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스트레스성 치매.
후우.
보통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하여간 온 식구들이 매달려야 된다. 삶의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자극 없는 반복된 생활에 익숙해지면 그 자체를 잊어버린다. 특별한 일을 제외하면 그 외의 일상이 그저 습관일 뿐, 기억에 남지 않게 되는 거다.
아마도 여사장의 경우 열심히 장사했던 건 당연한 일과이고, 그 이상의 충격적인 자극만 강하게 기억하겠지.
“흐으읍.”
이건, 직접 겪어봐야 아는 거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겪어보라 하면 안 된다. 너무 괴롭고 힘드니까.
내가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건, 경험 때문이었다.
게이트에서 많이 동료들이 죽은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면서 수십 차례 병원을 찾았다. 그러다 많은 자극이 결코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반대의 경우가 여사장의 케이스였다.
수십 년 동안 국숫집을 하면서 누적된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 그게 엘리오스 마을에 분점을 내면서 터지게 된 것 같았다.
어쩌면 주변 모두가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심했으면 갑자기 칼을 들었겠는가.
무엇보다, 남편을 찔렀다.
추가로 박동선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한 번씩 터지는 걸 제외하면 나름 그럭저럭한 가정이라고나 할까.
또 십수 년 이상 이어진 꾸준한 봉사활동.
이 정도면 주변에서도 참 사람 좋다, 그런 말을 여러 차례 들었으리라.
남편 입장에서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해도 솔직히 많이 베푼 삶이 맞는 거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결국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면 내부적인 문제라는 거지.
“이거 참. 말하기 어렵네.”
가능하면 전문적인 진단을 받아보라고 하고 싶었다.
장사고 나발이고 사람이 우선이지 않는가?
물론 국숫집이 문 닫는 만큼 어느 정도 피해는 있겠지만, 잘 이야기하면 주변 식당들이 감수할 여지는 있었다.
“국숫집 직원들을 원하는 선에서 각 가게마다 돌리면 되겠지.”
사실 엘리스는 이쪽에 과한 열의를 보였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인원을 투입하겠다고, 기타 필요한 건 뭐든 말하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카페 테라스를 포함해서 식당가에 투여한 인원이 50명이 넘는다.
단순히 월급 이백만 원만 잡아도 엘리오스 마을에 들어가는 게 1억이고, 기타 월세나 다른 것까지 치면 거의 억억억! 급으로 벌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때문에 언제든 요구하면 엘프들 팍팍 넣어주겠단다.
농담 삼아 자신 이하, 외모 특급으로.
* * *
“하하, 누님 괜찮으십니까?”
“저기 누구시죠?”
“그냥 동네 같이 장사하는 동생입니다. 에휴, 잠깐 까먹은 모양이네요. 하여간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으시죠.”
“으, 으음. 어디, 예, 없는데, 근데 우리…….”
“아이고, 누님. 괜찮습니다. 아저씨, 밤새 기다리다가 잠시 화장실 가셨어요. 곧, 어, 오셨네.”
박동선은 입원실로 들어오자마자 가만히 여사장을 끌어안았다.
한마디 말도 없는 긴 침묵.
그냥 서로 흐느끼기만 하는데 슬며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여사장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를 거다.
“잠시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 좀 하지.”
“예. 그러죠.”
병실을 나오자마자 박동선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 가는 게 있어 휴게실까지 별말을 하지 않고 움직였다.
자판기에서 믹스 커피가 나오고, 그걸 박동선에게 건넸다.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 뒤 어렵게 입을 열더라.
“자네 말이 맞았어. 의사 말로는 초기 치매 증상이 보인다더군.”
“역시 그렇군요.”
“아무래도 가게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시골로 가야 할 것 같아.”
“시골 어디로요?”
“양산 구도심 쪽에 한적한 빌라가 하나 있네. 자식 없는 친척 물려준 건데, 의사 말로는 당분간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느긋하게 지내보라 하더라고.”
“그런 처방이라면……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보더군. 매일 몰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고, 직원들도 관리한다고 한동안은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까.”
“그럼 가게는…….”
“당분간 자네가 맡아주게.”
“예?”
이 무슨 뜬금없는 전개란 말인가?
솔직히 황당하기도 했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동안 자네 일하는 걸 꾸준히 지켜봤어. 성실하고, 의외로 사람들 사이에 잘 녹아들어 가더군. 특히 기본 실력도 좋으니 금방 적응할 거야.”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말씀하시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리고 자네가 장사하지 않더라도 믿을 만한 사람을 고용하면 되니까, 그게 부담도 아닐 테고.”
“아! 관리만 해달라는 거군요.”
박동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이제 상당히 식은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어차피 치매는 오랜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하니까.”
* * *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재오픈까지는 고작 5일밖에 안 걸렸다. 기존의 직원들을 고용하고 약간 주먹구구식감으로 가던 조리법을 매뉴얼로 만들자 영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몸에 부담이 가는 것도 곤란하지.”
일단 호평을 받은 실곤약 밀면과 비빔 밀면은 각기 하루 50그릇씩으로 한정했다.
단호박 국수도 마찬가지.
나름 쏠쏠하게 팔리던 식혜도 큰 컵 기준 하루 백 잔으로 못을 박았다. 지금 수준에선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 것이다.
“나중에 적응하는 거 봐서 차차 늘리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어쨌든 식당가 일은 거의 다 정리된 것 같은데?”
사실 스트레스 많이 받는 이는 국숫집 여사장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일이 너무 많아서 거의 치이다시피 움직였으니까.
물론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긴 했다.
각 사장님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노하우도 전수를 받았고 그 외 기타 영업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런 장점이 없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겠지.
아마 어느 정도는 건성으로 하지 않았을까.
“사실 나도 문제가 있긴 있었구나.”
제대하고 바로 행복 분식에만 매달렸다. 물론 가끔씩 맛집을 돌아다니며 분석하기도 했지만 다양한 경험 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번 일은 큰 밑거름이 될 거다.
“벌써부터 새로운 메뉴를 만들고 싶어졌어. 하지만! 당분간은 무조건 휴식이다.”
미리 엘리스에게 말해 놨다.
한 달에 두어 번 올라와서 확인할 테니 이제 행복 분식으로 내려가겠다고.
미리 약속한 여행도 다녀오고, 잠시간 충전도 필요하다 봤다.
여기 오면서 너무 일! 일! 일만 했다.
무엇보다 자신 대신 가게를 지켜준 행복 분식 식구들에게도 뭔가를 보상하고 싶었다.
“이번 휴가가 선물이 될지도.”
갈 곳은 남해.
편백 자연 휴양림.
군대 후임이 근처 사는데 거기 공기가 아주 좋단다.
뒷산으로 40분 정도만 올라가면 산 정상이 나오는데, 거기서 보는 바다 광경이 그렇게 멋지다고.
무엇보다 시기도 괜찮았다.
겨울 직전의 선선할 때 한껏 자연 휴양지의 느낌을 맛보라는 것이다.
“버스 한 대만 빌리면 충분하겠지?”
이번에 단풍 때문에 관광객이 늘었다.
결국 엘리스는 마을버스 세 대를 더 구입해 20분 간격으로 서면 시내까지 운행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운전기사는 엘프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1종 대형 면허까지 땄다더라.
여기에 부산 시장의 적극 협조로 허가 역시 한 번에 나왔다나.
뭐, 모종의 뒷거래가 있겠지.
아마 인근에 게이트가 생기면 엘프 전사들이 처리한다든가, 부산시 행사가 있으면 여자 엘프들을 파견해서 돕는다는가.
“어쨌든 엘리스한테 버스 한 대 빌려야겠네.”
우리 강 여사, 현지, 현아, 여기에 정호석, 조온달…… 아, 이 자식은 빼 버릴까?
어쨌든 이호영과 임혜리, 임수원에 덕순 할머니와 정태수까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가서 고기도 좀 구워 먹고 하루나 이틀 정도 쉬고 오면 딱 되겠지.”
일단 대략적인 계획이 섰으니 속전속결이다.
근데 의외의 문제가 생겼다.
“나도 갈래.”
“뭐? 어디를?”
“휴가 간다면서? 나도 끼워줘. 안 그러면 버스 안 빌려 줄 거야.”
“아니, 엘리스. 니가 마을 떠나면 안 되잖아.”
“왜? 어차피 할 거 거의 다 했잖아. 며칠 정도는 나도 뺄 수 있다고.”
엘리스가 눈망울을 흔들면서 말하는데, 숫제 울 기세였다.
이거 살짝 마음 약해지네.
“그랬다가는 라이노스 장로님부터 난리 칠 것 같은데? 나 오래 살고 싶어.”
“내가 여왕이야. 그 정도도 마음대로 못할 것 같아?”
“그리고 이건 가족 여행이라서…….”
“나도 가족 하면 되지.”
엘리스가 헤실헤실 웃는데 속셈이 뻔히 보였다.
솔직히 잠시 일탈하고 싶은 거겠지. 얘도 한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잠시만이라도 사람들 시선을 피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안 돼!”
“히이잉~”
이 혹이 따라오면 분명 호위 전사들이 붙을 거고, 그럼 예정이 틀어진다. 오붓한 가족 여행이 급피곤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신 다음에 와서 놀아줄게. 버스는 일주일 정도 뒤에 빌리는 걸로 하고.”
“그래도 가고 싶은데.”
“나 이번에 일 많이 했다. 진짜 식당가 때문에 고생 많이 한 거 알잖아. 조금이라도 쉬어야 다시 뭘 해도 하지.”
“그건 맞는데…….”
“좋아. 선심 썼다. 다음에 데이트 한 번 해줄게.”
“세 번!”
“그럼 안 해준다?”
“으으, 두 번은 해줘야.”
“후우, 알았어.”
사실 난감한 게, 이렇게 아이처럼 떼를 쓰면 대응하기 쉽지 않았다. 현지야 직설적으로 치고받으니 쉬웠고, 현아는 진짜 필요한 말만 하니 이해하기 편했다.
어쨌든 이렇게 버스는 해결 했고, 남은 건 각 가게들을 돌면서 인사하는 거였다.
역시 이럴 때는 회식이지!
* * *
“허허허, 정말 자네 덕에 일이 많이 편해졌네.”
변고웅 점장의 말을 시작으로 다들 한마디씩 건네더라.
“나, 살면서 매출 이렇게 많이 찍어본 적은 처음이다. 여기에만 올인한 게 정답이었어.”
강종곤 형님은 다른 백화점 푸드 코트를 포함, 두 개의 가게를 지인들한테 맡겼다.
근데 여기 수익이 그 두 곳보다 많이 나온다나.
“우리도 뭔가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간 맞추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렸는데, 이제는 정량대로 재료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더라고요.”
국숫집도 매뉴얼대로 잘되는 것 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더라.
그때 박정철이 와락 끌어안았다.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 우리 가게가 일매출 이백을 넘기다니. 크흑,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 비결은 행복 분식 2호점의 방식을 따라한 거였다.
영업 전에 엘프들에게 주문받아서 포장 판매를, 마치고 야식으로 예약도 받았다.
다소 체력적으로 힘들긴 하겠지만 손강희와 직원들을 더 붙여줬더니 그럭저럭 해나가더라.
아! 이게 보람이 있다는 거구나.
약간 뿌듯하기도 했고, 뭔가 가슴이 찌릿했다. 친구 놈 잘되는 게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어쨌든 크레페 집과 핫도그 사장도 불러서 사정을 전했다.
이제 자신은 내려간다고, 애초에 받은 의뢰가 식당가가 자리 잡힐 때까지였다고 말이다.
물론 한 달에 두어 번 찾아와서 상담해 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족발집에서 회식을 하면서 한 명, 한 명 둘러보며 대화를 나눴는데, 확실히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즈음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모자란 저를 믿고 따라와 주셨고요,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어쩌면 내가 가장 큰 혜택을 본 건지도.
그렇게 회식 자리가 정리되고, 박정철이 조용히 날 불렀다.
“왜? 뭐 할 말 있어?”
“그게, 참 애매하긴 한데…….”
박정철이 쭈뼛쭈뼛하며 얼굴을 붉히는데.
설마? 아니겠지?
“저기 나, 강희랑 사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