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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는 분식집을 합니다-135화 (135/156)

135화

이번 여행, 나름의 테마는 힐링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고생한 행복 분식 식구들을 챙기려는 것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이른 거지.

거기다.

“생각해 보니 가족끼리 여행 간 적이 없었네.”

제대하자마자 행복 분식에 매달렸고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소소하게 어울리기는 했지만, 작정하고 여행을 계획한 건 이번이 처음인 셈.

어쨌든 겸사겸사…… 크흠, 우리 강 여사님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우르르 함께하기로 했다. 어차피 다들 친하고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래. 의도는 좋았지.

그러다 어느 순간 엘리스와 조온달만은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라고 했던가.

환한 그 빛을 이불 삼아 드러눕는데 막상 엘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기에 옵션 딸린 옵션이 조온달.

사실 자신에게 있어 엘프족은 특별하긴 했다.

처음으로 받아들인 이 세계의 일족들.

지성이 있으며 대화가 가능했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힘을 합치기로 합의까지 봤다. 다른 다섯 종족과는 다르게 보다 적극적으로 이 사회에 동화하려는 노력까지 보였던 것이다.

물론 백곰족도 정부와 협상을 통해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은 세력 구축이 우선이라고 했으니까.

남은 네 종족 중 둘은 종족 보존을 우선시했다.

특히 지리산에 자리 잡은 전사 오거들은 그 일대를 수호하는 조건으로 정부 간섭에서 벗어났다.

등산로 인근의 야생 동물을 쫓아내고, 간혹 조난자들을 구해서 넘겼으며, 깊은 산속에 게이트가 열리면 즉각 토벌에 나선 뒤 정부에 보고하는 식이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한 종족은, 여러 곳을 떠돌다 휴전선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주 임무는 지뢰 제거, 혹은 비무장 지대의 생태계 유지. 과하지 않은 선에서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전사 오거와 마찬가지로 이쪽의 게이트를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두 종족의 영역은 따지면 정부에서 군인이나 헌터를 파견하기 까다로운 곳이었다.

때문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되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머지 두 종족은…… 소수였지만 나름 영향력이 막강한 편이었다. 외형상 인간과 차이가 없어서 그냥 사회에 동화되기로 한 것.

물론 그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 이후 소식이 끊어졌으니 뭘 하고 지내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엘리스가 왕국을 선포했으니 다른 움직임을 취할 가능성도 컸다.

뭐,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고.

가만히 달을 보며 생각하는데, 나에게 엘프족은 역시 특별하긴 했다.

그런 이들임에도 이번 휴양림에 와서는 유독 대화가 드물었다.

항상 옆에 있는 엘리스.

노상 숨으려는 조온달.

그 때문인지 뭔가 셋이서 함께한 게…… 솔직히 없었다.

아마도 불쑥 내뱉은 건 거기에서 나온 미안함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엘리스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불쑥 말하고 나니, 조온달이 갑자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불안한데?

“그게 아니라고.”

“철벽같던 사장님이 드디어 마음을 여시다니, 지극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말이 맞군요.”

“오해하지 마라.”

“예.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전 사장님이 고자…….”

“죽는다!”

“흐음,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조온달은 태도를 바꿔 열심히 주걱을 휘젓기 시작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예상대로 엘리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커다란 쟁반 가득, 그릇과 수저를 챙기고서 말이다.

원래라면 주방에서 뚝딱 만들어서 먹었을 텐데, 덕순 할머니가 그러셨다.

이런 날은 야외에서 식사하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어제의 고기 파티도 그랬지만, 아침 해장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야외 테이블이 두 개나 있어 다 같이 먹는 건 문제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강 여사나 현지는 점심 늦게나 일어날 테니까.

일단 나와 조온달이 음식을, 자잘한 일은 아침의 소란에 대한 벌로 엘리스가 하기로 했다.

이참에 막 부려먹는 거지.

“여기 놔두면 돼요?”

“일단 테이블 한 번 닦고, 휴지 놓은 다음 사람 수대로 수저 챙겨.”

슬쩍 조온달을 보니 여전한 속도로 솥을 젓고 있었다.

이제 물이 바글바글 끓으니 누룽지는 가만히 놔둬도 풀어진다.

하지만 녀석을 놀게 놔둘 수 없었다.

후루룹.

일단 간을 보기 위해 맛을 봤다.

“오오, 오오오…….”

속에서 진한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한마디로 위장이 사우나하는 맛이랄까?

해물 된장의 진한 맛에 누룽지의 구수함이 더해지니, 전분으로 만든 걸쭉함과 깊이가 다르더라.

“흐음, 여기서 조금만 더 졸이면 되겠다.”

그렇게 가칭, 된장 누룽지죽이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건 반찬.

이미 덕순 할머니가 대부분을 해 와서 그릇에 담기만 하면 된다.

간간하게 절여져 아삭한 오이소박이.

혹시나 야밤에 해 국수 한 그릇 뚝딱하지 않을까 싶어서 담가온 시원한 동치미.

기본 밑반찬으로 양념 깻잎과 갖가지 나물들이 더해졌다.

물론 김치와 깍두기는 필수였다.

그렇게 한 상 차렸더니 푸짐한 시골밥상이 나왔다.

“근데 밥그릇이 너무 크지 않아요? 이거 거의 냉면 사발인데.”

“원래 해장으로 먹는 죽은 최소 1.5배 이상은 먹는다고 봐야 돼. 괜히 20인분 넘게 준비한 게 아니라고.”

특히나 죽 계열의 음식들은 상당히 부드럽기에 소화가 무척 잘된다.

단점은 금세 배가 고프다는 것.

거기다 먹성이 좋은 정호석과 임혜리, 임수원이 있으니 20인분도 부족할 수 있었다. 때문에 엘리스에게는 20인분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30인분에 가까웠던 것.

남으면 나중에 고추장을 추가해 장칼국수로 해 먹어도 될 테니 모자라는 것보다는 낫겠지.

“자! 이제 야채 투하.”

미리 썰어놓은 호박과 양파, 각종 버섯에 큼지막한 두부가 푸짐하게 들어갔다. 거의 건더기 폭탄 카레에 버금갈 만큼 솥을 그득그득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우러난 맛이 배이면 아주 끝장이겠지.

“넌 잘 안 뭉개지게 살살 젓고 있어. 엘리스는 나머지 반찬 정리하고.”

“알았어요.”

“나는 애들 깨우고 올 테니까. 완료해 놓도록!”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일단 둘에게 맡겨놓고 안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유현성이 사라지자 조온달이 말했다.

“여왕님. 우리 사장님께서 싫어하지 않으신답니다.”

“누구? 나?”

“예. 아주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 몰랐어? 우리 곧 같이 살 건데?”

“푸헉. 컥컥…….”

조온달이 사레가 걸린 듯 연거푸 기침을 토해냈다.

당연히 행복 분식에서 배운 것처럼 음식이 없는 방향으로 잽싸게 고개를 돌리고서 말이다.

“저, 정말입니까?”

“시간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늦어도 20년 안에는 같이 살게 될 거야.”

순간 조온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20년…… 안에요?”

* * *

“크하아아!”

“후우우…… 후우우…….”

단전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다는 소리가 바로 이건가 싶었다.

정호석의 우렁찬 곰트림을 시작으로 온 사방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얼핏 스쳐 들으면 늑대들이 단체로 하울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진한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늑대도 있기는 했지만.

“우와…… 진짜 이런 식으로 해장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와! 이거 팔아도 되겠는데요? 특히 술집에서 포장 판매하면 대박 날걸요? 한잔하고 내일 해장용으로요.”

“팔면 나부터 사고 싶네.”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쑥스러울 만큼의 극찬이었다.

“이거 팔기는 팔아. 딱 이거라고 하긴 그렇고, 비슷한 게 있기는 있거든.”

최대한 간단히 설명을 풀어냈다.

이건 고깃집 된장찌개에 가까운 거다.

일단 건더기가 푸짐한 것도 있고, 밥을 말면 거기서 나오는 전분기 때문에 걸쭉해져 맛이 더욱 진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또 찌개라고는 하지만 불판 위에서 계속 끓기 때문에 나중에는 짜글이에 가까워진다.

한마디로 맛이 응축된다는 거지.

“맑은 국물로 하려다가 밥을 따로 하려니 시간이 애매해서 그냥 누룽지로 한 거거든. 아마 죽보다는 씹는 식감이 더 나을 거야.”

메뉴를 고민할 때,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더라.

국밥이냐 밥국이냐 하는 거에서 좀 더 밥국 쪽으로 기운 게 이거라는 거지.

“나는 죽보다는 밥이다, 하는 사람은 나물하고 고추장 좀 더 넣고 비벼도 괜찮아. 약간은 청국장 비빔밥하고 비슷하게 나올걸?”

이걸 염두에 두고 엘리스한테 큰 그릇을 가져오라고 한 거였다.

“어, 진짜 그렇게 먹어도 되는 거예요?”

임혜리와 임수원이 손을 들고 묻자 피식 웃음이 나오더라.

하긴 동물 계열은 죽을 좋아하진 않지.

“테이블마다 고추장 통 있잖아. 취향껏 덜어 먹으면 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혜리가 손을 뻗었다.

고추장을 조금씩 덜어서 넣고 비빈 뒤 한 입 먹더니 갑자기 눈이 동그라지더라.

“이거 존맛!”

“와, 내가 인생 비빔밥을 산에서 다 먹네.”

그렇게 순식간에 비빔밥을 해치우는데 정호석이 슬쩍 끼어들었다.

“나도 한번 맛보자.”

“형도 만들어 먹어요.”

“아! 벌써 다 먹었어.”

냉면 사발 가득 채워줬는데도 순식간이었다.

먹성이 워낙 좋은 것도 있지만, 위장이 찌르르 녹는 맛이라면서 정신없이 먹었다나?

결국 사발 가득 더 덜어서 주니 테이블에 있는 반찬을 깡그리 쓸어 넣더라.

정호석은 그걸 열심히 비볐다.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나물과 오이소박이를 넣고 가위로 잘게 자르더니, 밥알 사이의 결을 파악한 뒤 골고루 섞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거의 비빔밥 곱빼기 양이 나왔다.

다행히 행복 분식 식구들 테이블은 그걸 사이좋게 나눠 먹었고, 결국 잔반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다들 신나게 식사를 즐기는데, 정태수만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주 신중하게 맛을 본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도 30여 초 뿐, 정말 한 그릇 뚝딱까지 금방이었다.

그렇게 설거지 필요 없는 그릇을 만든 뒤, 슬쩍 다가왔다.

“형, 이거 해물된장찌개 맞죠?”

“어, 맞아.”

“따로 조미료 같은 거 안 넣었어요? 엄마의 손맛이라고.”

“원래 시판 된장에는 다 조금씩은 조미료가 들어가 있어. 중요한 건 어떤 된장을 사다 쓰느냐에 달린 거지.”

“흐으음. 우린 식자재 마트에서 사는데, 제가 이것저것 해본다고 사서 먹은 거랑은 달라서요.”

그러고 보니 어제 스치듯 그 이야기가 나왔다.

거의 칼국수 단일 메뉴라 고민이 많다고, 그래서 장칼국수 같은 것도 해보고 흑미 칼국수나 녹차 칼국수 같은 것도 만들어봤다고 했었지.

“합동조합 된장이라고 있어. 그건 식자재 마트 같은 데는 없고, 따로 주문해야 돼.”

이름난 고깃집 된장이 이 회사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냈는데 대기업 제품보다 입에 좀 더 맞더라.

한마디로 가정용이라기보다 식당용 느낌이랄까.

“일단 나중에 연락처를 알려줄 테니까, 다 먹었으면 대충 설거지거리 챙겨서 들어가.”

“예. 형.”

그렇게 자리가 하나둘씩 비워질 때까지 지켜보는데, 조금은 뿌듯하더라.

덕순 할머니 말마따나 이게 내 새끼들 밥 먹이는 기분이겠지?

슬쩍 솥을 보니 대충 6~8인분 정도가 남았다.

불을 약하게 했음에도 더욱 졸아 있으니 이대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누룽지가 아래 가득 있었으니까.

그때, 저 옆에서 뭔가(?)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괭한 표정에 반쯤 맛이 간 얼굴로 1호, 2호, 3호가 눈치를 살폈다.

딱 보니까 우리도 살려주세요, 이 눈빛.

“그래, 니들도 먹어라. 조온달은 반찬 좀 챙겨주고.”

“가, 감사합니다. 형님.”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형님!”

거의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는데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됐고, 이거 받아서 앉아.”

그렇게 한 그릇 가득, 된장 누룽지죽을 퍼주니 신나게 테이블로 가더라.

곧 퍼묵처묵, 우걱우걱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된장 누룽지죽과 총각김치, 오이소박이를 완전히 작살내 버린 것이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1호, 2호, 3호를 덮쳤다.

뭔가 이상한 낌새에 3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보고 말았다.

지옥의 악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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