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엥?”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뭐가 이렇게 급전개냐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족발 배운다고 거의 한 달 넘게 붙어 다니기는 했네.
그것도 반쯤 밀실에 가까운 주방 안에서.
사실 박정철네 가게는 반 정도만 열려 있었다. 안에서 뭔 짓을 해도 모른다는 거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족발 삶는 걸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일부를 가린 것이다.
또 하나 삶을 때 나오는 열기와 냄새로 인해 홀 영업에 지장을 줄까 봐서였다.
그런 공간에 남녀 둘이서 한 달이면 서로 어느 정도는 알게 되겠지.
“흐어, 너 자신 있냐? 강희 부모님 엄청 무서워. 난 나무 도마로도 맞은 적 있다고.”
“아직 결혼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강희는 많이 젊잖아. 그리고 나도 이제 겨우 궤도에 오른 셈이니 당분간은 가게에 집중해야 하거든.”
“그건 그렇지만.”
“원래라면 더 미뤄둘까 했거든. 근데 지금 매출 수준이라면 강희는 굶기지 않을 자신이 생기더라고.”
“억크. 고백하겠다는 자신감의 원인이 그거였냐?”
“야, 난 네가 불러주기 전까지 찌질하게 장사했잖아. 그 고달픔 때문에 연애는 용기도 못 내겠더라.”
이전 시절이 생각났는지 박정철은 약간 울상을 지었다.
하긴, 영세 자영업자는 가게가 전부였다. 심지어 망하면 자살까지 하는 판이니, 녀석도 불안불안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월매출 5,500만 원을 찍는 나름 괜찮은 식당의 사장이 됐다. 게다가 아직도 성장할 가능성도 있었고, 특히 고기에 환장하는 엘프들이라는 단골까지 확보했다.
적어도 망할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 내가 친구 하나 제대로 살린 셈이네.”
“고맙다. 인마.”
“하여간 강희한테 잘 해줘라. 내 동생 같은 아이니까, 실수하면 국물도 없다. 아니, 빡치면 여기 가게 빼버릴 수도 있어!”
“헐, 진짜 무서운 협박이네.”
박정철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엄살이겠지만.
나름 성격도 좋은 편이고, 무엇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니 강희한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
“궁금한 게 있는데, 고백은 누가 먼저 한 거냐?”
“가, 강희가…….”
하긴 농담 삼아 연애 고자라고 불렸으니 숙맥 같은 녀석이 먼저 할 리가 없겠지.
하, 가만 생각해 보니 주변이 온통 핑크빛이네.
현지도 그렇고, 현아도 마찬가지. 이 녀석도 강희랑 사귄다니 이상하게 억울한 느낌도 들었다.
씨바. 이게 나라냐?
* * *
“어? 오빠 몰랐어요?”
오히려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라.
“뭐가?”
“우리 마을 유명한 소문 있잖아요. 세계수 아래서 고백하면 그 사랑이 오래오래 간다고. 그래서 커플들이 엄청나게 찾아오잖아요.”
이건 뭐 남산 자물쇠도 아니고. 그거 해도 깨질 커플은 다 헤어지더라.
“솔직히 난 처음 듣는데?”
“헤헤헤, 오빠는 죽어라 일만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주변을 좀 돌아보라는 말이죠.”
그러면서 요상하게 몸을 배배 꼬는데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현지가 가르쳐 주던데요? 남자들이 심쿵 한다고.”
“이상한 것만 알려주네. 그런 거 배우지 마. 그리고 나 이제 짐 싸서 내려간다. 버스는 일정 봐서 가지러 올게.”
“칫, 알았어요.”
살짝 삐질 것 같아서 이전처럼 이마를 한 번 두드려 줬다. 배시시 웃는데 이걸 보면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최근에는 미모가 물이 오르긴 했지.
하지만 얼마 전까지 중학생 정도의 모습이었으니, 거의 막내 동생 정도로만 생각했다. 갑자기 달라졌다고 묘한 감정이 생길 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책임감 같은 건 들기는 했다.
무엇보다 이 녀석 뒤에는 엘프 일족이라는 딸린 군식구가 있었다. 게이트를 나올 때,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니까.
어라?
가만 생각해 보니 이제 자리를 잡긴 했다.
세계수가 있는 엘리오스 마을에, 꾸준히 수익이 들어오는 식당가가 있었다. 거기에 고요환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니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
특히나 엘프들 중 일부는 인간들과 어울려 살겠다는 이유로 외부로 나갈 준비까지 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용병이 되어 파티를 짜거나 클랜을 만들어 게이트로 들어가게 되겠지. 그러다 인연이 맞으면 헌터나 혹은 일반인들과 혼인도 하게 될 테고.
아!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깊게 들어가 봐야 머리만 아파질 테니까.
“어쨌든 인수인계는 확실히 했으니까 일에 공백은 없을 거야.”
손강희를 중심으로 일종의 호위 겸 고위 엘프 전사 하나와 여자 엘프 둘을 붙여 놨다.
동시에 각 식당별 특징과 음식들, 주의할 점을 매뉴얼로 만들어 매일 체크해서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이 정도라면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진짜 문제가 생기만 각 식당 사장들이 알아서 연락을 할 테니까.
특히 김요성 대표는 이번 일로 많이 미안해했다. SF 푸드에 사고가 생겨서 그쪽을 챙긴다고 최근에는 거의 관여치 못했던 것이다.
대신 본성 푸드가를 통해 신청하면 우리가 필요한 식자재 일부를 저렴하게 판매하기로 했다.
이예지도 국숫집 사고를 듣고 사과를 했고, 버거샌드는 매니저 대신 사장을 올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거의 정량을 맞춰서 내는 것보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호쾌하고 박력 있게 때려 넣는 게 매력이기 때문이란다.
들어 보니 이예지는 본점을 차릴 때부터 필요한 초기 자금을 지원했다고.
마지막으로 식당가 최고령 변고웅 점장이 있었다.
다들 친해졌기도 했지만, 어쨌든 새로운 음식에 대한 밸런스를 잡아준다고 약속했다.
물론 창의성은 기대하진 말란다.
어쨌든 나 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말했다.
“그럼 난, 간다!”
* * *
“어쩌다 보니 거의 반년 정도 매달렸구나.”
물론 온전하게 집중한 건 대충 석 달이 조금 넘었다. 늦은 봄부터 진행한 일이 가을의 마지막에서 끝난 거다.
정말 사건 사고가 많기도 했고.
“솔직히 시원섭섭하다고나 할까?”
못 볼 사이는 아니지만 거처가 달라졌으니 뭔가 요상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시작은 행복 분식.
눈앞에 간판이 보이는 순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더라.
동시에 진짜 큰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 지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가게 문을 열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얘들아, 나 왔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정호석이 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에 쓰러지기도 했었는데, 어째 그때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였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브레이크 타임이잖아. 사장이 아니라 형님이지.”
“아! 오랜만에 가게에서 뵈다 보니 반가워서 실수했습니다. 이제 완전히 오셨습니까? 형님.”
“그래, 그쪽 일은 한 번씩 봐주기로 하고 내려왔어.”
“크흐, 진짜 오래 기다렸습니다.”
녀석이 덥석 끌어안으려 하자 재빨리 피했다.
전에 병실에서 당했을 때, 솔직히 좀 난감했지.
그다음 호영이한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 많았다고 들었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때부터 실력이 조금씩 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부족한 게 뭔지 찾았죠.”
“그게 뭔데?”
“자신감이요. 서브로만 계속 일했다가 메인을 맡게 되면서 불안했거든요. 이후 호석이 형이 퇴원하고 계속 메인 파트를 번갈아 하면서 거의 감을 잡았습니다.”
“잘했어. 잘했다고.”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준 뒤, 가게를 둘러봤다.
“근데 혜리하고 수원이는?”
“바람 좀 쐴 겸 심부름 보냈습니다. 이 시간에 올 줄 알았으면 안 보낼 걸…… 아! 그리고 뒤쪽에 손님 와 계십니다.”
“내…… 손님?”
살짝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게 왜일까?
중앙 통로를 지나 뒤편 공간으로 향했다.
황당하게도 여기 없어야 할 애(?)들이 둘이나 있었다.
* * *
“흐음,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단다.
눈앞의 두 사람은 오승호, 오승우였다.
둘은 쌍둥이 형제로, 나와 군 생활을 2년 정도 같이한 전우이자 믿을 수 있는 조원들이었다. 어쩌다 황무기 실장하고 술 한잔하다 내 소식을 들었다는 거다.
빌어먹을 군인 네트워크!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슬슬 사람이 필요한 시기이긴 한데?
신메뉴를 만들고, 3호점을 구상하는 중이었으니까.
문제는 이 녀석들의 모습이 이전과 달라져 있다는 점이었다.
슬쩍 오승호의 왼팔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어떻게 된 거냐?”
“뭘 어떻게 됩니까? 먹힌 거지.”
다시 오승우의 오른쪽 다리를 쳐다봤다.
“너는?”
“안에서 터졌죠. 별 시답지 않은 놈이다 싶어서 걷어찼는데, 자폭하더라고요.”
“그래서 제대한 거고?”
“예. 아무래도 의수랑 의족은 사제가 더 나으니까요.”
“치료 법사는 없었나?”
“그것도 뭐가 있어야 붙이든가 말든가 하죠.”
오승우는 옆의 오승호에게 눈짓을 했다.
“잘리거나 찢긴 거면 어떻게든 복구하겠는데, 제 팔 먹은 놈이 하필 호수에 빠져서 건지러 못 갔습니다.”
팔이 물린 상태로 엘리게이터 종으로 불리는 놈의 배를 갈랐단다.
근데 한 번에 죽이지 못했는지 녀석이 팔을 뜯어서 호수로 뛰어들었다는 거다.
“하, 이놈들 참…….”
게이트 안에서는 사고가 많이 난다.
아무리 주의를 줘도 돌발적인 상황이 생기면 팔다리 한둘 날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먼저?”
“승호 형이 팔을 잃고 입원한 사이 임무가 떨어졌는데 바로 다음에 제가…….”
아마 흥분했던 모양이다.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으니 방심했을 테고.
다시금 오승호의 왼팔을 쳐다봤다.
팔꿈치 바로 아래부터 약간 부조화스러운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제법 비싼 걸 달았는지 그리 티는 나지 않더라.
슬쩍 마력으로 안쪽을 보니, 무슨 터미네이터 기계 팔 같은 느낌이었다.
“움직이는 건 괜찮고?”
“보시다시피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승호는 엄지만 세웠다가 V자도 만든 다음 F로 시작되는 손가락 욕을 하려다 내 시선에 멈칫했다.
“아, 죄송합니다.”
“승우 너는 안 불편하고?”
“장거리는 안 되지만 단거리 정도는 뛰죠. 형이나 저나 헌터용 의수라서 일상생활 정도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오승우가 그렇게 말하며 오른발을 살짝 들었다.
“바닥 깨지면 죽는다!”
“아, 죄송.”
다시 슬며시 내려놓는데, 역시나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론은?”
“일하고 싶습니다.”
“취직시켜 주세요.”
* * *
“흐음.”
오승호는 약간 날렵한 스타일로 주무기인 군용 나이프를 잘 썼다. 내가 처음 각성해서 마수들을 썰어 버렸을 때가 떠올라서 선택했다나.
탁, 탁, 타탁, 타타타타타타-
진짜 칼질은 호석이보다 빠르더라.
아니, 순수하게 따지면 거의 내 수준이라고나 할까.
특히 놀란 건, 왼손의 의수였다. 야채를 다듬고 썰기 위해 움직이는데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 연습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힘을 좀 빼라. 도마에 칼자국 깊숙이 나는 건 곤란하니까.”
“앗!”
“너, 연습하면서 도마 몇 개나 깨 먹었냐?”
“며, 몇 개 안 됩니다.”
고개를 뒤로 돌려 오승우를 쳐다봤다.
“몇 개?”
“열두 개요.”
“참 많이도 해 먹었네. 그럼 할 줄 아는 요리는?”
“제가 케첩 볶음밥이랑 오므라이스를 잘 만듭니다.”
응? 계란이 있고 없고의 차이밖에 없는데?
물론 오므라이스도 경지에 이르면 좀 다르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중식 스타일?”
“예.”
“그럼 한 번 해봐.”
“알겠습니다.”
아!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일부 중국집, 혹은 분식집에선 이런 오므라이스를 내기도 했다.
볶음밥을 담고, 계란을 최대한 넓게 부친 다음 밥 위에 올린 뒤 케첩을 뿌린다.
“이거랑 케첩 볶음밥이랑 무슨 차이냐?”
“계란이 있고 없고 차이죠.”
살짝 두통이 오려 했지만, 다른 가능성을 보기로 했다.
칼질 합격, 팬 다루는 솜씨도 합격.
맛은…… 이건 Good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