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을까?”
-어디신데요?
“네가 전에 추천해 준 편백나무 휴양지.”
-아~ 그럼 내일 등산이나 같이 하죠. 점심 먹고 출발하실 것 아니십니까?
확실히 그런 일정이었지.
혹시나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봤는데, 역시나였다.
“흐응~ 역시 고기에 고기는 진리야!”
엘리스는 두툼하게 잘라놓은 삼겹살을 세 개씩 겹쳐서 한입에 넣었다.
그 직후 현지와 잔을 치더니 단번에 털어 넣더라.
“캬하! 이거지.”
외모는 여신인데 행동은 삼겹살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코리아 현지화 100%.
딱 그런 느낌이랄까?
그 옆의 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추 위에 깻잎 얹어서 덕순 할머니표 파채무침과 마늘, 고추에 쌈장까지 얹더니 삼겹살 두 개를 올리더라.
저 큰 게 들어갈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한입에 집어삼켜 우물거리더니 소맥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흐, 역시 삼겹에 소맥은…… 영혼의 힐링이지.”
위장의 힐링일지 뱃살의 힐링일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내일 숙취 확정이군.
덕순 할머니는 이미 한 막걸리 하셨는지 얼굴이 발그레하셨다. 그러면서 태수와 현아의 손을 붙잡고 조곤조곤 이야기하시는데, 우리 강 여사도 신나게 맞장구치시더라.
아무래도 내년에 있을 행사에 대해 대화하는 거겠지.
“아마 엘리스를 제외하면 다들 내일 등산은 무리겠지?”
분명 다들 숙취에 골머리를 앓을 테니까.
물론 사이다만 마시고 있는 현지는 멀쩡하겠지만 다른 이들을 챙겨야 하니 등산은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엘리스와 조온달은 반드시 따라나설 거다.
이미 나무숲의 맑은 기운을 충분히 받아들였고, 깨끗한 곳을 즐겨 찾는 편이었으니까.
“저쪽은 또 어쩌려나?”
반대편을 보니 여기도 예상대로였다.
정호석이 이호영과 열심히 뭔가를 이야기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우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쩌다 부산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억양이 강해졌고, 목소리도 커졌다.
“당연히 국밥이지.”
“아니요. 밥국입니다.”
“흠흠, 국물 양을 늘리면 되잖아.”
“어차피 내용물이 퍼지면 죽처럼 되니 밥국이 맞습니다.”
“소주에 맥주를 타면 소맥인 거야.”
“맥주에 소주를 타도 소맥이죠.”
대충 무슨 이야기 중인지는 알겠다.
어쨌든 진지(?)하게 행복 분식의 메뉴에 대해 토론하고 있으니 나름 과음하진 않을 것 같았다.
말을 많이 하면서 마시면 숙취가 덜한 것도 있었으니까.
임혜리와 임수원도 평소와는 달랐다.
고삐가 풀린 건지 맥주잔에 소주를 채워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건 분명 현지 스타일이었다.
제발 좀 이상한 건 가르치지 말라고!
“확실히 이것도 색다르네.”
“누나, 의외로 맛있는데요? 뭔가 묘한 충족감 같은 게 느껴져요.”
“그건 그동안 고생한 보람 때문일 거야.”
“헤헤, 맞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언제 이렇게 여유롭게 놀러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게. 마치 지난 일 년이 꿈같은 느낌이라…….”
“누나, 꿈 아니야. 진짜라고.”
“알아. 그리고 너 이 자식이. 삼겹살은 한 번에 두 개까지가 이해다. 세 개는 선 넘은 거라고.”
“형이 그랬어요. 세 개든 네 개든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요. 적어도 오늘은요.”
“하긴 그러네. 오늘은 허리 풀고 먹어도 된다고 했으니, 좋다. 허락하마.”
하여간 사이좋은 누나동생이라 티격태격하는 것도 귀여워 보였다.
마치 주워 온 길냥이들이 서로 애교를 부리는 느낌이군.
“저 둘은 해보고 싶은 게 있다니까 따라올 것 같고.”
하여간 초저녁부터 시작된 삼겹 파티가 이제는 알코올 파티로 변해 있었다. 1호, 2호, 3호를 뚜까 패고 고기 치료를 하는 사이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이다.
-형님?”
“아, 영식아. 미안.”
-괜찮습니다.
“등산을 하긴 할 건데 시간을 정확히 잡기는 어려울 것 같고. 내일 상황 봐서 전화할게.”
-예. 알겠습니다. 기왕 오신 거 편하게 즐기다 연락 주시면 됩니다.
통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문제는 술 파티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분위기라는 것.
“힐링하러 왔다가 술링하게 생겼네.”
그래도 다들 웃는 걸 보니 묘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이제 이 분위기를 흐리게 했던 녀석들에게 마무리만 하면 되겠군.
마침, 1호와 2호가 3호를 부축하고 왔다.
* * *
“먹어!”
“예?”
“먹으라고.”
“옙.”
우걱우걱, 퍼먹퍼먹, 깨작깨작.
“3호는 삼겹살 싫어하나?”
“아, 아닙니다.”
“오겹살로 바꿔 줄까?”
“열심히 먹겠습니다.”
아까의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아예 상추에 삼겹살 올리고 다시 상추로 덮어 입으로 가져갔다.
또, 그걸 한참이나 씹으면서 시간을 끌더라.
“잘 먹네. 이번에는 내가 싸 줄게.”
현지가 먹는 것처럼 상추에 깻잎에 갖은 재료를 올리고, 두툼한 삼겹살을 무려 세 개나 넣었다.
그걸 내미니까 3호가 기겁을 했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니 바로 입을 벌리더라.
“맛있게 먹어!”
“읍, 우웁.”
그렇게 3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물론 이게 시작이었다.
“마셔!”
“예?”
“마시라고.”
“아, 알겠습니다.”
1호, 2호는 내가 직접 소맥을 말아서 내밀었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조심스레 마셨다.
이제 3호 차례였다.
맥주잔 가득, 소주를 채웠다.
“자, 마셔.”
“흡, 그건.”
“마시라고. 이게 아주 몸에 좋아. 아니, 머리에 좋았나?”
그러면서 잔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줬다. 물론 깨지지 않게끔.
포인트는 손등 가득 혈관이 튀어나오게 하는 거지.
역시나 3호는 잔을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씨익.
가볍게 웃어줬는데 왜 몸을 벌벌 떠는 건지.
하여간 그런 식으로 1호, 2호, 3호를 돌아가면서 먹이고, 마시게 했다.
이건 다 이유가 있지.
“자, 우리 건배나 하자.”
“예. 감사합니다.”
“어우~ 예. 마시겠습니다.”
“우읍, 끄으읍. 후우~ 주십시오.”
나 역시 깔끔하게 원샷!
다들 눈치를 보면서도 잔을 깨끗하게 비우더라.
“자, 우리 같이 먹고 마셨으니까. 뭐냐?”
“예?”
“공동체라는 거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사이.”
“그게 무슨…….”
“원래 식구라고도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니, 공동체 정도로 하자고.”
“그, 그런 어거……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래, 그런 사이니까. 뭐, 폭행 신고하니 헌터청에 고발하니 뭐니 그러진 않을 거 아냐?”
“그야, 당연…… 합니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다!”
다시 한번 씨익 웃으며 1호, 2호, 3호와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경고도 잊지 않았다.
“공동체는 말이야. 배신자를 어떻게 처단하냐면 별것 없어. 그냥 푹, 여기 찌르고, 여기 찌르고, 찌른 데 또 찌르고. 뭐, 그런 거라고. 알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이 동시에 합창하더라.
“예! 알겠습니다.”
“그래. 믿는다. 이제 먹고 마시자.”
다시금 술자리가 이어졌고, 적당히 배부르고 적당히 취하니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지더라.
사실 이런 녀석들하고는 그다지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니, 괜한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처맞은 당사자가 부인하면 사건 자체가 되지 않는 법이니까.
특히 3호의 경우, 다시 배경을 믿고 설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그냥 귀찮아진다.
고작 이런 일로 헌터청에 연락하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미리 입막음 하는 거다.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다른 목격자들을 만들어 두려는 의도도 있었고.
“이 형님이 말이야. 군대 있을 때 게이트가 터졌거든.”
“아! 그렇습니까?”
“진짜 초창기 헌터셨군요. 지금까지 살아남으셨다면 그 강함이 이해가 됩니다.”
1호와 2호가 눈을 반짝였고, 3호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내가 게이트 안에서 별의별 마수들을 다 봤는데, 진짜 희한한 놈들 많더라고. 특히 몸은 곰인데 대가리가 토끼인 놈이 나왔는데, 이걸 토끼곰이라 불러야 할지 곰토끼라 불러야 할지 고민되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하. 그냥 단칼에 쪼개고 나니까, 고민이 사라지더라구.”
“오오! 현명하십니다.”
“너네, 켄타우르스라고 아냐?”
“그, 혹시 상반신은 사람이고, 밑에는 말인 그거 말입니까?”
“그래. 별자리도 있는 녀석인데, 내가 만난 놈은 대가리도 말이더라고.”
“그러니까 말대가리에 사람 상체에, 말 다리였군요?”
“대충 상상이 되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거기에 끔찍하게도 흠흠, 아니다. 이거 좀 그렇네.”
궁금한지 녀석들이 눈빛이 달라졌다.
결국 마지못한 듯 입을 열고 말았다.
“거시기가, 거시기한 게. 내 다리통만 하더라고, 그걸 질질 끌면서 달려오는데 어우야.”
“헐.”
“흐어…….”
상상력이 풍부한지 끔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쩌나, 뒤는 더한데…….
“사실 그때는 몰랐어. 싸우면서 다리를 몽땅 자르고 나서 알았거든.”
“끄아악.”
녀석들은 갑자기 손으로 그 부분을 가렸다.
세 녀석이 동시에.
“그렇게 수십 마리를 처리하고 복귀하고 나서, 내 칼을 서른 번 정도 소독했다. 진짜 얼마나 찜찜하던지. 결국 칼을 아는 동생한테 줘 버렸어. 아오. 도저히 못 쓰겠더라.”
그게 고우환이 날려먹은 성운검이다.
물론 지금은 ‘네뷸라’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바꾼 이름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영 그랬다.
꼭 네 X알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하여간 다른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라.”
“아닙니다. 전혀 없습니다.”
“근데 니들은 군대는 다녀왔냐?”
“저희들은 헌터라서, 기본 반년 교육만 받았습니다. 대신 2년간 지역 방어라서 남해를 나가려면 휴가를 써야 합니다.”
“아. 그런 것도 있었지.”
사람이 적은 지역, 특히 외지에 가까운 곳은 헌터들이 꺼려했다. 일단 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숙식이나 기타 여러 가지가 불편했던 것이다.
결국 헌터청에서 고안한 게, 예비군과 민방위가 짬뽕이 된 이런 형식이었다.
대충 농어촌 특별형이랄까?
군 복무는 반년으로 줄이는 대신, 그 지역을 방어해야 한다. 다소 자유로운 군 생활이지만 엄연히 군인 신분인 것이다.
그러니 외출 외박도 보고해야 했다.
“이 자식들이 그럼 아직도 군인이냐?”
“아닙니다. 저희 셋 다 두 달 전에 끝냈습니다. 물론 내년부터 예비군 헌터 훈련이 남긴 했지만요.”
“흐음, 좋아. 한참 군헌터 선배로서 몇 가지 이야기해 주마.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한참이나 설교 비슷하게 떠드는데, 불쑥 엘리스가 찾아왔다.
“오빠, 벌써 한 시간하고 반이나 지났어.”
“어? 그렇게나 됐나?”
“주인공이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잖아.”
“그, 그렇지. 슬슬 일어나야겠네.”
“그리고 여자들은 군대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해.”
갑자기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자리를 정리해야 했기에 1호, 2호, 3호를 쳐다봤다.
이 자식들이 감히!
아니, 엘리스를 보고 눈빛이 헤롱거리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니 봐주자.
“자, 들었지. 너희들 여기 치우고 설거지까지 해놓고 돌아가라.”
“예. 알겠습니다.”
“하하, 당연히 저희가 치워야죠.”
“저, 여신님 성함이 어찌…….”
3호의 질문에 1호, 2호가 녀석을 노려보더라.
아까까지 생생했던 눈치가 달아난 걸 눈으로 욕하는 모양이었다.
“엘리스는 여신이 아니고, 여왕이야. 엘프 종족을 대표하는 진짜 여왕이라고.”
“헉, 그, 그렇습니까?”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부, 분명 뉴투브에서 봤던…….”
이제 1호, 2호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3호의 입을 막고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한 거다.
“하여간, 적당히 먹고 마시다 가라.”
“옙.”
“형님.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엘리스를 따라나섰다.
근데 분위기가 좀 묘한데?
* * *
편백나무 숲.
그 한적한 산책로를 엘리스와 걷는데, 느낌이 신기했다.
원래라면 무서울 야간 산책이었다.
사방에 높게 솟은 나무들과 수풀들이 가득했다.
거기에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으니, 간담이 약한 사람은 쉽게 들어오지 못하겠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나무들이 만든 검은 기둥 사이로, 보름달이 주먹만 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가을의 은하수가 밤하늘을 고고히 가로질렀다.
“아름답다.”
“나?”
“아니, 밤하늘이…….”
저런 광경을 보면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게이트 탈출에 실패했을 때.
바로 그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