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참 겁이 없어.”
오승우가 움찔하더니 한 걸음 물러서려했다.
하지만 오승호의 눈치를 보더니 가까스로 자세를 잡았다.
피식-
잔뜩 긴장한 채 쫄아 있는 모습에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쟤들은 내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겠지.
사실 그때는 모질게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면 부대 내의 사망률이 훨씬 치솟았을 테니까.
그것도 제일 치열할 때, 두 녀석이 각성해서 들어왔다.
하사 계급을 달고 이등병 밑바닥 생활부터 다시 해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고백하길, 실무 최고 상급자가 나였으니 당시는 별을 보는 심정이었다고도 했지.
물론 무작정 갈구기만 한 건 아니었다.
진짜 심하게 괴롭혔다면 게이트 안에서 내 뒤통수에 구멍이 났을 테니까.
즉, 갈구되 어르고 달래기도 잘해야 한다는 거다.
지금처럼.
“흠흠,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해. 최소한의 지식을 가르쳐 주고, 실습도 시켜주고, 조리 과정도 보여주고. 마지막엔 시식까지.”
“그, 그렇습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쌍둥이에게서 느껴졌다.
분위기가 부드러울 때 서둘러 진도를 빼야겠다는 조급함이.
일단은 장단은 맞춰주기로 했다.
“하하, 너희들 운 좋은 거야. 진짜 가까운 지인들 아니면 이런 기회를 얻는 건 어렵거든. 따지면 내가 보여준 건 우리 분식집, 아니, 일종의 기업 비밀인 셈이니까.”
김요성 대표도 조심하는 게 있었다.
자신이 사장인 식당이라도 주방 출입은 관리자에게 최소한의 허락을 구한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김요성 대표조차 그러하니 밑의 직원들도 당연히 그 과정을 밟아야 한다. 아주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러면 조리법과 비밀들이 새어 나가도 범인을 찾기 유리했다.
솔직히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은 그걸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식업 계통에서 이걸 장사가 아닌 사업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그 부분에서 상당히 철저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유난 떤다고 할지 몰라도 나름의 규정을 정해놓는 것이다.
특히 김요성 대표는 고용계약서에 비밀 엄수 조항까지 넣는다더라.
실제로 그걸 빌미로 고소 고발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어떻게 하기도 애매하고.
중요한 건, 그게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었다.
주방 출입이나 조리법 공개 같은 걸 가볍게 여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한테 보여준 게 특별한 혜택이라는 걸 이해했어?”
“예.”
“그럼 내가 왜 너희들이 겁이 없다고 말했는지는 깨달았고?”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특히 오승호는 뭔가 말할 듯 말 듯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서 뭘 느꼈니?”
또다시 찾아온 침묵.
“뭐 즐겁게 일하고 싶다. 뭔가 보람 있는 걸 해보고 싶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보고 싶다. 으흠, 다 좋은 말이야.”
“아, 그, 그건.”
“그래, 그건 동기고. 그 방향을 잡은 게 이 요식업이라는 거지. 그것도 나쁘진 않아.”
“저, 조장…….”
“문제는 그걸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거지. A급 헌터도 최하급 게이트에 들어가서 뻘짓거리 하면 그냥 뒈지는 걸 수십 번이나 본 놈들이.”
살짝 찔리는지 오승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오승우는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위기가 닥쳐오면 선택을 해야 해. 인정하느냐, 인정 못 하느냐.”
실패를 인정하는 사람은 새로운 준비를 하게 되어 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든, 뗏목을 만들든, 지푸라기를 잡든, 뭐라도 해보는 것이다.
반대로 인정 못 하는 사람은 배에 뚫린 구멍만을 쳐다보는 거지.
그러다 같이 꼬로록 잠수하는 거고.
심지어 그 끝은 지옥이었다.
“이제 대충 눈치챘을 거야. 내가 대략적으로 일러주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 직접 보여준 건…….”
오승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와는 격이 다르다?”
“격이 다르게 맞아볼래?”
그때 오승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가…… 저희가 많이 안일했습니다. 조장 말대로 너무 겁이 없었네요.”
“그래도 눈치는 있구나.”
“후우. 막연히 바닥부터 일을 배우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가게 하나 차리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오승우도 표정이 바뀌었다. 약간은 비장하다고나 할까.
그럼 이제 진지하게 말해도 되겠지?
“그래. 음식 장사라고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만, 이것도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해야 하는 거야. 그만한 각오가 없이 무턱대고 해보겠다? 그건 통장과 시간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그렇군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너희들이 하고 싶은 걸 어느 정도 이룬 상황이니, 하나의 가이드를 잡아준 거지.”
“예. 이해했습니다.”
오승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오승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조장은 조장이네요. 겨우 일 년 반 정도 차이인데…… 처음 봤을 때처럼 저 멀리 있다는 느낌이에요.”
“나도 동감해.”
“그럼 역시 알바는…….”
여기가 중요한 포인트였다.
살살 갈구고, 어르고, 달래고, 흔들었으니 정신 차리기 전에 몰아붙여야 하는 것이다.
“자, 빠르게 인정했으니 기회를 준다.”
“예? 방금…….”
“기회라고요?”
살짝 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이때 필요한 건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이겠지.
옜다, 던져주마.
“딱 3년. 그 정도만 내 밑에서 제대로 배워.”
배우기보다 구른다는 게 맞겠지만.
“장담하는데 지금의 나 정도 실력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물론 너희들 하기 나름이겠지만.
“마지막으로 정말 열심히 한다면…….”
최소 열댓 번은 피똥을 싸겠지만.
“가게를 차려주지.”
물론 너희들 돈으로.
약간 사기 필 나는 말은 뺐음에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죽다 살아난 것처럼 얼굴부터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괜히 찔리는데?
“어때 생각 있어?”
슬쩍 떠보듯이 물었는데, 진짜 낚시 바늘을 제대로 물었다.
“예. 조장. 각오를 다지고 임하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해볼게요!”
쌍둥이가 기뻐하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싸! 노예 두 명이 생겼다.
* * *
-운영 재정비 관계로 당분간 휴무합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조만간 보다 나은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으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문 앞에 붙인 공지글을 몇 번이나 읽어봤는데,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임혜리가 물었다.
“오빠, 이거 사기 아니에요?”
“사기는 무슨, 재정비.”
“근데 우리 그냥 놀러 가는 거잖아요.”
“갔다 와서 전체적으로 다시 체크 할 거야. 뭔가 조금 애매한 부분도 있고. 미묘하지만 호석이가 레시피를 조금 바꾼 게 있거든.”
불라면이 1, 2, 3단계까지 있었는데 정호석이 약간 손을 댔다.
몇몇 손님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게 이거였다.
매운 걸 좋아하지만 잘 못 먹는다. 근데 1단계도 너무 매운 것 같더라. 좀 더 순하게는 안 되나요, 하고 말이다.
당시 숙제를 겸해 고민해 보라고 했다.
결국 정호석은 라면과 불라면의 중간 맛 0.5 단계를 만들었다. 그냥 라면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 것과 끓일 때 양념을 추가하는 것이 맛이 다르다면서 말이다.
단, 정식 메뉴로는 올리지 않았다. 그냥 아는 사람만 아는 방식으로 내기로 한 것이다.
왜냐?
메뉴판 바꾸는 것도 비용이 발생하니까.
사실 이건 농담에 가까운 소리고.
진짜 이유는 슬슬 신메뉴를 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 전에 미묘한 조정을 마무리 짓고, 메뉴판부터 기타 등등까지 한 번에 삭 해치우는 게 맞겠다 싶었다.
물론 그 전에, 즐길 건 즐겨야지?
“사람이 너무 일만 하면 안 좋아. 개 같이 고생했으면, 때론 정승처럼…….”
가만 생각해 보니 조선시대 정승들도 개같이 일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크흠, 장승처럼 가만히 쉬는 것도 괜찮다고.”
“아, 오빠. 차라리 그런 말 하지 마요. 기껏 돌린다고 한 게 그 수준이라니. 후우.”
임혜리가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더라.
괜히 민망해서 전화를 받는 척 폰을 드는데.
띠리리리리. 띠리리리-
진짜 전화가 와 버렸다.
“크흠, 큼. 그래. 호석아. 어, 가게 앞으로 오면 돼. 아, 호영이랑 같이 있다고. 어. 알았어.”
폰을 끊고 딱 3분 뒤에 정호석과 이호영이 행복 분식 앞에 도착했다.
그 시점부터 사람들이 한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먼저 강 여사와 현아, 덕순 할머니, 정태수가 함께였다.
들어 보니, 이성남 삼촌과 혜진 이모는 이참에 가족 여행을 따로 가기로 했단다.
어쩌면 박은희, 아니, 이제는 이은희로 바꿨지만. 어쨌든 걔 밑으로 조카 하나가 더 생길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행복 분식과 칼국수집 식구들이 다 모이자 곧 마을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조온달.
원래 이 녀석은 빼 버리려 했는데, 자신이 직접 마을에서 버스를 끌고 내려온다더라. 게다가 남해까지도 직접 운전하겠다고 하니 마지못해 승낙했다.
“자, 타시죠.”
여전히 느끼하고 능글능글한 미소였는데, 왠지 꺼림칙하다.
일단 버스에 올라 현지를 찾았다.
당연히 조수석에…… 하아.
“엘…… 리스?”
“헤헤, 따라왔어요.”
그러면서 손으로 V자를 그리는데, 살짝 두통이 느껴졌다.
“그게…… 허락은 받은 거야?”
“제가 여왕인데요?”
엘리스는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 조온달이 슬쩍 끼어들었다.
“몰래 짐칸에 숨어드셨더라고요. 출발하고 나서 다시 되돌리기도 좀…… 하. 하. 하.”
“아냐, 오빠. 조온달 얘가 정중히 모시겠다고 해서 따라온 거라고!”
“아! 깜빡했네요. 맞습니다. 사실입니다. 사장님.”
조온달이 다급히 정정하는데, 참으로 신기했다.
철판 얼굴에 왁스 광택질까지 한 뻔뻔한 놈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당황해하다니.
정말 묘한 통쾌감이 느껴지더라.
“그럼 현아는?”
“제일 뒤에서 자고 있을걸?”
슬쩍 봤는데, 진짜 엎드려 졸고 있었다. 그러니 안 보였던 거지.
“자, 자, 어서 타세요.”
조온달이 재촉하자 다들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강 여사와 덕순 할머니가 같이 앉았고, 그 뒤에는 태수와 현아였다.
제일 뒷자리에는 임수원, 임혜리, 정호석이 앉았는데 각자 그럴듯한 핑계가 있더라.
임수원이 후각이 예민해서 창가를 고집했고, 임혜리는 동생 옆에 붙어 있겠다고.
정호석은 자신이 제일 덩치가 크니 가운데 앉아야 한다고 우겼다.
남은 자리는 현아가 차지했고.
하여간 그런 식으로 앉다 보니 요상하게도 내 옆자리에 엘리스가 있게 되었다.
흐음, 뭔가 의혹은 있으나 증거가 없었다.
조온달은 조수석에 혼자 앉은 이호영의 어깨를 두드린 뒤 소리쳤다.
“자, 출발합니다.”
* * *
부우우우웅-
버스는 고속도로를 타고 빠르게 움직였다.
차가 밀리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불과 세 시간도 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남해 편백자연휴양림.
막상 도착해 보니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더욱 울창했다.
거의 수직으로 뻗은 나무숲 사이로 그늘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느낌이 달랐다.
“와, 공기 좋다.”
임수원의 탄성에 조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 역시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는 걸 보면 확실히 좋기는 좋은 모양이었다.
나 역시도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 이런 게 진짜 힐링이구나, 싶더라.
괜히 ‘치유의 숲’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거지.
무엇보다.
“생각보다 비용이 저렴해.”
부대시설 포함해서 한 동을 빌리는데 고작 20만 원도 들지 않았다.
나름 국가 유공자(?)라 최대 할인이 적용되어서였다.
일단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숙소에 짐부터 내렸다.
그런 뒤 주의사항을 읽는데, 뭔가 이상한 게 걸리더라.
“으음, 애완동물 출입 금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