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아오!”
황급히 이불을 덮었다.
예상대로 엘리스가 맞았다.
하지만 복장은 문제였다. 분명 잠옷 입는 거 보고 재웠는데 왜 속옷뿐이냐고.
문제는 내 옷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밑에야 그대로였지만 잘 때 입었던 셔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곯아떨어졌다지만 그 정도로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이 상황이 아주 심각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누군가의 수작질(?)일 테지. 우발적인 사고를 가장한 장난을 위해서.
“으음, 추워.”
엘리스가 품 안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당연히 공범인 터라 더욱 범행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엘리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으으음.”
모르는 척, 졸린 척 슬며시 고개를 젓는데 너무 상황이 뻔했다.
살짝 두통이 밀려왔지만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다들 자는 걸 확인했다.
그런 뒤, 정태수까지 방으로 밀어 넣고 이불을 챙겨 혼자 다락방에 올라왔다.
대충 복층 원룸의 윗부분이라 해야 하나?
수면을 위해 만든 것이라기보다 애들이 장난치고 놀라고 만든 좁은 공간이었다.
홀린 듯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창밖으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 때문이었다. 가만히 누워 시선을 돌리기만 해도 커다란 달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
그 몽환적인 광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든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그러니 이 상황이 작위적이라고 할 수밖에.
“엘리스, 다 아니까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씨이이, 먼저 유혹해 놓고.”
“내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하도 어이없어서 쳐다보는데, 오히려 엘리스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됐고, 내 옷 어디 있어?”
“몰라요. 오빠가 덥다고 벗어 놓고…… 아, 위에 있네.”
스스로 벗었다면 정황상 맞기는 했다. 다른 누가 벗겼다면 바로 깼을 테니까.
엘리스가 손을 뻗어 가리키자, 진짜 베개 위쪽에 구겨진 면티가 보였다.
“잠깐만, 근데 뭔가 수상쩍은데?”
“뭐가요?”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 있냐고?”
“그야 오빠가 춥다고 불렀으니까요?”
“설마?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아까와 똑같은 말을 뒤집어서 이어가자 엘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후 대충 전말을 들어 보니 이해가 가더라.
엘리스가 새벽에 화장실에 갔다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위에서 진동이 느껴지더란다.
올라와 보니 내가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나.
그제야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됐다.
술을 진탕 먹고 잤으니, 몸에 열이 올랐을 거고, 잠결에 셔츠를 벗었겠지.
가끔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숲속이 일교차가 무척 크다는 것.
난방도 안 되는 다락방에서 호기롭게 웃통 까고 잤으니 이른 아침이면 본능적으로 떤 것도 당연했다.
“전 오빠를 살리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제 체온으로…….”
“엘리스. 너 이상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아. 여기가 북극도 아니고, 그건 난방시설이 없을 때 이야기잖아. 일단 대충 옷 걸쳐. 남들이 오해할라.”
“쳇. 진짜 너무해요. 보통 이 정도면 다 넘어온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현지가?”
끄덕끄덕.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저거 딱 봐도 연기였다.
“뚝.”
“뚝.”
“그래, 잘했어.”
에구에구 하며, 일단 엘리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야기 중에 뭔가 맞지 않고 빠진 것도 같았지만 일단 넘어갔다.
심증을 확증으로 바꾸는 데 시간을 소요하다 괜히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더 피곤해지는 법이었으니까.
셔츠를 걸치며 엘리스가 잠옷 입는 걸 슬쩍 확인했다.
“슬슬 다들 일어날 시간이니 해장 음식 해야 되거든. 조금만 서두르자.”
“알았어요.”
대충 이불을 둘둘 말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아래로 내려갔다.
다락방이 복층 원룸과 비슷해서 내려가는 계단 폭이 좁아 불편하더라.
어쨌든 밑에서 조심스레 내려오는 엘리스의 손을 잡아주는데 벌컥 복도 한쪽의 방문이 열렸다.
먼저 나온 건, 조온달이었다.
“아니! 여왕님. 설마 두 분이서?”
막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떠는데, 발연기를 넘어 로봇 연기에 가까웠다. 거기에 더해 마구 춤까지 추는데, 나무로 된 펜션이 울릴 정도.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깨울 의도겠지.
문제는 엘리스가 화들짝 놀랐다는 점이었다.
“어어, 오빠!”
당황했는지 미끄러지듯이 넘어지는데, 일단 붙잡아서 가슴 쪽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엘리스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두 팔로 내 목을 휘감았다.
일단 내려놓을까 싶었는데, 그 이상으로 급한 건 조온달의 턱주가리를 막아버리는 거였다.
“너, 쉿!”
“아! 조용히 하겠습드아아아-”
“진짜 없애 버린다?”
“예. 저는! 진짜! 조용히 있겠…… 헙.”
다급히 내지른 살기에 조온달은 넙죽 엎드렸다.
하지만 방금 전의 발광은 다른 이들을 깨우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으음, 뭐야?”
정호석이 엘리스를 안고 있는 나를 봤고, 그 직후 문 너머로 이호영이 보였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난 또 뭐라고. 호영아. 자자.”
“예. 형.”
그 직후 문 옆으로 고개를 내민 임혜리가 하품을 했고, 그 아래로 임수원이 머리를 내밀었다.
“누나, 무슨 일이야?”
“하아암~ 별일 아니네. 난 또 뭐라고. 들어가 자자.”
“음. 알았어.”
역시나 반응은 탄산 빠진 콜라 같았다.
뒤이어 방을 나선 정태수도, 현아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더라.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다들 숙취의 여파인지 인식의 익숙함인지, 엘리스의 팔이 내 목을 휘감고 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당연하다는 거겠지?
유일하게 반응이 달랐던 건 현지였다.
냅다 달려와 조온달의 엉덩이를 뻐엉 걷어차 버린 거다.
현지는 엎어진 조온달에게 말했다.
“하여간 눈치도 없어요.”
* * *
“저어라, 저어라. 열심히 저어라.”
“꼭 뱃사람들 노래 같습니다만.”
“당연히 저승 강을 건너는 뱃사람들 노래지. 네가 곧 들을 노래이기도 하고.”
슬쩍 고개를 돌리려던 조온달의 모가지가 휙 하고 순식간에 원위치로 돌아갔다.
녀석의 머리 위에는 혹이 선인장처럼 주렁주렁 이어진 상태. 때리고 또 때리고, 닦아 패고, 쥐어 패고, 또 깠기에 나온 결과였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자다가 술김에 셔츠를 벗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그걸 본 건 조온달이 바로 엘리스에게 일러바쳤다.
이 기회에 덮치는 게 어떻겠냐고!
순간 눈빛이 하트로 변한 엘리스가 슬금슬금 다락방으로 올라왔는데,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옆에서 잠들었단다.
이 둘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말이 떠오르더라.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하여간 엘리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조온달 이놈은 용서할 수 없었다.
최근 고전 사극에 심취한 게 문제였는지, 성은이 어쩌고, 짐이 책임을 지니 어쩌니 개소리를 늘어놓는데……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뭐, 제 딴에는 충성심의 발로겠지.
어쩌면 라이노스 장로의 밀명(?)이 있었을지도.
어째 녀석이 버스를 몰고, 조수석에 엘리스가 있을 때부터 찜찜하긴 했다.
더군다나 여기 오고 나서 엘리스가 한시도 내 옆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아마도 조온달이 장로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한 모양.
이참에 제대로 나와 엘리스를 엮어보자고 열렬히 부르짖었겠지.
어쨌든 내 주먹 끝에서 나온 조온달의 마지막 탄식이 이거였다.
“하아, 차기 수석 장로의 꿈이…….”
대충 이 정도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 아니, 아니라고.
흐음, 엘프들 말대로 이루어질 건 이루어지는 거고 안 될 건 안 되는 거겠지.
하여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엘리스와 나중에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로 합의를 봤다.
직감상 뭔가가 있는 듯했고, 계속 미루기에는 여러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으니까.
“잔소리 말고 열심히 저어. 양념 뭉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오늘의 해장 메뉴는 이름하여.
된장술국!
사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좀 생소한 이름이다.
대충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고깃집에서 나오는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먹는다, 정도로.
물론 조금 결이 조금 다르긴 했다.
고깃집 된장은 기름기로 인해 부대끼는 속을 풀면서 안주의 역할을 겸하지만, 이건 온전히 해장에 포인트를 맞췄다.
때문에 더 부드럽고 속까지 파고드는 부분에 집중했다.
재료 베이스는 해장의 일등공신, 강종곤 짬뽕의 해물 육수였다.
비슷한 방식으로 갖은 해산물을 투하해 감칠맛과 향을 살리고, 여기에 된장을 중심으로 약간의 고추장을 푼다.
이것만으로도 속풀이의 끝장인데, 그게 전부라면 내 요리가 아니지.
보글보글, 부글부글.
커다란 곰탕 솥에서 국물이 끓는데 퍼지는 향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보기엔 얼핏 해물 장칼국수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칼국수면 대신 누룽지가 들어간다.
나중에라도 일어나 해장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게 적절한 선택인 것이다.
바로 먹으면 꾸덕꾸덕 후루룹.
나중에 먹어도 죽처럼 후웁 후웁.
어쨌든 누룽지만의 구수함에서 나오는 향을 더해 된장의 미묘한 거침을 바꾸는 게 핵심이었다.
사실은 기름진 맛을 내야 할 우삼겹이 어제의 육전으로 거덜 났기에 나온 편법이었지만.
덕분에 기름진 음식을 먹어 밀어내서 해장하는 것이 아닌, 뜨뜻한 누룽지로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해서 알코올을 녹여 버리는 방식이 된 거지.
딱!
“아욱! 끄어어윽…….”
“한눈팔지 말고 저으라고.”
“예! 열심히 젓고 있습니다.”
“어쭈, 손이 보인다?”
“아까는 살살…… 죄송합니다.”
누룽지의 장점은 바닥에 눌어붙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만큼 덩어리가 풀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때문에 계속 저어서 풀어야 하는데, 잠시 눈을 떼자마자 조온달은 옆동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상 직후, 막 펜션 마당으로 나와 스트레칭하는 아가씨를 향해 윙크를 던진 것이다.
당연히 상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넌 당분간 행복 분식 50m 밖으로 외출 제한이다.”
“헉, 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가혹합니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한 거 엘리스한테 이른다? 라이노스 장로님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하, 하하. 당연히 명을 받드옵니다.”
조온달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건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날 인정하니 마니 지랄을 했었다.
하지만 엘리스의 한마디에 깨갱하더니 어정쩡하게 행복 분식에 합류했고, 이후 명령 때문인지 자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열심히 했다.
이후에는 정호석과 친구 먹으면서 행복 분식에 서서히 녹아들었고, 튀김 덮밥 때부터는 나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애초 조온달은 인간 사회에 녹아드는 첨병으로서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오라는 게 임무였으니까.
그래서 제약을 많이 풀어줬고 재량권도 줬다.
그랬는데 통수를 맞았다.
생각하니 열받네.
어쨌든 엘리스도 라이노스 장로도, 내가 다 허락한 거로 알고 있더라.
SNS 활동도, 모델처럼 꾸미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반쯤 연예인들처럼 자랑질하는 것도 전부 나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이 괘씸한 새끼.
단지 그 행동들이 행복 분식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고, 피해가 없었기에 별말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선을 넘는다 싶으면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기에 콕 집어서 따지기도 애매했고.
하여간 조온달은 능력치가 높은 충신이긴 했다.
근데 묘하게 꺼림칙한 부분이 적지 않은 게 문제다.
필요하면 굴려야 하는 게 맞겠지?
“넌 아직도 우리 문화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남자든 여자든 너무 적극적인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고.”
“예. 듣기는 했습니다.”
“대충 너도 과정은 알 거 아냐?”
“그게 인간과 저희 엘프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아옥.”
조온달이 다시 뒤통수를 매만졌다. 두어 대만 더 때리면 선인장 꽃처럼 피가 피어날 것 같았다.
“직접 보고 겪은 걸 그런 쓸데없는 기준에 집어넣어서 보려 하지 마.”
“예?”
“인간이고 엘프고 그렇게 다 따지면 서로 동화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냐?”
“그야 제가 죽기 전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 전에 네가 아는 인간들이 다 죽으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래?”
순간 조온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졌는지 몸도 굳어졌고.
딱!
“아옥. 사장님……!”
“생각은 생각이고 행동은 행동이지.”
“으으윽, 그래도…….”
“어쭈, 손 보라. 허리도 여유 있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온달이 끙끙대며 열심히 젓는데, 다소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그걸 지켜보다 내심을 불쑥 내뱉고 말았다.
“차이라는 건 이해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이해하기도 어렵고. 중요한 건, 이해하려는 노력이거든.”
“예?”
……말해놓고도 참 설명하기 어려웠다.
결국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도 엘리스가 싫은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