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예. 생각 해볼게요.”
일단 그렇게 상황을 넘겼다.
솔직히 갑자기 툭 던져진 고민거리라 확답하기가 애매하더라.
애초에 계획에도 없는 일이기도 했고.
“으이구, 은하야. 그만하고.”
“그래도 이야기는 마저…….”
“우리 예쁜 현성이가 자네 말을 어련히 염두에 안 둘까? 그리고 현성아.”
덕순 할머니가 방긋 웃으며 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태수도 돕기로 했으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마라. 그냥 한 손 거든다아~ 하면 돼.”
“으음, 태수도요?”
확실히 이러면 부담이 덜해지기는 하지.
내가 메인이 아니라 보조라면 딱히 고민할 것도 많이 없을 테니까.
“그려. 이제 우리 태수도 좀 어른이 되어야 하니까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아직 한창인 우리 강아지가 종일 가게에서 칼국수만 썰어대는 건 아니라고 보거든.”
덕순 할머니의 말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
겉으로는 정정하게 보이지만 덕순 할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면 더 이상의 장사는 무리였다.
어렴풋이 들었는데 내년에 칠순이란다.
거기에 40여 년 가까이 손칼국숫집을 운영했으니 신체가 온전할 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소소하게 움직이는 데는 불편함이 없으시다곤 했다.
하지만 태수가 조심스레 말하기를 몇 번이나 수술을 했었단다.
왼쪽 검지 손가락은 바깥쪽으로 휘었으며 무릎의 연골은 이미 닳아 없어 오래 서 있는 것도 어려웠다.
정태수가 칼국숫집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한 것도 할머니 어깨 수술 직후였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오른쪽 팔은 머리 위로 잘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순 할머니가 손칼국수를 포기하고 수동으로 면을 뽑아내는 기계를 선택한 게 그래서란다.
어쩌면 태수가 준비될 때까지 버티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우리 태수가 사람들도 좀 만나고, 젊은 아가들처럼 놀러도 다니고 그랬으면 하는데…… 자꾸 아직 멀었다고 하더라고. 그렇다고 이 할미 주변에는 태수 또래도 없고 해서.”
“아, 확실히 좋은 기회는 맞는 것 같네요.”
확실히 돈보다는 ‘사람이 남는 것’이라는 게 덕순 할머니의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태수도 적극적인 교류가 필요하다고 본 거겠지.
“찬찬히 생각해 봐. 글고, 이제 전 다 됐으니 먹자!”
덕순 할머니가 눈치껏 손짓을 하자, 우리 강 여사는 마지못한 듯 새 막걸리를 땄다.
그 즉시 현아가 상을 가져오더니 태수가 한껏 부친 전 접시를 그 위에 올렸다.
다시 턱턱턱, 밥사발이 놓이고 막걸리가 부어졌다.
꼴록꼴록꼴록.
우유 빛깔 막걸리가 그릇을 가득 채웠다.
“크흐, 좋다!”
강 여사는 한껏 기분이 좋은지 단숨에 그릇을 비워냈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전을 한 입 물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생각보다 맛있는데요? 우리 아들도 먹어봐.”
강 여사님께서 친히 젓가락을 내미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슬쩍 보는데 조금 희한하긴 했다.
보통 전이라면, 원재료가 보인다.
동그랑땡이라든가 버섯전, 동태전, 배추전, 깻잎전 등등 딱 보면 뭔지 알게 되는 거다.
근데 이건 계란물이 두꺼워서인지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더 황당한 건, 전으로 부칠 만한 재료들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티가 나는 게 있기는 했다.
같이 구워 먹으려고 가져온 새송이 버섯전과 쌈 싸 먹고 남은 걸로 부친 깻잎전이었다.
“빨리 먹어보라니까?”
“아, 예.”
강 여사의 재촉에 입에 넣고 한 입 씹었는데.
어라? 이게 무슨 맛이지?
“으음, 신기…… 하네요.”
의외로 담백했으며, 어이없게도 고소한 육즙이 그대로 느껴졌다.
근데 이런 재료를 사 온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할머니, 이거 뭐예요?”
“그냥 이것저것 남는 거 부쳤어. 왜? 입에 안 맞니?”
“아뇨. 하아, 이거 너무 맛있어서요. 분명 육전이긴 한데…… 먹어 본 적 없는 맛이네요.”
질리도록 삼겹살을 먹었다.
갖은 쌈채소에 마늘, 고추를 곁들여도 당연히 느끼함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걸 고소함으로 바꾸는 육전이라니.
마치 상식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하나만 더 먹을게요.”
“그려. 많이 먹어.”
막걸리로 입가심을 한 뒤, 다시 계란으로 덮인 육전을 입에 넣었다.
뭔가 자신이 알던 맛과 달리 가벼운데 맛있었다.
“이거 진짜 육전 맞아요?”
“호호, 맞아.”
“일단 고기는 고기인데, 중간중간 당근하고 고추가 씹히는 게 맛을 깔끔하게 잡아주네요.”
덕순 할머니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현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오빠, 힌트는 우리 집 옆 대패 삼겹살집.”
“앵?”
워낙 특이한 음식점들이 많은 세상이었다.
하지만 대패 삼겹살집에서 육전을 판다고? 이건 아무래도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인당 한 개씩 먹을 수 있는 거.”
“그야 계란프라이…….”
“절반은 맞아.”
현아는 소심하게 대꾸해 주더니 살짝 고개를 돌리더라.
아무래도 더 말해줄 수 없다는 거겠지.
결국 안의 고기를 맞히라는 건데, 일단 머리를 굴려보자.
집 옆의 대패 삼겹살집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그런 식당이었다.
넓은 철판을 달궈서 돌돌 말린 대패 삼겹살을 올리고, 거기서 나오는 기름으로 김치와 콩나물을 구워 먹는 흔한 방식.
처음 나오는 기본 찬 외에는 무한리필 셀프 형식이 대부분이었는데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1인분 3,900원이라는 가격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최초 주문이 기본 5인분이라는 게 당황스럽긴 하지만, 좀 먹는 성인 두 명만 가도 부족한 양이었다.
현지 혼자서도 그 정도는 가뿐하게 클리어였으니까.
해서 남자 둘이 가면 기본 5인분에 소주 한두 병, 식사로 볶음밥을 해 먹거나 된장 같은 걸 추가로 시킨다.
그럼 평균적으로 4만 원 전후였다.
과하게 비싸지도 않고, 그렇다고 푸짐함에서 절대 모자라지 않는다.
한마디로 상당히 대중적인 가게라는 거지.
메인은 냉동 대패, 냉동 삼겹, 생삼겹, 우삼겹 정도일 텐데?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냉동 우삼겹이었다.
설마, 그걸로 육전을 부친다고?
“진짜 냉동 우삽겹이에요?”
내 질문에 다들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져온 기억이 없었다. 생삼겹살과 오겹살, 양념 갈비 팩 등등을 샀지만 돌돌 말린 우삼겹은 장을 볼 때 분명 못 봤던 것이다.
“설마 된장찌개에 넣으려고 샀다는 그 차돌 우삼겹?”
“오~ 정답.”
덕순 할머니와 강 여사, 현아가 환호성과 박수를 쳤다.
단지 정태수만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뭔가 있는 느낌인데?
“근데 할머니, 이게 육전이 돼요? 진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호호, 나도 처음에는 좀 어색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괜찮더라고. 그러니까…… 태수야. 네가 말해보렴.”
모두의 시선에 한 곳으로 향했다.
약간은 분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정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요.”
* * *
칼국숫집을 마무리한 후, 정태수는 현아를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나왔다.
그래 봐야 5~10분 거리.
수다를 떨면서 잠시 걷는다 싶으면 바로 코앞이었다.
그때 현아의 배에서 끄르륵 소리가 났단다.
마침 정태수도 허기를 느끼던 참이었다. 유독 바빠서 미처 저녁도 챙기지 못한 것도 있었고.
결국 둘이서 대패 삼겹살 간단히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래서!”
꽁냥꽁냥 데이트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살짝 분노가 치밀었다.
이건 내가 연애를 못 해서가 아니고 우리 현아와 관련돼서다.
식당을 하는 녀석이 감히 내 동생을 굶겼다고?
묘한 기운 탓인지 태수가 살짝 움찔거렸다.
동시에 엘리스가 슬쩍 내 손등에 손을 올렸다. 적당히 하라는 거겠지.
“하, 하하. 그런데 그날따라 세트를 먹고 싶더라고요. 대패하고 우삼겹하고 소세지 모듬이 나오는 게 있었는데 그걸 골랐거든요.”
“술은? 술은 뭘 마셨는데?”
“소주 한 병 시켜서 저 마시고, 현아는 사이다 하나 먹었어요.”
“그래. 잘했다. 현아는 아직 학생이니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태수가 말을 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양이 많더라고요. 대패가 산더미처럼 오는데…….”
전에도 몇 번이나 시켜 먹었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분명 이전보다 양이 많았다.
당황해서 사장님을 봤더니 엄지를 세우고 윙크하더니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허, 그 사장님하고 많이 친한가 보네?”
“우리 가게 단골이시거든요. 자기 입에 딱 맞다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오세요.”
어쨌든 대패 삼겹을 먹으면서 느끼하지 않게 볶은 김치와 콩나물까지 곁들여 쌈까지 싸 먹었다.
하지만 너무 배가 불러 우삼겹이 절반 가까이가 남았다는 것이다.
“이걸 싸 갈 수도 없고, 남기기도 미안해하는데 사장님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고 천천히 먹고 가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가만? 거기 마감 시간이 새벽 1시 아니었나?”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쫘악!
“끄악…….”
“아들, 적당히 해라!”
“옙.”
강 여사님의 눈빛에 진짜 살기가 돌았다. 그러면 당연히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직후, 정태수가 슬그머니 현아를 쳐다보며 몸을 움츠리더라.
훗, 이게 너의 먼 미래란다.
“하, 하하.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또 사장님이 서비스로 사이다도 두 캔 주시고 해서 좀 있었죠. 근데 마침 셀프 코너가 보이더라고요.”
“계란프라이?”
“예. 그래서 사장님한테 해도 되냐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요.”
갑작스러운 발상에서 나왔는데 오히려 도와주기까지 했다고.
즉, 계란 두 개를 풀고 테이블에 있던 고추를 가위로 썰어서 넣는다. 약간의 소금 간을 한 다음 반으로 접은 우삼겹을 적셔서 판에 구워봤다는 것이다.
세상에나, 맛이 대박이었다.
첫 시도라 약간 어설픈 감은 있었지만 세 개째에서 거의 완벽한 육전이 나왔단다.
사장님도 궁금해서 한 점 먹어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흐음, 이거 우리 가게의 비밀병기가 될지도.
“못 들은 척했는데, 진짜 다음에 가니까 단골 손님용 메뉴로 있더라고요.”
“헐, 진짜?”
“계란 두 개 푼 거에 당근하고 파하고 다진 실파가 들어가 있는데 단돈 2,000원. 취향대로 양파 절임이나 파채 무침을 잘라 넣든 고추를 넣든, 깻잎을 잘라 넣든 하라고 설명서까지 붙여놨어요.”
“오우, 사장님 수완이 대단하네.”
생각해 보니 다들 계란말이에 넣을 수 있는 재료였다. 게다가 전부 테이블에 있는 것들이니 잔반을 줄일 수도 있었고, 가족 외식이라면 해서 먹는 재미까지도 추가되는 것이다.
“흐음, 확실히! 좋은 아이디어야.”
“그렇죠? 하여간 그날은 공짜로 먹고, 다음에 가게 오실 때 상품권까지 주시더라고요.”
무려 50만 원어치라고 했다.
그걸로 둘이 커플링을 맞췄다고.
어째 현아 손가락에 못 보던 게 있다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단 말이지.”
“예? 뭔데요?”
“내가 재료를 맞혔을 때, 표정이 여엉 안 좋았어. 너만!”
“악. 그, 그건…….”
정태수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미 편은 하나도 없었다.
즉 이 녀석만 내가 못 맞힐 거라 판단했다는 거지.
“태수, 네 이놈! 네가 정녕 네 죄를 알렸…… 악!”
“아들. 이 엄마가 적당히 하라고 했지?”
“여, 여, 옆구리 으아우으아…….”
진짜 독사한테 물린 것보다 더 아픈 꼬집어 비틀기였다.
항복하듯이 두 손을 번쩍 드니까, 그제야 강 여사님이 놔주시더라.
결론은, 설거지 내기를 했단다.
정태수는 내가 못 맞힐 거라고 했고, 나머지는 반대.
물론 현아의 결정적인 힌트가 포인트였지만 사실 못 맞힐 것도 아니었다.
맞아.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다들 막걸리를 마시며 수다에 빠져든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슬슬 정리해야겠다는 분위기가 되었다.
덕순 할머니와 강 여사가 일어나고, 뒷정리와 설거지는 다 같이 했다.
태수 이놈이 괘씸하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