.”
“아악.”
대비고 방어고 나발이고, 순식간에 쥐어 터져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유현성의 공격이 벼락처럼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검을 든 놈은 검을 박살 내고 주먹 망치로 정수리를 갈겼고, 창을 든 놈은 발차기로 두 동강을 낸 뒤 명치를 찍어 찼다.
힐러로 보이는 덩치는 싸다구를 날렸고,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턱을 갈겨 버렸다.
마지막으로 탱커로 보이는 녀석은 손을 과감하게 썼다.
방패로 전면을 막고 달려들려 하기에 아예 후려 갈겨 버린 것이다.
결과는 방패 박살.
코뼈 주변 함몰까지 추가되었다.
“에휴, 한 방도 제대로 못 막는 놈들이 아주 입만 살았네.”
유현성은 그렇게 말한 뒤 박정철을 일으켰다.
“괜찮냐?”
“어, 조금 아리긴 한데…….”
“뭐? 아프다고? 이 새끼들이!”
다시금 쥐어 패려고 돌아보자, 쓰러진 헌터들은 기겁을 했다.
그건 그거고.
유현성은 박정철을 가만히 들어서 의자에 앉혔다. 그 옆에 손강희까지 자리 잡게 하더니,
그 직후, 다시금 움직이더라.
비명이 그친 건 3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아주 냉정한 얼굴로 팔다리를 똑똑 부러뜨리는데, 그러면서 유현성은 가볍게 말했다.
“괜찮아. 후유증은 안 남을 거니까. 물론 아물어도 정상적인 형태는 아니겠지만.”
“으어, 어어어.”
“끄아아악.”
헌터들은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를 보며 반쯤 기절하다시피 했다.
여기에 추가가 있었다.
“어, 너네들 마력 회로는 다 흐트러 놨어. 괜히 쓸데없는 짓 하면 그대로 펑, 터질지도 몰라.”
“그, 그건 너무 잔인한…….”
“이 새끼들아. 내 친구 가게에서 깽판 치고 무사할 줄 알았냐?”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퍼졌다. 순식간에 가게 온도가 몇도나 내려갈 정도로.
“억!”
“큽.”
다들 뼈가 부러졌음에도, 그 통증을 잊을 만큼 섬뜩했다. 여기서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까지 들었던 것이다.
특히 집중적으로 받은 강구식은 주마등까지 겪을 정도였다. 한순간에 살아왔던 인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거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아, 너희들은 참…… 뭐라고 해야 할까?”
헌터들은 뒤늦게 나타난 고요환을 단숨에 알아봤다.
아니, 전 세계가 알 정도로 유명인이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하겠지.
“기껏 힘들게 헌터들 이미지 작업해도,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참 꼬이더라고. 일 년에 헌터청이 홍보에만 쓰는 돈이 수백억인데 말이야.”
확실히 헌터청의 얼굴 마담으로 오만 행사에 불려 다니는 고요환으로써는 진짜 빡칠 만도 했다.
그래서인지 박정철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저기 사장 친구. 여기 CCTV 공개할 거야?”
“그, 그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닌데? 하지만 여왕님께서 공개하지 않을까?”
“그럼 확실하게 해야 되는 거네?”
“뭐?”
고요환은 몇 번 머리를 흔들더니 쓰러진 강구식의 멱살을 붙잡았다.
“음성까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잘 들어. 너희들은 공식적으로 헌터 자격증 박탈이다!”
“예?”
“일단 그동안의 공적치랑 연금은 날아갔다고 봐야겠지. 또, 헌터들 의료지원도 이제 해당 없고. 세금 혜택도 앞으로는 못 받을 거야.”
“아니, 그게 고작…….”
“그래, 성희롱 같은 걸로 벌금 얼마 정도를 예상했겠지. 근데 말이야. 대충 분위기 보니 그 수준은 아닌 것 같더라고. 헌터들 위상을 갉아먹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걸로도 안 끝나.”
강구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명 발목 뼈가 뒤집히도록 꺾인 데다 주마등까지 겪었음에도, 이후에 나올 내용에 잔뜩 겁을 먹은 것이다.
“분명 헌터증 발급할 때, 기본 규정을 배우게 되어 있잖아. 이 경우, 물론 내 독단이기도 하지만, 벌금 백억부터 시작할게.”
“그, 그런 돈이…….”
“아, 어차피 네 말은 들을 생각 없어. 그리고, 정식으로 변호사를 구해서 재판을 걸어도 네 편은 아무도 없을 거야. 미친놈이 아니라면 대한민국의 모든 헌터를 적으로 돌릴 변호사는 없을 테니까.”
고요환은 그렇게 말한 뒤, 유현성을 쳐다봤다.
“이 정도면 되겠냐?”
“뭐, 나쁘진 않는데,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잖아. 진짜 처분은 엘리스가 내리겠지. 보통은 강제 노역 정도인데…… 아, 다시 고쳐줘야겠네.”
유현성은 씨익 웃으면서 강구식에게 다가갔다.
아주 비틀어 버린 뼈를 다시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였다.
당연하게도 비명은 아까의 두 배 정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냥 병신 만드는 것보다는, 살려서 부려먹는 게 훨씬 낫기는 하겠네.”
“나보다 잔인한 새끼.”
“하, 원래 본보기는 이 정도는 해줘야지. 진짜 게이트 안이었으면, 내 친구 건드렸으니 이 정도로는 안 끝나.”
“진짜 무식하고 잔인한 새끼.”
“야,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왜?”
고요환의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의외로 유현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일단은 친구 범주에 들어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