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너, 취했냐?”
펜션 바깥의 야외 의자로 가는 길.
정태수는 몇 번이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아니요. 취한 게 아니라 발에 자꾸 뭐가 걸려서요. 형은 어떻게 제대로 걸어요?”
“그야 다 보이니까.”
아무리 달빛이 밝다 해도 건물 때문에 생기는 그림자 밑까지는 비추지 못한다. 게다가 산길이기도 했으니 바닥이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었다.
나야 뭐, 훤히 보이지만 태수한테는 쉽지 않겠지.
어쨌든 많이 취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했다.
“자, 앉아.”
“예.”
“근데 술도 깰 겸,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잠시 뜸을 들인 정태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부탁한 거 있잖아요. 봉사 활동하는 거요. 그거 꼭 형이 함께했으면 하거든요.”
“그런 녀석이 내기에 나를 걸어?”
“아니, 그건…… 처음이라서요.”
“처음이라…….”
남은 우삼겹을 계란에 적셔서 고기 불판에 부쳐 먹는 건 아주 소소한 아이디어의 하나였다.
집에서 해 먹는다면 또 모를까, 장사하는 고깃집이니 일반적으로 생각하긴 어렵겠지.
근데 그게 정식 메뉴에 올랐다.
자신의 가게는 아니지만, 음식 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뿌듯함이 느껴졌다고.
더군다나 손님들 호응도 좋았고 그 대가로 삼겹살집 사장한테 감사 선물까지 받았다.
거기서 자신감이 생겼다나 뭐라나.
“흥, 네 녀석이 나를 얼마나 물로 봤으면.”
“그건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냐?”
“그, 그게…… 그렇게 쉽게 맞힐 줄은 몰랐던 거죠.”
설거지하면서 생각해 보니 현아의 힌트가 결정적이었다.
아무래도 출발 전에 몰래 찔러줬던 용돈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겠지.
역시나 돈이 만세다.
“태수야. 잘 생각해 봐. 우리 가게 음식 중에 평범한 게 있어?”
“그야…… 없죠.”
“그걸 누가 만들었냐?”
“형이요.”
“그걸 아는 놈이 내 실패에 승부를 걸어?”
정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다 당황해하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흠, 일부러 돌려가며 놀리니까 이거 은근히 재밌네.
사실 살짝 미안한 점도 있었다.
임민혁의 경우 수업을 따라가는 게 벅차다고,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금치수 역시 한창 일을 배우는 중이라 함께하고 싶지만 어렵다고. 특히나 식재 납품 같은 경우, 며칠만 지장이 생겨도 곤란하다나.
유일하게 남은 친구인 이호영은 정호석에게 붙들려 토론 배틀이 한창이었으니, 따로 둘이서 한잔하기도 애매했겠지.
거기에 할머니를 모시는 입장이기도 했으니, 의외로 자잘한 일을 태수 혼자 처리해야 했다.
한마디로 제대로 놀지 못했다고나 할까.
그러니 고민 정도는 제대로 들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태수야. 왜 내가 도와줬으면 하는 건데?”
“이번에 봉사하는 곳이 전포동 교회 앞 주차장이거든요.”
“그 하늘 계단 있는 곳이네.”
계단 제일 아래에서 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면 그 끝나는 부분에 파아란 하늘이 보인다. 거길 오를 생각을 하는 순간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해서 다른 말로 한숨 계단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산복 도로까지 가장 빠르고 짧기 때문에 그 코스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다.
완만하게 가려면 큰길로 한참이나 돌아가야 했으니까.
“근처 독거 어르신들 300여 분 정도 모실 예정이라네요.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색다른 음식을 드시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색…… 다른 음식?”
“예. 이전까지는 거의 국수나 짜장면 같은 것만 나왔는데, 이번에 제가 돕게 되면서…….”
봉사 단체에서 이랬다더라.
젊은 친구가 참여하니까 참신한 아이디어 없냐고 조심스레 물었단다.
특히나 이번에는 색다른 음식을 내놓기로 했다고.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먼저, 면이든 밥이든 상관없지만 수분기가 좀 있어야 한다.
어르신들 대부분 퍽퍽한 음식은 기피한다더라.
실제로 대학생 봉사단이 참여했을 때, 조리의 간편함 때문인지 볶음밥을 해온 적이 있었다. 여기에 어묵 국물을 내놨는데도 4분의 1 정도가 남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무 씹기 힘든 음식도 피해달란다.
대부분 치아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쫄면 같은 음식은 먹는 데 한참이나 걸린다고.
또 하나가 더 있었는데 이게 골치 아팠다.
위에 부담스럽지 않고 소화가 잘되는 한 그릇 요리를 해줬으면 한단다.
생각해 보니, 거의 환자식에 가깝더라.
“흐음, 솔직히 어렵네.”
단번에 몇 가지 메뉴가 떠오르긴 했지만 특색 있는 음식이라는 부분에서 조금 걸렸다.
“너무 부담 가지진 말라고 하더라고요. 정 안 되면 기존 칼국수도 괜찮으니까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면 하고 말면 말다니. 할 거면 제대로 하고, 말 거면 도전이라도 해보는 거지.”
“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원래 군대에선 다 이래. 애초에 하지도 않을 거면 말도 안 꺼낸다고. 하지만 꺼낸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는 해야 하는 거야!”
갑자기 불안감이 스쳤다.
내년에 결혼하는 거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가 있지 않는가?
“가만? 태수야. 너 군대는 어떻게 하려고?”
“아. 원래 별생각 없었는데, 고민하다 취사병 지원했어요. 자격증 있으니까 거의 100%래요.”
올 한 해만 한식, 양식을 땄단다.
거기에 더해서 군부대 특성상 실무 경력을 우선으로 보기에 무조건 그쪽으로 빠진다더라.
무엇보다 주방 보조 경력이 아닌 실제로 칼국숫집을 운영하기에 거의 확답을 받아놨다고.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냐?”
“면접 담당관한테 뉴튜브를 틀어줬거든요.”
“엥? 그건 또 무슨…….”
정태수가 폰을 꺼내 보내주는데, 뉴튜버가 찍은 동영상이 떡하니 뜨더라.
-짜잔! 전포동 칼국수 맛집.
첫 장면부터 정태수가 호쾌하게 반죽을 미는 게 나왔다. 홍두깨로 가볍게 슥슥슥 하는데 피자 도우처럼 쭉쭉 늘어났다.
일부러 바깥에서도 볼 수 있게 해놨기 때문에 조작의 여지는 전혀 없었지.
이어서 능숙하게 칼질하는 게 찍혔다.
탕탕탕탕. 탕탕탕탕.
진짜 동작만 보면 몇십 년 동안 칼국수만 썰었던 달인 같았다.
“이게 저 본인이고, 고등학생 때부터 해서 경력은 4년 됐으며, 직접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했더니 바로 땅땅땅 찍어주더라고요. 헤헤.”
“헐, 요즘은 이런 것도 있구나.”
“공군이니까 가능한 거죠.”
내년 후반기, 가을이나 겨울 즈음에 입대 예정.
복무기간은 2년이지만, 정기 휴가를 제외하고도 두 달에 한 번 3박 4일 휴가 확정이라고.
“그럼 가게는?”
“그래서 제가 요즘 성남 삼촌한테 가르쳐 주고 있어요. 직원도 이미 구했고요.”
현아 친구 중에 지원자가 둘이나 있다고 했다.
한 명은 요식업 쪽으로 꿈을 꾸고 있어서 칼국수 제대로 배우겠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현아 절친이란다.
“너,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 제가 사장이잖아요. 그리고 내년부터는…… 하여간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너, 이 새끼! 사고 쳤냐?”
“풉!”
순간 발끈하려다가 녀석의 반응을 확인했다.
뻘게진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아저씨 같더라.
이제 곧 둘은 결혼한다.
서로 좋다는데 중간에 끼어들어 잔소리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나 스스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일지도.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는 이야기 안 하마. 알아서 잘 할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태수의 손을 쳐다봤다.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럼에도 손등은 울퉁불퉁했고 나무 홍두깨를 얼마나 밀었는지 손바닥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저게 그 노력의 증거겠지.
짜식. 기특하네.
“하여간 자원 봉사는 월 1회 정도고요. 인근 부인회 분들하고 대학생 봉사단이 돕기로 했어요.”
봉사라고는 하지만 생업에 지장이 가는 건 곤란했다.
해서 월 1회고, 석 달에 한 번씩 특식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2주 뒤, 수요일 점심이 바로 그날이라나.
문제는 비용이었다.
“이게 기부금으로 운영된다는데, 인당 식대가 1,000원 선으로 정해져 있대요.”
“뭐? 겨우 그거밖에 안 돼?”
“예. 처음에 저랑 할머니가 좀 보태려고 했는데 현금 지원은 안 된다고 해서요.”
대신 쌀이나 육류 이런 지원은 가능하다고 했다.
단체의 성격상 현금이 오가면 불화의 여지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회계상의 문제도 있고.
때문에 요즘은, 봉사자들이 나와서 조리 과정도 다 촬영하고 나누는 것까지 다 확인한단다.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피곤하긴 하겠네.”
게이트 사태 이후, 정부는 막대한 지원금을 뿌렸다.
그 과정에서 나쁜 새끼들이 불법적으로 자금을 빼돌렸고, 결국 지원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아무리 퍼부어도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안정기에 들어가자 정부는 단호하게 칼을 빼 들었다.
특별법을 만들어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간 거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하는 건 예외.
하지만 단체의 경우 철저하게 감사를 진행했다. 물론 규모가 작은 경우 자료만 확실히 제출하면 그리 까다롭게 하지는 않는단다.
“결국은 저렴한 가격으로 푸짐한 한 끼를 만들어야 된다는 거네.”
“그렇죠. 인력은 봉사자로 대체하는, 그런 형식이니까요.”
“그럼 부족한 부분은 사람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야 된다는 건데…… 봉사자는 몇 명이나 되려나.”
“일단 밑반찬은 아주머니 다섯 분이서 도와주기로 했고요. 조리 과정에서는 호텔 조리학과 여섯 명이 지원했다고 들었어요.”
정태수의 목소리가 조금씩 기어 들어가는 게 단번에 느껴졌다.
아무래도 자격지심 같은 건가 보다.
조리 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온다니 위축되는 게 당연하겠지.
동시에 녀석이 내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다는 걸 깨달았다.
난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태수야. 아직 시간도 있고 딱히 고민거리도 아니니까 여유롭게 가자. 우리가 봉사하는 거지 싸우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야, 40년 역사의 칼국숫집이야. 넌 거기 사장이고. 솔직히 칼국수만 치면 넌 어지간한 장인급이라고. 오히려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걸?”
“아, 몇 분 계시기는 했죠.”
하지만 이틀을 넘긴 사람이 없단다.
태수가 하는 게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의외로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배워서 장사해 보겠다고 왔음에도 이틀을 넘긴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자신감을 가져! 그리고 우리가 집중해야 할 건 어떤 음식을 할 거냐는 거지. 아직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역시. 형하고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마음에 편해지는 것 같아요.”
정태수가 웃는데,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우리 현아 울리면 죽는다!”
* * *
“으아아아, 잘 잤다.”
누워서 기지개를 켜는데, 이상하게 몸이 뻐근하더라.
동시에 갑자기 정신적인 피로가 훅 몰려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분명 힐링 여행이었다.
덕순 할머니와 우리 강 여사님의 걱정을 덜어주고, 태수한테 용기를 북돋아 줬다.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돕기로 결정을 내렸으니까.
또, 정호석과 이호영의 툭탁거림도 해결했다.
진짜 별거 아닌 일로 몇 시간씩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경이로울 정도였다.
임혜리와 임수원은 충분히 만족하는 기색이었으니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고기와 술, 따뜻한 잠자리만 있으면 어디든 천국이라나.
현지야 뭐, 원체 생각 없으니 패스.
현아 역시도 평소와 다르게 감정을 드러내며 많이 웃더라.
확실히 무표정보다는 미소가 좋은 법이지.
“그럼 나만 제대로 못 즐긴 건가?”
그건 아니었다.
좀 피곤한 일들이 겹치긴 했지만, 다들 좋아하니 저절로 흐뭇해지더라.
“이제 슬슬 등산 준비를…….”
몸을 일으키려는데, 묵직함이 느껴졌다. 이불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바짝 달라붙었던 것이다.
당연히 뻔히 예상되는 상황.
“자자, 엘리스. 일어나야지.”
그리고 살짝 이불을 거뒀는데,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