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와! 진심으로 지긋지긋하다, 라고 해야 할까.
동시에 의문이 들더라.
이거 그냥 음식 만들어서 하루 나눠주면 끝인 거 아니었나?
대체 또 뭐가 있다는 거지?
시간으로 치면 고작 세 시간 남짓.
하지만 그 전후로 들어간 노력은 상당했다. 게다가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의외로 일도 많아졌고, 여기에 혹이 네 개나 딸려와 이런저런 계산까지도 해야 했었다.
어느 순간, 이게 우리 강 여사님의 부탁인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근데, 이제 마무리됐다 생각해서 한숨을 놨는데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저, 무슨 일이 또 남은 거죠?”
“아니, 일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어쩌나 음식이 다 떨어졌네.”
“뭐, 재료만 있으면 뚝딱 만드는 건 어렵지 않거든요. 근데 무슨 일인지 알아야…….”
조심스레 떠보고 있는데, 할머님 한 분이 손짓으로 날 불렀다.
그때 순이 엄마가 웃으며 날 탁 밀더라.
“빨리 가봐.”
“아…… 예.”
차에서 내려 할머님에게 다가갔는데, 단번에 기억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포장을 해간 3단 찬합의 그분이었던 것이다.
“아니, 고, 곱분이 이모님. 아까 포장해 가셨는데, 어쩐 일로…….”
“내가 너무 고마워서 그래.”
“예?”
“우리 영감이 거동이 좀 불편해. 그래서 거의 누워 지내서 만성 소화불량이거든.”
“아. 그, 그러시군요.”
“맨날 깨작깨작 먹던 양반이 왠 걸. 맛있다고 삭삭 긁어 먹는데…… 기분이 그렇더라고.”
곱분이 이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며 눈가를 만지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더라.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단순히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셔서 기쁜 것도 있지만, 반대로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뭔가도 느껴졌던 것이다.
일종의 죄책감? 그런 비슷한 거였다.
“이건 별거 아니고. 내가 올 여름에 담근 매실 장아찌야. 거 수고한 학생들 하고 나눠 먹어.”
그러면서 옆에 놔뒀던 보따리를 가리키는데, 대략 10리터짜리 통으로 두 개나 되더라. 진심으로, 저걸 어떻게 들고 왔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던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아녀. 내가 고맙지. 근데 물어보니, 학생도 식당 한다면서?”
“예. 작은 분식집 하나 하고 있습니다. 저기 저 친구가 칼국숫집하는데 그 맞은편에서요.”
시선을 돌려 정태수를 가리키자 곱분이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덕순네 손자구만.”
“예. 잘 아시는군요.”
“그야 자랑 자랑을 얼마나…… 호, 입이 방정이지. 하여간 잘 먹었어. 고맙고.”
“보잘것없는 음식인데, 맛있게 드셔주셔서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말도 참 곱게도 하네. 혹시 다음에도 학생이 음식 해서 나오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저 친구 도와주러 나온 거라서요.”
“이 나이 되면 그냥 봐도 보이는 거야. 딱 봐도 학생이 애들한테 다 시키더만.”
“그게…… 나이가 조금 많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허,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여간 잘 먹었네.”
곱분이 이모는 다소 묘한 표정을 지은 뒤, 몇 번이나 내 손을 다독여주고 돌아섰다.
잠시 뒷모습을 보는데, 감정이 약간씩 요동을 치더라.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고.
“현성아. 슬슬 정리는 끝나가는데 말이야.”
“아! 예. 뭐 남은 거…….”
“호호호. 아니, 이거 바빠질 것 같아서.”
순이 엄마의 예언이 적중하더라.
술판을 벌이던 할아버지들이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가운데, 데리러 온 가족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저 영감님들이 취해서 환하게 웃는 건 정신줄을 놔서 그러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어쨌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니, 뭐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다들 자리를 비우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사람이 더 느네?
“저기 총각.”
“예?”
수더분한 아줌니 한 분이 화려한 몸빼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텅 소리가 나게 김치통을 내려놓더라.
“이거 내가 담근 파김치인데…… 짜장하고 먹으면 죽여. 나눠 먹어.”
그러면서 뒷말도 듣지 않고 돌아서는데, 너무 시원해서 더 당황스러웠다.
“저기 김치통은 가져가셔야죠.”
다급히 불렀지만, 아줌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손을 휘휘 젓고 아래로 내려가셨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이, 학생!”
“예?”
“이거 시골에서 보내온 호박이야. 푹 삶아서 죽 끓여 먹으면 맛있어.”
“아, 가, 감사합니다.”
한창 삼촌뻘 아저씨가 베개만 한 늙은 호박을 두 개나 놓고 갔다.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세우자마자 이번에는 산적 같이 수염을 기른 아저씨가 앞을 가리더라.
“잠깐,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으으. 예에…….”
“울 사촌이 대저 한참 위쪽에서 토마토를 해요. 한 상자 가져왔으니까. 나눠 먹어. 이게 참 다이어트도 좋고, 고혈압에도 직빵이고. 뭐시냐 10대 건강식품? 거기에도 들어가.”
“아니, 이걸 왜?”
“마, 나도 몰라. 울 엄니가 그냥 가져다주라더라. 잘 먹어.”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수줍어하면서 사라지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거, 맞는 건가?
아니,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그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자네, 가는 가?”
“아! 이제 다 끝나서 정리하려고요.”
“이거, 크흠. 울 큰 형님이 오늘 너무 잘 먹었다 그러네. 이거, 밤이야! 겨울이니 군밤도 좋고, 찐 밤도 좋고, 보관만 잘하면 내년 설까지도 거뜬 없으니까. 가져가.”
턱 하고 앞에 놓인 건, 현아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마대 자루였다.
“아니…… 이걸 어떻게?”
들고 왔냐고 물으려는데, 이 어르신은 그저 고개를 젓더라.
“울 큰 형님이 입이 진짜 더럽게 까다롭거든. 그것 때문에 형수랑도 많이 싸우고 그랬어. 근데, 올해 먹었던 고기 밥 중에 최고라네.”
“아…… 그게.”
“돈도 많은 양반인데 짠돌이라서 비싼 건 죽어도 안 먹는단 말이지. 어쨌든 내주라 했으니까…… 기왕이면 맛있게 해 먹으라고.”
그렇게, 뭔가 하나씩, 하나씩 트럭 앞에 쌓여가더라.
그 대부분이 농작물이었는데 감자, 고구마, 호박, 밤, 토마토에 숙취에 좋다는 헛개나무 껍질까지, 진짜 시골에서 캤다는 어지간한 건 다 있었다.
특히 하이라이트는 이거였다.
처음에는 무슨 괴물이 교회 쪽으로 올라오는 줄 알았다.
그 정체는, 어지간한 헬스 트레이너도 옆에 서면 찔끔할 정도로 아주 그냥 근육덩어리 아저씨였다.
대충 팔뚝만 보통 사람 허벅지 두께는 되어 보이더라.
“어이, 학생들. 다들 고생 많이 했다면서.”
“아…… 고생이라 할 정도는 아닙…….”
“울 아버지가 다 봤다던데.”
어우, 눈빛에 살기가 도는 게 평범한 사람이라면 바로 몸을 수그리겠지.
“이거 가져가 먹어.”
그러면서 끈으로 묶은 박스 하나를 한 손으로 내미는데, 얼떨결에 잡았다가 살짝 놀랐다.
최소 10㎏. 크지 않은 박스 사이즈를 생각하면 정말 상당한 무게였다.
“삼겹살이야.”
“아니, 이걸…….”
“야. 나, 이 밑에서 정육점 해. 좋은 걸로 골랐으니까 끝나면 구워 먹어.”
“감사…… 합니다.”
“좋은 일 많이 하려면, 좋은 거 먹고 그래야지. 그래야 힘도 좀 쓰고, 더 열심히 하고. 하여간 수고해.”
그러면서 어깨를 두드리고 가는데 힘이 정말 상당했다.
그렇게 뭔가가 한가득 쌓이자 순이 엄마가 그러더라.
“이걸로 맛있는 거 만들 수 있겠어?”
* * *
“그런 거…… 였군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졌다.
아니, 방금 전의 황당한 상황 때문에 저 멀리 하늘로 솟구쳤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순이 엄마의 수다는 제법 길었다.
대충 요약하면, 최근 몇 년 사이 이렇게 뭔가를 많이 받은 적은 없단다.
점점 살기가 각박해지면서 다들 아끼기 시작했다나.
“그만큼 현성이랑 너네가 만든 게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사실 정성이 없으면 그렇게 못하지.”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최소 육십에서 나이 많으신 분들은 팔십도 훌쩍 넘으셨다고 했다. 그만큼 살아오면서 드신 게 있으니 그 음식의 가치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만든 요리에서 자신들을 배려해 주는 마음을 느꼈다고 하더라.
무엇보다 석 달에 한 번씩 특별한 메뉴가 나오는데 최근에는 그다지 만족도가 높지 못했단다.
색다른 메뉴라고 나온 볶음밥은 퍼석거렸고, 어떤 때는 유행하는 음식이라고 큐브 스테이크니 뭐니 나오는데 질겨서 씹기도 어려웠다고.
가장 중요한 건, 몇 번이나 음식을 더 달라고 했는데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했다.
“근데 그걸 어떻게 다 아세요?”
아까 막걸리 마시고 춤춘 걸로는 전부 파악하긴 어려웠을 텐데?
“호호, 방법이 있지.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그리고 이걸로 도시락 만들 수 있겠어?”
“충분히 가능하긴 합니다.”
육류는 일단 삼겹살.
시골에서 왔다는 초란도 한 판 있었고, 야채 종류는 정말 골고루 골고루였다.
특히 감자나 고구마가 참 유용하게 쓰일 것 같더라.
30인분의 도시락 배달.
그건 거동이 불편해 여기까지 올 수 없는 어르신들 몫이었다. 그들만을 위해 따로 포장을 해서 배달해주는 것까지가 봉사의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 음식이 모자란 적은 없었단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남은 거에다 몇몇 재료를 더해 도시락과 반찬을 만들었다나.
어쨌든 순이 엄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하게 울컥 울컥하더라.
무엇보다, 책임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럼 부탁해.”
“예. 어떻게든 해낼 테니까. 맡겨만 주세요.
순이 엄마는 그렇게 주방을 맡기고 사라졌다.
그제야 겨우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치미는 것 같았다.
“자, 다들 집합.”
“옙. 제가 제일 먼저 도착했습니다.”
김부성이 손을 들자, 홧김에 꿀밤을 먹이고 말았다. 그러자 녀석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먹이기까지 하더라.
“오늘까지 너네 다섯은 한 몸이다. 다 같이 움직이라고. 그러니까 빨리 다들 불러와.”
“알겠습니다.”
김부성이 후다닥 사라지는데, 그러고 보니 강만식과 이보영이 보이질 않았다.
흐음, 그렇게 된 건가?
일단은 무시하자.
어쨌든 다들 모이자마자 분위기 환기 겸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임무가 떨어졌다.”
“예? 끝난 거 아닙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저절로 한숨을 내쉬자 동시에 다들 따라 하더라.
하긴, 버거울 만도 하겠지.
“근데 뭡니까?”
“도시락 30인분.”
“헐, 그게 갑자기 무슨.”
“질문은 거절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넉넉히 40인분 이상 잡고 하자.”
애들에게 따라오라고 한 다음, 어르신들의 보답이 가득 쌓인 곳으로 안내했다.
다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는지 그리 놀라지는 않더라.
“여기 재료로 도시락을 만든다고 생각해. 삼겹살도 있으니까, 1.5인분 같은 1인분을 구상하라고.”
순간 강만식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슨 요리 대회라도 나가는 것처럼 제일 먼저 재료들을 살피는데, 점점 표정이 밝아지더라.
“이거 대부분 상등품인데요?”
“그렇게 좋아 보여?”
“예. 특히 토마토가 아주 싱싱합니다. 이걸 끓는 물에 데쳐서 껍질 벗긴 다음에 으깨서 다른 재료 넣고 볶으면 아주 고급 페이스트를 만들 수 있거든요.”
강만식이 쏘아내듯 말하는데, 인정!
사실 다들 이것저것 놓고 간 직후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확인하게 되었다.
대부분 건강하게 자랐는지 반짝반짝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더라.
확실히 재료는 좋다는 뜻이겠지.
“자, 그럼 다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자고. 그리고 이제 진짜 마지막이니까. 힘내자.”
어쩌면 마지막 일은, 나보다 이 녀석들한테 뭔가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그건 적어도…… 요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