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곧게 뻗은 포장도로처럼 아무 자극 없는 잔잔한 인생. 깜짝 이벤트처럼 터지는 두근거림은 무척 귀하고 소중해서 안절부절못할 때가 있다.
그녀에게는 그가 그랬다. 학생 시절의 첫사랑. 몇 년간 품어왔던 소중한 마음. 그에 대해 아는 건 뭐 하나 확실하지 않은 뜬소문뿐이면서도 열렬하게 좋아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과 그에게서 풍기는 청량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내면이 아닌 외면을 좋아하는 게 무슨 진짜 사랑이냐고 비난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를 생각할 때 시작되는 두근거림엔 거짓이 없었다.
‘그러니 무슨 상관이야. 그것도 사랑인 거잖아.’
“우예린 씨는 구멍을 쑤셔주는 것보다 이 살점을 뭉개는 걸 더 좋아하네요.”
사랑하는 남자가 뱉는 천박한 말.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것이 흥분인지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알지 못한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런 곳까지 왔으면서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요. 다 예상한 거 아닌가.”
이런 곳에서 일하는 남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를 비웃으며 속삭였다. 입가에 팬 한쪽 보조개가 전처럼 부드럽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말을 해줘야 뭘 원하는지 알지.”
“…….”
“아니면, 그냥 내가 알아서 해줄까요?”
안 그래도 축축한 손에 바디 로션을 잔뜩 부었다. 그의 손에서 로션 한 방울이 그녀의 헐벗은 어깨에 뚝 떨어져 고였다. 그는 바디 로션을 대충 바른 손으로 가슴을 콱 붙잡았다. 마사지를 빙자한 거친 애무였다.
가슴을 강하게 주무르는 그를 차마 볼 수 없어 우예린은 눈을 꽉 감았다. 첫사랑. 유흥업소. 야한 짓. 하나하나가 합쳐지자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도준희. 이런 곳에서 널 다시 만난 것부터 함정이 아니었을까.
* * *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소란스러운 밤거리에 때아니게 옥신각신 실랑이하는 소리가 섞였다.
취객도 많고 도둑도 많고, 말 많은 거리에서 싸우는 소리야 흔한 것이었지만 한쪽은 칭얼대고 한쪽은 끈질기게 설득하는 대화는 잘 들어보면 수상한 데가 있었다.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얌전한 머리 스타일에 행동거지 또한 모난 데 없는 여자가 화려한 차림의 여자에게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 나 이런 데는 됐다니까.”
“이런 데가 뭐 어때서 그래?”
생머리 여자, 우예린은 취업 턱을 내기 위해 만난 오랜 친구 이지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본인의 짙은 피부와 어울리는 새빨간 립스틱과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검은 가죽 치마 같은 것들이 당당하고 섹시해 보이는 이지나가 척,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원래 자유분방하고 오픈 마인드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지만 이번에는 ‘얘는 원래 그런 애야.’ 하고 넘기기 힘들었다. 우예린의 지나치게 모범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촌스럽게 굴지 말고 들어가자.”
우예린은 화려하고 세련된 건물 앞에서 땀을 뻘뻘 흘렸다. 한여름도 아닌데 땀이 났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신의 직장에 입사하여 겉모습만은 어엿한 직장인이었지만, 대학교를 갓 졸업한 모범생이 우예린의 속 알맹이이자, 본질이었다.
“여기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내가 큰맘 먹고 공유하는 거야. 얼른 들어가 보자. 나도 기대된단 말이야!”
“너도 처음이라고?”
“손님으로 온 건 처음이야.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 보자.”
우예린은 해맑은 얼굴로 독촉하는 이지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야, 여기서 시간 다 가겠다. 들어갈 거야, 말 거야?”
이지나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자 우예린의 얼굴이 곤혹스러워졌다.
고향인 충남에서 서울까지 긴 역사를 맺어온 친구가 바로 이지나이다. 보수적인 마을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자유로웠던 그녀를 익히 알고 있다. 어릴 때에는 호기심으로 그녀가 하는 말에 눈을 반짝거리기도 했다.
인생을 즐기는 이지나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이건 좀 아니잖아! 업소라니…….’
우예린은 울상이 되었다. 사방에서 삐끼들이 손님을 부르는 소리와 술 취한 아저씨들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나이트, 노래방, 마사지 업소. 이곳은 유흥과 범죄의 온상지였다. 이지나가 팔짱을 끼더니 한심하다는 듯 툭 물었다.
“겁나?”
“뭐, 뭘 겁나.”
비웃듯 쳐다봐서 발끈했지만 사실은 그렇다. 겁도 나고…….
‘이런 거 무섭단 말이야.’
우예린은 꽤 엄한 집에서 자라서, 일탈을 ‘해선 안 되는 행위’로 교육받아왔다.
몇몇 친구들을 따라서 강의 도중 나가는 일명 출튀를 했을 적에도, 깔깔거리며 즐기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우예린은 강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카페에서 빨대만 쪽쪽 빨았다. 걸리면 어떡하지, 두려워하면서.
재수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도중 출석을 부르지 않는다는 교수님이었지만 딱 우예린이 출튀를 한 날 출석을 부르는 게 아닌가.
우예린도 결석 한 번 한다고 인생에 문제가 생기는 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은근하게 신경이 쓰여서, 그 뒤로는 소소한 일탈도 시도하지 않았다.
정신력이 약하고 유약한 스스로가 가끔은 짜증이 났지만 어쩌겠는가. 사람 성향이 바꾸고 싶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헤어스타일 같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가자. 가서 술이나 더 마시자. 내가 낼게!”
어두운 밤거리에서 독보적으로 번쩍거리는 건물은 부담스럽다. 때문에 괜히 목소리를 낮추게 되고, 어깨도 움츠러들었다.
이지나가 귀찮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너도 흥미 있어 했잖아.”
“그건 이런 덴 줄 몰랐으니까 그랬지!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가 가득한 곳이라며!”
“왜? 맞잖아? 여기가 뭐 어때서 그래. 여기 직원들 얼굴 진짜 죽여. 연예인 뺨친다니까.”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가 커지자 사람들이 흘끗거리며 지나갔다. 우예린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모르는 남자 손에 몸을 맡기고 싶어?”
“모르는 남자니까 좋은 거지. 야, 여기 이렇게 서있는 게 더 쪽팔리니까 얼른 들어가자. 너도 후회 안 할걸? 얼른! 나 화낸다?”
“…….”
“까놓고 말해서 늙으면 썩어 없어질 몸! 안전하다면 즐기는 게 백배 이득이지!”
우예린은 입을 떡 벌렸다.
“목소리가 커!”
“뭐야, 저 여자들?”
아니나 다를까,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딱 들려왔다. 혹시 아는 사람이 이 꼴을 보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지나가 우예린의 손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이지나와 우예린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도로는 잠시간 조용해졌다.
“자기야, 저기 이상한 곳이야?”
두 사람을 보며 수군거렸던 여자가 애인을 향해 물었다. 남자는 번쩍거리는 화려한 건물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내가 알기로 건전한 가게인데.”
“확실해?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여자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묻자 남자가 억울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직원들이 잘생겨서 여자들이 많이 찾기는 하는데 완전 건전해.”
“근데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데?”
“마사지가 뭔지 모르나 보지.”
“에이, 청학동 동자도 아니고.”
키득거리는 커플에게 청학동 동자보다도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우예린은 남들이 뭐라건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건물 안에서 우예린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들어와 버렸어.’
마굴로 들어온 기분이라고, 온갖 호들갑을 다 떨던 우예린은 번쩍거리는 내부에 넋을 잃었다. 막연한 상상 속에서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꽂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사람 하나 없다.
건물 안은 밖과 달리 은은한 황금색이었다. 그 와중에 내부의 벽지가 야시꾸리한 붉은색이 아닌 것에 안도하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졌다. 마사지 샵은 입구에서부터 각종 액자로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우예린은 국가 공인 마사지 자격증, 피부 마사지 자격증, 스포츠 마사지 자격증 등 다양한 마사지 자격증을 진열해 놓은 액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꼼꼼히 훑었다.
‘진짜인가?’
요즘은 돈만 주면 저런 자격증은 얼마든지 만들어준다고, 어딘가의 기사에서 보았던 것 같다.
“어서 오세요, 손님. 안내 데스크는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남성 메이드복을 입은 남자가 우예린을 발견하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우예린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살짝 벌렸다.
‘와, 그 청순파 남배우 닮았잖아.’
미모에 홀딱 반해 드라마 본방 사수를 하게 했던 그 청순한 배우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너무 착하게 생겼다고 그 배우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지나는 직원의 인사에도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다.
‘직원들이 다 저렇게 생긴 건가.’
끈끈이 풀을 바른 듯 바닥에 발을 딱 대고 있던 우예린은 위험한 호기심이 슬금슬금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지나가 우예린의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우예린은 못 이기는 척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겼다.
일탈에 대한 두려움이 기대감으로 살짝 덮였다.
흔한 나이트 한번 가본 적 없었던 우예린은 처음으로 술집을 제외한 업소에 발을 들였다.
일명 <꽃미남 마사지 샵>에.
“너 왜 이렇게 긴장했어? 긴장 풀어. 뭐 죄지었어? 하여간 우예린, 겁은 많아서.”
이지나가 혀를 차며 우예린의 허리를 툭 쳤다. 우예린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헛기침을 했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가 나타났다. 광택이 나는 회색 안내 데스크는 키가 큰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예약하셨나요?”
안내 데스크의 남자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예린은 남색의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는 그를 빠르게 살폈다.
남자의 가슴팍에는 ‘지배인’이라고 적힌 명패가 달려있었다. 그밖에 안내 데스크 위에는 마사지 샵의 명함이 놓여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향수와 비슷한 황금색 디퓨저가 자리했다.
우예린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킁킁댔다. 어디선가 향긋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디퓨저의 향인 듯했다. 의심과 불안을 안고 안을 탐색하는 우예린과 달리 웃음을 머금은 이지나가 우예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박. 카운터 보는 남자조차 얼굴 이거, 이거…….”
그러면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한 마디로 왕 대박 잘생겼다는 거다.
“네, 예약했어요.”
이지나가 고개를 도도하게 들었다. 우습게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지나가 부러 짓는 표정이다. 우예린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술집에서만 해도 ‘잘생긴 남자와 즐긴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취기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한 지금, 찝찝한 후회가 솔솔 밀려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가 등을 보이자 이지나가 재빨리 속삭였다.
“야, 아까부터 왜 그래. 이거 범죄 아니라니까?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하여간 고작 야한 만화 하나 보는 것도 손을 벌벌 떨더니. 괜찮아, 문제없어. 정 그러면 너는 다리만 해달라고 하든가. 난 아까워서 추천은 안 해.”
우예린은 망설이다가 지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나야 당연히 할 수 있는 거 다 해달라고 할 거야. 내가 얼마나 벼르고 왔는데.”
말해 뭐 하겠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지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기대로 눈이 아주 반짝반짝해서 차마 마주 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여기 정말 범죄 아니야?”
“응? 당연하지. 마사지 샵이 뭐가 범죄야.”
이지나는 별소리를 다 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진짜 마사지 샵? 이상한, 뭐 그런 게 아니라?”
이지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간의 침묵 후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너 그래서 겁먹은 거였어? 미쳤냐. 진짜 아니야, 그런 거.”
킥킥 웃는 걸 보자 맥이 탁 풀렸다.
“여기입니다.”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사이 어느새 방 앞에 다다랐다. 지배인이 문을 열자 이지나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언뜻 열린 문 사이로 훤칠한 남자가 보였다. 이지나가 휙 고개를 돌려 우예린을 향해 경례 자세를 취하며 눈을 찡긋했다.
“Have a good time!”
퍽이나.
신난 이지나를 뒤로 하고 우예린은 지배인을 따라 몸을 돌렸다가 손목에 걸린 이지나의 손가방을 발견했다.
‘아까 화장실 갈 때 잠깐 들어준다는 걸 아직까지 들고 있었네.’
휙 몸을 돌려 마사지 방의 문을 열었다.
“지나야, 너 가방 여기…….”
잘생기고 훤칠한 마사지사에게 달라붙어 키스를 하고 있던 지나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예린은 당황하며 허둥지둥 문고리를 붙잡았다.
마치 모텔 문을 함부로 연 것처럼 실수한 느낌이라, 가방을 얼른 안으로 던져놓고 문을 닫았다. 뒤늦게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남이 키스하는 것 따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았다.
키스를 그렇게 격렬하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평범한 마사지 샵에서 왜 마사지사와 키스를 하고 있어?
정신이 돌아오자 상황 파악이 됐다. 이거 아무래도 속은 것 같은데.
‘그런 곳 아니라며!’
멀쩡한 마사지 샵이라는 이지나의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서 안내해 준 지배인을 보자, 보지 못한 걸까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는 걸까 알 수 없게 프로페셔널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반대 방향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손님께서는 이쪽으로…… 아, 잠시만요.”
지배인이 돌연 귀에 낀 기계 장치에 손을 올렸다. 직원들끼리 소통하는 장치인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이 곤란해졌다. 뭔가 문제가 생긴 듯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배정된 직원이 손을 다쳤다고 하네요. 새로운 직원을 배정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배정이요?”
“네, 같이 오신 분께서 지정하셨습니다. 꼭 이 친구를 원하는 게 아니시라면 의자에 앉아 잠시만 대기해 주세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이지나가 누굴 골랐는지도 모른다고.’
“정말 죄송합니다.”
딱히 실망할 것도 없어서 사과를 받는 것도 민망했다. 무엇보다도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사과를 하자 한없이 괜찮다고 하고 싶어졌다.
잘됐다. 그냥 간다고 해야지. 지나도 이런 상황은 이해하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그녀의 의도를 어떻게 곡해한 건지 지배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손님.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저기, 그게 아니라…….”
“뭐?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지배인은 심각한 얼굴로 홱 몸을 돌렸다. 우예린은 허탈한 얼굴로 들었던 손을 내렸다.
‘술 다 깼다.’
취객이라면 한두 번 즈음은 하는 생각. 일명 ‘자,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시간. 멍해진 우예린에게 다른 직원이 다가왔다.
“기다리기 지루하시죠?”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지나는 거짓말을 심심찮게 하는 편이었지만 이거 하나는 진실이었다.
여기 있는 모든 남자들이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다는 거.
입구에서 마주쳤던 남자가 청순한 상이었다면 지금 붙임성 있게 말을 거는 남자는 섹시하게 생겼다.
구체적으로는 야한 19금 영화에서 여주인공과 바람피우는 조연으로 나오면 딱 어울릴 얼굴이었다. 청순한 남자보다 섹시한 남자가 더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잘생겼다.
“이거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잘생긴 남자가 주는 걸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우예린은 홀린 듯이 컵을 받아들었다. 잘 우려낸 보리차였다.
따뜻한 음료가 들어가니 속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 같았다. 홀짝홀짝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들이켜던 우예린의 눈이 끔벅끔벅 반쯤 감기기 시작했다. 몸이 따뜻해지자 술기운이 다시 오르는 기분이었다.
“맛있어요?”
섹시한 남자가 눈꼬리를 휘며 물었다.
“되게 맛있게 마시네. 나도 마시고 싶게.”
남자가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우예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빤히 보는 시선을 느끼며 우예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누구 지명했어요?”
“네?”
“예약하고 온 거 아니에요?”
남자가 카운터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상태로 눈을 맞추었다. 우예린은 민망한 듯 어색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할 말도 할 수 없게 되는데요.’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섹시한 남자가 검지로 제 뺨을 톡톡 쳤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친구 따라왔구나.”
“……네.”
“어쩐지 이런 데 안 올 것처럼 생겼다 했어. 여기 자주 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왜요?”
“무서운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라, 아무래도 손님처럼 순진한 사람이 오기에는 좀 그렇죠?”
“무서운 사람이요?”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말고도 이 건물, 층마다 놀거리가 다양하거든요.”
‘무슨 뜻이지?’
우예린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하에는 업소가 있고 3층엔 도우미 노래방. 4층엔 분위기 좋은 바가 있어요.”
우예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지하게 설명하던 남자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우예린이 멍한 얼굴로 푸하하, 웃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짓말이죠?”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남자는 빙글거리며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밖에서 봤을 때는 마사지 샵 위부터는 아무 가게도 없었다. 온통 새카맣기만 했다. 긴가민가하는 우예린을 흘끗한 남자가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명한 놈이 누구길래 이렇게 안 와요?”
“사정이 생기신 것 같았어요. 안 오실 것 같던데요.”
컵에 앞니를 걸듯이 물고 차를 홀짝이며 대꾸하자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가 제멋대로 캔슬하고 이럴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손이라도 부러지지 않는 이상은…….”
“손이…… 뭐라고요?”
‘뭐 그런 데가 다 있어.’
어리숙해 보인다고 놀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우예린은 방글방글 웃는 남자의 매끈한 얼굴을 흘끗하고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렸다.
‘마사지 샵. 여긴 마사지 샵이야. 일단 간판은……. 근데 진짜 마사지 샵인가?’
이지나가 그렇다고는 했지만 마사지사와 키스하던 그녀를 떠올리자 신빙성이 떨어졌다. 우예린은 선반 위에 가득한 오일과 크림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마사지…….’
여태 살아오면서 발 마사지를 받으러 간 적도 없었다. 마사지라곤 어릴 때 키 크라며 부모님이 꾹꾹 눌러주신 경험이 다였다.
우선 겉보기에는 충분히 마사지 샵 같다. 우예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우예린의 눈에는 이곳이 건전한 마사지 샵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마사지사 자격증과 마사지 도구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번 의심이 싹튼 뇌가 무엇을 보든 의심의 구름을 피워내는 탓이다.
‘사실은 이상한 곳이라면?’
생각에 잠겼더니 곧 머릿속에 적나라한 살색 영상들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어찌 된 일인지 배경은 무지개와 안개가 가득한 동화처럼 몽환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무지개 아래에서 이뤄지는 일은 동화라기엔 너무 낯 뜨겁다.
머릿속 상상 속에서 마사지사는 퇴폐적이고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손님? 이리 오세요. 이리 와서 누워보세요.’
‘여기, 내 앞에, 얌전히요.’
우예린은 머릿속 생각을 정지하고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요? 얼굴은 갑자기 빨개져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남자가 물었다. 빙글거리는 웃음에 괜히 시선을 마주하기가 머쓱하여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요. 상대가 없으면 나로 할래요?”
“네? 뭘요?”
“당신 상대로요. 토끼처럼 귀여워서,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눈을 반쯤 접으며 건네는 말에 머릿속이 뒤엉켰다. 아무리 뭘 모르는 우예린이라지만 그의 말이 어딘지 야릇하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뭐, 뭐를 해요?”
입술을 덜덜 떨자 섹시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여기서 할 게 뭐겠어. 마사지지.”
얇은 눈매를 휘며 하는 말에 우예린의 머릿속에 이상한 장면이 떠오르려는 찰나.
“아, 손님!”
때마침 지배인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더니 우예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아하게 물었다.
“얼굴이 빨가신데, 괜찮으세요?”
“예? 네, 네. 당연하죠!”
“신세진, 장난이라도 쳤냐?”
지배인이 남자를 쳐다보며 낮게 내뱉었다. 남자는 손을 들고 억울해했다.
“심심해 보여서 말 상대해 준 것밖에 없다고.”
지배인이 그럼 뭐 때문이냐는 얼굴로 우예린을 돌아보았다. 우예린은 혹여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들킬까 봐 과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좀 더우면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이에요!”
그냥 둘러댄 거였는데 다행히 지배인은 납득하는 듯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 저 그냥 가려고요.”
“예?”
“그, 급한 일이 생겨서요.”
지배인이 우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짓말과는 인연이 없던 우예린은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지배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원래 배정되었던 직원보다 괜찮은 직원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
“원래 이쪽 일은 안 하는 친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하겠다고 하지 뭐예요. 너무 아까워서 그래요. 저 믿고 한번 받아보세요.”
“누군데? 지금 여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
지배인은 신세진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우예린이 불안하게 지배인을 쳐다보자 그는 믿음직스럽게 잘생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절 믿으세요.”
저희 오늘 처음 보는 사이예요.
믿고 말고 할 게 없다, 시니컬하게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방 앞이었다.
‘어라?’
그렇다. 우예린은 미남이 성경을 읊으면 한 문장마다 아멘을 외칠 사람이었다. 참고로 그녀는 타의에 의한 모태 신앙이었다.
“너 그러다 얼굴만 잘생긴 나쁜 놈 만나면 탈탈 털린다? 인생 종 치기 전에 정신 차려야 돼, 우리.”
‘나 진짜 얼굴에 전 재산이라도 팔아먹으면 어떡해?’
이지나가 저를 향해 했던 말을 되뇌며 머리를 뜯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아니에요. 저 갈 거예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지배인은 다리가 길어서 걸음도 빠른지 어느새 저만치로 걸어가고 있었다. 목소리가 작아 듣지 못한 듯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안 되겠다 싶어 우예린이 그를 쫓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끼이이…….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이미 마사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코 남자를 꼼꼼히 살핀 우예린이 이지나의 마사지사보다 몸이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여기서 나가겠다고 생각한 우예린은 문을 닫고 있었다.
방 안으로 몸을 들여놓은 채.
탁.
문이 닫히자 방이 조용해졌다. 우예린의 정신도 돌아왔다.
쿵쾅쿵쾅!
쾅!
‘이게 무슨 소리지.’
우예린은 가쁘게 숨을 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 뛰는 소리였다. 말 그대로 심장이 천둥처럼 뛰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1인용 침대처럼 생긴 마사지대 옆에서 무심하게 손을 문지르고 있는 남자. 언뜻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농구 선수만 한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는 몸이 좋았다.
그러나 우예린은 몸보다는 얼굴에 홀리는 사람으로서, 남자의 특출난 몸매 때문에 넋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아직 술이 덜 깼나? 그런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저 남자가 왜 이런 곳에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손님?”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며 우예린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 * *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절세 미남이었다.
길게 늘여 설명하자면,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콧날과 턱선, 섬세한 이목구비와 190cm는 족히 될 듯한 큰 키. 매일 보지 못해 안달을 냈던 사람.
도준희.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대학교의 같은 과 후배였다. 100m 밖에서 보면 빛이 나는 외모에 놀라고, 1m 앞에서 보면 심장이 너무 뛰어 피 부족으로 기절한다는 전설적 외모의 소유자.
신입생 때부터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그를 둘러싼 소문들은 마치 나무 넝쿨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복잡하고 쓸데없는 소문들.
재벌 집 사생아일 것이다.
연예인 지망생이라더라.
성격이 차갑다던데.
명품만 두르고 다니는 걸 보면 부자인 게 확실하다.
양다리를 넘어 일곱 다리를 걸치고 있다더라.
여자를 먹고 버리는 게 일상인 천박한 놈이라더라…….
이지나는 도준희의 소문에 감탄하며 자신도 그렇게 살아보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아, 이건 사족이고 어쨌든 도준희는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이슈 메이커였다.
말은 많았지만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던 소문들. 우예린은 그런 소문에 관심이 없었다. 헛소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만큼 이성적이어서는 아니었다. 소문으로 도준희를 판단하기에 앞서 이미 홀딱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외모로 생긴 편견이 절대적으로 강력해서 기타 소문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갖고 싶은 남자. 그게 우예린이 가진 도준희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겁 많고 소심한 자신이, 어딜 가든 시선을 끌어모으는 도준희에게 말이라도 걸어볼 수 있을 리가. 더군다나 가진다니.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평생 요원한 일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역시 소문은 사실이 못 되었다.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걸까. 번듯한 기업도 아닌 이런 검증 안 된 곳에서 일한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집안 사정이 어지간히 어렵지 않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거면 휴학한 것도 그 때문일까. 세계 일주를 떠났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니,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솔직해지자.’
우예린은 팔짝팔짝 뛰고 싶어하는 허벅지를 쥐어뜯었다. 따끔하게 아프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안경테가 바뀌었네.’
작은 얼굴에 걸친 까만 안경테를 보자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느 날, 도준희가 은색 안경을 쓰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그 잘생긴 얼굴에 뭘 걸치면 범죄라면서.
우예린은 다른 관점에서 기대를 했다. 안경을 썼으니 미모가 조금 가려지면 말이라도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도준희를 마주치는 순간 단단히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은색의 안경테 따위는 도준희의 미모를 조금도 가리지 못했다. 오히려 지적인 매력까지 덧붙였으니, 그로써 그는 완전히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우예린은 냉가슴 앓듯 상사병을 앓았다. 큰 용기를 내어 눈에 좋은 영양제를 그의 과 방 사물함에 넣은 적도 있었다.
다음날 보니 그의 추종자 중 하나가 그 영양제를 먹고 있었다.
우예린은 그를 향했던 마음을 곱게 접어 가슴 밑바닥에 던져버렸다. 가슴 아픈 첫사랑의 추억이다.
지금도 그렇다. 다른 사람이 썼으면 영락없이 고시생처럼 보였을 검은 뿔테 안경이 그에게 가니 섹시한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첫사랑의 완벽한 외모에 넋을 잃었던 우예린은 허벅지에 마사지대가 닿자 정신을 차렸다.
“손님, 어디 아프십니까?”
우예린은 딱딱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자, 우예린은 어느새 손에 고인 땀을 조심스럽게 치마에 닦으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왜, 왜요?”
“거기서 뭐 하시는지 생각 중입니다.”
우예린은 뒤늦게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가만히 서있었다는 걸 인식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지만, 우예린은 무덤덤한 남자의 말에 묘한 실망감이 들었다.
‘아.’
입맛이 썼다.
‘나를 모르는구나.’
하긴 말 한번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다.
어차피 아는 척을 할 용기도 없었으나 왠지 마음이 아렸다. 당황한 표정을 수습하고 나니 이 상황이 상당히 이상하고 난감하다는 걸 깨달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나에게 뭐라도 물어보는 건데.’
후회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가고 있었다. 도준희의 매끄러운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우예린은 눈을 질끈 감고 블라우스를 한 번에 벗어 던졌다.
툭.
취업 기념으로 큰맘 먹고 장만했던 블라우스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치마까지 벗자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도준희가 눈을 깜박였다. 우예린은 그런 도준희의 눈치를 살폈다.
‘이게 맞는 건가.’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맞게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안심하며 속옷을 붙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속옷을 벗으려는데, 절묘한 타이밍으로 도준희가 입을 열었다.
“속옷은 벗을 필요 없어요.”
‘아, 속옷은 지금 벗는 게 아니구나. 나름 가릴 건 가리네. 아니면 나중에 벗게 되는 건가.’
조금 민망해서 얼른 속옷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도준희가 약간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옷 갈아입는 데는 저깁니다.”
도준희가 가림막이 있는 방구석을 가리켰다.
“네?”
우예린이 어리둥절하게 묻자, 도준희가 고개를 까딱했다.
“마사지복은 안에 있고요.”
그러니까, 옷을 벗은 것은 생쇼였다는 뜻?
가림막을 향해 고개를 돌린 우예린의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 *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도준희가 수건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도준희를 보자 다시금 발이 멈추는 것 같았다. 우예린은 미색의 마사지복을 만지작거리며 쭈뼛쭈뼛 움직였다.
마사지대는 일반적인 침대보다 높고, 시트는 매끄럽다. 그런 것을 제외하면 일반 침대와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상단에는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얼굴을 두는 곳인 것 같았다.
우예린은 아무 말 없는 도준희를 힐끗 보고 침대 위에 올라갔다. 구멍 부분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눕자, 머리 위에서 도준희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특별히 선호하는 게 있습니까.”
고개를 저었다. 마사지는 처음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초보 티를 내는 건 촌스러운 거라고 했지. 이지나가 신신당부했던 것을 떠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안 하면…….”
“…….”
“알 수가 없는데요.”
우예린은 엎드린 채 아래를 곁눈질했다. 그가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등허리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모르겠는데 마치 진열대에 전시된 상품이 된 기분이었다.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으러 온 건 자신인데 어째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내가 마음대로 할까요?”
도준희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혹시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언뜻 평온해 보이는 목소리인데도 우예린의 속은 바싹바싹 탔다.
“전신을…….”
“다리만 해달라고 하든가.”
문제없다는 지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아스라이 스치고 사라졌다. 하지만 아깝잖아. 지나의 말처럼, 도준희를 앞에 두자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어졌다.
“전신?”
도준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보자, 우예린은 너무 부끄러워서 긴장으로 숨이 가빠왔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러니.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한 게 아닌가 싶었다.
“강도는 강하게 할까요.”
도준희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 감겨왔다. 그것만으로도 황홀했다. 딱히 부드러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인데. 우예린은 뒤늦게 말의 내용을 이해하고 불에 덴 듯 푸드덕댔다.
‘강하게?’
강하게는 어느 정도지? 아니, 뭘 강하게?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가.’
심각해진 우예린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너무 세지는 않게요.”
간신히 침착하게 대꾸했다.
“세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재차 물었다.
“어떤 식으로요?”
“…….”
“자세히 말해봐요.”
말문이 턱 막혔다. 서비스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부끄러움은 벌써 최대치로 올라간 것 같았다. 우예린이 감당할 수 있는 부끄러움이 한계에 달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자세히요?”
“네, 자세히.”
“그렇다면…… 멍은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 제가 피부가 좀 약해서요.”
왜 갑자기 이지나의 골반 멍 자국이 생각나는 걸까. 목욕탕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이지나는 말했었다.
“최고의 밤이었어.”
머쓱해하면서도 엄숙했던 이지나의 얼굴이 떠오르자 우예린은 신음을 삼켰다. 남자의 손자국 모양으로 멍이 들었던 날씬한 허리와 엉덩이, 그리고 묘하게 섹시하게 들렸던 쉰 목소리.
“목소리가 쉬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나서야 지금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도준희가 조용해졌다.
“저기요?”
“……예, 최선을 다해보죠.”
‘말 몇 마디 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두운 바닥이 보일 뿐이다.
‘엎드려 있으니까 도준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민망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는데 보이지 않으니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신경 쓰였다. 마치 온 신경이 촉수처럼 돋아나 뒤통수를 향하는 듯했다.
따뜻한 손이 목덜미를 감쌌다.
움찔. 우예린의 어깨가 미모사처럼 움츠러들었다. 긴장을 풀라는 듯 두 손이 어깨를 감쌌다.
커다란 손이구나. 도준희의 손은 이런 느낌이었다. 큼지막하고 따뜻해서 심장이 꽉 조여드는 느낌. 그의 두 손에 양어깨가 모두 덮여버린 것 같았다.
엄지손가락이 목덜미를 느릿하게 훑었다. 손바닥은 어깨를 지긋하게 누르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어깨뼈 근처를 꾹꾹 눌러 자극했다.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시원해.’
야릇한 쪽으로만 신경 써서 그런지, 이곳이 마사지를 하는 곳이라는 걸 깜박했다. 눈을 감고 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저기, 여기 뭐 하는 곳이에요?”
어떻게 물어보면 이상하지 않게 잘 물어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나온 말은 더없이 멍청한 질문이었다.
역시 도준희가 황당했는지 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사지.”
어느새 말이 반 토막이 되었지만 우예린은 다른 곳에 집중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맞는데…… 그게 어떤 마사지인지…….”
“상체, 하체, 발, 전신, 다.”
귀찮은 걸까? 도준희는 귀찮은 듯, 짜증스러운 듯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진짜 마사지요?”
혼란스러워 무심코 확인하듯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귀찮았는지 도준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뭉쳤네요.”
“네?”
“어깨요.”
어깨 쪽이 무거워졌다. 도준희가 힘주어 상체를 누르고 속삭였다.
“구부리고 앉으면 피로가 쌓여요.”
어쩐지 목소리가 한층 가깝게 들리는 것 같아, 우예린은 깃털을 털어내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어깨 근육이 사르르 풀어지는 느낌에 몸이 노곤했다. 눈이 게슴츠레 감겼지만 긴장은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진짜 그냥 마사지인가?’
좋기는 좋은데 느낌이 묘했다. 그렇게 동경하던 도준희가 자신의 어깨를 마사지하고 있다니. 그의 큰 손에 주물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돈을 지불하는 건 자신인데, 자신이 마치 그의 소유가 된 것 같았다.
“상체를 먼저 하고 하체 할게요.”
무덤덤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그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텐데도 괜히 부끄러워졌다.
‘절대 들키면 안 돼.’
도준희의 손이 어깨를 쓸며 등으로 내려왔다. 엄지가 날개 뼈를 꾹 눌렀다.
“악!”
뼈가 아려서 입술을 사리물고 신음을 흘렸다.
“거, 거기도 마사지 부위예요?”
“……맞아요.”
도준희의 대답은 한 템포 늦게 흘러나왔다. 우예린은 어리둥절했다.
‘마사지는 근육에 하는 거 아닌가.’
도준희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엔 날개 뼈 주변의 근육이었는데 뼈를 건드렸을 때 아팠던 것에 비하면 시원했지만 어쩐지 미심쩍어서 찝찝했다.
도준희는 손 아래 닿는 모든 곳을 주무르는 것 같았다. 설렁설렁한 손길도 그런 느낌에 한몫했다.
‘마사지에 크게 소질이 있는 건 아니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봐.’
그래도 손이 커서 그런지 나쁘지는 않았다. 날개 뼈의 통증도 가라앉고 마사지도 시원하여 눈이 슬그머니 감겼다.
큰 손바닥이 등을 스윽 훑자 우예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돌연 그가 마사지복을 들추었다. 손이 옷 아래로 들어가자, 따뜻한 체온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살과 살이 만나는 야릇한 감각에 우예린의 등허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위로 올라간 도준희의 손가락이 속옷 후크에 걸렸다.
“풉니다.”
“아니, 그……!”
깜짝 놀라 손을 쳐들었다. 동시에 달칵, 후크가 풀렸다. 가슴을 압박하는 속옷이 풀어지니 편하기는 했지만 등 근육이 긴장으로 단단히 굳어졌다.
“다시 채워요?”
우예린은 굳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촌스럽게 굴지 말자. 브래지어 정도야 별것도 아닐 거 아냐. 앞을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에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꾸했다. 나름대로 여유로워 보였으려나? 목소리는 잘 나온 것 같다. 만족스러워하는데 후크가 풀린 맨등에 예고 없이 손이 닿았다.
우예린은 시든 야채처럼 숨을 죽였다.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내려와 허리를 감쌌다.
“헉!”
재빨리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멈칫했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이 허리를 꾹꾹 눌렀다. 강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너무 느린 것도 아니고,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주물렀다.
‘마사지일 뿐인데 왜 이렇게 다리 사이가 찌릿찌릿하지?’
다리를 꼬아대자 이상하게 보인 듯했다.
“어디 불편해요?”
“아, 아니요.”
“아프면 얘기하세요. 이제 하체 하겠습니다.”
잘 넘어간 것 같다. 우예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체보다 하체가 나을 것 같다. 다리 정도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러나 도준희의 손끝이 마사지복 아래로 들어가고, 그것도 모자라 팬티 윗부분을 파고들었을 때 우예린은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아까처럼 신음이 나올까 봐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도준희가 힘을 주어 살을 밀었다. 살이 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도준희의 뜨겁고 단단한 손이 미끄러지듯 팬티 안으로 들어와 엉덩이 윗부분을 쓸었다. 통통한 살덩이가 그의 손끝에 눌러졌다.
우예린은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행히 도준희의 손은 거기서만 깔짝거릴 뿐, 더 들어오지는 않았다.
잠시 후, 손이 팬티에서 빠져나갔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도준희가 발바닥을 붙잡았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발가락을 움찔했다. 아까와 달리 손길이 나긋나긋하다. 차라리 힘을 주었더라면 시원해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은데.
손가락이 발가락을 간질이다가 발바닥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발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발목이 잡혔다. 감각이 민감하게 달아올랐다. 딱히 간질이는 게 아닌데도 간질거렸다.
‘나, 발이 약해.’
“저, 그쪽은 됐어요.”
도준희는 별다른 말 없이 손을 위로 옮겼다. 종아리에 손끝이 닿자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내가 이렇게 간지럼을 잘 탔나?’
지금은 어딜 만져도 간지러울 것 같았다. 도준희가 돌연 손에 힘을 주었다. 종아리 알이 눌리자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조, 조금 아파요.”
“여기도 많이 뭉쳤네요.”
신입 사원이라 그렇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 보니 종아리가 절로 튼튼해져 버렸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늘씬한 종아리를 자랑하는 회사 동료들을 생각하자 울적해졌다.
‘도준희는 그런 여자들에게 익숙하겠지.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잠시 생각에 잠긴 우예린은 슬픈 사실을 깨달았다. 도준희는 자신의 몸을 보아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터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대학 시절까지 생각이 나서, 조금 우울해질 뻔했다.
“무슨 일 해요?”
“그냥, 회사원이에요.”
대답하는 순간 그의 손길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언제 거기까지 올라온 건지. 손이 무릎 뒷부분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점점 더 올라와 허벅지를 마사지했다.
꼴깍.
창피하게 침 삼키는 소리가 컸다. 손끝이 팬티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엉덩이 아랫부분에 닿는 손은 윗부분에 닿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느 쪽이 더 야릇하냐면, 지금이다.
네 개의 손가락이 통통한 엉덩이 둔덕을 누르고, 엄지가 은밀한 곳 가까이를 스윽 쓸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음순이 닿을 위치였다. 화악, 얼굴이 붉어졌다. 이번에야말로 다리가 절로 꼬였다.
‘제발.’
도준희의 손가락이 은밀한 곳을 쿡 눌렀다. 주륵. 뭔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우예린은 사색이 되었다.
‘어떡해, 이거? 진짜야? 진짜 흐른 건가?’
갈피를 못 잡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돌아누워요.”
목덜미가 오싹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섹시하게 들렸다. 그보다 돌아누우라니. 지금? 이 상태로?
우예린은 빳빳하게 굳은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툭.
고개를 들자 머리 앞에 떨어진 수건이 보였다.
‘이걸로 가리라는 건가?’
손가락으로 수건을 집었다. 마사지복은 어느새 가슴 윗부분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수건으로 가슴을 가린 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얼른 누웠다.
마사지복을 입고 있음에도 슬쩍슬쩍 드러나는 몸을 보인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눕자 생각보다 훨씬 부끄러웠다. 도준희가 어디선가 커다란 집게를 가져와 위로 말린 옷을 고정했다. 우예린은 수건이 가슴을 잘 가리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에야 시선을 들었다.
은은한 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아래, 도준희가 너무나도 선명히 보여서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슬그머니 도준희를 흘끔거렸다.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머릿속을 훔쳐보고 싶은 표정이다. 무감한 눈빛은 자신의 몸을 보면서도 여전해서 안심이 되었다.
지나라면 아무런 반응 없는 얼굴에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우예린은 그저 그가 자신을 비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힘 풀어요.”
“네?”
“지금 로봇처럼 굴고 있잖아요.”
어, 웃는 건가?
처음으로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았다. 수건이 빠질라 나무토막처럼 팔을 몸통에 붙이고 있었던 우예린은 슬그머니 몸에 힘을 풀었다. 저절로 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준희의 웃는 얼굴을 보니 몸에서 힘이 쭉 빠진 탓이다.
“시작할게요.”
도준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머리맡에서 손을 뻗었다. 흰색 티셔츠 자락이 얼굴에 닿았다. 눈을 감자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향기. 도준희에게 나는 스킨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시원하면서도 가슴을 달구는 냄새였다.
도준희가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손은 점점 내려가 가슴에 가까워졌다. 수건으로 가렸지만 그래도 입이 말랐다. 도준희의 단단한 손가락이 가슴 윗부분을 꾹꾹 눌렀다.
유두는 잘 가려져 있고, 고작 가슴 윗부분을 만지는 것뿐인데 닿지도 않은 유두가 저렸다. 수건이 있어 다행이었다. 얇은 천이었다면 젖꼭지가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네?”
온 신경이 가슴에 닿은 그의 손에 가있다 보니 바로 알아듣지 못한 머리가 뒤늦게 질문을 인식했다.
“아, 그냥, 친구랑 얘기하다가 호기심에…….”
“아, 호기심.”
그냥 넘기기엔 묘한 뉘앙스에 우예린이 멈칫했다.
“왜요?”
“이런 데 안 올 것 같아서.”
“제가 그렇게…… 보여요?”
최대한 세련되게 꾸민다고 꾸몄는데 아직도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가. 대학 때야 수수해서 눈에 차지도 않았겠지만 지금도 그렇게 보인다니.
‘돈은 엄청 썼는데.’
왠지 서글펐다.
“아니, 오기 싫어했잖아요.”
“네?”
“다 들었는데. 여기 방음이 그렇게 잘되는 게 아니라.”
“…….”
“집에 가겠다고 한 거.”
아, 지배인이랑 대화했던 걸 다 들었다는 거구나. 보지 않아도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어떻게 마음을 바꿨어요? 들어오기 싫어했잖아요.”
“여기까지 온 게 아깝기도 했고…….”
“…….”
“몸도 많이 뭉쳐서…….”
“그게 끝인가?”
“네?”
‘자꾸 되묻게 되네.’
우예린은 땀을 뻘뻘 흘렸다. 어느새 도준희는 가슴 아래 튀어나온 갈비뼈 주변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만큼 상체가 숙여져서 옷자락이 우예린의 얼굴을 덮었다.
무심코 앞을 본 우예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헐렁한 흰 티셔츠 안으로 도준희의 탄탄한 가슴이 얼핏 보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섹시한 몸이었다. 다리 사이가 저렸다.
‘나 진짜 왜 이래?’
“욕구 불만…….”
“…….”
무심코 중얼거린 우예린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들었을까?’
“몸이 많이 뭉치긴 뭉쳤네.”
여유로운 목소리에 못 들었나 보다 하고 안도했다.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네?”
‘처음에 물었던 거랑 비슷하잖아. 좋아하는 마사지 없냐고. 그걸 또 물어보네.’
“딱히…….”
어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도준희는 홀쭉한 배를 두 손으로 가볍게 쓸고, 허벅지를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손을 뗐다.
“그럼 끝입니다.”
“네?”
눈을 번쩍 떴다. 도준희는 정말로 손을 떼고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크림을 닦고 있었다. 우예린은 당황해서 “어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끝이라고요?”
“시간도 됐고, 이 정도만 바란 거 아니에요?”
뭐가 문제냐는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수위 조절을 할 수 있다고 했지. 그럼 내 대답은 딱 마사지 정도였던 건가. 다행이기는 한데…….
‘아니, 다행이 아니야!’
상대는 도준희다. 몇 년 동안 가슴앓이만 하며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첫사랑. 얼굴에 쉽게 혹하는 자신이 다른 곳으로 한눈도 팔지 못하게 했던 그 사람, 도준희.
도준희는 할 일을 다 끝냈다는 양 몸을 돌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일어났다.
“가지 마요!”
도준희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창피하단 생각보다도, 그가 가지 않아서 다행이란 안도가 먼저였다. 잠시 후, 눈을 바라보던 도준희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우예린도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수건이 어디 갔지?’
도준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우예린은 양손을 몸 위로 교차시켰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꺄악!”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흘끗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마저 닦고 있었다.
“할 말 있어요?”
아, 그렇지. 그가 가려고 해서, 붙잡으려다가 수건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우예린은 망설였다. 도준희는 그냥 불러봤다고 얘기하면 망설임 없이 가버릴 듯했다. 눈을 꽉 닫고 냅다 질렀다.
“수, 수위 조절 다시 할게요!”
“수위 조절?”
“그냥 마사지 말고 진짜 하는 걸로 해주세요. 여기서 원래 하던 걸로.”
“……여기는 주문제라, 원하는 걸 정확히 말해주셔야 하는데요.”
가게 방침이라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게 싫으면 그만두면 되는데, 문제는 그만두기는 싫다는 거다.
여기서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분명 후회하겠지. 같은 캠퍼스 교정을 거닐면서도 먼 곳에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처럼.
달달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마사지, 제대로 해 줘요. 가슴이랑, 다른 곳, 좀 더 제대로.”
‘여기까지가 한계야. 더는 못 말해!’
“다시 누워요.”
도준희의 말에 안도하고 얼른 누웠다. 용기 내어 말은 했지만 차마 얼굴은 볼 수 없어 눈을 꽉 감았다.
도준희의 향기가 가까워졌다.
‘아, 수건!’
당황하느라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챙기는 걸 깜박했다. 양팔을 교차해서 가슴을 가리는 자세가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수건을 챙겨 주면 좋겠는데.’
도준희는 뭘 하는지 기척이 없었다. 답답해서 한쪽 눈이라도 뜨려는 순간, 로션을 듬뿍 묻힌 손이 쇄골에 닿았다.
쇄골 부근이 문질러지자 다시 긴장이 되었다.
“팔.”
“…….”
“힘 풀어요.”
나직한 소리와 함께 도준희의 손이 우예린의 팔을 잡아 내렸다.
우예린은 눈을 감은 채로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빛 아래 드러나 있을 가슴. 도준희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선만으로도 젖꼭지가 꼿꼿하게 서는 것 같았다.
“긴장돼요?”
“네…….”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왜 웃는 걸까?’
궁금해서 눈을 뜨려는 순간, 도준희가 양손을 가슴에 올렸다. 뜨이려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도준희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다.
굳은살이 박여 보기보다 딱딱한 손이 가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봉긋한 가슴이 손 아래서 이리저리 뭉개졌다. 거친 손가락에 여린 살이 쓸리는 느낌이 퍽 야릇하고 기분이 좋았다.
젖꼭지는 건드리지 않은 채 가슴 둔덕을 꾹꾹 눌렀다. 이상하게도 그 모든 자극이 젖꼭지에도 전해졌다.
다리 사이가 너무나도 간지러웠다. 시원하게 긁어주었으면. 창피하게 애원하게 될까 봐 이를 악물었다.
마사지인지 애무인지 모르겠다. 꾹꾹 가슴을 누르기는 누르는데 몸이 풀리기는커녕 더 굳어지고, 아랫배에 뜨거운 게 고였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도준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올랐다.
실수인지 뭔지, 가슴을 누르던 손가락이 젖꼭지를 살짝 스쳤다. 불에 덴 것처럼 허리가 튕겼다. 손가락이 까딱이며 젖꼭지를 휘저었다.
이건 알겠다. 절대 실수가 아니다.
“아……!”
도준희가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집었다.
찌릿한 감각에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틀림없이 흥분으로 액이 흘렀을 것이다. 다리를 꼭 붙이고 찌릿한 감각을 감내했다.
도준희는 그대로 젖꼭지를 비볐다. 딱히 성의가 느껴지는 손길도 아니었다. 무심하게, 대충 비벼대는데 이상할 만큼 흥분이 되었다.
“아, 아으.”
입술을 아프도록 씹었는데도 신음이 새어 나갔다. 도준희가 다시 손을 쫙 펴고 가슴을 눌렀다. 이번에는 솟아오른 가슴 둔덕과 젖꼭지가 함께였다. 손바닥 가운데가 젖꼭지를 정확히 눌렀다.
그 상태로 가슴을 문지르자 젖꼭지와 둔덕이 함께 흔들렸다. 이상하다. 가슴을 건드렸을 때는 젖꼭지가 찌릿하더니 이렇게 가슴을 무자비하게 주무르자 다리 사이가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다.
“그, 그만, 그만요!”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리 사이에 손이 닿았다.
“다리 힘 풀어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내가 아는데, 어떻게 풀어.’
거의 울먹거리며 고개를 젓자 도준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만할까요.”
‘그건 싫어.’
도대체 자신이 뭘 원하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도준희가 다리 사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손을 떼고 물러나는 것도 싫었다. 도준희가 무릎을 잡았다. 그리고 벌리자, 스륵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도준희가 팬티 위로 다리 사이를 스윽 훔쳤다. 축축한 팬티가 살점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젖었다. 확실히.
‘……미쳤어.’
우예린은 창피해서 신음을 흘렸다. 차라리 어떤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도준희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떻게 해줄까요.”
울컥.
“묻지 말고요.”
“…….”
“묻지 말고 어떻게 좀 해주세요. 나, 나 이런 거 잘 모른단 말이에요.”
있어 보이는 척 같은 건 도저히 못 하겠다. 재주도 없고, 그런 걸 할 정신도 없다, 지금. 촌스럽게 보이는 게 싫다는 마음 같은 것도 돌아볼 새가 없었다.
“그냥 어떻게 좀 해 줘요.”
다리 사이가 너무 저리단 말이야.
“여기 그런 데 아닌데요.”
웃음기 어린 소리에 울컥, 괜한 눈물이 치솟았다. 이제 와서 그걸 누가 믿어.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은 왜 해?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다시 다리를 붙이려는데 도준희가 손으로 무릎을 붙잡아 막았다.
눈을 감은 채 다리가 벌어지니 불안해서 눈꺼풀이 떨려왔다. 도준희의 기다란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을 살짝 눌렀다. 아까 닿았던 곳과 상당히 비슷했다.
구멍과 가까운 은밀한 부위. 그 부분이 짜릿짜릿했다.
“팬티, 얼룩졌는데 벗길까요?”
애액이 부른 부분이 젖어 있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차라리 벗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팬티가 쑥 내려갔다. 갑자기 섣불리 행동한 건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공기 중에 드러난 다리 사이가 시원하면서도 민망했다.
‘아, 나 털 정리는 안 했는데.’
이 상황에서도 그런 게 생각나는 게 우스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도준희가 은밀한 곳과 가장 가까운 허벅지를 잡아 양옆으로 벌렸다.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리고 검지로 팬티의 라인대로 꾹꾹 마사지하듯 눌렀다.
점점 아래로 내려간 손이 대음순 바로 옆 부분을 힘을 주어 눌렀다. 팬티까지 벗었으니 은밀한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을 것이다.
‘잘못 생각했어. 이건 너무…… 야하잖아.’
자신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부분을, 첫사랑인 도준희가 지켜보고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았다.
돌연 따끔한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도준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손가락을 떼자 서너 가닥의 음모가 떨어져 내렸다.
“지, 지금 뭐 한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도준희는 말없이 우예린과 눈을 마주한 채로 엄지를 할짝였다. 우예린은 큰 충격을 받았다.
‘뭐 하는 거지?’
야한 영상은 이지나가 낄낄대며 보여준 것밖에 없던 우예린은 성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래서 도준희의 행동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설마.’
도준희는 침을 묻힌 엄지로 음모 아래 숨겨진 작은 돌기를 툭 건드렸다. 우예린은 움찔 발가락을 폈다.
‘어딜 만지고 있는 거지?’
침 묻힌 손가락으로 거길 만졌다는 것도 이상한데 그게 너무 야하게 보여서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더 감당 못 할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도준희가 살점을 누른 채로 손가락을 진동시켰다. 우예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아! 아아아아앗!”
비명이 길게 빠져나갔다. 도준희가 빠르게 손을 털수록 허리가 높이 뜨이고 신음도 높아졌다. 도준희가 살점을 짓이기듯 누르고 후벼 팠다.
우예린은 아랫배와 성기 사이 애매한 곳에 고인 뜨거운 것을 배출하고 싶었다. 허리가 들리며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아, 안 돼!”
동시에 도준희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강하게 눌렀다. 다른 손가락은 젖꼭지를 꼬집듯 잡아 튕겼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다리가 마구 떨렸다.
왈칵. 구멍에서 애액이 흘렀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애액이 새어 나왔다. 애액이 얼마나 멀리 튀었는지 무릎 근처까지 축축한 게 묻었다.
털썩.
우예린의 팔다리가 마사지대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이거 뭐야?’
지쳐서 기진맥진한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마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거대한 풍랑을 만나 전복된 배처럼, 우예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종아리부터 발까지 달달 경련하고 있었다. 음모는 젖어서 축축했고 엉덩이도 그랬다. 엉덩이 아래가 푹 젖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순간 이지나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 남자가 최고야. 속궁합 잘 맞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알아?”
너무 적나라해서 상스럽게까지 느껴지던 단어. 지금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에 그것보다 적절한 단어는 없을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변함없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었다.
아까와 다른 건 크림이 아니라 애액을 닦고 있다는 거였다.
얼굴이 빨개져서 순간 도준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흠칫,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처음처럼 무표정하고 말끔했다.
“……예?”
“끝났으니 나가볼게요.”
그리고 그대로 나갔다. 정말로. 일말의 미련도 없는 듯.
“……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눈을 끔벅거렸다. 열기가 식은 엉덩이에 닿은 시트가 애처롭게 축축해졌다.
삼십 분 후, 우예린은 비척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옷은 들어오기 전처럼 제대로 갖춰 입었지만 대충 어루만진 머리는 묘하게 허술했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도준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좀 늦게 나왔나?’
이지나는 카운터 맞은편의 좌석에 앉아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뭘 생각하는지 눈을 감은 상태다. 지나의 눈치를 보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업무를 보던 지배인이 우예린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미소가 습관인 것 같았다.
“손님, 서비스는 즐거우셨나요?”
“네, 네. 그게 아니라, 저기…….”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제 방에 들어온 사람…….”
“우음, 예린! 지금 나왔어?”
뒤에서 들려오는 이지나의 목소리에 우예린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손님?”
의아하게 쳐다보는 지배인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닫았다. 이지나와는 대학 동기이기도 하다. 과는 다르지만 도준희는 과를 불문하고 전 학부생에게 베일에 싸인 슈퍼스타와 다름없으니 이지나도 당연히 도준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일한다는 걸 안다면. 우예린의 입술이 더욱 강하게 다물렸다. 도준희에 관해서는 비밀로 하고 싶다.
‘당분간. 당분간만이라도.’
“우예린!”
이지나가 어깨를 쳤다. 꿀꺽 침을 삼켰다. 뒤를 돌아보았다.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을까?
이지나가 나가자며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계산은 아까 했어. 나가자. 얼굴은 왜 그래?”
“어, 얼굴? 얼굴이 왜?”
혹시 뭐라도 티가 났나? 안에서 했던 짓을 들켰을까 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한 손을 뺨에 번갈아 대자 이지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빨개서. 별로 안 좋았어?”
목소리를 낮춘 이지나가 지배인의 눈치를 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나가자.”
우예린도 이견이 없는 제안이었다.
시간이 꽤 흐른 줄 알았는데 고작 한 시간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새벽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쳤다. 열 오른 피부를 식히기에 딱 좋은 바람이었다.
“야아, 우예린. 왜 말이 없어. 별로였냐고. 기술 없이 힘으로만 하는 사람 걸리면 아프기만 하거든.”
우예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아닌데, 아, 지나 너는 어땠어?”
“나는 뭐…….”
말꼬리를 흐리는 이지나를 긴장하며 쳐다보았다. 이지나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엄지를 추켜올렸다.
“봤으면서…….”
눈을 찡긋하는 그녀를 보자 마사지사와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도준희를 보고 충격을 받은 탓에 까먹고 있었다.
“좋았겠네.”
“일단 얼굴이 내 취향. 그렇다고 기술이 좋지 않았냐. 그건 아니지. 난 내가 등이 예민한지 얘 만나면서 알았잖아.”
표정만으로 알겠다. 욕구란 욕구는 모두 풀린 듯 아주 후련한 얼굴이었다.
“너는 괜찮았던 거 맞아?”
우예린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이상하니까 걱정했잖아. 역시 너도 좋았구나. 좋아할 줄 알았어. 너같이 얼굴 밝히는 애가 여길 싫어한다는 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과 똑같단 말이야.”
“하, 하하.”
“근데 내가 예약할 때 일부러 너 취향일 거 같은 사람으로 골랐거든? 무쌍에 눈이 옆으로 길고 잘생긴 사람. 왜, 너 우리 대학 때 도준희 엄청 좋아했잖아. 이상형이 딱 그 사람이었으니까.”
헉. 우예린이 숨을 들이마시자 이지나가 혹부리 영감처럼 눈썹을 꿈틀거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 이름만 들어도 막 가슴이 쿵쾅대?”
“어어…….”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예약했는데 아까 지배인 말 들어보니 사정이 있어서 바뀐 것 같더라. 바뀐 사람도 괜찮았다는 거지? 어떤 사람이었어?”
“어? 왜?”
“왜긴, 얼굴 좀 보려고 그러지.”
우예린은 눈을 굴리다가 때맞춰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지나야.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
“뭐? 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우예린은 못 들은 척 얼른 택시를 출발시켰다. 뒷좌석에 탄 뒤, 휙 뒤를 돌아보자 어깨를 으쓱이는 이지나가 보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미안해, 지나야.”
이지나는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우예린은 한때 도준희를 정말로 좋아했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꼴딱 새우는 날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을 정도로. 당분간은 그를 발견한 이 은밀한 기쁨을 홀로 간직하고 싶었다.
‘거기 가면 다시 볼 수 있는 거겠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던 그를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고 싶었던 회사에 합격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 기뻤다.
* * *
스물세 살의 우예린은 학교에서 선배로 분류되는 축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과 활동을 많이 하는 선배는 아니라서, 후배들은 선배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며 인사를 하고는 했다.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과 행사에 잘 참석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작년 신입생이 들어온 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자들이 공공연하게 욕망을 품는, 일명 '갖고 싶은 남자' 도준희의 등장으로 꾸역꾸역 얼굴을 비추러 나갔다. 그래봤자 고작 인사 한 번 겨우 나누는 정도였지만.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자리에 없거나 조가 다르게 배정이 될 때는 그 인사마저 나누지 못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화석이라는 4학년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나간 엠티에서는 하필 우예린이 가장 무서워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일명 둘이 건너다가 하나 떨어져도 모를 정도로 미친 듯이 움직여 정신을 쏙 빼놓는다는 흔들 다리. 아직도 그게 왜 지역 명물인지 이해 불가였지만, 어쨌든 집행부는 재밌겠다고 낄낄거리며 그 다리를 체험 프로그램으로 넣었다. 우예린에겐 불행하게도.
어린 후배들까지 모두 건넌 뒤에도 우예린은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왜 안 오냐고 소리를 지르는 동기들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은 따로 내려가서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터벅터벅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조금 입맛이 씁쓸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불행한 것은 우예린은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데다가 체력까지 좋지 않다는 거였다. 산을 다 내려가고 약속 장소인 식당에 가자 이미 식당은 학교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음식은 반쯤 비워진 상태였다. 왜 이제 왔냐는 친구들의 타박에 우예린은 힘없이 웃고 친구들이 시켜주는 밥을 먹었다. 산채 나물 비빔밥이었다. 배가 고파서 음식은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니 학생들은 하나둘씩 식당에 비치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나갔다. 느지막이 나간 우예린은 식당 밖 벤치에 앉아있는 도준희를 발견했다.
마침 도준희도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식후땡이라면서 나갔던 남자 동기들처럼 도준희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자 도준희가 슬쩍 담배를 내려다보더니 신발 밑창에 비벼 껐다.
“담배 안 좋아해요?”
“내, 내가 폐가 안 좋아서…….”
기침을 하다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도준희가 손을 흔들어 연기를 흐트러뜨렸다.
“산에서 혼자 내려왔죠?”
“네…….”
“그런 것도 못 건너오고, 겁쟁이네.”
후배의 입장에서 하기엔 부적절한 말이었지만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나이가 자신보다 어렸어도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살짝 웃는 얼굴이 너무 멋있어서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고 도망을 쳤다. 도망을 치다니. 도준희가 무슨 도깨비도 아니고 왜 도망을 친단 말인가.
‘이 바보!’
나중에야 도준희랑 단둘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걸 깨닫고 이마를 쳤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기회였고 도준희는 항상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날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밤, 우예린은 어제와 똑같은 시각에 번쩍거리는 건물 앞에 선 채 고개를 들었다.
<꽃미남 마사지 샵>
민망할 정도로 정직한 간판이다.
‘도준희가 일하는 곳.’
어느 집단에 가도 시선을 끄는 사람이니 이곳에서도 인기가 많을 것이다. 자신 같은 사람도 한둘이 아닐 테고. 우예린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원래는 이렇게 바로 찾아올 생각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리워하던 첫사랑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바로 얼굴을 비치기에는 우예린의 얼굴 가죽이 너무 얇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눈앞에 도준희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져서, 도준희의 얼굴이라도 보고자 이지나가 예약했다던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과연 지나가 감탄했던 대로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잘생긴 사람들의 사진이 주르륵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도준희는 없었다. 그제야 도준희의 사진이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었다면 지나가 모를 리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
‘여기 오면 볼 수 있단 거지.’
우예린은 결심한 눈으로 건물을 직시했다.
또각또각.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신은 뾰족한 구두의 굽이 전투적으로 땅을 밟았다.
그러나 열 걸음도 걷기 전, 휘청한 우예린은 도도한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재빨리 주변 눈치를 살피고, 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번에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아, 손님, 예약하셨나요?”
지배인은 우예린의 얼굴을 기억하는지 친밀하게 응대했다.
“어제 서비스에 만족하셨나 보네요.”
그 질문에 괜히 민망해진 우예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약은……?”
“아, 못 했는데요.”
“그럼 제가 임의로 배정해 드릴까요?”
우예린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게, 저…… 예약을 하려고 했는데 할 수가 없어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리둥절해하는 지배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약하려고 했는데 직원 목록에 없더라고요.”
“그럴 리가요. 아, 새로 들어온 직원이 아직 목록에 올라가지 않기는 했는데.”
중얼거리던 지배인이 혹시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전에 배정됐던 그 친구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 그분.”
우예린은 말을 하면서도 괜히 찔렸다.
한번 겪어보고 홀딱 반해서 또 찾아온 사람처럼 보이겠지? 변태처럼 보이지는 않으려나.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반해서 하루도 못 참고 득달같이 찾아온 거긴 하니까.
‘괜찮아, 어차피 나 같은 손님들 많을 거 아냐.’
억지로 민망함을 밀어내는데 지배인의 곤란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예약이 다 찼나?’
가슴이 철렁했다. 대학에서도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돈을 주고 그를 살 수 있는 여기라면 더하겠지.
‘그럼 지금도 여자와 있단 걸까?’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는 건가?
새하얗게 질린 그녀를 지배인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네. 괜찮아요.”
“어쩌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친구는 예약이 안 되는 친구입니다.”
“네? 왜요?”
“여기 직원으로 소속된 친구가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답니다.”
우예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럼 어제는 어떻게…….”
‘남들이 어떻게 볼까’에 대한 민망함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은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기대했던 만큼 마음을 졸였던 만큼 실망감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맥이 탁 풀려 비틀거리는 우예린을 지배인이 급하게 부축했다.
“원래 그 친구가 그렇게 나서는 애가 아닌데, 이해합니다. 잊지 못할 타입이기는 하죠.”
우예린은 측은한 표정의 지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준희 번호 물어보면 알려줄까?’
실낱같은 희망에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저기…….”
“말씀하세요. 다른 괜찮은 직원을 추천해 드릴까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지배인을 보자 이게 뭔 짓인가 싶어 의욕이 떨어졌다.
“아니, 아니에요. 다음에 올게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몸을 돌렸다. 억지로 힘을 내보려 했지만 어깨에 돌덩이라도 매단 듯 축 처졌다. 도준희가 아니라면 여기 다시 올 이유가 없다.
‘바보. 바보, 우예린.’
주먹으로 머리를 툭 쳤다. 예상 못 한 곳에서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첫사랑을 만났는데 당황하기만 했다. 전화번호를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긴 같이 있는 시간에 말도 제대로 못 건넸는데 과연 시간을 되돌린다고 용기 있게 굴 수 있을까 싶지만.
타고난 대로 살자고, 자신의 소심한 성향이 불만스러웠던 적은 별로 없었지만 유독 아쉽게 느껴질 때는 항상 도준희와 관련된 순간이다.
어쩐지 저번이 그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은은한 황금빛의 건물을 빠져나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군가 건물 벽에 서있었다. 이 시간, 이 거리에 가장 많은 부류가 취객이다. 취객이겠거니,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려던 우예린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우뚝 멈추었다.
‘……어?’
휙 고개를 돌렸다. 너무 간절히 바라서 하느님이 선물이라도 주신 걸까? 벽에 기댄 채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도준희였다. 졸고 있는 건지, 쉬고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혹여 도준희가 사라질까, 우예린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하얗고 긴 담배를 분홍색 입술 사이에 살짝 문 도준희는 대학교 때와 똑같았다.
우예린은 담배 연기를 혐오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물론이고 담배라는 물건 자체도 싫었지만, 도준희의 입술에 걸린 담배는 그토록 싫어하는 담배 같지가 않았다.
대학을 다닐 때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하얀 연기는 폐를 썩게 하는 더러운 연기가 아니라 환상 속의 신비스러운 연기처럼 보였으니 말 다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도준희가 피운 담배를 버리면 그 꽁초조차 주워서 가져가는 여자들도 있었다. 남들은 비웃었지만 우예린은 그걸 우습다고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보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그렇게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도준희를 좋아한다는 것을 들킬까 봐 눈으로만 좇았던 우예린은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보자.’
만인의 아이돌이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다. 지금은 그를 시선으로 탐닉하던 다른 사람들도 없다.
‘이번에는 꼭…… 번호를 물어보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말하지?’
쉬고 있는 도준희를 깨운다는 건 우예린에게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엉거주춤해도 얼굴을 보니 그저 황홀했다. 우예린은 얼마나 오래 서있는지도 잊었다. 도준희가 눈을 뜰 때까지.
입술로 담배를 질겅이며 도준희가 눈을 떴다. 시선이 얽혀들었다.
“…….”
“…….”
착각인지 도준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그의 입술에 걸려있던 담배가 기우뚱하더니 떨어졌다.
“어, 담배!”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도준희는 우예린이 놀란 게 무색하게 한 손으로 떨어지는 담배를 가볍게 잡았다.
우예린은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도준희는 담배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매력적으로 뻗은 입술이 달싹였다. 우예린은 홀린 것처럼 그 입술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했다.
“담배, 피우는 거 아니에요.”
“아는데…….”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합, 입을 다물었다. 눈치를 보자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알아요?”
“연기가 안 나잖아요.”
도준희가 침묵했다.
“그게 아니라…….”
“그러면?”
“……됐어요. 여긴 왜 왔어요?”
그렇게 직구로 물어보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예린이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렸다. 왜 왔냐니, 이유는 뻔하다. 도준희가 자꾸 생각이 나서.
자꾸 생각이 나는 이유는? 그를 사랑했던 그때의 마음이 갑자기 다시 불타오르는 것 같아서. 이미 끝난 인연이라 생각하며 접었는데 언제 접었느냐는 양 살아나 버려서.
그러나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우예린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망설이자 도준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하루 만에?”
감을 잡았다는 듯 뉘앙스가 야릇한 말에 우예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표정은 어떻게 여차여차 관리를 한다고 해도 얼굴색이 멋대로 변하는 건 조절할 수가 없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빨간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욕구 불만이네.”
피식, 웃는 소리가 수치심을 부추겼다.
“그, 그게 아니라…… 그냥 계속 생각이 나서요. 도……, 그쪽이…….”
말하고 나니 이상하다.
‘뭐가 계속 생각이 나? 마사지가? 아니면 도준희 네가 계속 생각이 난다고 말하려는 거야? 그건 그거대로 이상하잖아. 간접 고백도 아니고!’
우예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지고 있을 때 도준희가 우예린이 걸어 나온 문을 힐끗했다.
“근데 왜 도로 나와요?”
“지배인한테 물어보니 그쪽은 여기서 일 안 한다고 해서요.”
“아.”
도준희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벽에서 등을 뗐다.
“알바처럼 일해서 그런 말을 했나.”
중얼거리더니 몸을 돌렸다.
“어?”
이대로 그냥 간다고? 저번처럼 그렇게? 번호도 못 물어봤는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도준희의 뒤를 쫓아갔다. 도준희는 다리도 길쭉해서 한 번 내디디면 쑥쑥 앞으로 나갔다. 우예린은 건물 안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도준희를 따라잡았다.
“아, 맞다. 근데…….”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리는 그의 가슴팍을 들이받기 전 간신히 걸음을 멈추었다. 코가 그의 티셔츠에 닿을락 말락 했다. 놀란 우예린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도준희 특유의 서늘한 향이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뭐 해요?”
우예린이 불에 덴 듯 뒷걸음질을 쳤다. 의아한 얼굴의 도준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내밀었다.
‘혹시 괜찮으면 번호 주실래요?’
“호옥시 괘아느면 주세요, 번호 폰.”
입 밖으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
우예린은 핸드폰을 내민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원래도 긴장하면 혀가 꼬이는 편이었지만 당당해도 모자랄 판에 엉망진창이다. 이번에도 망했다.
울상이 된 우예린의 귀로 희소식이 들려왔다.
“아, 번호 달라고?”
‘어떻게 용케 알아들었구나.’
우예린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도준희가 우예린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내어 뒷주머니에 넣고,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어?”
손목이 잡힌 우예린은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고 손목과 도준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준희가 가볍게 웃었다.
“이리 와요.”
“버, 번호…….”
“번호만 갖고 갈 생각이었어요? 번호 먹튀?”
“머, 먹튀가 아니라.”
“왜 이러고 있지, 그럼. 욕구 불만으로 온 거 아닌가?”
도준희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미소를 짓자 한쪽 뺨이 쏙 들어갔다. 예전부터 묘하게 잘 어울린다 생각했던 그 보조개다. 몽롱해진 우예린은 도준희의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도준희가 또 한 번 끌자 우예린은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준희는 성큼성큼 걸어가 맨 끝 방을 열어젖혔다. 마사지 도구를 채워놓던 지배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준희야? 무슨 일이야?”
“여기 빈방이지? 내가 쓸게.”
“아니, 잠깐만……!”
도준희는 설렁설렁한 태도로 지배인을 문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탁 닫았다. 우예린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더 말하려는 게 있는 것 같았는데.”
“별로 중요한 얘기 아니에요.”
도준희는 자유롭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 선반에서 로션 통과 오일 통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우예린은 멍하니 서서 도준희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진행이 착착 되는 느낌인데.’
도준희와 관련된 일은 하나도 자신의 맘대로 된 적이 없어서,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마사지대에 걸터앉은 도준희가 우예린에게 손짓했다. 우예린은 저를 부르는 도준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뭔지 모르겠고 얼떨떨하기는 하지만…….’
가슴이 떨렸다. 도준희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그가 자신을 모르고, 돈으로 그의 시간을 산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상하게 마음이 떨렸다.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도준희는 어제 만났을 때와 달리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손을 씻고 핸드크림을 발랐다.
우예린은 마사지대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제와 비슷하게 헐렁한 흰 티셔츠를 입은 어깨는 태평양 같아서, 양팔을 최대한 벌려서 끌어안아도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도준희가 그녀를 힐끗했다. 화들짝 놀란 우예린은 홱 고개를 돌리고 옷을 어루만지는 척을 했다.
혹시 몰라서 제일 비싸고 좋은 속옷을 입고 왔다.
‘다행이야.’
떨리는 숨을 내쉬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열었다. 긴장한 손은 덜덜 떨리는데 오늘따라 단추가 쉽게 열려서 금세 옷을 벗어서 내려놓았다.
평소에는 주름 하나 가지 않게 잘 접어놓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접을 정신이 없었다. 휘리릭, 옷을 벗어 바구니에 넣어두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쪽에 곱게 개어져 있는 미색 마사지복을 입었다.
준비를 끝냈는지 뒤를 돈 도준희가 우예린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착하네요.”
‘뭐가 착하다는 거지? 이렇게 미리 옷을 갈아입는 건 이상한 건가?’
어제처럼 실수할까 봐 긴장해서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가까이 다가온 도준희가 우예린의 어깨를 뒤로 슬쩍 밀었다. 그 손길에 쉽게 밀린 상태로 마사지대에 단정히 누웠다.
“오늘은 어떻게 해볼까요?”
우예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이런 곳에 왔다는 걸 부모님이 안다면 당장 몸이 꽁꽁 붙들려 택배물처럼 집으로 배송될 터였다.
이곳에서 도준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우예린의 생각 역시 부모님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도준희였다. 도준희. 이 순간만큼은 몸을 사리고 싶지 않다.
“가, 강하게요.”
“아, 강하게.”
도준희가 한 템포 늦게 대꾸했다.
“진짜 욕구 불만인가 보네.”
낮은 웃음소리에 몸에 있는 모든 털이 곤두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준희가 마사지복을 위로 걷어 큰 집게로 고정하는 동안, 우예린은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눈을 굴렸다.
누운 채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게 낯 뜨겁기 짝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부끄러움이 끓어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심코 도준희를 보았다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우예린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옷은 왜…….”
“크림이 묻을까 봐요.”
‘그렇구나.’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상체를 들썩였다.
“저, 뒤로 누울게요.”
서둘러 몸을 뒤집으려는 순간 도준희가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네?”
“강하게 해달라면서요.”
‘할 말이 없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긴장으로 떨려왔다. 도준희가 눈을 아래로 내리고는 손가락으로 브래지어의 끈을 탁, 튕겼다.
“야한 속옷 입고 왔네요.”
별다른 의도 없이 사실만 말하는 것 같은데 왠지 의도를 들킨 기분이었다.
“이상한가요?”
“……이런 걸 입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네?”
“아니, 잘 어울린다고.”
낮은 목소리에 조금 안도했다.
“눈 가릴게요.”
도준희가 따뜻한 수건을 얼굴 위에 올려두었다. 하루 종일 이 순간만 생각하느라 피곤했던 눈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반면 시야가 차단되니 다른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도준희가 손끝으로 브래지어 끈 주변의 어깨를 둥글게 쓸었다.
“뭐가 계속 생각이 났어요?”
도준희의 목소리가 개미처럼 귓가를 기어 다녔다. 어깨를 떤 우예린이 한발 늦게 대꾸했다.
“네?”
“계속 생각이 났다며.”
“…….”
“뭐가 그렇게 생각이 났는지 궁금한데.”
허스키한 목소리에 우예린의 입술이 절로 열렸다.
‘도준희, 당신.’
솔직하게 나오려는 말에 간신히 제동을 걸었다.
“마사지.”
“…….”
“마사지요. 마사지가 생각났어요.”
“아하, 그러고 보니 좋아했었죠.”
“…….”
“마사지.”
야릇한 목소리에 부끄러워진 우예린은 고개만 미약하게 끄덕였다.
“어디가 가장 좋았어요?”
“…….”
“응? 마사지 말이에요.”
우예린은 무난하게 답을 골랐다.
“다리요.”
“다리?”
‘고작 그것뿐’이냐는 투에 우예린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배를 만졌을 때도 뭔가 야릇했는데.
“배도 그렇고…….”
“…….”
“엉덩이도 계속 생각이 나던데.”
무심코 줄줄 읊어대다 흠칫했다. 주변이 조용하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수건을 내려 도준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냈다.
잠시 후, 도준희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전부 다 생각났다는 건데.”
“그렇게 되나요?”
“실망시키면 안 될 텐데. 어제 내가 어떻게 했더라…….”
두 손이 부드럽게 어깨를 어루만졌다. 손끝이 근육 주변을 꾹꾹 눌러가며 움직였다. 도준희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야릇하면서도 시원한 감각에 발가락이 찌릿찌릿했다.
‘이상하네. 손가락이 찌릿하면 모를까 왜 발가락이 저리는 거야?’
그런 이상한 궁금증에 시달릴 때 큼지막한 손바닥이 브래지어를 밀어내고 봉긋한 둔덕을 반죽하듯 주물렀다.
긴장하고 있던 우예린이 눈을 번쩍 떴다.
“흐, 으으!”
‘어제처럼 등부터 하는 거 아니었나? 이렇게 갑자기?’
마치 ABCDE……Z가 순서를 무시하고 D부터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어제는 Z까지 가지 않기는 했지만, 어쨌든 분명한 건 이 상황이 예상 못 했던 상황이라는 거다.
“자, 잠깐만요.”
“아파요?”
“아니, 아픈 건 아닌데…….”
“아프면 말해요.”
도준희의 목소리는 우예린의 고민일랑 전혀 모르는 것처럼 잔잔했다. 미치겠는 건 그 잔잔함마저도 색스럽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우예린은 눈을 꽉 감고 다리를 딱 붙였다.
도준희는 머리맡에 위치한 채 손으로 가슴을 주물렀다. 손끝이 가슴살을 리드미컬하게 문지르며 지나갔다.
“어제도 생각한 건데, 가슴이 참 크네요.”
“그, 그런 말은 흣, 들어본 적 없는데.”
몸매가 좋다느니 얼굴이 예쁘다느니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머리가 좋다, 성실하다, 똑똑하다. 이런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래요? 아, 속옷을 너무 작은 걸 입어서 그런 거 같은데.”
도준희가 속옷의 컵을 확인하는 듯 브래지어를 들었다. 가슴이 확 조여서 신음을 흘렸다.
“후크 풀게요.”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살짝 들자마자 도준희가 한 손으로 능숙하게 후크를 풀었다. 조금 편해져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아, 으.”
도준희가 속옷을 옆으로 치우고 다시 가슴살을 손으로 받쳐 크기를 가늠했다.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의 무게를 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크네.”
“아, 읏…….”
그가 가슴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우예린은 젖꼭지를 슬쩍 스치는 도준희의 손길에만 온 신경이 쏠렸다.
“어디 아파요?”
도준희가 의아하게 물었다. 우예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퇴폐업소긴 하지만 어쨌든 ‘마사지’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이다. 고작 가슴 마사지를 당한 걸로 흥분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열면 자꾸 신음이 튀어나와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
“아?”
도준희가 손가락으로 딱딱하게 선 유두를 꼬집었다.
“젖꼭지가 이렇게 바짝 섰는데.”
“흐읏!”
‘그럼 아프냐고는 왜 물어본 거야!’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걸까. 대학생 때 봐왔던 도준희는 고독한 게 이상하게 어울리는, 자유롭고도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농담인지 헷갈렸다.
“엉덩이 들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엉덩이를 들었다.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을 때와 달리 도준희가 잠잠했다. 우예린은 엉덩이를 든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팬티가 벗겨졌다.
작은 팬티가 바구니에 살포시 떨어지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이런 곳, 자주 와요?”
“자주는 아니고…….”
“종종은 온다?”
왠지 집요한 느낌이 드는데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촌스럽게 느껴질까 봐 ‘척’을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준희 앞에서는 거짓말을 해도 다 들통이 나는 것 같았다.
이미 자신의 본질마저도 다 꿰뚫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짓말해서 우스워지는 것보다는 민망해도 솔직한 게 나을 터였다.
“여기가 처음이에요.”
“여긴 왜 왔는데요?”
“그냥, 제가 최근에 취업을 했는데 친구랑 그 기념으로…….”
“아하, 그래서 이런 곳에 왔구나. 떨리진 않았어요?”
문득 도준희와 이런 대화를 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비스업 직종들은 스몰 토크가 필수라고 했던가. 직원이 손님에게 건네는 스몰 토크라 생각하자 곧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엔 되게 이상하고 야한 곳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 좋은 것 같아요.”
도준희가 재밌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야할 것 같았는데요?”
“말만 마사지지 이상한…….”
이거까지 말하는 건 이상한 것 같아 뒤늦게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얏!”
돌연 도준희가 젖꼭지를 꼬집었다. 생각보다 아파서 허리가 튀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 수건에 시야가 가려져 깜깜했다.
“아아, 그런 곳인 줄 알았었구나.”
“네?”
“난 또, 혹시 잘못 들어온 줄 알았지.”
“…….”
“별 뜻 아니에요. 민망해하는 것 같아서.”
“그, 그게 나가려고 했어요. 무섭고 겁이 나서.”
변명을 하려다 아무리 해도 궁색한 것 같아 울상을 지었다.
“떨 필요 없어요.”
“…….”
“그냥 괜히, 질투가 나네.”
우예린은 정신이 없었다. 말소리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가슴을 이리저리 반죽을 치대듯 만져대는 도준희의 손 때문에 머리카락까지 곤두설 지경이었다.
“내가 여기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고.”
교묘하게 중심을 피해 주변부만 문지르다가 갑자기 젖꼭지를 꽉 잡은 손가락 탓에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예민해진 살점을 꼬집고는 위로하듯 살살 어루만졌다. 마사지를 하는 건지 살을 꼬집는 건지 헷갈렸다.
“흣,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려 되묻자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답변했다.
“다행이라는 뜻이에요.”
부드러운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심술궂게 들리는 건지. 목소리와 달리 무자비하게 젖꼭지를 튕기는 손가락 때문일지도 몰랐다. 도준희가 자리를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그의 티셔츠에 밴 향이 멀어져 갔다.
“그럼 어제 아쉬웠겠네.”
도준희가 살짝 볼록한 배를 쓰다듬었다. 우예린은 뱃살이 잡히는 게 신경 쓰여 허리를 뒤틀었다가, 도준희가 뱃살을 살짝 내리치자 깜짝 놀라 몸을 바로 했다. 그 바람에 얼굴에 올려두었던 수건 한쪽이 흘러내렸다.
“기대했을 텐데 어제 그렇게밖에 안 해줘서.”
“그게 아니라니까요. 기대한 적 없어요.”
“흐응.”
변명은 여전히 궁색해 보일 따름이었다.
‘왜 무슨 말을 해도 없어 보이는 거야.’
억울하기까지 했다.
우예린의 말은 믿지 않는 듯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도준희가 한 손을 배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대로 원을 그리듯 문질렀다.
대놓고 가슴을 마사지했을 때보다는 자극이 덜했지만 긴장은 여전했다. 도준희가 뭘 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탓이었다. 우예린은 눈을 꼭 감아버렸다.
배를 타고 넘어간 손이 우예린의 성기를 덮었다. 그의 손바닥에 음모가 눌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흡.”
숨을 들이켰다. 성기를 덮은 채로 도준희가 검지를 까딱여 음모 너머의 민감한 살점을 툭 쳤다.
“기대를 안 했다는 거, 못 믿겠는데.”
그가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들은 게 수치스러웠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손가락에 질척한 애액이 묻어나와 있을 게 분명했다. 다리를 꽉 붙였다. 도준희가 무신경하게 중얼거렸다.
“소용없어요.”
뭐가 소용이 없다는 건지도 명확해졌다. 우예린이 다리를 붙이든 말든 애초에 도준희의 공략 대상은 꽉 다물려 숨겨진 구멍이 아니었다. 다리를 붙여도 훤히 드러난 살점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여자들도 흥분하면 여기가 커지는구나. 귀엽네.”
“아, 제발…….”
“손가락으로도 잡혀.”
그가 손가락으로 자극을 받아 발딱 선 클리토리스를 집었다. 젖꼭지를 집었을 때보다도 더 적나라한 자극에 허리가 절로 튀어 올랐다. 도준희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잡아 눌렀다.
손으로 음모를 덮은 채로 빠르게 문질렀다. 손바닥에 음모와 클리토리스가 동시에 거칠게 주물러졌다.
“아, 흐, 흐으!”
야릇한 자극이 끊임없이 주어지자 머릿속이 점차로 텅 비어갔다. 손을 멈춘 도준희가 여유롭게 우예린의 다리를 벌렸다. 처음엔 틈 없이 다물렸던 다리가 스륵 열렸다.
“구멍에 손 넣어 봐도 돼요?”
‘뭔 구멍?’
우예린은 단번에 눈을 떴다.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발끝까지 힘이 빡 들어가게 민망한 마법의 단어였다. 손을 넣을 만한 구멍이라면 한 군데지.
‘거기까지는 아니야.’
우예린은 빨간 얼굴로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기요!”
손바닥으로 불룩 튀어나온 살점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도준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이름, 몰라요?”
“네?”
“그렇게 부르니까 거리감 느껴지네.”
혹시 내가 누군지 알아챘나? 우예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가 그쪽 이름을 어, 어떻게 알아요.”
도준희가 빤히 쳐다보았다. 우예린은 뭔가를 숨기는 데 재능이 없었다. 눈을 피하자 그녀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도준희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몰라요?”
“…….”
“정말?”
우예린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최악이다.’
자신이 같은 대학 학생이라는 것을 들키는 것만큼 최악인 것도 없을 것이다. 도준희는 자신을 충분히 모를 수 있지만 도준희를 모르는 같은 학교 학생은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를 못 알아봤다고 하는 건 누구도 믿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를 모른 척 이런 마사지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비열해.’
제정신이라면 학교 사람인 걸 알자마자 자리를 피했겠지. 자신은 오히려 기회라며 ‘옳다구나’ 했으니 도준희가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게 될 것인가.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상상만 해도 숨이 가빠왔다.
“여기 있잖아요.”
도준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잔뜩 긴장하던 우예린은 떨리는 눈을 깜박였다.
“……?”
“내 이름.”
도준희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직원들이 다는 작은 명찰에는 도준희 이름 석 자가 박혀있었다.
내가 어제 저걸 왜 못 봤지? 아니, 잠깐만,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도준희…….”
멍하게 중얼거리자 도준희가 잘했다는 듯 매력적으로 웃었다.
“내가 기계도 아니고, 이름 불러요. 사람이라면 이름을 불러야지. 그렇죠?”
조곤조곤 하는 말에 어쩐지 뭘 많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라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희가 세 번째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듯 긁어냈다.
“하악!”
“힘 풀어요. 물이 많이 나와서 괜찮겠는데, 그래도 뻑뻑할 테니까.”
‘뭐가?’
의문은 금방 풀렸다.
도준희가 클리토리스를 긁어낸 손으로 구멍을 침입했다. 빠듯한 감각에 우예린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 잠깐만요!”
“왜요?”
도준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구멍을 쑤시는 손은 멈추지 않고서.
“손 좀 멈춰주세요.”
우예린은 도준희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도준희가 손가락으로 살점을 쓸자, 절로 울먹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단하고 억센 손목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거기는 됐어요.”
“……됐다고?”
도준희가 안에서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휘었다. 우예린의 숨이 날카로워졌다.
“강하게 해달라면서요?”
“네.”
“그러니까…….”
휜 손가락이 내벽을 긁자 우예린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마사지를요!”
“…….”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니에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에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자고 싶진 않다고요.”
이런 말을 입에 담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도준희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자고 싶은 건 아니다…….”
“…….”
“무성애자예요? 아니지.”
도준희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퍽퍽 쳐 댔다. 찰박거리며 물이 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도준희는 민망해하는 우예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도준희가 떨리는 우예린의 속눈썹을 시선으로 쓸었다. 그 아래 눈가는 흥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느른하게 우예린의 붉은 얼굴을 훑어본 도준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렇게 물을 흘리는 걸 보면 그건 아니겠고.”
도준희의 웃는 얼굴을 보자 우예린의 얼굴이 한층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게 아니라 그…… 잠자리를 막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우예린의 정처 없는 변명에 도준희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해졌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하면서도 도준희의 눈치를 보며 땀을 뻘뻘 흘렸다. 첫사랑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잠자리 얘기를 하는 이 순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민망해서 다리가 배배 꼬였다.
“위생 문제도 있고, 잠자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나 해야죠.”
즐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즐기자는 주의인 이지나에게서 고리타분하다 한 소리 들었던 생각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자신이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무하고나 자고 싶지는 않았다.
“난 섹스하자는 건 아니었는데.”
도준희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민망해진 우예린이 시선을 피하려 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흥미롭네요.”
‘흥미로워?’
도준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혹시 그건가?”
“…….”
“혼전 순결 주의자? 이렇게 느끼는 걸 보면 처음은 또 아닌 것 같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 한다고.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랑 질펀하게 뒹군 적이 많았겠군요.”
도준희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우예린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잔뜩 띄워놓고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멈췄던 손이 움직였다. 그것도 격하게. 엄지가 클리토리스를 강하게 뭉갰다.
“악! 자, 잠깐만요!”
‘도준희가 이렇게 심술궂은 사람이었나?’
나머지 손가락은 구멍을 쑤셨다. 우예린이 경험이 없어도 얇은 손가락 하나 정도는 수월하게 들락날락했다.
나머지 손가락은 주변을 가볍게 자극하는데, 그 자극의 강도가 우예린에게는 전혀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목을 뒤로 젖히고 입을 벌렸다.
“으앙, 아앗, 앗, 으앗!”
뭐야. 이거, 클리토리스를 만지는 것과는 전혀 달라.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만 해도 그저 빠듯하단 느낌뿐이었는데 삽입하는 것처럼 안쪽을 쿵쿵 찧어대자 아랫배와 음부 사이의 어느 부위가 미치도록 간지러웠다. 벅벅 긁고 싶었다.
그것만도 이상한데 클리토리스를 동시에 자극하니 이상야릇한 감각이 몰려왔다. 지금 당장 멈춰줬으면 하는 마음 반, 어떻게든 이 이상야릇한 감각을 폭발시켰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으앙, 앙, 읏, 이, 이상해. 이상해애! 앗, 아아앗.”
쉴 새 없이 비명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얼굴 반반한 거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럼 전 애인 놈도 얼굴이 반반했겠어요? 무서워하면서 도망가더니 남자 친구는 잘도 만들었나 보네.”
도준희가 속닥거렸다. 우예린은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듣고자 했지만 말은 한쪽 귀를 통과하지도 못했다. 반반한, 전 애인, 남자 친구 같은 단어들이 토막 난 상태로 인식될 뿐이었다.
안 그래도 야릇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는 참이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도준희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꾹 눌렀다.
“그만……! 거긴 안 돼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 몸을 일으키자 도준희와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이 마주치자 입 속에서 맴돌던 비명이 쑥 들어갔다. 어느새 도준희도 손을 멈추고 있었다.
스륵 구멍에서 손이 빠졌다. 끈적한 액체가 늘어지는 것을 보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감당 못 한 쾌감의 여운으로 발가락이 달달 떨렸다. 힘을 줘서 멈춰보려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리에서도 시선을 뗐다. 도준희를 보기도 민망하여 그의 어깨 부근에서 시선이 방황했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까. 남자 친구?”
“아, 남자 친구가 잘생기셨을 것 같다고요.”
‘무슨 소리지?’
맥락이 이해가 안 가 쳐다보자 아까의 무표정한 얼굴이 거짓말인 것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얇은 검은 테 안경이 그를 좀 더 부드럽게 보이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미인 안 좋아하는 사람 없으니까요.”
……아,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우예린은 물끄러미 도준희를 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더 미인이란 것을 알고 있을까?
도준희는 예민해진 살점에서 손을 뗐다.
“갑작스러우셨죠? 손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독단으로 해보았는데, 부담스러워하실 줄은 몰랐네요. 저번에는 좋아했던 것 같아서요.”
도준희가 동면에서 깨어난 흑곰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어제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도 만진 적 없었던 클리토리스를 애무당해 물을 질질 흘렸던 것을 도준희는 빠짐없이 보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좋아했었으니 지금 이러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거기는 여기서 건들고 싶지 않아요.”
“아하. 이런 곳에서는 싫다는 말이군.”
도준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민망함에 휩싸여 이상한 기색까지는 느끼지 못한 우예린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몸이 확 눕혀졌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준희가 가면처럼 딱딱한 미소를 띤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마사지를 계속하겠습니다. 아까 보니 이쪽에 피로가 몰려있던데, 이럴 때는 림프절 마사지가 효과가 있다더군요.”
도준희는 우예린의 팔을 위로 젖히더니 겨드랑이에 덥석 손을 댔다. 우예린은 얼굴을 구기며 신음을 흘렸다.
“너무…… 세게 하시는 거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나 세게 주무르는지 아프기까지 했다.
“조절할게요.”
아까보다는 덜 아프긴 한데 뭔가 어깨를 문지르듯이 주물거리기만 하는 게, 영 미덥지가 않았다.
“마사지사 분들도 자격증이 있다면서요?”
대놓고 마사지 자격증은 있는 거냐고 묻기에는 가슴이 새가슴이다. 돌려 돌려 떠보았다.
“그렇겠죠.”
도준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럴 거라고요……?”
애매한 답변에 우예린의 기분도 애매해졌다. 떨떠름해하는 우예린의 표정을 눈치챈 도준희가 물었다.
“왜요?”
“그, 저기, 혹시 자격증 같은 거 있으신가요?”
“…….”
답이 없었다. 우예린은 금세 질문한 걸 후회했다.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그럼 당연히 기분이 나쁘겠지. 마사지 자격증 따위, 없으면 어때. 뭔가 허술해도 시원하긴 하잖아. 그럼 됐지.
우예린은 식당에 갈 때도 인증 마크를 꼼꼼히 확인하는 사람이었지만 도준희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그녀에겐 도준희의 얼굴이 인증 마크였다.
“의심해서 그런 거는 아니고요. 저는 그냥…….”
“제가 못 미덥군요.”
그렇긴 하지만 사실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그냥 림프절 마사지는 어려운 마사지 같아서요.”
“사실 제 전공은 이쪽보다는 이쪽입니다.”
준희의 손이 겨드랑이에서 올라가 가슴께를 가리켰다. 우예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준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
“겨드랑이에서부터 가슴까지 림프절이 이어져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도준희가 위에서 빨래를 짜듯 가슴을 주물렀다.
“읏…….”
우예린은 입술에 살짝 이를 박았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림프절이 가슴에 연결되어 있는 게 맞기는 한데……. 아무래도 민감한 부위다 보니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이쪽에 신경이 많이 몰려있죠.”
그렇다고는 들었다. 문득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는데 돌연 도준희가 두 손가락으로 유두를 집어 들었다.
“헉!”
도준희가 양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손바닥 아랫면으로 주변의 가슴살을 꾹꾹 눌러댔다.
“어때요. 시원한가요?”
“흐, 흐읏…….”
신음이 새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도준희의 여상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렇게 흥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변태 같아 보일 거야.’
억지로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참는 건 거의 기침을 참는 것과 같은 급의 난이도였다. 흐…… 미처 막지 못한 신음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새어 나갔다.
“거기는…… 조금.”
“너무 약한가요.”
‘아니!’
고민스럽게 중얼거린 도준희가 젖꼭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우예린은 눈을 꽉 감았다. 허리가 자꾸만 튀어 올라갔다. 또다시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져서 다리를 붙였다.
도준희는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젖꼭지와 그 주변을 매만졌다. 유두에 감각이 희미해질 무렵, 돌연 도준희가 젖꼭지에서 손을 뗐다.
“더워요?”
“……네?”
“땀이 나서.”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 열이 올라서 그런지 덥게 느껴졌다.
“그럼 빨아줄까요.”
“뭐를…….”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도준희가 고개를 숙여 가슴을 입에 넣어버린 것이다. 마찰로 인해 뜨거워진 유두가 순간 시원하게 느껴졌다. 눈을 번쩍 뜬 우예린은 이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앗! 앙! 그, 그만. 아앙!”
혀로 달아오른 젖꼭지를 휘감던 도준희가 퉤, 물고 있던 것을 토해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션 맛이 역하네요.”
도준희는 고민하는 얼굴로 침에 젖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을 빨렸다는 충격에 헐떡이는 우예린과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좀 닦고 할까요?”
이제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움직인다. 물수건으로 가슴의 로션을 닦아내고는 확인차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할짝였다.
“이제 먹을 만하네.”
도준희가 그대로 다시 가슴을 물려는 참이었다.
벌컥.
“괜찮아. 오늘 흥준이 안 나와서 빈다니까. 여기서 좀만 노가리 까고…….”
세 명의 남자들이 빛과 함께 쏟아져 들어왔다. 시시덕거리던 남자들이 도준희와 우예린을 보고 굳어졌다.
“어?”
제일 뒤에 있던 남자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가 우예린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우예린은 그 반응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깨어났다.
나 지금 옷 다 벗고 있구나.
뒤늦게 제 상태를 깨달은 우예린은 목 안에서 비명을 울리며 팔로 가슴을 막았다.
“씨발.”
살벌하게 울리는 욕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머릿속이 공황이었다. 얼굴이 대형 수건으로 덮였다. 우예린은 허겁지겁 수건으로 몸을 감쌌다.
“미, 미안. 우리는 여기 빈 줄 알고…….”
제일 먼저 들어왔던 남자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준희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소곤거려서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가 않았다. 곧 문이 세게 닫히고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우예린은 눈을 꽉 감았다. 머리만 숨기면 제 몸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타조처럼, 외부와 자신을 차단했다. 외간 남자들한테 몸을 보였다는 충격에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잠시 후, 몸이 꽉 안겼다. 우예린은 눈을 조심스럽게 뜨고 깜박였다. 수건을 사이에 둔 채로 도준희가 우예린을 끌어안았다.
“쉬이, 괜찮아요. 괜찮아, 겁먹지 말아요.”
대범하게 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체격이 큰 도준희가 빈틈없이 끌어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되어 갔다.
우예린의 몸에서 떨림이 잦아들었다. 후우,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순간, 수건이 홱 당겨졌다.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도준희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는 여러모로 불편하군요. 자리를 옮기죠.”
“어디로…….”
“따라오면 알아요.”
도준희가 싱긋 웃었다. 아까 ‘빨아줄까요’ 했던 표정과 달리 점잖은 얼굴이었다. 우예린에겐 이쪽이 더 익숙했다.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는 도준희를 보며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도준희라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 * *
도준희를 따라간 곳은 서울 중심가의 타워 팰리스였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면서 우예린은 투명한 엘리베이터의 밖을 바라보았다.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완전히 개미처럼 작아졌을 때에야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 층에 한 집밖에 없는지 문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면서 따라 들어갔지만 집 내부를 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여기가 마사지 샵이라고요?”
“맞아요.”
도준희의 대답을 듣고서 다시 내부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가 끝인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운동장만 한 내부였다.
“……마사지 샵이라고요?”
우예린은 다시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가정집인데.’
먼저 들어간 도준희가 손을 뻗었다. 우예린이 의아해하며 눈을 끔벅였다.
“네?”
“가방 줘요.”
아, 가방.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에 멘 가방을 그에게 주었다. 도준희가 매처럼 가방을 채갔다. 언뜻 인질을 사로잡듯 빠르게 낚아챘지만 우예린은 그저 ‘매너가 좋구나, 역시.’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집, 아니, 가게가 너무 좋은데요.”
‘여기 아무리 봐도 주거 공간 같아.’
일말의 의심을 풀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도준희가 돌아오며 그녀를 흘끗했다. 가방은 어디다 뒀는지 눈에 보이는 데에는 없었다.
‘나중에 돌려받을 수는 있는 거겠지?’
어느 가게에 가도 해본 적 없는 걱정이 어째서 드는지도 모르고, 우예린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며 가방을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다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요즘은 자택으로 사업자 등록해요. 임대료가 워낙 비싸서.”
“임대료. 임대료.”
우예린은 다시 집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지간한 가게 임대료를 내는 게 여기 월세를 내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없는 일은 아니지.’
요즘 어린이집 같은 걸 봐도 아파트에서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없는 일은 아니야.’
어째서 이런 걸로 합리화하려고 노력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예린은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누울래요?”
도준희가 거실 한편으로 걸어가더니 마사지대를 가리켰다. 우예린은 대리석으로 된 깔끔한 바닥에 양말 때라도 묻을까 봐 조심조심 걸어갔다.
“와아.”
마사지대에 눕기도 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꼭대기 층이라 그런지 내려다보는 야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창에 달라붙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 좋아해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너무 아름다워요.”
“무섭진 않아요?”
“무섭긴 한데…….”
우예린은 무심코 대답하다가 이상하게 찝찝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도준희는 마사지에 쓸 수건을 깔끔히 접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 없는 모습이다.
‘이상하다. 왜 자꾸 떠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반짝거리는 야경에 순간적으로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원래 우예린은 높은 곳을 무서워했다. 대학생 시절, 엠티에 갔었을 때도 남들 다 통과하는 흔들 다리를 통과 못 하고 결국 홀로 산을 내려오지 않았던가.
워낙 높은 흔들 다리였던지라 다른 사람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가장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던 사람은 도준희였다.
우예린은 다리 기둥만 붙잡은 채 멀어지는 도준희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자 아름다운 야경도 빛이 바래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 물러나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무섭네요. 높은 곳은 역시 무서워요.”
울적한 기분에 중얼거렸다. 갑자기 볼이 따뜻해졌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준희가 양손으로 우예린의 뺨을 감싸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섭다면 안 보면 되잖아요.”
“…….”
“무서운 건 보지 말아요. 좋은 것만 봐도 모자란 세상인데.”
심장에 무리가 올 정도로 달콤한 말이었다. 우예린은 여기까지 오면서 불안함에 잊었던 심장 고동이 다시금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헷갈렸었는데 역시 도준희는 점잖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바람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지면서도 봄바람처럼 따스한 사람.
얼굴만 잘생겼다고 몇 년 동안 가슴앓이를 할 리는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도준희를 잊지 못했던 이유를 떠올리자 우예린은 가슴이 찌르르 조여들었다.
“괜찮아요, 이제?”
우예린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희가 손을 뗐다. 우예린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마사지대를 바라보았다.
‘응?’
“편하게 누워있어도 돼요.”
“이거, 새것인 거 같은데요?”
사용 흔적이 없는 매끈하고 깔끔한 마사지대를 보자 어느 순간 사라졌던 정체 모를 찝찝한 의심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전에 건 낡아서 버렸어요.”
도준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 약간 미심쩍기는 했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대충 껴입은 블라우스에 손을 가져가자 그걸 발견한 도준희가 성큼 다가왔다.
“옷은 저한테 줘요.”
벗어서 달라는 건 줄 알았는데 직접 블라우스 단추로 손을 뻗는 도준희를 본 우예린은 당황했다. 도준희가 불쑥 가까워졌다.
털썩, 마사지대에 앉은 우예린의 무릎이 도준희의 허벅지를 살짝살짝 쳐댔다. 그게 신경 쓰여 우예린은 최대한 무릎을 붙이며 도준희를 힐끔거렸다.
도준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단추를 하나 풀어냈다. 단추가 두 개 풀어졌다. 가슴이 조금 드러났다.
“제가 풀까요?”
“불편해요?”
대놓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불편하다고 말하겠는가. 우예린은 동공을 떨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피식, 웃음이 떨어졌다.
“사람, 잘 무서워하는 편이에요?”
“아, 아니요.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은데.”
“……그런가요?”
줏대가 없는 우예린은 도준희의 거듭된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떨결에 되묻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역시 아닌 것 같다.
“긴장은 많이 하는 편인데 사람을 무서워하진 않아요.”
“……그래요?”
“네.”
“……그렇다고요.”
도준희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힐끗 올려다보자 묘한 표정으로 마주 웃어 보인다. 매력적인 웃음에 우예린은 얼굴을 붉히느라 그가 왜 자꾸 저런 걸 물어보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뭘 무서워해요?”
“갑자기 물어보니까 생각이 잘 안 나요.”
“잘 생각해 봐요.”
“음, 아무래도 법적이지 않은 것들은 좀 꺼려 하는 편이에요.”
“아, 불법적인 거. 폭력이나, 조폭, 그런 거 무서워하겠네요.”
“그렇죠, 그건 누구나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도준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우스가 다 벗겨졌다. 그는 치마까지 벗기고 옷가지를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마사지는 로션 대신 오일로 이루어졌다. 오일로 하면 색다른 효과가 있다는 도준희의 말에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문이 남았다. 마사지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성적으로라면, 효과는 매우 컸다. 손길이 좀 더 적나라하고 뜨겁게 느껴졌고 그 탓인지 몸도 쉽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가슴과 성기를 몇 번 애무당한 후 헐떡이는 우예린의 가슴을 빨려던 도준희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러면 또 빨아줄 수가 없네.”
“하아, 하…….”
“씻을래요?”
몸이 뜨거워서 찬물에 식히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도준희가 우예린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욕실로 옮겼다.
우예린은 내내 이곳이 집인지, 가게인지 헷갈렸지만 욕실을 보는 순간 샵이라고 해도 믿겠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주거 공간의 욕실이라기에는 욕실이 너무 크고 화려했다.
‘주거용 욕실이 이렇게 좋을 리가 없어.’
가게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한 표가 기울어졌다. 안아서 옮겨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한데, 내려놓고 갈 줄 알았던 도준희는 가지 않았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바디 워시를 펌핑하기에 설마 싶어 쳐다보자 도준희는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혼자 씻기 힘들잖아요.”
결국 그에게 몸까지 씻겨졌다. 속옷까지 홀딱 벗은 우예린과 달리 도준희는 웃옷 하나 벗지 않은 상태였다. 욕실이 뿌연 김으로 차올랐다. 그의 안경에도 김이 서려서,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앞, 잘 안 보이지 않아요?”
수건으로 몸을 덮은 채로 따뜻한 물에 들어간 우예린은 온기에 노곤해진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열기 탓인지 도준희가 약간 촉촉해진 입술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안경을 벗어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보통 안경을 오래 끼면 콧대에 약간 눌린 자국이 남기 마련인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결점의 피부였다.
우예린은 멍한 얼굴로 도준희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것을 응시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속눈썹을 톡, 쳤다. 손가락에 묻은 물기가 속눈썹에 옮겨 붙었다.
도준희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투명한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눈이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끼지 않은 도준희는 좀 더 선이 선명하고 센 인상이었지만 눈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런 흠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
오래도록 가슴에 품어왔던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울컥한 우예린의 눈이 촉촉해졌다.
“내 얼굴이 좋아요?”
도준희가 조용하게 물어왔다. 조곤조곤한 말투와 달리 손바닥은 물속에서 우예린의 젖꼭지를 은근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우예린은 허리를 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이런 얼굴을 어떻게 무서워해요.”
우예린은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뜨거운 공기 때문일까, 분위기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우예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준희가 고개를 꺾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우예린은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의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도준희의 깨끗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곧 우예린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욕조는 성인 다섯 명이 들어와도 충분한 크기였다. 씻는 도중이라 비누 거품이 섞이긴 했지만 물은 깨끗했다. 그 욕조에 도준희는 옷을 입은 채로 들어왔다.
첨벙첨벙.
물을 헤치는 소리가 거칠게 났다. 도준희의 격한 움직임에 우예린은 욕조 끝까지 물러나 등이 닿았다. 도준희가 끈질기게 따라붙어 우예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코로 열심히 숨을 쉬어봤지만 공기가 부족하여 고개를 틀었다. 입을 벌려 숨을 쉬다가 다시 도준희에게 턱이 잡혀 키스를 당했다. 도준희의 혀가 우예린의 혀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휘감았다.
우예린의 풍만한 가슴이 도준희의 젖은 티셔츠에 달라붙어 문질러졌다. 도준희의 은근한 손길에 발딱 선 젖꼭지가 천에 쓸려 달아올랐다.
“하, 하아……. 수, 숨을 못 쉬겠어, 숨을.”
우예린이 애원하자 도준희가 입을 뗐다. 그러곤 살았다는 표정으로 숨을 고르는 우예린을 힐끗하고 고개를 내렸다. 우예린의 눈이 커졌다. 그가 가슴을 담뿍 물어 입 안에서 굴리며 젖꼭지를 살짝 깨물었다.
“아, 아앗, 악……!”
손은 아래로 내려가 클리토리스를 마구 주물러댔다. 우예린이 허리를 튕겼다. 도준희가 그녀의 가슴과 성기를 꽉 내리누르며 씨익 웃었다.
“빨아주니까 좋아요?”
우예린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아무 대꾸도 없는 그녀를 불만족스럽게 응시한 도준희가 중지를 구멍에 팍 처넣었다.
“아앗!”
“아까 하도 쑤셨더니 이제 손가락 두 개쯤은 쉽게 들어가네요. 느껴져요?”
부끄럽게도 잘 느껴졌다. 전에는 손가락 하나도 빠듯하더니 어느새 손가락 두 개를 넣어도 수월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이제 할 만하려나.”
도준희가 중얼거리더니 손을 확 뺐다. 손가락으로 어찌나 거칠게 삽입했던지 휩쓸렸던 우예린은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그때 도준희가 제 바지를 벗어 던졌다.
멍하게 도준희를 보고 있던 우예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사지를 받으면서도 궁금하긴 했다. 남자들은 흥분하면 커진다던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기색이 없어서 흥분하지 않은 건가 했었다.
역시 내겐 아무 감흥이 없나 보다, 하는 생각에 내심 의기소침하기까지 했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도준희의 성기는 도대체 그런 걱정을 왜 했나 싶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곤두선 채로 꺼떡이는 검붉은 성기는 마치 흉악한 몽둥이 같았다. 한 손으로 성기를 쓸어내린 도준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가요?”
뒤로 물러서자 욕조의 벽에 등이 닿았다. 더 물러설 곳이 없어진 우예린은 도준희의 얼굴과 검붉은 성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위쪽은 해사하고도 점잖은 얼굴인데 아래는 흉측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저 물 좀…….”
후다닥 달아나려던 우예린은 발목이 잡힌 사슴처럼 다시 욕조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우예린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긴 도준희가 그녀를 다시 욕조에 앉혔다.
“이따 물 잔뜩 먹여줄게요.”
도준희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웃음이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움찔거리는 우예린의 다리를 단단하게 잡은 도준희가 그 다리를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개구리처럼 다리가 벌어진 우예린의 입도 슬그머니 벌어졌다. 도준희가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넘실거리며 차오른 물도 검붉은 성기를 가려주지 못했다.
저런 게 들어가다간 안이 찢어질 거야. 우예린은 공포에 질렸다. 아까 뭐가 무섭냐 물어볼 때 당신 성기가 무서울 것 같다고 말할 걸 그랬다.
“들어가요.”
“자, 잠깐. 나 이런 거는…….”
“마사지 샵에서는 섹스하기 싫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여기로 데려왔는데.”
“여기도 마사지 샵이라면서요.”
“……말이 많네. 개인 마사지 샵이라 괜찮아요.”
‘누구 맘대로 괜찮아?’
도준희가 황당해하는 우예린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았다.
그사이에 도준희가 뭉툭한 성기 끄트머리를 우예린의 구멍에 맞추었다. 그대로 주변부를 뭉근하게 돌려대자 우예린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괜찮아요?”
그래. 역시 배려를 해주는구나. 안심한 우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직 준비가…….”
“손가락이 쑥쑥 들어가는 걸 보면 괜찮아요.”
그럴 거면 왜 물어보는 건데. 또 말문이 막힌 우예린이 다시 입을 열자 도준희가 허리를 가볍게 내밀었다. 뭉툭한 귀두가 입구에 진입했다.
“헉!”
우예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손가락 한두 개가 들어왔을 때랑은 전혀 달랐다. 몸이 쪼개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이건 안 돼요. 찢어질 거예요.”
“반도 안 들어갔는데.”
도준희가 실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곤 겁에 질린 우예린의 얼굴을 보더니 한 손으로 가슴을 주물렀다.
“몸이 긴장해서 그래요.”
나도 모르는 몸 상태를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항변하기도 전에 도준희가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우예린의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학, 하앗!”
뜨거운 공기 때문인지 머리가 띵했다. 물에 젖은 도준희의 머리카락이 가슴에서 흩어졌다. 도준희가 한 손으로는 빨지 않는 가슴을 주무르고 다른 손으로는 클리토리스를 짓뭉갰다.
양쪽으로 견딜 수 없는 자극이 가해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작은 머리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이제 좀 풀렸죠?”
도준희가 뭐라고 묻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라고 생각한 순간, 곧 그 생각을 박살내는 고통이 밀어닥쳤다.
“아악!”
도준희의 거대한 성기가 좁은 내벽을 헤치며 끝에까지 닿았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어깨에 손톱을 박은 채로 다리를 달달 떨었다.
“이제 안 아플 거예요.”
“아, 안 믿어요. 거, 짓말쟁이.”
“나 거짓말은 한 거 없는데.”
억울한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눈을 꽉 감았다. 도준희가 허리를 잘게 떨었다. 안에까지 진동이 닿자 우예린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훨씬 더 아플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처음 밀고 들어올 때는 그렇게 아프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덜 아프기 시작했다. 우예린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우예린의 목을 할짝이던 도준희가 예쁘게 눈을 맞추어왔다.
“안 아프죠.”
쑥스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나가 몸의 상성이 맞는 게 마음의 상성이 맞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기루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도준희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도준희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콩깍지라고 할 것도 없이 잘생긴 게 사실이었지만, 몸을 맞대니 그가 더 잘생겨 보였다.
이보다 더할 순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그렇다. 더 잘생겼다. 눈이 부시게.
“아프면 말해요.”
도준희가 슬쩍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물었다.
“아프다 하면 멈춰줄 거예요?”
도준희가 점잖은, 아니, 점잖은 남자의 탈을 가장한 못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상황 보고.”
“여, 역시 못 믿겠, 아아, 앗!”
천천히 움직인다 싶더니, 곧 속도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도준희가 세차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몸짓에 물이 출렁거렸다. 욕조를 넘어 흘러넘친 물이 땅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아파요?”
“아, 아파! 아파, 아아, 앙, 아앙!”
“조금 있으면 안 아플 거예요.”
“그런 게 어딨, 아앗! 머, 멈춰, 멈춰줘요!”
도준희의 커다란 귀두가 자궁구를 찌를 듯이 박아왔다. 퍽, 퍽, 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욕실에 적나라하게 울렸다.
우예린은 귀에 닿는 그 소리가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몸을 점령하는 감각에 저항할 수 없이 휩쓸려갔다. 도준희가 허릿짓을 하며 손가락을 내려 우예린의 클리토리스를 찍어 눌렀다.
“이제 안 아프죠?”
“차, 차라리 묻지를 말아요.”
울먹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클리토리스를 애무하고 손가락으로 삽입할 때처럼,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파도가 다가오는 것 같더니 이상한 감각에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이상, 이상해애, 아, 그만!”
우예린의 눈이 떨리자 도준희가 씨익 웃었다.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빨라졌다. 짧고 빠르게 삽입하자 귀두가 더 빠르게 안을 찧어댔다.
쿵, 쿵. 도준희는 우예린이 정신을 차릴 새 없이 박아댔다. 스멀스멀 다가온 감각의 파도가 이윽고 우예린을 완전히 덮쳤다.
“아앗……!”
허벅지가 바르르 떨렸다. 우예린은 고개를 젖히고 비명을 길게 질렀다.
울컥. 오줌을 싼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래를 보자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지쳤는데 놀라서 그런지 기진맥진이었다. 완전히 힘이 빠진 우예린이 도준희의 품에 안겼다. 도준희는 작은 몸을 쉽게 끌어안으면서 잘게 허릿짓을 했다.
우예린은 흐릿한 정신으로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바라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 * *
우예린은 눈을 떴다가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낯선 분위기가 거슬리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꽉 감았다.
“으으…….”
운동과는 연이 없는 우예린인지라 쓰지 않는 근육이 호소하는 근육통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특히 민망하게도 허벅지가 유난히 고통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하얀 시트가 몸에서 흘러내렸다. 이불 속에서 속옷만 입고 있었다. 깜짝 놀라 한 손으로 몸을 가렸다. 가리거나 안 가리거나 큰 차이는 없었다. 옆에는 도준희가 잠이 들어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얼굴은 빛이 났다.
‘내가 이 사람과…….’
그래서 그런지 더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도준희가 자고 있으니 훔쳐보는 것만큼은 자유인데도, 소심한 우예린은 눈을 제대로 뜨는 것조차 힘들어서 도준희를 흘끗흘끗 보는 게 다였다.
‘이러다 눈뜨면 어떡해.’
새가슴이라 긴장으로 온몸이 콩닥거렸다. 살금살금 도준희가 깨지 않게 일어났다.
시트로 몸을 가릴까 했지만 그러면 도준희가 추울 것 같았다. 결국 우예린은 시트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겉옷을 입지 않은 상태가 민망했으나 보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대범해졌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옷과 가방, 그리고 핸드폰을 찾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문을 살짝 열었다.
문 여는 소리가 나면 어떡하지 했는데 과연 좋은 곳이라 그런지 문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입고 온 옷은 마사지대 아래 바구니에 있었다.
얼른 옷을 찾아 꿰입었다. 그리고 가방을 찾기 위해 방 하나하나를 다 열어보았다. 가방은 가장 마지막 방의 행거에 걸려있었고 핸드폰도 그 안에서 찾아냈다.
‘도준희가 일어나기 전에 나가야지.’
우예린은 얼른 현관으로 달려갔다. 오픈 버튼을 누르자 기계음이 났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방문은 열릴 생각 없이 잠잠했다. 빠르게 문을 열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누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잠을 꽤 잔 것 같은데도 탈력감에 멍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우예린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번호!”
번호를 물어봤었지. 준다고 했었는데. 기대 어린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얼른 연락처 창을 열었다.
‘도준희.’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어?”
‘마사지사.’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마사지.’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어어?”
급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연락처로 등록된 번호를 훑었다. 도준희의 ‘도’자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우예린의 얼굴이 실망으로 흐려졌다.
―띵동. 1층입니다.
우예린은 터벅터벅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다.
“뭐야.”
입구를 향해 걸어가며 멈칫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번호 준다면서.”
‘그냥 한 말이었던 건가?’
뒤를 돌아보았다.
‘번호를 받으러 다시 올라가?’
그러나 다시 올라가려면 카드 키를 꽂아야 하는 형식이었다.
우예린은 신 포도 근처에서 하릴없이 맴도는 어리숙한 여우처럼 엘리베이터 근처를 서성이다 경비원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고 물러났다.
“아, 차라리 얼굴 보고 물어볼 걸 그랬나.”
후회했지만 사실 자신은 없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간다 해도 말 못 하고 나왔을 것 같다.
구구구구국!
건물 근처의 비둘기가 홰를 치며 우예린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똥을 쌀까 봐 머리를 싸맨 우예린이 서둘러 앞쪽으로 나왔다. 홱 뒤를 돌아보자 전봇대 위에 올라간 비둘기가 비웃듯 부리로 날개를 골랐다.
“아휴. 그래, 나도 이렇게 소심한 내가 싫다!”
볼멘소리라도 크게 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헛기침을 하고 얼른 자리를 떴다.
* * *
우예린은 도준희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최대한 그를 생각하지 않고자 했다.
“또 준이 범인이야?”
“도금은 뭐로 할래?”
“걔 주느니 내가 갖겠다.”
도준희의 이름과 비슷하다 싶은 말에 일일이 흠칫할 정도로 그다지 효과는 없었지만……. 우예린은 도준희에게서 생각을 분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생각하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매일 밤, 매 순간 그가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단순히 그의 얼굴이나 체취, 손 크기 이런 것들이 생각이 났다면 이제는 그와 몸을 겹쳤던 감촉, 그의 숨소리, 질척거리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생각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마저도 생각이 나서, 넋을 잃다가 혼나기도 했다.
도준희와의 잠자리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 세상에 이런 게 있지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아서, 그게 문제였다. 좋으면 그냥 좋다고 생각하면 될 텐데 우예린은 덜컥 겁이 나서 이제라도 선을 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와서 왜 이러지, 나.’
할 거 다 했는데 갑자기 왜.
우예린은 마음과 머리의 괴리가 혼란스러웠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실은 우예린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정도로 안전 주의였으므로, 그녀의 본능이 의식보다 먼저 도준희에게서의 분리를 주장하는 탓이었지만 우예린은 거기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선을 그어야겠다는 결심은 채 한 달을 가지 못했다. 참새가 결국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우예린도 그랬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우예린은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도준희를 오랜 시간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리워할 정도로 그를 마음속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도준희를 끊는 것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녀가 다시 마사지 샵에 들르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도준희의 번호를 모르므로 그와 연결된 수단은 마사지 샵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인생에서 다시 찾을 리 없을 거라 생각한 건물에 다시 걸음을 들이민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첫 번째는 이지나 때문이라고 해도 나머지 두 번은 그녀 자신의 의지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에 항상 있던 그 잘생기고 친절한 지배인이 보이지 않았다. 우예린은 소심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계세요?”
“예, 잠시만요.”
지배인이 근처에 있던 직원 방의 문을 열고 나오더니 우예린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아, 안녕하세요.”
‘몇 번 봤다고 기억을 해주시는구나.’
지배인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네?”
우예린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너무 반겨주시는 것 같은데.’
지배인이 당황하는 우예린을 보고 뒤늦게 말을 바꾸었다.
“아, 아니, 오랜만에 뵙는다고요.”
“아아, 네네.”
“예약은 아, 못 하셨겠구나. 도준희, 그 친구 찾으러 오신 거죠?”
다짜고짜 이름부터 꺼내어 우예린은 가슴이 덜컹했다.
자신이 그렇게 도준희에게 애타는 것처럼 보였나 싶어서 얼굴이 붉어졌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지배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아니라, 이런 부탁 실례인 줄은 알지만요.”
머뭇거리자 기다리던 지배인이 답답한 듯 물었다.
“뭔데요?”
지난번에 봤을 때는 침착해 보였는데. 오늘은 일이 바쁜 건가, 유난히 조급해 보이는 지배인을 보며 우예린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직원이 아니라고 하셨지만요, 번호를 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우예린은 심호흡을 하고 숨도 쉬지 않고 내뱉었다.
“누구요? 아, 도준희요?”
우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당할 각오를 했지만 그럼에도 거절당할까 봐 불안해서 심장이 뛰었다. 노심초사하는 우예린을 보며 지배인의 얼굴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아, 난 또, 다른 직원이 눈에 들어온 건가 해서 심장 떨어질 뻔했네.”
“네?”
“아니, 아니에요. 잠깐만요. 번호도 주고, 도준희도 불러줄게요.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지배인은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직원 방으로 걸어갔다.
‘아직 도준희의 얼굴을 볼 준비는 안 됐는데!’
놀란 우예린이 서둘러 손을 저었지만 지배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막 방에 들어가려던 지배인이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우예린이 안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으나 지배인이 한발 더 빨랐다.
“잠깐만 기다려요. 어디 가지 말고요!”
“네? 아, 네.”
안 그러면 큰일 날 기세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인은 안심한 얼굴을 하고는 방으로 쏙 들어갔다.
‘……뭐지? 곤란해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기뻐하는 것 같다. 부드럽고 다정했던 지배인의 인상이 오늘은 좀 다르게 보여서 떨떠름했다. 우예린은 조용한 가운데 주춤거리며 소파에 엉덩이를 댔다. 잠깐만 기다리라던 지배인은 시간이 꽤 지나도 오지 않아서 우예린은 가게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