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여왕님?”
“아니,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호호호, 진짜 여왕이라고?”
이게 최대한 압축한 내용이었다. 그러다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정태수가 폭주해서였지.
“진짜라니까요.”
“에이, 그건 아니지.”
“그러게. 요즘 세상에…… 무슨…….”
그러다 아주머니들끼리 서로 시선을 맞추더니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은하가 그렇게 자랑하던 예비 며느리가…… 설마?”
“그게 진짜야?”
이미 저 위쪽 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전 국민적으로 퍼진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뉴튜브로 인해 엘리스의 미모는 어마어마하게 알려졌지.
이걸 좋아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저희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그냥 태수가 좀 과하게 오해를…….”
“왜요. 엘리스 형수 정도면 진짜. 우우웁.”
“너 취했어. 내일 바쁘니까 일찍 정리하자고.”
그렇게 정태수의 입을 막고 술자리를 마무리하려 했다.
사실 분위기는 좋았다.
김장을 했으니 수육을 삶아라, 그래, 간만에 한번 마셔보자,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 술판이 벌어졌으니까.
이상하게 포근해지는 정 같은 것도 느껴졌다. 마치 덕순 할머니가 가게 할 때처럼 사람들이 웍더글덕더글 거린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복작복작한 가운데.
“캬하,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그럼, 이런 게 바로 재미라니까.”
“받어, 받어. 한잔 더 해야지.”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더해져 막걸리 잔이 몇 번 돌아갔는데, 정태수가 평소보다 빨리 취했다.
“으어, 어지러운데요? 이거, 막걸리에 소주 탄 거 아니죠?”
“귀한 소주를 왜 타? 그건 따로 마셔야지. 호호호.”
“어으, 으으으.”
취해서 하늘하늘 흔들거리는 정태수의 행동이 재밌었는지 아주머니들이 몇 차례나 더 권했다.
가만히 보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사실 정태수는 한동안 꽤나 무리했다. 어떻게든 가게 꾸려 나가려고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가 긴장이 확 풀린 거겠지.
덕분에 엘리스 이야기로 급발진하긴 했지만, 웃고 넘길 정도였다.
슬쩍 시선을 돌려 김부성을 쳐다봤다.
녀석이 엄지를 슬쩍 드는 걸 보니, 잘했다고 칭찬해 달라는 것 같았다.
확실히 김부성의 친화력이 큰 역할을 하긴 했다.
정태수에게 딱 달라붙어서 배우겠다고 다른 누구보다 노력했으니까.
사실 조리학과 학생과 실제로 장사하는 사장 사이의 차이는 크긴 했다. 단순히 음식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손님을 받아야 하니까.
때문에 태수는 시간이 지나자 능숙하게 다른 이들을 가르쳤다.
“형. 이건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세척에 파우더를 쓰는 것도 맞긴 한데, 그런 식으로는 하나하나 못 닦아요.”
“어? 그럼 어떻게?”
“뭘 어떻게 해요? 그냥 하나하나 박박 씻어야죠. 일단 손으로 다 만져보고, 흐음, 뽀득뽀득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미끄덩하면 안 된다고 보면 돼요.”
진짜 강만식이 당황할 정도로 정태수가 꼼꼼하게 체크를 하더라.
심지어 그걸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
“면발이 색이 바뀌어야죠. 그냥 시간 된다고 익었다고 판단하면 안 돼요.”
“근데 타이머 넘기면 퍼지지 않나?”
“화구 온도나 어느 정도 끓는점에서 넣었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요. 같은 반죽이라도 숙성도에 따라 익는 부분도 조금씩 차이가 있고요.”
태수가 어려 보여도 덕순 할머니 옆에서 곁눈질만 십여 년이 넘는다.
그 경험은 누가 쉽게 따라 할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나 역시 맞춰줬고.
“흐흠, 태수 말 못 믿겠으면. 직접 먹어봐. 백번 말 해봐야 한번 겪어보는 게 확실하니까.”
강만식은 약간 당황해했지만, 나름 자신감 있게 행동을 했다.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면을 건져서 맛을 본 것이다.
하지만 결국 태수 말이 맞았다.
“하루 수백 그릇, 달로 치면 수천 그릇이야. 년으로 치면…… 수만, 아니, 수십만은 넘지 않을까?”
“그렇게나 된다고요?”
“그러니까 경험치를 무시 못 한다는 거지. 그만큼 삶았으면 슬쩍 보기만 해도 대충은 알지 않을까? 그리고 만식아. 그걸 이기려 한다는 건 좀 아니지.”
“크으, 인정합니다. 음식은 타이머가 아니네요.”
강만식이 정식으로 고개를 숙였고, 김부성은 정태수를 훅 끌어안았다.
다른 둘도 마찬가지.
그렇게 정태수가 존재감을 입증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던 불안감을 날려 버렸던 거다.
흐음, 생각보다 의도대로 잘돼서 다행이었다.
애초에 이번 일 자체가 정태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 했던 거니까.
물론 개인적인 도전도 포함되기는 한다.
일단 음식은 완성.
부가적인 부분도 끝났다.
남은 건, 정상적인 나눔 봉사만 끝나면 된다.
결국 정태수는 그렇게 막걸리 두어 병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이주 가까이 쌓인 스트레스가 한순간 탁 하고 풀린 거겠지.
술김에 정태수가 그러더라.
“형. 고마워요.”
* * *
“으어으, 새벽 네 시인가?”
정확히 폰에 표시된 시각은 3시 48분이었다.
“슬슬 일어나면 4시 정도 되겠구나, 씻고 챙기고 나가서 문을 열면 5시일 거고, 이런저런 조리에 준비가 끝나면 7시 정도?”
사람들이 참 오해를 하는 게, 11시부터 장사를 시작한다고 뭐 한두 시간 준비한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아니다!
그렇게 간단히 되면 참 좋으련만, 그런 방식으로는 맛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일어나 이불 대충 정리하고 후다닥 샤워를 마친 후,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어, 형. 왔어요?”
“뭐, 뭐냐. 이 혼란한 상황은?”
이보영과 정아름은 보이질 않았고, 정태수, 김부성, 강만식은 부스스 그 자체였다.
“설마 너네 전부 가게에서 잔 거야?”
“예. 어쩌다 보니…….”
내가 집에 돌아간 이후 한 잔 더했단다. 제일 먼저 뻗은 정태수가 일어나면서 다시 술자리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찍 마셔서 일찍 잤다는 정도?
후우, 그래도 나름 의기투합한 것 같아서 흐뭇해지네.
“다른 여자들은?”
“새벽에 목욕탕 다녀온다고 나갔어요. 우리는 가게 뒤편에서 씻으려고요.”
강만식은 그렇게 말한 직후 살짝 휘청거리더라.
아직 술이 덜 깼다는 증거겠지.
“빨리 샤워하고 정신 챙겨. 오늘 바쁘다.”
“옙.”
김부성은 후다닥 팬티만 남기고 다 벗더니 강만식과 정태수를 끌고 나갔다.
“허, 추울 텐데.”
초겨울에 저건 아니다 싶었는데, 의외로 김부성은 씩씩하게 돌아왔다.
“괜찮아?”
“하하하, 사나이 김부성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정신 바짝 차리려면 냉수마찰 정도는 하고 와야죠.”
당당하게 말하는데 뭐, 별수 있나.
어쨌든 나머지는 애들한테 맡기고 수비드 시켜놓은 고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음, 잘됐군.”
손가락으로 눌러 보니 정말 부드럽게 들어가더라.
이제 이걸 벗겨서 표면에 스테이크 파우더를 바르고 굽기만 하면 된다. 그런 다음 다시 진공 포장하고, 먹기 직전에 물에 한 번 더 데우면 끝이었다.
“태수야, 그쪽은.”
“여기도 다 끝났습니다. 사실 자기 전에 한 번 더 작업해 놨거든요.”
슬쩍 맛을 보니 족발 육수 쪽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적당히 간간한 게 밥이랑 딱 어울릴 정도였고, 의외로 감자나 당근이 넉넉해서 부족할 것 같지 않더라.
“그럼 마무리하자.”
칼국숫집 오븐이 작아서 서너 번 나눠서 20분씩 고기 표면을 구웠다.
그걸 식힌 뒤 진공 포장.
다행히 남자 손이 넷이나 되니 순식간에 정리되더라.
그 직후, 이보영과 정아름이 돌아왔다.
“서둘러 온다고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작업할 건 어제 다 해놨으니까. 밑반찬하고 좀 꺼내서 식사부터 하자.”
어제 아주머니들이 한창 뚝딱뚝딱하면서 김장 마무리하고 밥에 반찬에 한가득 해주고 갔었다. 거기다 봉사에 필요한 밥까지 해놨으니 데우기만 하면 된다.
“이제 다들 모였으니, 솜씨 좀 부려볼까?”
이럴 때 제일 빠른 메뉴는?
역시 비빔밥이 제격이겠지. 게다가 간편하기도 하고.
지지지직, 계란부터 튀기듯 구웠다.
그사이 강만식이 나물을 데쳤으며, 정태수가 고추장 양념장과 해장용 국물을 만들었다.
김부성은 어디서 찾았는지 커다란 양푼이 세 개에 밥을 한가득 담아 오더라. 거기에 나물과 고추장 계란을 올리고 슥삭슥삭 비볐는데, 간이 기가 막혔다.
“아, 이거 옛날 생각 나네요.”
김부성이 군침을 다시면서 말하는데,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하하, 군대 훈련 나가서 먹은 개밥 느낌이잖아요.”
“아! 씨. 밥맛 떨어지게.”
“에이, 밥맛이 왜 떨어집니까? 맛있기만 하구만.”
그러면서 한 술 크게 떠서 입으로 가져가더라.
결국 한 소리 하고 말았다.
“앞으로 군대 이야기는 금지.”
“예? 왜 안 됩니까?”
강만식도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그때 정태수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우리 형, 짬밥만 7년 먹은 사람이거든요. 스무 살 되고 바로 입대, 스물여섯에 제대했어요. 그래서 밥상 앞에서 군대 이야기 금지입니다.”
“크흐, 죄송합니다.”
“옙.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강만식과 김부성이 동시에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모를 수 없겠지.
결국 분위기 전환 겸 말했다.
“됐고. 우리 밥이나 먹자.”
근데, 진짜.
비빔밥은 꿀맛이더라.
* * *
“와, 사람 많다.”
“어이구, 현성이 왔어? 근데 이것도 아직 절반도 안 돼.”
“예?”
“원래 공간이 애매해서 1차, 2차, 3차로 나눠서 배식할 거야.”
“으어, 그렇게 많아요?”
진심으로 놀라는데, 순이 엄마가 그러더라.
“말이 좋아 삼백 명이지, 한 번에 식사할 공간도 없고 또, 포장해서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거든.”
“그…… 얼마나 되는데요?”
“어르신들이 차가운 바닥에서 드시겠어? 편하게 집에서 먹겠다는 분들은 절반이 조금 안 될 거야.”
확실히 자리 깔고 먹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괜히 눈치 볼 필요도 없을 테고.
“자자, 언니들 먼저 오니까 슬슬 움직이자고.”
아주머니들의 재촉에 일단 돌돌이에서 짐을 내려, 밥차로 향했다.
화구는 총 셋.
하나는 폴드 포크, 하나는 육수를 데우고, 남은 건 예비인가?
“일단 이쪽에서 먼저 밥을 담고, 그 위에 소스, 마지막으로 고기 올리면 되겠네.”
동선을 확인하고 대략적인 준비를 마쳤다.
그제야 뒤늦게 출발했던 애들이 나타나더라.
“자, 순서 불러줄게. 제일 왼쪽부터 김치, 양파절임, 깍두기 담고, 밥, 소스, 고기다. 아름이하고 보영이가 반찬 담당, 태수랑 부성이가 소스, 나랑 만식이가 고기를 맡을 거야.”
그릇과 밥을 챙기는 건 자원봉사 아주머니들이었다.
특히 뒷정리가 중요하다며 그쪽으로도 두 분이나 빠졌다.
근데 이거 너무 열약하다 싶었다.
많이 개선된 거라고 하는데 여기서 먹는 사람은 교회에서 쓰는 식판에 비닐을 씌워서 쓴다고.
포장의 경우 각자 가져온 그릇에 담아주든가 1회용 큰 종이 용기에 덜어준다더라.
아, 이거 이상하게 불편하네.
“호호, 무슨 생각하는지 단번에 알겠네. 괜찮아. 처음 봉사하러 온 학생들은 다들 그래.”
“예? 뭐가요?”
“처음에는 불편해하고 뭔가 안쓰럽고 그렇지만, 다 끝내고 나면 사람 마음이 달라져.”
순이 엄마의 말뜻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아주머니들도 맞장구쳐줬고, 자원 봉사 대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내가 모르는 뭔가 깊은 뜻이 있겠지?
짝짝!
그때 유쾌한 아주머니들의 박수를 쳤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