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9)

02.

늘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곳이었는데 평일 밤, 영업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때라 손님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턱, 턱. 타박.

입구에서부터 거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우예린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0분 후면 영업이 끝나는 시간인데 지금 오는 손님도 있는 건가?’

지배인을 기다리느라 심심했던 우예린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드러난 사람들을 확인한 우예린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걸음 소리부터 심상치가 않더니 외양은 더욱 심상치가 않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옷. 검은 구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세 명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덩치가 워낙 커서 입구 통로도 나란히 통과하지 못하고 순서대로 걸어 들어왔다.

양손을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는 폼이 퍽 거칠고 무서워서 우예린은 구경하려고 들었던 턱을 목에 딱 붙였다.

우예린은 워낙 존재감이 없는지라 덩치들은 우예린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황금색의 은은하고 세련된 건물과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조폭이잖아?’

유흥거리에 자리한 교회 목사 딸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침 누군가 일을 끝냈는지 손님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손을 수건으로 닦으며 손님을 배웅하려던 마사지사가 덩치들을 맞닥뜨렸다. 손님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주춤주춤 물러났다.

“가쇼.”

덩치들이 비켜주자 손님은 그 틈으로 재빨리 종종걸음을 쳤다.

“형님들, 오셨습니까!”

마사지사가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인사했다. 각이 제대로 살아있는 자세였다.

유혈 사태가 날까 봐 걱정했던 우예린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괜히 손님 하나 겁준 거 아닌가. 조금 이따가 올 걸 그랬네. 오늘 유독 몸이 안 좋아서 왔다.”

“아닙니다. 가게 끝나는 시간입니다. 얼른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운데에 있던 덩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요즘 도련님이 여기 자주 오신다던데. 안 오셨냐?”

“오늘은 안 오셨습니다.”

“오시면 연락해라. 몸이라도 얼른 풀어야지. 영, 찌뿌둥해서…….”

덩치들은 마사지사가 안내하는 방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벽에 붙어서 벽과 혼연일체가 되었던 우예린은 멈췄던 숨을 길게 쉬었다.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저기에 왜 남자가 들어가지? 남자 마사지사가 있는 곳인데?’

머릿속에 마사지사와 키스하던 이지나가 떠올랐다. 우예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야 이성 간의 행위에 갓 눈을 뜬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는 건 너무 과했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리 봐도 그거 같지…….’

검증이 안 된 것도 모자라서 위험한 사람들까지 얽혀 있는 가게라면……. 도준희가 바로 떠올랐다.

“어떡해!”

게다가 도준희는 얼굴도 잘생겼으니 저런 사람들이 가만히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니까. 도준희를 설마 돈 많은 사모님들한테 팔거나 그러면…….

지금은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금세 사라졌다. 얼른 만나서 위험한 상황에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배인은 직원 방으로 들어가서 여전히 나오고 있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우예린은 벌떡 일어났다. 실례인 건 알지만 조금 독촉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 순간, 통로에서부터 타박타박 걸음 소리가 울렸다.

‘도준희인가?’

반색하며 고개를 든 우예린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형님들 왔다며?”

“오랜만에 오셨네.”

“아, 오늘은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얼른 퇴근해야겠다. 잘못 걸려서 끌려가면 어떡하냐.”

“오늘 형님들 방 들어간 새끼들만 불쌍하지. 손바닥 아작 나겠던데.”

“근육 형님들 상대하는 게 제일 빡세도, 들어가면 팁은 짭짤하게 주신다더라. 팁 안 줘도 어쩔 수 없지. 건물주인데 찍소리나 할 수 있겠냐.”

우예린은 낄낄대는 무리를 살폈다. 맨 앞에 나와있는 남자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첫 번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났었고, 두 번째는 도준희와 빈방에서 야릇한 짓을 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얼굴을 가리려고 하는 찰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그 토끼 손님?”

남자, 신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누구?”

주변 남자들이 물었으나 신세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묘했다. 우예린은 신세진의 얼굴을 당당하게 볼 수가 없었다.

‘설마 그때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사고였고 순간이었지만 나신을 보인 충격에 우예린은 금세 그때의 수치스러운 감정이 되살아났다.

“어, 나도 알겠다. 그때 그 손님이네. 도준희 손님.”

“무슨 소리야?”

“아, 왜. 나 세진이 형이랑 기주랑 노가리나 좀 깔려고 흥준이 비번일 때 그 방 쓰려고 했었거든. 근데 그때 도준희가 떡 치려고 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손님이랑.”

“뭐? 왜?”

“난들 아냐.”

“그럼 저 여자가……?”

“그래, 그 여자야.”

가까이 다가온 남자들이 주춤거리는 우예린의 주변을 둘러쌌다.

“도준희한테 돌아버린 여자들 많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데서 옷 까고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네.”

가장 왼쪽의 남자가 이죽거렸다. 다소 거친 말투에 우예린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그 사람이 좋아요? 그런 거예요?”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억지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지나처럼 앙칼지게 대꾸해 봤지만 킬킬거리는 비웃음만 돌아올 뿐이었다.

용기도 잠깐, 간신히 긁어모은 용기마저 폭삭 주저앉은 우예린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나도 한 얼굴 하는데. 그렇지 않냐?”

남자는 동료들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했다.

“씹새들, 의리 없기는. 아무튼.”

다시 우예린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깜짝 놀란 우예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으나 누군가 뒤를 받쳐주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 사람, 신세진이었다.

“나는 어때? 나도 얼굴 좀 괜찮지 않아요? 왜 다들 그 사람만 그렇게 멋있다 잘생겼다 하는지 모르겠네.”

앞의 남자는 도준희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듯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거울을 좀 보시는 게…….’

목구멍까지 소리가 올라왔으나 한 단어도 뱉을 자신이 없었다. 우예린은 지금 상황이 너무 두려웠다. 어깨가 덜덜 떨렸다.

신세진은 그가 잡고 있는 우예린의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궁금해서 그래. 남의 작업장에서 옷 까뒤집고 그럴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미쳐있어야 가능한 거야? 보니까 얌전한 게 다방 아가씨들 스타일도 아닌데. 알려줘요, 이유 좀.”

빙글거리는 얼굴로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문득 남자의 시선이 우예린의 얼굴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꽤…….”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하는 말에 우예린은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때 앞으로 팔 하나가 뻗어져 나왔다.

“무, 무슨…….”

“그만해라.”

“세진이 형? 에이,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칭찬 좀 하려는 건데.”

기분이 나빠진 우예린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퍽!

억울한 듯 항변하던 남자가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쿵!

이마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꺄악!”

비명을 지른 우예린이 재빨리 옆으로 물러났다. 웅성거리는 남자들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도, 도준희.”

긴 다리로 남자의 등을 까버린 도준희가 그 발을 그대로 남자의 등줄기에 얹었다. 지그시 밟자 아래에 깔린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뭐 하냐, 새끼야?”

평소 점잖았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도준희?’

우예린은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남자의 희롱으로 인한 충격도 가시는 기분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가려진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안경이 아니었다면 훨씬 무서워 보였을 것 같았다. 그만큼 도준희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위압적이었다.

사악하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도준희를 상대로는 처음 한 생각에 놀란 우예린은 눈을 사정없이 깜박거렸다.

도준희가 몸을 숙이더니 엎어진 남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짧은 머리를 어떻게 그리 단단하게 잡아챌 수 있는지 남자는 울대가 울렁거리는 게 보일 정도로 목이 최대한도로 젖혀졌다.

“뭐 하냐고.”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어.”

“씨발, 내 귓구멍은 장식이냐? 네가 지껄인 대사가 있는데 뭘 아무것도 안 해, 안 하긴.”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 한 대에 실핏줄이 터진 듯 남자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윽!”

신음은 맞은 남자가 아닌 우예린에게서 나온 거였다.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우예린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우예린을 돌아본 도준희가 인상을 쓰고는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머리를 뒤로 더 젖히고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귀에다가 속삭였다.

“씨발, 이따 보자?”

“흐, 흐흑. 흑…….”

급기야 울기까지 하는 남자를 팽개치듯 버려두고 벌떡 일어난 도준희가 얼어버린 우예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뒤늦게 직원 방에서 나온 지배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태를 파악하느라 애를 썼다.

도준희에게 끌려 빈방으로 들어간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도준희의 손을 뿌리쳤다. 막 문을 닫았던 도준희는 우예린이 뿌리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우예린은 아랫입술이 달달달 떨렸다.

“왜 그래요?”

“도, 도준희?”

이상하다며 쳐다보는 얼굴은 자신이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그 얼굴이 맞는데, 분명 맞는데,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이질감이 있었다.

뭘 확인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조심스럽게 묻자 도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

“왜 그런 얼굴이에요?”

“그, 그거야…….”

“아, 놀란 거구나.”

“…….”

“겁이 많은 거, 순간적으로 깜박해 버렸네.”

왜일까. 전에 그가 던진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무서워하는 거 있어요?”

지금 물어본다면 망설임 없이 도준희 당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겁먹지 마요. 여기 사람들 보기보다 거친 사람들이라, 앞에서 얕보이면 물어뜯겨요.”

“아…….”

“웬만하면 이런 데 안 오는 게 좋고. 우예린 당신 같은 사람들은 특히나 더.”

“마사지 샵이라면서요?”

의심을 풀지 못한 우예린이 주춤거리자 도준희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말이 많네.”

“네?”

“사내놈들이 몸 주물러대는 건데, 그렇게 받고 싶어요? 내 말에 꼼짝도 못 하더니 토를 달 만큼? 내가 아까 괜히 끼어든 건가?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기가 막혀 되묻자 도준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니, 근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어서 말이에요.”

“뭐, 뭐가요?”

얼굴을 찌푸리더니 툭 내뱉는 말에 어쩐지 묘하게 불안해서 우예린은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겁이 많다고 해도 사내놈들이 그렇게 둘러싸고 있는데 멀뚱히 거기 그러고 있어요?”

“…….”

“얼굴 좀 반반한 것들이 들이대니까 또 설렜어요?”

우예린은 도대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멍해졌다.

“지,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예요?”

“아니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우예린 씨가 잘못한 건 없지. 근데 빡친 게 안 풀려서 그래요.”

자신이 잘생긴 얼굴에 약한 건 사실이고, 그래서 도준희를 그토록 좋아하고 가슴 떨려했지만 그건 도준희가 ‘점잖고 섹시하면서도 잘생긴 얼굴’이라서 그런 거였다.

우예린은 착한 사람이 좋았다. 성격이 사나워 보인다거나 거칠어 보이면 아무리 잘생겼어도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못하고는 했다. 도준희는 말은 거친데 이상하게 얼굴은 아직도 선하게 잘생겨 보여서, 그 괴리감이 혼란스러웠다.

화난 건가? 아닌 건가?

도준희가 빙그레 웃었다.

“아주 좋아 죽던데.”

역시 화난 건 아닌 건가?

그리고 좋아 죽다니. 무서워하고 있었는데 뭘 좋아 죽는단 말인가. 도준희가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그녀는 혹여 자신이 웃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잘생긴 사람 좋아하잖아요. 좋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고 못 살지.”

“…….”

“그래서, 아까 그놈들이 잘생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어, 어?”

“생각보다 눈이 낮네. 얼굴이 반반하긴 씨발, 빻아서 쳐다보기도 힘들더만.”

무슨 소리야. 아까는 반반하다며. 네 입으로 그랬잖아.

우예린의 눈이 흐려졌다.

‘이상하다.’

도준희는 말수가 별로 없었지만, 욕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지금의 도준희에게선 상스럽고 천박한 분위기가 흘렀다. 모범생 우예린은 알지 못하는 느낌이었고 그래서 천적을 만난 것처럼 두려워졌다. 겁을 먹어버린 우예린은 덜덜 떨면서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입이 붙었어요? 왜 말을 안 해요?”

무슨 말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우예린은 윽박지르는 도준희의 성화에 못 이겨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아, 안 잘생겼어요.”

“어디서 거짓말이야, 내가 다 봤는데.”

“그쪽 아니, 도준희, 당신이 훨씬 자, 잘생겼어요.”

분명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는 건데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도준희는 도준희이되 자신이 알고 있는 도준희가 아닌 것 같았다.

도준희가 의심스럽게 눈썹을 까딱였다.

“내가?”

“으, 응. 잘생겼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이 잘생겼다고.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평생 동안 할 칭찬 아니, 아부를 그에게 퍼부었다.

도준희가 미심쩍은 눈으로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고개를 떨어질 것처럼 세게 끄덕였다. 믿음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학창 시절 선생님한테 혼날 때 잘못한 것을 반복해서 고했던 것처럼 고개를 기계적으로 끄덕였다. 도준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질 때까지.

“……그래요?”

그리고 한참 후, 다시 흘러나온 도준희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점잖고 부드러웠다. 야누스인 양 순식간의 변화인지라 우예린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리 와요.”

도준희가 우예린의 손목을 잡고 마사지대로 잡아끌었다. 원래는 도준희가 하는 말이라면 껌벅 죽는 시늉까지 할 의지가 만만이었던 우예린이지만 이번에는 브레이크가 걸린 양 주춤거렸다.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왜, 왜요?”

“왜긴. 마사지해야죠. 여기 마사지하러 온 거 아니에요?”

도준희를 만나기 위해 온 거였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 입술만 소리 없이 달싹이자, 도준희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왜, 역시 딴 놈 만나려고 온 건가?”

순식간에 기온이 내려갔다. 이런 도준희는 어딘지 무섭다. 우예린은 황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웃음을 회복한 도준희가 그녀를 마사지대에 눕혔다.

순식간에 속옷만 남기고 옷이 벗겨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우예린은 도준희가 웃자, 그의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늘은 어떻게 해줄까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우예린은 도준희가 하는 말에, 행동에 정신없이 휘둘렸다. 겨우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몸에 진이 빠지고, 도준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을 즈음이었다.

마사지대에 누워서 헐떡이는 우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도준희가 속삭였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죠?”

우예린은 화들짝 놀랐다.

“네?”

떨떠름한 반응에 도준희가 미간을 좁혔다.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매끄러운 뺨이 힘이 들어가 불거졌다. 화를 참는 기색이라 우예린은 바짝 긴장했다.

“아무하고나 안 잔다면서.”

“…….”

“나하고는 했잖아요. 그럼 사귀는 거지.”

‘분명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도준희의 눈이 싸하게 가늘어졌다.

“그냥 한 소리였어요?”

우예린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럼 사귀는 거네.”

“아니…….”

도준희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고개를 젓던 우예린은 방향을 급선회해서 상하로 고개를 흔들었다.

“맞아?”

“네, 네네. 맞아요.”

도준희가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 얼굴은 우예린이 사랑한 그 점잖고 비밀스러운 얼굴 그대로였다.

“사귄 기념으로 데려다줘야겠네.”

“네?”

“여자애들은 사귀면 데려다주는 걸 원하잖아요. 그렇죠?”

“…….”

“사귀는 사이인데. 응?”

어딘지 확답을 받고 싶어 하는 그를 보며 소리를 죽여 입술을 웅얼거렸다. 희멀건 얼굴이 풀이 죽었다.

도준희는 그 얼굴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끼지 못한 우예린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몰라요.”

“…….”

“사귄 적이 없어서 그게 당연한 건지 아닌지 모른다고요.”

우예린은 말이 없는 도준희를 보는 것이 창피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늘어놓더니, 왜 이럴 때는 갑자기 말이 없어지는 거야?

‘소, 솔로인 사람 처음 봐?’

모태 솔로라는 것에 불만을 품어본 적 없지만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마다 미묘한 얼굴로 그렇게 안 보인다는 둥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하는 사람들로 인해 방어 태세가 장착되어 버렸다. 도준희는 솔로인 적이 없었을 테니 그녀를 더욱 이해하지 못할 거다.

‘실망하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아닌 척해도 촌스러운 티는 다 나기 마련이다.

체념하고 고개를 든 우예린은 입꼬리를 올린 채 입가를 매만지는 도준희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도준희가 눈매를 휘더니 살짝 웃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도준희가 피아니스트처럼 긴 손가락으로 우예린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우예린은 멍하게 그가 자신의 가방에서 핸드폰을 가져가 멋대로 번호를 저장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왜 그때 아무 말 없이 도망쳤어요. 번호도 안 가져가고.”

“…….”

“지우면 안 돼요. 검사할 테니까. 가요, 집에.”

쪽,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디 살아요? 말해줄 수 있죠?”

집요한 목소리와 다르게 깃털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다.

* * *

도준희의 집안은 머리에 먹물을 집어넣는 대신 돈놀이와 주먹을 휘두르는 것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가문이었다.

도준희가 어릴 때 주먹 사업을 하다 서울로 올라온 후로 그의 부모님은 돈놀이에 홀딱 빠졌다. 돈놀이는 주먹 사업보다 머리는 더 쓰지만 돈은 수배로 더 잘 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주먹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 그 일이었으니, 알고 지내는 사람을 동원하여 사업을 키웠다. 일명 사채업자라고 불리는 게 그들이었다.

같은 시기에 서울로 올라온 도준희의 백부는 역시 지방에서 주먹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술집을 차렸다. 술 마시고, 춤도 추고, 거기서 눈 맞은 커플들이 푹 쉬라고 주변 모텔 상권까지 장악했다. 유흥의 거리라고 불리는 그 거리가 그의 큰아버지의 돈줄이었다.

그들이 막 서울로 올라왔을 시점, 20대 초반의 도준희는 돈놀이를 하는 부모의 아래에서 일했다. 평생 일을 안 해도 흥청망청 살 수 있는 돈이 있었으므로 돈을 벌기 위한 건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도준희는 그야말로 개차반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미친개였다. 패싸움을 하고 돌아다니는 그를 두고 보지 못한 부모가 차라리 일이라도 하라며 목줄을 채운 거였다. 그 일은 도준희의 적성에도 꽤 잘 맞았다.

남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을 빌린 주제에 못 갚겠다고 뻗대던 놈들은 도준희가 머리채 한번 잡아주고 얼굴 좀 어루만져 주면 금방 백기를 들었다.

“어쩌다 저런 개새끼가 내 밑에서 나왔는지 몰라?”

그가 작업하는 상황을 지켜본 부모가 한 말이었다.

도준희는 사실 부모도 잘 몰라보았다. 어쨌든 그런 도준희가 어렸을 때라고 성격이 유순할 리 없었다. 약간의 갈등도 주먹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도준희는 그 지역에서 미친개로 유명했다.

지방에선 도준희의 옷깃만 보여도 벌벌 떨며 도망 다니는데 서울은 새로운 먹잇감이 천지였다. 사냥할 필요가 없는 이 시대에, 도준희는 사람 사냥을 하고 다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도준희도 한번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도준희가 연장은 잘 쓰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적대 세력이 그가 귀가하는 길을 노려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도준희라 해도 밤중에 연장 든 열 명의 사내가 덮치는 데야, 무사할 재간이 없었다.

“이런 씨발.”

결국 배에 구멍이 뚫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누군가에게 신고를 당하기라도 한다면 경찰서에 갈 테고 그럼 귀찮은 일이 생길 터였다. 배에 뚫린 구멍에서는 피가 줄줄 새서,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인적 드문 곳에 주저앉아 핸드폰으로 부모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무리 그를 폭탄 취급하는 부모라도 자식이 죽어간다는데 의사 한 명은 보내주겠지 싶었다.

실상 ‘칼 맞았으니 의사 한 명 보내’라는 내용의 문자를 받은 부모는 드디어 이 미친놈이 사고를 쳤구나 싶었지만, 어쨌든 도준희는 힘이 빠져 자리에 앉아있었다.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조금 피곤하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사를 기다리는 와중이었다.

타박타박.

어둠을 가르는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도준희는 졸린 의식 속에서도 ‘좆됐다’고 생각했다. 신고를 한다면 일이 귀찮아진다. 게다가 발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여자였다.

여자는 호들갑을 더 떨어대니까,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검은색 가죽 재킷으로 구멍이 뚫린 배를 가리고 여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발소리는 도준희의 근처에서 멈추었다. 차라리 무섭다고 생각하고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였다. 겁이 나면서 말은 왜 거는지. 아직 그릇된 호기심이 명을 단축한다는 걸 모르는 순진한 새끼일 게 분명했다.

‘귀찮게.’

도준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가 서성이는 눈치였다. 다친 사람을 그냥 두고 가면 안 된다는 시민 의식이라도 발휘된 모양이었다. 차라리 협박을 해서 쫓아내자고 생각하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119에 신고를 하려는 참이었는지 액정에 119가 찍혀있다.

“씨발.”

순간적으로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는 게 보였다.

“신고하면 뒈질 줄 알아.”

“저, 저, 저기…….”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인데 핸드폰 불빛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하얗고 말랐다. 피와 폭력에 미쳐 있던 인생이라 여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연약하고 겁 많은 여자란 걸 알 수 있었다.

옷은 또 교복이었다. 요즘 고딩들은 밤늦게까지 공부한다더니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 놈들도 있을 줄이야. 공부와 담쌓은 도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그래도 피가 빠져 졸린데 여자가 가지 않자 짜증이 솟았다.

“저리 안 꺼져?”

여자는 신고할 생각은 접은 듯했다. 머뭇거리는 여자를 보자 꼭 사슴이 생각이 났다. 사슴도 잘 쳐준 것이다. 큰 눈이 바르르 떨리는 게 겁먹은 참새 새끼 같았다.

도준희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서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부모는 돈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일 처리가 매우 느렸다. 의사 새끼는 언제 오는지, 약을 만들어서 오는 모양이었다.

‘설마 의사를 부르지도 않은 건 아니겠지.’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타닥타닥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여자가 도망간 듯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타닥, 발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에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이 다녀.’

이젠 머리까지 아파왔다. 그냥 그대로 지나가기만을 바라는데, 보드라운 향기가 맡아졌다. 짙은 피 냄새로 마비된 코를 뚫고 들어온 냄새였다. 도준희는 콧잔등을 씰룩였다.

“저기, 약국은 안 열었고 편의점밖에 없어서요. 히, 힘내세요! 나쁜 짓은 하지 마시고요!”

아까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타다다닥, 뛰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까 망설이던 때와는 달리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여자의 하나로 묶은 긴 머리가 말꼬리처럼 살랑대었다.

도준희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봉지가 있었다. 안을 뒤적였다. 반창고 하나, 약국보다 성분이 떨어지는 바르는 약 하나, 그리고 편의점용 쌍화탕 하나였다.

배에 구멍이 뚫린 것까지는 못 보고 얼굴의 상처만 보고 사온 듯했다. 그런데 반창고와 연고는 그렇다 치고……. 도준희는 쌍화탕을 눈높이까지 들어 보았다. 이거는 감기 기운 있을 때 마시는 거 아닌가.

다시 여자가 도망간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미 사라져서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친년인가?”

잠시 기다리자 의사가 왔다. 도준희의 부모가 일이 있을 때마다 연락하는 야매 의사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의사의 뒤통수를 찼다. 그대로 튀려는 의사를 잡아오느라 상처가 더 벌어졌다.

그대로 자리를 뜨려다가, 의사의 알은체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의 교복이 놓고 간 봉지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봉지를 들었다.

“도련님 거예요? 뭔데요?”

그는 배가 뚫렸다는데도 급하지 않고 유유자적했다. 도준희는 재킷으로 배를 누른 채 봉지를 흔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여자가 뛰어가던 발소리가 겹쳐졌다.

“적선?”

“네? 아니 무슨, 도련님에게 누가 적선을 해요? 정신 나간 사람이라면 모를까.”

도준희의 지긋한 시선을 받은 의사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교복을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그것도 큰아버지가 관리하는 유흥 골목 안에서였다. 교복의 집은 우습게도 교회를 하고 있었다. 유흥업소가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의 골목에서 말이다.

원래라면 침대에 누워 나른한 아침을 즐기고 있었을 주말, 도준희는 저를 향해 교회 홍보 전단지를 내미는 교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전의 일 때문에 습격을 대비하여 모자와 마스크를 쓴 탓에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시간 되시면 주말에 예배 오세요.”

웃으면서 말하는 여자는 도준희가 빤히 쳐다보자 흠칫했다. 차림이 이런 탓일까. 두 눈 안에 당황과 두려움이 번져나가는 게 보였다. 밝은 대낮에 봐도 역시 크고 검은 눈이었다. 툭 치면 떨어질 것처럼.

도준희는 약 고마웠다고 하려다가, 실제로 전혀 쓰임새가 없었던 걸 떠올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단지를 받아든 채로 교회 앞을 지나쳤다.

도준희의 손에 들린 전단지를 본 검은 옷 하나가 도련님이 웬일로 거리에서 나눠주는 걸 받아서 오냐고 신기해했다가 머리를 한 대 맞았다.

평소라면 본 척도 안 하고 무시했을 도준희는 전단지를 내려다보고 구긴 뒤 검은 옷에게 던졌다. 검은 옷의 말을 듣고 나니까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았다.

“여기 그 교회네요? 웬일로 이런 걸 여기까지 들고 오셨어요?”

“너 여기 아냐?”

“그렇죠? 골목에 있는 그 교회잖아요.”

알고 보니 유흥 거리 속 교회는 검은 옷들에게도 꽤 유명했다. 교회 건물을 지을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모양인데 빌려준 이들 중 하나가 돈놀이 비슷하게 작업하는 검은 옷이었다.

사람 좋은 지인인 척하면서 돈을 빌려준 검은 옷은 어떻게 더 많은 이자를 받아낼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계약서 하나도 제대로 쓰지 않은 것을 보니 주먹으로 협박할 셈이었던 듯싶다.

그다지 참견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추저분하게 구는 것 또한 거슬려서 따로 불러 타일렀다. 조용하고 착하게. 물론 타이름을 받은 검은 옷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도준희는 그것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 이후로 교회 앞을 지나갈 때마다 여자의 굴러떨어질 것 같은 큰 눈이 떠올랐다. 빈약한 가슴과 엉덩이, 볼 거라곤 흰 피부밖에 없는 여자인데.

어느 날은 괜히 교회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를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우리 대학 가면 소개팅하자.”

“소개팅?”

“지금 해도 상관은 없는데 수능까지는 참아야지.”

“지나야, 너 저번 모의고사 점수도…….”

“거기까지만 말해. 아, 남자 만나고 싶다.”

“조금만 참아.”

“생각난 김에 말해 봐. 넌 어떤 사람 만나고 싶어? 내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공부 중이지만 대학만 가봐라. 이지나 살판 날 거다. 미리 말해놔 봐.”

“나는 음… 착하고 똑똑한 사람.”

“이 가식적인 것. 얼굴이 착한 사람 아니야?”

“아니야, 진짜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 좋아.”

여자들이 흔히 할 법한 대화였는데 어째서 기분이 더러워졌는지 모를 일이다. 여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착하고 똑똑한 놈. 그런 놈이 어떤 놈이지.

마침 검은 옷 중에 그 교회에 예배를 다니는 놈이 있기에 불러서 물어보았다. 사람 때리고 협박하는 일을 하는 주제에 시간이 나면 꼬박꼬박 예배를 다니는 이상한 놈이었다.

성실하게 예배를 다니는 덕에 그놈은 그 여자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엄격한 부모님을 둔, 성실하고 모범적인 딸이라고 했다.

“수능을 봤으니까 곧 대학도 갈 거예요.”

대학에 간다면 말했던 그 소개팅을 하게 되려나.

남자의 말을 들으며 주먹에 붕대를 감던 도준희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돌아버렸던가. 어느 날은 예배를 꼬박꼬박 다니는 놈을 따라 교회에 갔다.

여자는 목사 일을 하는 아비를 둔 주제에 그다지 신실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예배를 드리면서 뭘 그렇게 보고 있나 했더니 알아보지도 못할 영어 단어가 빼곡하게 적힌 단어장을 보고 있었다.

도준희는 질린 얼굴로 여자의 단어장을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까맣고 물기 어린 눈동자에 움찔했다. 그때 느꼈던 대로 사슴 비슷한 느낌이 나는 여자였다.

여자는 재빨리 손에 있는 단어장을 치웠다. 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여자의 검은 눈동자가 도준희를 힐끗거렸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두려워하는 눈.

‘설마.’

그때 칼 맞고 앉아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 걸까. 여자가 얼굴을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공부에 한창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술은 옅은 분홍색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죄송한데, 예배 중에는 모자랑 마스크 쓰시면 안 돼요.”

예배가 뭐라고 사람 차림 가지고 지적을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마스크를 벗으려다가 멈칫했다. 어제도 싸움을 한 탓에 입가가 터져있었다. 겁 많은 여자가 본다면 또 기겁을 할 것이다.

그대로 손을 내리고,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여자에게 속삭였다.

“예배 중에 단어장 보고 있는 것도 안 될 것 같은데.”

사실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던졌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홱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성경을 펼쳐댔다. 경건한 자세로 목사의 말을 듣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날 밤 생각했던 대로, 웃기는 여자였다.

여자라고는 고등학교 시절 제게 엉겨 붙었던 정신 나간 여자들밖에 모르는 도준희지만 며칠 동안 여자가 생각이 나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생각이 난다.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이쯤 되자 도준희는 고민이 되었다. 여자가 아직 미성년자라는 것도 그렇지만 여자가 선호하는 남자상에서 그는 완벽히 어긋나는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형 따위 금방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여자를 관찰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여자는 정말로 겁이 많았고, 겁이 많았으며, 겁이 많았다.

싸움이 벌어지거나 조금이라도 다툼이 일어날 것 같으면 끼어드는 대신 멀찌감치 피했다. 멀리서라도 취객이 걸어오면 재빨리 비켜서서 다른 길로 가는 여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로 겁이 많은 여자는 처음 보았다.

도준희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일인데도 그랬다. 알고 보니 그녀의 그런 성품은 그 부모 때문이었다. 유난히도 엄하고 걱정이 많은 그들의 부모는 매일 아침 인사가 사람 조심, 차 조심, 싸움 조심이었다. 우예린은 싸움에 맞서는 대신 도망가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여자였다.

도준희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공포감을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전에는 신경이 쓰인 적이 없었으나 우예린 앞에서는 평소처럼 굴기가 힘들었다.

마스크와 모자만으로도 힐끗거리며 불안하게 쳐다보는 우예린이 싸움을 업처럼 삼고 있는 그를 상대도 안 하리란 것은 당연한 예상이었다.

도준희가 다친 그날, 도망가지 않은 것만 해도 용했다. 우예린은 겁이 많지만 마음도 약해서 다친 동물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도준희는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만약 보통의 사람들처럼 신경 쓰지 않고 도망갔다면 그녀가 눈에 걸리는 일 따위 없었을 테지. 물기가 많은 검은 눈동자를, 이렇게 집요하게 관찰하는 일 또한 없었을 텐데.

하지만 도준희는 이미 그녀를 눈에 담아버렸고, 그녀에게 관심을 주었으며, 그 관심은 점점 더 몸체를 불려가고 있었다.

도준희는 뭐 하나를 오랫동안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하루를 꼬박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정했다. 그녀를 그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결정을 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결단력을 갖고 있었으나 그녀의 수능이 끝나고 대학 합격 결과가 날 때까지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선뜻 행동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녀와 검은 옷을 보았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녀가 힐끗거리는 맞은편의 검은 옷은 사람 고문을 잘하는 주제에 꼬박꼬박 예배를 나가던 그 특이한 놈이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즉시 도준희는 모자를 눌러쓰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 대화를 엿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교복, 아니 우예린은 잔뜩 긴장한 떨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지?’

“저는 그쪽에 그, 관심이 없어서요.”

“관심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검은 옷, 놈의 신실함은 십자가에 있지 않았다. 십자가를 모시고 사는 우예린에게 있었지. 그 대화만으로도 그가 오기 전에 어떤 얘기가 오가고 있었을지 추측할 수 있었다.

도준희는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컵을 꽉 그러쥐었다. 이 연약한 컵으로 놈의 머리를 깨는 상상을 하면서, 이어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의외네.’

겁이 많아서 윽박지르면 ‘네, 네.’ 할 것 같았던 우예린은 떨리는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반복해서 거절하고 있었다.

“왜죠? 이유를 말해줘요.”

“일단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예린 씨 이제 스무 살이잖아요.”

“생일 안 지나서 열아홉 살이에요.”

끈질긴 새끼. 도준희는 입술을 비틀었다.

‘저놈이 몇 살이더라?’

그다지 예뻐하던 놈이 아니라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20대 중반이었다. 도준희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놈이란 말이다.

정신 나간 병신 새끼. 욕설이 치밀었다. 당장 머리채를 잡아끌고 구둣발로 주둥이를 짓뭉개고 싶은 충동이 머릿속을 들쑤셨다.

다행히도 도준희의 하얀 얼굴은 그런 폭력적인 기색을 완벽하게 갈무리했다. 손가락으로 컵의 주둥이를 둥글게 매만졌다.

“저는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사람이 좋아요.”

도준희는 그 말에 제 나이와 그녀의 나이 차를 셈해 보았다. 서너 살 정도 차이다.

‘이 정도면 나이 차이가 적은 편이지. 늙은 새끼가 어딜 넘봐.’

분노가 조금 누그러졌다.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편하게 기대었다. 검은 옷은 끈질기게도 물고 늘어졌다.

“겪어보면 제 매력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예린 씨, 제가 오랫동안 봐왔던 거 알잖아요.”

“그건 예배 때문이잖아요.”

“저란 놈이 뭘 믿을 수 있는 놈 같아요? 사실 저 무교입니다.”

우예린은 확연히 곤란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안 되겠어요.”

“솔직한 이유라도 말씀해 주세요.”

“화……내실 거잖아요.”

“안 내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사나이 김원철, 한번 뱉은 말은 지킵니다.”

“그럼 다행인데요.”

우예린은 안심한 목소리로 깊이 한숨을 쉬었다. 도준희는 그녀가 한심해서 눈썹을 찡그렸다.

‘조폭 새끼가 하는 말을 믿냐.’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는 똑똑하지만 헛똑똑이다. 사내새끼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하는 말을 진실로 믿다니.

‘멍청하기는.’

여기서 저놈에게 끌려간다 해도 누가 도와줄 수 있겠는가. 우예린은 그가 우연히 이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걸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사실 아저씨는…….”

“아저씨…….”

“제 취향이 아니세요!”

우예린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도준희는 웃음이 터질 뻔해 한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멍청하게 굴기에 자신이 나서야 할까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보면 할 말은 한단 말이지.

“예린 씨 취향이 뭔데요?”

“저는…….”

‘똑똑하고 착한 사람.’

도준희는 입 속으로 그녀가 답할 말을 굴려 보았다.

“똑똑하고 착한 사람이 좋아요.”

“똑똑하고 착한 사람이요? 그건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적어도 저만큼은 똑똑했으면 좋겠고요, 저보다 착한 면모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 역시…….”

“그리고 잘생겼으면 좋겠고요.”

도준희는 눈썹을 까딱했다.

‘이건 처음 듣는데.’

“그래서 아저씨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우예린이 또박또박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우예린이 옆을 지나가자 도준희는 저도 모르게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썼다.

원래라면 검은 옷을 비 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패려고 했지만, 하나하나 다 취향이 아니라고 지적당한 검은 옷이 만신창이로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그냥 봐주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간 도준희는 고민했다.

‘똑똑하고, 착하고, 잘생긴 남자.’

도준희는 우예린을 잡기 위한 계획을 미루었다. 대신에 고등학교 때도 펴지 않았던 책을 폈다. 그가 책을 보기 시작하자 주변은 놀라 뒤집어졌지만 도준희는 발로 그들의 얼굴을 찰지언정 책을 덮지는 않았다.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주변에 그나마 머리가 깬 놈을 데려왔고, 돈을 들여 최고 대학의 석학에게서 과외를 받기도 했다.

애초에 도준희는 머리가 둔하진 않았다. 게다가 족집게 과외를 부탁했던 대학생은 집이 가난하지만 않았더라면 도준희 같은 사람의 과외를 할 만한 학생이 아니었다. 평균은 하는 머리와 최고의 인재가 만나 기적을 만들어냈다.

시험을 보기 전날, 과외 선생이 콕콕 집은 문제가 모조리 수능에 나왔다. 소위 대박이 터진 것이다. 결국 한 번 만에 우예린과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들어갔다.

다행인 일이었다. 도준희는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 없었고 만약 실패했다면 대학 강의를 듣는 우예린을 도중에 데리고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말을 하면 첫날부터 본성이 까발려질 것 같아 입은 최대한 열지 않았다.

‘저기 있네.’

신입생 환영식에서 우예린을 보는 순간, 도준희는 마음이 편해졌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교회에서 그녀를 훔쳐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 우예린과 같은 눈높이에 서게 된 것이다.

과연 대학으로 명석함을 가릴 수 있을까 싶지만, 공부를 잘하는 그녀만큼 똑똑해졌고, 말을 하지 않으니 다들 도준희를 일컬어 착한 신입생이라고 했다.

도준희는 우습기만 했다. 무거운 거 몇 번 들어주고, 길을 알려주고 하는 것만으로도 착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아마도 그의 외모 덕이었을 거다.

이 정도면 얼추 우예린이 말한 조건에 들어맞은 상태가 된 걸까. 이제 우예린에게 다가갈 일만 남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말을 걸고 싶어 살짝 다가가면 어느 순간 저 멀리 가있다. 학과 행사에서는 주변에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고, 학기 중에는 과외에 학교 공부에, 인턴십에 어찌나 바쁜지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학과 행사에나마 꼬박꼬박 나오는 게 다행이었다.

어느 날은 교정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갔다. ‘이번에는 인간도 그리 많지 않으니 도망가지 않겠지.’ 하는 계산이었는데, 그를 발견한 우예린은 맹수를 발견한 토끼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그대로 도망을 갔다. 도준희는 허둥지둥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왜 저래?’

이미지 관리가 미흡하기라도 했던가. 도준희의 시름이 한층 깊어졌다. 그러던 중 학과실에서 그녀가 동기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너 그 오빠 싫어해?”

“누구?”

“도준희. 신입생인데 나이 많은 오빠 말이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귀를 쫑긋했다.

“너무 잘생겨서 그래.”

“뭐?”

어처구니가 없어진 도준희는 실소를 흘렸다.

“너무 잘생겨서… 말을 걸기가 힘들어.”

“너 잘생긴 사람이 좋다며?”

“응, 좋으니까 더 말 걸기 힘들더라고.”

그 속마음을 듣게 되자 조급해지던 마음이 풀어졌다.

‘그랬단 말이지.’

의문이 풀린 줄 알았지만 여전히 헷갈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저만 보면 도망가는 그녀는 아무리 봐도 너무 좋아서 도망가기보다는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녀가 그렇게 구니 빠르게 친해져야겠다는 당초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래도 도준희는 그녀를 보지 못했던 시간보다는 마음이 편안했다. 언제든지 볼 수 있었고, 짧은 대화나마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선배, 커피 마실래요?”

우연한 척 만나 카페에서 산 음료를 건넬 수도 있었다.

“고마워요.”

“선배 족보 덕분에 시험 잘 본 값이에요.”

“잘됐다. 다음에도 챙겨줄게요, 그럼.”

사실 시험 따위 하나도 관심 없고, 망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였지만, 소소하게 나눈 대화들이 가슴 빠듯하게 만족스러웠다.

학교 내에서만큼은 도준희는 우예린과 같은 눈높이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하지 않고도 우예린과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가끔,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그녀의 둥그스름한 뒤통수를 보다가 불쑥불쑥 난폭한 욕망이 치밀기는 했지만 일상이 만족스러워 그마저도 내리눌렀다.

단순히 한 번 박고 치우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짓까지 해가며 대학 같은 데를 들어갈 리 없으니까.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예린과.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만족이 되어서 지켜보기를 몇 년, 어느 날 부모가 죽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다 그대로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익사한 채 차 안에서 끌어내린 시체는 물에 퉁퉁 불어 최악이었다.

조사한 결과 차체의 브레이크가 망가진 상태였다. 근래 들어 돈놀이를 과하게 한다 했더니, 부모와 백부의 구역을 호시탐탐 노리던 세력의 수장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학교로 찾아온 백부의 수하에게 대꾸했다.

“갚아줘야지, 받은 만큼.”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피가 이어졌으니 도리는 하자 싶었다. 키워준 값을 복수로 갚기로 했다. 백부와 손을 잡고 6개월 만에 그놈들의 아지트를 쳤다.

빌린 돈을 떼먹은 걸로 사업을 키웠는지 꽤 그럴듯한 건물이었다. 새벽을 틈타 유리를 깨고 들어가 놈들의 대가리를 깠다. 피차 경찰을 부를 정도로 순결한 낯짝은 아니었다. 거리낄 게 많은 입장에서 남은 건 본연의 힘으로 겨루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도준희는 1년이 지나지 않아 잔챙이들까지 모조리 쳐내었다. 그놈들의 수장을 친 도준희에게 가장 큰 공이 있다 하여 놈들이 가진 재산은 도준희에게, 그들의 영역은 백부에게 돌아갔다. 거기까지 1년이 걸렸다.

이제 슬슬 학교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우예린은 졸업반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굳이 대학을 더 다닐 필요가 있어?’

도준희는 멍청하지는 않지만 성실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평생 펑펑 쓰고 살아도 모자랄 만큼의 돈이 있는데 월급쟁이가 되기 위해 회사에 들어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소꿉장난은 이쯤 하자.’

하지만 몇 년 동안 보기만 해서 그런지 도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좋은 생각을 떠올리기가 골치 아팠다. 주변에 물어보면 콱 박으면 된다는 영양가 없는 답변만 돌아오니 영 쓸모가 없다.

연약한 사슴처럼 겁 많은 우예린.

얌전한 우예린.

눈치를 많이 보는 우예린.

피에 젖은 손을 탈탈 털며 우예린의 물기 많은 큰 눈을 떠올렸다. 그러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싸움으로 인한 흥분인지 우예린에 대한 성욕으로 인한 흥분인지 헷갈렸다.

‘우예린.’

처음 접하는 타입이다 보니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말 한번 거는 것도 막 걸 수가 없었다. 말투에 밴 천박한 티를 최대한 절제하고 말하느라 할 수 있는 말이 한정적이었다.

‘모텔 가자’는 말도 ‘오늘 같이 있자’는 말로 바꿔서 해야 한다니. 제법 연애 좀 할 줄 안다는 부하의 말을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눈만 마주쳐도 도망가는 여자라고 말해주자 주변의 놈들이 기함을 해댔다.

“답답해서 어떻게 만난대요?”

‘답답하기는 하지.’

그런 여자는 그의 주변에 우예린 하나뿐이라 뭐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니 도준희는 며칠을 고민했다. 며칠이라고 해봤자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정도 생각한 후, 도준희는 결정했다.

‘일단 얼굴을 먼저 볼까.’

마음이 설렜다. 가장 최근에 시비가 붙어 배에 칼빵을 맞은 상태였다. 예전에 우예린을 처음 만났을 때 칼을 맞았던 그 자리였다. 상처만 나으면 학교에 가서 우예린의 행방을 물어볼 생각을 했다.

그때 즈음 큰아버지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지 3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술장사가 아니라 양지에서 서비스업을 해보겠다기에 핸드폰 대리점이나 하려나 싶었다. ‘서비스업’하면 폰팔이가 생각났으므로.

그런데 큰아버지가 시작한 사업은 더 골 때렸다. 요즘 돈이 된다는 아이돌을 보고 생각한 사업이라면서 얼굴 반반한 놈들을 모아오더니 대뜸 건물 하나를 비워 마사지 업소를 차린 것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지만 직원들이 모조리 힘세고 얼굴 괜찮은 사내놈들이다 보니 손님들은 대부분 여자였다.

차라리 게임방을 열지 낯간지럽게 마사지 샵이 뭐냐고 면박을 주자 백부는 네 무식한 머리로는 원대한 사업 계획을 가늠할 줄 모른다며 성을 냈다. 그 무식한 머리로 무려 4년제 대학교를 간 거라고 비웃으니 아무 말도 못 했다.

잘생긴 사내놈들로 돈을 벌겠다는 백부의 욕망은 가게 이름에서부터 부끄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꽃미남 마사지 샵>

백부의 자랑에 어디 한번 보자 해서 구경을 갔던 도준희는 간판을 처음 보고는 마시던 술을 뱉어냈다.

누가 저런 이름에 혹하겠나. 빈정거리면서 조롱했더니 백부가 재떨이를 던졌다. 머리가 깨질 뻔해서 욕을 진탕 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처음엔 얼마나 가나 싶었지만 얼굴 반반한 놈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게 맞는 말인지 입소문이 나서 가게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제일 어이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더 어이없는 부분은 손님으로 가득한 가게를 보며 헛웃음을 짓는 도준희에게 백부가 거드름을 피우며 한 말이었다.

“애들 사진 올리고 예약제로 운영하니 전화가 터질 뻔했다. 이제는 사내놈들 얼굴도 돈이 되는 시대야. 깡패들도 머리를 써야 한다, 그기다. 페이 세게 줄 테니 너도 일 좀 할래?”

“미쳤나…….”

도준희가 이를 갈며 백부를 노려보자 백부는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어쩐지 할 말이 남은 얼굴로 눈을 굴리는 얼굴이 퍽 수상했다.

“사람만 좀 주물거리면 된다는데 돈을 준대도 싫대요. 배가 불렀어, 아주.”

“사람을 주물러? 합법은 맞아?”

쳐다보는 와중에도 드나드는 손님들을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유흥 거리에 번쩍이며 들어선 건물이 멀쩡해 보일 리가 없었다.

합법인 체하지만 실은 불법인 장사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마사지도 합법이 있고 불법이 있는 법이다. 마사지를 받으러 오는데 왜 저렇게 광을 내고 와?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출입하는 여자를 가리키며 백부를 바라보았다.

“합법 맞아, 이놈아. 마사지만 하는 거라니까. 안마 말이야, 안마.”

“안마라면 림프절 마사지?”

“림프절? 그게 뭐냐.”

“겨드랑이부터 가슴 아래 있는 거.”

도준희가 눈을 찌푸린 채 백부의 몸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보았다. 한 손으로 그의 겨드랑이부터 가슴을 긋듯이 가리키자 백부가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오호라, 그거 꼴리겠…, 아니라니까, 그런 거. 완전 마사지만 해. 이걸 계기로 사업 좀 넓혀보련다.”

‘솔깃한 게 뻔히 보이는데, 뭘.’

도준희는 관심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백부가 다시 제 가슴을 흘낏하고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돈을 번 뒤로 피둥피둥 찐 살은 어느새 그를 땅딸막한 난쟁이로 보이게 했다. 예전에는 키는 작아도 근육으로 다부진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욕심 많은 돼지.’

제 핏줄에게도 가차 없는 도준희였다.

‘운동을 게을리 말아야겠군.’

그에게 운동은 싸움질이었다. 도준희가 백부를 꺼림칙하게 쳐다보자 눈치 빠른 백부가 펄펄 뛰었다.

“왜 그렇게 봐, 새끼야?”

“……돈이나 많이 버쇼. 그거라도 있어야지.”

“그러지 말고. 왜, 너도 안마 좀 하잖아.”

“내가?”

“손아귀 힘이 세잖아.”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백부가 입맛을 다셨다.

“입소문이 좀 나면…, 아니다. 너 연예인 할래? 요즘 그…… 엔터! 그래, 엔터테인먼트가 돈이 좀 된다더라.”

“나더러 얼굴 팔리는 짓을 하라고?”

담배를 질겅이며 말하자 백부는 두꺼운 입술을 실룩거리며 투덜댔다.

“아무리 얼굴 반반하면 된다지만 그래도 사람들 앞에 서는 건데 이미지가 중요한 거 아니냐. 넌 안 되겠다.”

“그렇지?”

피식 웃자 백부가 면박을 주었다.

“새끼, 돈만 많으면 똥만 찬 돼지가 되는 거야. 사람이 일을 해야지.”

“지랄.”

“저거 사업 시작한 거 네 도움도 있으니까. 용돈이나 좀 챙겨주마.”

“……내 도움이라니?”

난 저런 꼴같잖은 일에 손가락 하나 댄 적 없는데? 싸늘하게 쳐다보는 도준희에게 백부는 시선을 피하며 살찐 볼을 긁적였다.

“여자들이 네 얼굴에 환장하잖아. 너랑 한번 자게 해주면 돈을 다발로 주겠다는데. 생각 없냐?”

도준희의 서슬 퍼런 눈과 마주친 백부는 한 걸음 물러났다. 혈연으로 따지자면 3촌 관계임에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하, 한 대 치려고 하냐? 이 미, 미친개가…….”

“입술이나 떨지 말고 말하지.”

도준희가 툭 뱉자 백부는 헛기침을 했다.

“싫으면 말고. 물건이 아깝지도 않냐? 아끼다가 썩는다. 아무튼 네 얼굴 보고 생각한 거니까, 너도 끼고 싶으면 얘기해. 알았지? 나 바쁘니까 먼저 간다.”

마침 운전수가 차를 끌고 도착하자 일 벌이기 바쁜 백부는 잽싸게 차를 탔다.

‘여기까지 부른 게 고작 저런 말을 하려고 한 거야?’

도준희는 미간에 빗금을 그었다가 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자들이 마사지 가게 앞을 힐끗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다 저 간판 때문이다.

“꽃미남 마사지 샵은 무슨, 씨발.”

말이 좋아 마사지지, 벗은 몸을 만지작대면 안 서던 것도 서고, 안 젖던 것도 젖게 될 게 아닌가. 저런 곳 가는 놈들 생각이야 빤하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성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싸움질에 더 미쳐서 그 외의 다른 것엔 관심이 없던 도준희는 저런 낯 뜨거운 곳에 드나들 정도로 떡을 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에 눈이 돌아가 집도 재산도 다 버리는 놈들이 있는 것도 알고, 눈앞에서 손목이 날아갈 판인데도 여자 위에서 허릿짓을 해대던 미친놈들도 만나봤지만 도준희에겐 이해 범주 밖의 일이었다.

“쯧쯧.”

그러므로 혀를 차며 가게를 드나드는 여자들을 비웃었다. 마침 도준희가 비웃는 여자들이 가게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자, 지나야.”

“여기까지 왔는데 왜? 겁먹지 말라니까. 내가 이미 예약도 다 했어. 가자!”

어떤 상황인지 눈에 훤하다. 이런 데 드나들어도 되냐고 빼는 척하지만 한번 경험하면 먼저 온 놈보다 더 더럽게 노는 놈들이 저렇게 소심한 척하는 이들이다.

도준희의 차가운 눈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가며 옥신각신하는 이들에게 닿았다. 역시나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기는 여자는 회사에 갔다가 왔는지 여의도에 가면 자주 보이는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다.

‘저런 꼴로 여기를 왔어? 얼마나 몸이 달았으면. 남자와 자고 싶으면 나이트를 가지 저런 곳에는 왜?’

한심해서 고개를 돌리려던 도준희는 문득 손가락을 꿈틀했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앞선 친구의 손에 엉거주춤하게 끌려가는 여자의 뒤통수가 눈에 익었다.

동그랗고 귀여워서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뒤통수. 어쩐지 매우 익숙한 느낌이 나는 뒤통수다.

‘설마 그 여자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겁먹어서 문 앞만 와도 혼비백산을 할 텐데.’

내심으로는 부정을 해도 가느스름해진 눈은 매처럼 여자를 훑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우예린, 얼른 와!”

설마가 사람 잡지.

“씨발, 쟤가 왜 여기 있어?”

‘학교에서 얌전히 공부, 아니 졸업했으면 얌전히 일이나 하면서 성실히 살고 있어야 할 여자가 왜 여기 있어?’

도준희는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마지막까지 실랑이를 하는지 우예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래, 들어가지 마. 내가 찾아갈 거니까 얌전히 기다려.’

안 그런 척하면서 넥타이도 풀고 미친 듯이 노는 놈들이 저렇게 빼는 놈들이라고, 비웃었던 생각이 쏙 들어갔다. 그 빼는 놈이 우예린이라면야, 빼는 척이 아니라 정말 빼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도준희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우예린을 노려보았다. 얌전하다고 생각한 사슴에게 없던 뿔로 걷어차인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거기까진 괜찮다. 사람이니까 방황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 그러면 못 본 일로 할 테니까.”

그는 우예린은 전혀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우예린을 주시했다. 그리고 우예린은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으로.

“……하.”

도준희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가게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걸까. 우예린처럼 겁 많은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좋게 생각하기엔 ‘꽃미남 마사지 샵’이라는 간판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럴 수 있기는…….’

“씨발.”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렸다. 앞머리 사이로 활활 타오르는 눈이 광기를 담아 퍼렇게 빛났다.

“골 때리네?”

이에 잘린 담배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떨어졌다. 입에 남은 담배 반절을 퉤 뱉어냈다.

담배를 피우지 않은 지도 벌써 2년째다. 담배 연기가 몸에 안 좋다며 담배 피우는 남자를 피하는 우예린을 본 이후부터 담배에 불을 붙인 적이 없다. 하지만 골초가 담배를 쉽게 끊을 수가 있을 리가 있나. 금단 현상 때문에 먹어 치운 사탕만 한 통이었다.

“안 본 사이에 발랑 까졌네, 우예린?”

안 봤다고 해봤자 1년밖에 안 됐는데 그사이에 뭔 일이 벌어져서……. 설마 그동안 사내새끼라도 사귀었나? 남자를 사귀기에는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았던 여자였던지라 마음을 놓았던 게 문제였을까.

도준희는 몇 년간 고이 지켜보기만 했던 우예린이 그가 비웃던 ‘자고 싶어 발정 난 가게’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위 뚜껑이 열릴 정도로 열이 받았다.

들어가자마자 우예린의 손목을 분질러버릴 것 같아서 자리를 왔다 갔다 하며 분을 풀려고 했다. 그리고 처참히 실패했다. 머리꼭지까지 분이 차올랐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처음 보는 사내새끼랑 몸을 비비려 한다는 거 아니야, 지금.”

‘씨발!’

그도 보지 못한 우예린이 늑대 같은 놈의 손 아래 얌전히 누워있을 생각을 하자 분을 가라앉히기는커녕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졌다. 도준희는 짐승처럼 파르라니 달아오른 눈으로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나 손님 호출 왔다.”

직원용 출입구랑 연결된 직원 휴게실에서는 아직 도준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직원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손님?”

“어, 좀 웃겨. 특별 요청 사항에 친구 축하 선물로 오는 거니까 겁먹지 않게 잘해달라네. 아무래도 느낌이 아다 같지?”

곧바로 지배인을 만나러 가려던 도준희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우뚝 멈추었다.

“그게 뭔 상관이야. 어차피 안마만 하는 건데.”

“그래도 재밌잖아. 난 순진한 애들이 부끄러워하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좋더라.”

“변태 새끼, 취향은…….”

낄낄대는 남자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제야 도준희의 존재를 눈치챈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도준희를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너 뭐야?”

같이 시시덕거리던 직원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누구시죠?”

“…….”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시는 건지…….”

동료 직원의 굽신거림에 목덜미가 잡힌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개짓거리야. 작게 욕설을 지껄이던 직원은 도준희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왜 친구가 말을 더듬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직원은 유흥가를 전전하며 약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았다. 정신이 나간 눈. 남자의 눈 역시 정신이 나간 눈이었지만 약쟁이들과는 약간 결이 달랐다.

비상식적인 일을 저지를 것 같은 건 똑같은데 그 방향이 굉장히 폭력적이고 제게 불리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워, 원하는 게 뭡니까?”

눈치 빠른 직원은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사장 불러.”

“…….”

“불러, 씨발 놈아. 이 새끼 팔 부러졌다고 얘기해.”

“왜 굳이…….”

어리둥절했지만 순순히 인이어와 연결된 마이크로 지배인을 호출하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본인이 한 말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듯 도준희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잡혀있던 남자의 팔이 뽀각, 하고 부러졌다.

“끄, 끄아아. 읍!”

도준희는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휴지 뭉치를 꺼내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막힌 남자의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람 팔을 하나 부러뜨린 주제에 도준희는 태연하게 남자의 턱을 막았다. 도준희에게 붙잡힌 남자의 목덜미는 건장한 청년의 것임에도 가녀린 느낌이 풍겼다.

‘미, 미친 새끼.’

직원은 소름이 확 돋아났다. 눈앞의 남자가 정상적인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폭들이 도련님이라고 부르기에 돈 많은 부잣집 자식인 줄 알아서 배알이 꼴렸지, 이런 놈인 줄은 몰랐다.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얼굴로 저런 근본 없는 짓이라니.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뭐 해? 안 부르고.”

태연하게 말하는 태도에 또다시 소름이 돋았다. 도준희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직원은 이제 말 한마디 섞을 용기가 없었다. 서둘러 지배인 호출 버튼을 눌러댔다.

―뭐야, 갑자기?

“혀, 형! 빠, 빨리요!”

―무슨 소리야? 손님 앞이야.

“빨리요, 여기 미친놈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미친놈이었지만 눈치가 보여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니 누가 와서 연호 팔을 부러뜨렸어요!”

―뭐?

“연호 팔이 부러졌다고요!”

지배인을 부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지배인 형님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과거에는 조폭 형님들과 어울렸다고 들었다.

이 사람이 아무리 도련님이니 뭐니 하는 호칭으로 불린다지만 남의 영업장에 와서 이렇게 굴고 있으면 해결해 주겠지. 기대를 갖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도준희는 직원의 반응은 관심 없다는 양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남자의 다리를 자근자근 밟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저렇게까지 구는 건가. 직원은 침만 삼켜댔다.

의구심은 당하는 남자가 더해서, 그가 억울하게 소리쳤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 가게, 지명제냐?”

도준희는 남자의 말을 무시한 채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은 희번덕거리는 도준희의 눈이 무서워서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지명제입니다. 정확히는 예약제요!”

“직접 예약하는 거야?”

“네, 네.”

“얼굴 보고?”

으득. 이 가는 소리에 흠칫한 직원이 성심성의껏 대꾸했다.

“사진을 보고 예약합니다.”

도준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아, 그래?”

“네, 맞습니다!”

대답도 꼬박꼬박 잘 해줬건만 도준희가 남자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남자가 입을 찢어지도록 벌렸다. 도준희가 억센 손으로 턱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을 터였다.

직원은 눈을 찡그리며 그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저 미친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고 싶지도 않았다.

불똥이 자신에게까지 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벽에 등을 딱 붙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자 드디어 기다리던 지배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색하던 직원의 얼굴이 흐려졌다. 지배인 형님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믿음이 흔들렸다.

‘지배인 형님이 저 미친놈을 손봐줄 수 있을까?’

아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 가게에서 지배인을 맡을 정도면 어지간히 신뢰받고 있는 게 아니니까.

직원이 간절한 눈으로 지배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았던 지배인이 도준희를 보더니 분노하기는커녕 눈가를 달달 떨었다. 딱 봐도 당황하는 기색이다.

“주, 준희야?”

“아, 관리하는 사람이 형이었어?”

다정한 얼굴에 매서운 눈으로 가게를 경영하던 지배인이 도준희 앞에서는 땀을 흘려댔다. 한 줄기 기대가 와장창 부서졌다. 직원은 슬쩍 벽에서 떨어뜨리려던 등을 다시금 딱 붙였다.

“무슨 일이야? 연호는, 걔는 왜 그렇게 만든 거고?”

지배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사실 지배인은 도준희의 백부, 도주일 회장의 휘하에 있던 새끼 어깨였다.

반반한 얼굴 덕분에 새로운 사업의 점장으로 발탁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도준희와 같은 동향 사람이었고, 온 거리에 유명했던 그의 지랄맞은 품행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주먹 좀 쓴다는 놈들 사이에서 도준희는 보자마자 피해야 하는 미친놈 1순위였다. 약하는 놈, 연장 쓰는 놈, 분노 조절 장애 조폭,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제일 피해야 하는 놈.

대부업을 크게 하는 부모에, 조폭 수장 큰아버지에, 배경도 헉 소리가 났다. 어떻게 하다가 도준희의 큰아버지 아래서 일을 하게 된 지배인은 그것까지 알게 되자 도준희 앞에서는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피하고, 피하고 미친 듯이 피했던 도준희가 눈앞에 있는 현실에 지배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미친개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왔어?’

어쨌거나 지배인으로서 이 소란을 잠재울 의무가 있는 그는 가까스로 얼굴을 폈다.

“걔, 걔가 뭐 잘못했냐?”

그 말에 남자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그건 아니다 싶은 직원도 외쳤다.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저, 저 사람이 갑자기……!”

도준희의 시선을 받은 직원은 다시 시트지가 된 것처럼 벽에 붙었다. 도준희가 다시 지배인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맡으려는 손님, 아직 있어?”

“어? 소, 손님?”

“머리가 여기까지 오는 생머리에, 얼굴 하얗고 눈이 까맣고 큰 여자 말이야.”

도준희가 한 손으로 가슴 부근을 가리켰다. 구체적인 묘사에 지배인은 바로 해당하는 여자를 떠올렸다.

“어, 있지. 잠깐 기다리게 하고 온 길이야. 문제가 생겼다고 들어서…….”

지배인의 시선이 잠깐 남자에게 닿았다. 도준희 아래 깔린 남자는 이제 포기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안 갔단 말이지.”

도준희의 잇새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적나라한 소리가 소름이 끼쳐 몸을 꿈틀거리던 남자가 조용해졌다.

“어, 그래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다른 직원, 붙여줘야겠네.”

다시금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지배인은 그가 팔이 부러졌음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말했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이제 다시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면을 또 보고 있으니 계속해서 식은땀이 났다.

“아니.”

“어?”

“내가 담당하지.”

“……어?”

“귀먹었어?”

짜증스러운 도준희의 시선에 지배인은 입을 합, 다물었다. 고향에서는 필히 조심해야 할 세 가지가 공공연한 불문율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첫째, 미소 짓는 도준희. 둘째, 주먹을 쥐는 도준희. 셋째, 눈썹을 찌푸리는 도준희.

‘도준희’는 피해 다녀야 할 어떤 것의 대명사였다.

‘아, 씨발.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속으로는 신랄하게 욕설을 뱉어내도 겉으로는 유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알았어. 네가 하겠다는 거지? 저 손님, 담당.”

“어.”

“근데 마사지…… 할 줄은 알아?”

도준희가 스윽, 몸을 일으키며 지배인을 응시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에 지배인은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런 게 중요해?”

그럼 마사지 가게에서 마사지 기술이 중요하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얘기하다간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시간을 지체하는 게 짜증 난다는 듯한 시선이라 지배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나도 안 중요하지. 속성으로 배우면 되니까. 5분이면 돼.”

그 말에 숨을 죽이고 있던 두 남자가 지배인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속성이라니. 손님을 사로잡기에 얼굴과 말발은 필수고 손 기술은 기본이라며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기 전 몇 시간이고 훈련을 시켰던 지배인이 맞는가?

비난 어린 시선을 싹 무시한 지배인이 말했다.

“저쪽 통로의 가운데 방으로 들어가. 거기가 연호 담당 방이니까. 저기 쟤, 쟤가 어떻게 하는지 잠깐 알려줄 거야. 거기 있으면 내가 손님 들여보낼게.”

손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인데 어쩐지 도준희에게 그 손님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지배인은 슬쩍 생기는 자책감을 자근자근 눌러 없앴다. 도준희의 말을 거역하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이 일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온갖 아부와 노력을 통해 얻어낸 가게이지만 목숨이 더 중요했다.

“좋아.”

“근데 저기, 손님이랑…… 원수 사이야?”

그래도 가게에서 손님을 상대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건 피해야 하는데. 도준희 성격이라면 차라리 여자를 데려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굳이 마사지하는 방을 원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하지는 않아도 돈줄이 걸려있는 만큼 소중한 일터였다. 지배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도준희는 두 눈썹을 치켜떴다.

“뭐?”

“아, 아니야.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서 그러지.”

도준희는 또 이를 갈았다. 지배인은 그가 도준희의 발작 스위치를 건드렸나 싶어 바싹 긴장했다. 하지만 도준희는 그런 의미로 열이 받은 게 아니었다.

무슨 사이냐니,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열이 받았다. 곱게 지켜주느니 뭐니 하느라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은 상태라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선후배 관계?’

그랬는데 외간 남자에게 몸을 주무르는 것을 합법적으로 허락하는 이런 곳엘 와?

“지랄.”

그동안 무슨 헛짓거리를 했나. 어처구니가 없어 입술을 달싹이자 제게 한 말인 줄 알고 지배인이 잽싸게 문을 열고 나갔다.

“얼른 손님 데리고 갈게.”

지배인이 우예린을 설득해서 데려오는 사이에 도준희는 덜덜 떠는 직원으로부터 간단한 것을 배웠다. 마사지 크림을 이용해서 어디, 어디를 주무르는지, 손을 어떻게 쓰는지를 속성으로 배우는 데는 과연 지배인의 말처럼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살았다는 표정으로 직원이 뛰쳐나가고 도준희는 마사지 방을 둘러보았다. 옅은 조명에 세련된 인테리어였다. 과연 이곳에서 마사지만 하겠는가. 도준희의 눈이 의심스럽게 가늘어졌다.

‘떡도 치겠지.’

우예린이 그것까지 노리고 왔을 거라 생각하니 다시금 머리에 열이 뻗쳤다.

“씨발.”

화가 가라앉자 곧 우예린이 방으로 들어올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도준희는 문득 그가 입은 재킷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가죽 재킷이었다.

우예린은 그녀의 이상형대로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다른 때는 무섭다는 듯 힐끗거리기만 하는데 안경에 셔츠 차림의 모범생같이 할 때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는 했다.

지금 그가 입은 가죽 재킷은 단정과는 거리가 억만 배는 멀었다. 서둘러 가죽 재킷을 벗어 직원용 서랍 안에 숨겼다. 다행히 안은 민무늬 흰 티였다. 단정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깔끔하기는 했다. 상처도 거의 아물어서 피도 비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자 바구니 안에 있는 검은색 뿔테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의 안경인 듯했다.

도준희는 바구니 안에서 안경을 집어 들었다. 고루한 티가 풀풀 나는 게 딱 봐도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마뜩잖지만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썼다. 그리고 마사지 크림을 손에 짜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크림을 손에 펴 바르는 도준희의 손이 느려졌다.

‘우예린.’

우예린이 특유의 잔뜩 겁먹은 눈으로 주춤거리며 들어왔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는지 스스로 문까지 닫는다. 행여나 그녀가 도망가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도준희는 또다시 머리에 열이 올랐다.

‘도망가기는커녕 아주 기대를 하셨나 봐?’

아무리 부모의 일이라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는 게 아니었다. 도준희는 분노한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돌려 화를 삭였다.

손에 묻은 크림을 반복적으로 비비며 다시 우예린을 보는 순간, 기가 막혀서 욕을 할 뻔했다. 간신히 입술을 깨물고 우예린을 노려보았다. 벗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옷을 다 벗은 우예린이 쭈뼛거렸다.

‘만약 내가 오늘 저 여자를 못 봤으면 다른 새끼가 저 몸을 봤을 거란 거잖아.’

인생을 살며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참은 건 처음이라서, 인내하기가 힘들었다. 우예린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을 때만 해도 정신 못 차리게 쥐고 있으려고 했는데, 막상 그 큰 눈을 덜덜 떨며 쭈뼛거리는 우예린을 보니 솟아오르던 분노가 억눌러졌다.

화는 나지만 우예린이 그의 본모습을 보고 도망가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도준희는 그가 가진 최대치의 인내를 끌어 올려 우예린에게 그 나름대로는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말 잘 듣는 모범생 우예린은 그의 말대로 얌전히 마사지대에 누웠다. 말을 잘 듣는 걸 보니 또 귀여웠다. 얌전히 누워 있는 우예린을 보자 슬그머니 화가 풀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도는?”

“세게요.”

“세게?”

“몸에 멍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목이 쉬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쳤나, 이게. 몸에 멍이 들어? 목이 쉬어? 도대체 얼마나 야하게 놀았으면 이딴 말을 해?’

도준희는 지금이라도 이 여자를 그의 집으로 데려가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못하게 박아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우예린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작고 둥그런 뒤통수는 보면 볼수록 도준희의 독기 어린 분노를 누그러뜨린다는 거였다. 도준희는 결국 우예린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부터 한다고 그랬지.’

어쩌다 팔자에도 없는 마사지 따위를 하고 있는 거지. 순간적인 자괴감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손바닥 아래에서 움찔거리는 우예린의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피부에 마음이 변했다.

모든 욕구보다 싸움질에 대한 욕구가 우선이었던 도준희는 여자와 자본 적이 없었다. 성욕을 싸움질로 푼 듯 자위조차도 해본 기억이 없었다. 환경이 환경이니만큼 잠자리에 대한 이론은 빠삭한데 실전은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도준희는 능숙한 것처럼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다리 사이가 불편하다 싶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자 가랑이 사이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우예린은 가슴을 만져도, 엉덩이를 은근하게 건드려도 신음만 흘릴 뿐 제지를 하지 않았다. 우예린의 몸을 만지는 건 짜릿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지만 점점 기분이 좋기는커녕 불쾌해졌다.

우예린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몸.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그가 아니더라도 우예린은 그녀의 몸을 허락했을 거란 데 생각이 미쳤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예린이 아픈 신음을 흘리면서 도준희를 힐끗했다. 도준희는 대학교에 다닐 때 그랬던 것처럼 이미지를 관리하며 미소를 지었다.

우예린이 안심하며 눈을 감자 그의 눈이 악귀처럼 찢어졌다. 우예린을 노려보며 손을 놀렸다.

‘씨발, 어디까지 허락하나 보자.’

그리고 우예린은 모든 것을 허락했다.

설마 했는데…….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우예린의 성기를 애무하는 순간, 우예린이 흘리던 신음, 질질 흐르던 애액, 달큼한 향기.

페니스가 부풀어 올라 아플 정도였다. 도준희는 더는 우예린을 만질 수 없었다. 급기야 우예린의 성기에서 애액이 분수처럼 튀자, 머릿속이 아찔했다.

열에 들뜬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는 우예린의 입에 제 것을 처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본성을 드러내고 그녀가 망가질 때까지 안아버릴 것 같아서 도준희는 서둘러 그녀에게서 손을 떼었다.

재빨리 몸을 돌려 방문을 닫았다.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커진 남성이 팬티 안에 답답하게 욱여넣어진 상태였다.

“준희야.”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지배인을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씨발.”

욕설을 지껄이며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바지를 내리자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페니스가 팬티 안에서 튀어나왔다.

도준희는 한 손으로 기둥을 움켜쥐었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성기를 잡자 등골이 오싹했다. 눈을 감고 페니스를 손으로 흔들었다. 우예린이 옷을 벗고 다가오던 게 떠올랐다.

‘우습게도 그때 움찔했지, 씨발.’

우예린에게 박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으면서, 막상 그녀가 그렇게 구니까 당황스러웠다. 화가 나는 동시에 함부로 옷을 벗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새끼들의 앞에서도 옷을 벗을 생각을 하니까,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거기서 우예린을 다그치지 않은 것만도 평생의 인내심을 다 끌어다 사용한 것이었다.

한 손에 살짝 넘칠 듯이 들어오는 모양 좋은 가슴과 근육일랑 하나도 없이 말랑했던 다리. 손을 뗄 수 없이 중독적이었다.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바르르 떨었던 몸.

“흐읏.”

도준희는 거칠게 신음을 흘리며 엄지로 귀두를 막았다. 서둘러 휴지를 뜯어 감쌌다. 머릿속에선 우예린이 열에 들떠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겁에 질린 사슴처럼 흔들리는 시선이 아니라, 흥분해서 어떻게 좀 해달라는 눈빛이었다.

그래.

매달리듯이.

눈앞에 하얀빛이 번졌다.

“큭!”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축축해진 휴지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도준희는 화장실 벽을 후려쳤다.

쾅!

“빌어먹을!”

마침 볼일을 보기 위해 들어왔던 직원이 화들짝 놀라 튀어 나갔다.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도준희는 거칠게 숨을 씨근덕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나랑 하는 거 말고는 만족할 수 없게 하겠어.”

도준희의 까맣고 반질거리는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미친개라며 피하는 바로 그 광기 어린 눈빛이었다.

도준희는 마음을 먹었다. 우예린이 이렇게 발랑 까진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우예린이 음란한 여자라면 적어도 다른 남자들에게는 끼 부리지 못하게 해야겠다.

순진하고 겁이 많아서 지켜줘야 하는 우예린. 그녀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음에도, 다시 만난 우예린은 도준희가 억눌렀던 그녀에 대한 마음을 폭발시켰다. 거리낄 게 없어진 도준희는 우예린을 홀라당 잡아먹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실행했다.

“사귄 기념으로 데려다줘야겠네.”

“네?”

“여자애들은 사귀면 데려다주는 걸 원하잖아요. 그렇죠?”

“…….”

“사귀는 사이인데. 응?”

도준희는 희멀건 얼굴로 풀이 죽은 우예린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사귀자는 말을 꺼낼 때부터 힘이 들어가 있던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은 그녀의 달싹이는 입술에 못 박혀있었다.

‘어디 뭐라고 지껄이나 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하기만 해봐.’

속으로 싸늘하게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속을 태웠던 우예린이다. 답지 않게 이해하고 점잖은 척했던 도준희는 원래 인내심이 촛불 심지보다 짧은 사람이었다.

‘섹스까지 했는데도 도망가고 답답하게 구는 거라면 됐다. 그래, 씨발.’

제 구멍에 내 걸 처박고 질질 싸도록 울려주기까지 했는데 뭘 더 해. 거절하면 이제 거절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없애버릴 거다.

“몰라요.”

“…….”

“사귄 적이 없어서 그게 당연한 건지 아닌지 모른다고요.”

얇고 색 엷은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도준희는 멍해졌다. 저 얇아서 더 볼품없는 입술을 보면서도 섹시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그도 갈 때까지 간 게 분명했다.

멀쩡히 공부하러 들어간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우예린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질질 싸게 하고 싶단 생각을 했을 때부터 그녀와 얽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거다.

* * *

우예린은 밤새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일이 생기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는 습관이 있다.

최대한 자신과 비슷한 일을 찾아보고 누구에게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확신하면 불안감이 누그러들고는 했다. 그건 그녀가 멀쩡한 길에서 이탈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안정감을 주는 작업이었다.

어릴 때는 보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립스틱 하나 칠하는 것도 주변 눈치를 보는 스스로를 깨닫고는 철없는 생각을 접었다. 거리에서 자유롭게 노래하는 음악인들은 멋있지만 그렇게 살기에 자신은 깜냥이 되지 않았다.

특별한 예술적 기질도 없고 특출난 논리적 머리도 없고, 다행히 성실하기는 해서 그럭저럭 회사원으로 먹고살게 된 지금은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제 안정된 사회인으로서 날개를 펼칠 시점인데, 인생을 뒤흔드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렸다. 우예린은 두려운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다 설정에 들어가 알림 차단을 눌렀다. 내내 가슴에 박힌 가시 같았던 문자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머리가 복잡할 땐 그 이유를 정리해 본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생긴 첫 남자 친구. 심지어 그 남자 친구가 몇 년간 마음에 품어왔던 첫사랑이다.

첫사랑은 조폭과 묘하게 얽힌 것 같은 가게에서 마사지사 아니, 알바로 일하는 눈치고. 대학 때 알던 모습과 달리 싸하고 거친 면이 있다.

단순히 싸하고 거친 면이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잘 어울렸던 상스럽고 천박한 말이 떠올랐지만 얼른 고개를 저어 털어버렸다. 깊게 생각하기엔 우예린의 심장이 너무 작았다.

포털 사이트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이 담겨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뭐라고 검색을 해야 하지?”

첫사랑과 만났는데 이상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첫사랑과 사귀기 전에 잠자리부터 했습니다?

이리저리 검색을 한 결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상담 글을 찾아냈다. 달달하고 가벼운 염장 글부터 성병과 관련된 깊은 고민 글까지……. 우예린은 피식 웃었다가 심각해졌다 하며 모니터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했다. 심지어 어떤 고민 글에선 상대방이 조폭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런 게 가능해?”

조폭이라니. 총기, 마약 그리고 사람까지 마구잡이로 사고파는 무법 지대의 사람이 아닌가. 법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우예린의 관념상 조폭이란 족속들은 평생 마주치면 안 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하아…….”

포털 사이트를 아무리 뒤져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엎어둔 채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어.’

아니, 애초에 도준희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 적 없다. 그런데 도준희를 만나고, 그에게 야릇한 마사지를 받다가 잠도 자버리고. 이제는 사귀기까지?

한창 그를 좋아할 때 그와 사귀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귀는 게 뭐야. 결혼하고 어떤 집에서 살지도 생각해 봤는걸.’

아무리 상상이라도 도준희가 기분 나빠할까 봐 오래 이어지진 못했지만 어쨌든 사귀는 상상을 몇 번 해보았다.

상상 속의 그녀는 온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현실의 우예린은 세상 모든 근심을 떠안은 듯 우중충했다.

“이해가 안 돼. 좋아야 하잖아? 기분 좋아서 방방 뛰어야 하잖아.”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알고 있다. 왜 좋지 않은지. 초식 동물이 위험 감지 본능이 발달했듯이 어디 들어가도 잘 굴러가는 부품이 되려고 아등바등했던 우예린도 현 상황의 기이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절절히 그리던 첫사랑과 백팔십도 다른 도준희를 보면, 누구라도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도준희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으면서도 특별히 누군가와 교분을 다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학교 동기들은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도준희의 신상을 묻는 말이 나오지만 그의 외양과 학과, 객관적인 특징만 떠들어댈 뿐 성격이 어떻다든지 어떤 사람이라든지 하는 내용은 없었다.

우예린이 도준희에 대한 의심을 털어놓기에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럴 때는 학교 소문에 빠삭했던 사람을 알고 있으면 좋을 텐데…….’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던 우예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있다. 생각해 보니.

잘생긴 남자에 한해서는 리스트처럼 머릿속에 정보를 박제해 두고 있는 사람이.

얼른 이지나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언제 시간이 되냐는 요지의 문자였다. 전송을 누르자 답은 금방 왔다.

[시간은 되는데 무슨 일?]

우예린은 고민했다. 이런 일을 문자로 말하는 건 좀 껄끄럽다.

“얼굴, 보고 말했으면, 좋…….”

여기까지 썼는데 전화가 왔다. 문자를 치느라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누른 우예린은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굳어버렸다.

―……들려?

수화기를 통해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예린은 울상을 지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수화기를 귀에 댔다.

―들리냐고. 왜 말이 없어. 씨발, 기계가 고장이 났나.

안 들린다고 생각하는지 예의 그 천박한 말투가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머리가 띵하다. 눈을 꼭 감고 침착하게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드, 들려요.”

―……우예린?

멈칫한 그가 이내 살갑게 말했다.

―핸드폰이 고장 난 줄 알았잖아요.

아까 “기계가 고장이 났나.” 하는 어투와는 백팔십도 다르다. 우예린은 혼란스러웠지만 그가 앞에 없어서 그런지 어리벙벙했던 저번보다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아, 핸드폰을…….”

―문자엔 답 안 오던데.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우예린은 제 이마를 쳤다. 끊임없이 문자 알림이 오기에 무서워서 알림을 껐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하다가 잠깐 잠들었어요.”

―그렇구나. 아직 7시인데 많이 피곤했나 보네. 내가 전화해서 깨운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막 일어난 참이었어요.”

―그래? 이상하네. 20분 전에 보낸 건 확인했던데.

소름이 쫙 끼쳤다.

―20분밖에 못 잔 거예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그가 보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냈다.

“네, 네네. 조금 자는 게 습관이라.”

―내 문자에 답장하기 싫었던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우예린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필사적으로 굴 필요가 없는데도. 도준희의 느릿느릿한 목소리는 심장을 꽉 조여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문자 확인해요.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

우예린은 초췌해진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할 기운도 없었다.

―우예린 씨는 안 좋아요?

“고개 끄덕였어요.”

―아, 보고 싶네. 어떻게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을지.

“문자 확인할게요!”

냅다 외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마자 문자 하나가 새로 도착했다.

[멋대로 끊지 말아요. 잘 자라는 말도 못 했는데.]

텍스트로만 보면 귀엽게 서운해하는 것처럼 읽히는데 실제로 들었다면 모골이 송연했을 것이다. 우예린은 울상을 지으며 얼른 문자를 확인하려고 그랬다고 답장했다. 웃는 이모티콘이 답장으로 왔다. 외면하고 문자 창을 위로 올렸다.

알림이 끊임없이 울려서 초반 문자만 확인하고 차마 들어가지 못했는데 어마어마하게 쌓여있었다.

[지금 뭐 해요?]

[뭐 하고 있어요?]

[시간 나면 말해요.]

[바쁜가?]

[뭐 하는 건데.]

‘대체 뭘 하고 있는지가 뭐 그리 궁금한 건데!’

문자 간격을 확인하니 10분에 한 번꼴로 왔다. 아래로 갈수록 그 간격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뭘 하고 있는지 집착하는 게 느껴져서 소름이 돋았다.

읽는 사이에도 계속 새롭게 문자가 올까 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새로 오는 문자는 없지만 어쩐지 지금 그가 이 문자 창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망설이다가 “지금 일어나서 씻으려고요.”라고 보내려다가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준희 씨는 저녁 먹었어요?”라는 평범한 안부를 덧붙여 보냈다. 예상이 맞았다.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얼른 씻어요. 나는 먹었으니까 안 먹었으면 얼른 먹고. 먹을 거 없으면 뭐 사갈까요?]

가슴이 뛰었다. 설레서인지 무서워서인지 희한하게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집착적인 문자 폭격에 비해서는 평범한 답장에 안도해서 한숨을 쉬었다가 집에 식량이 쌓여있다고 답장했다. 약간 아쉽다는 투의 답장이 와서 얼른 문자 창에서 빠져나왔다.

마침 이지나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럼 내일, 퇴근하고 우리 자주 가던 카페에서 보자.]

* * *

“뭐, 뭐라고?”

먹던 커피를 뿜는 이지나에게 얼른 티슈를 던지듯 건네주었다. 이지나가 티슈를 손으로 구기며 받아 들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가방에 이지나가 뿜은 커피가 튀었다. 우예린은 티슈 한 장을 더 뽑아 손가방에 묻은 커피를 깔끔하게 닦아냈다.

이지나는 할 말이 많은데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테이블 위를 닦았다. 주변을 정리한 우예린은 심호흡을 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그녀 같아도 만약 아는 동창이 만인의 연예인이던 도준희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다고 고백했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왜, 왜 처음부터 말을 안 했냐면, 그러니까 내가 독점하려고 한 건 아니라… 아니, 사실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는데 너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라서!”

우예린은 전혀 논리정연하지 못한 제 혀를 살짝 깨물었다. 횡설수설하는 우예린에게 이지나가 답답한 얼굴을 했다.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뭐? 도준희?”

우예린은 이지나의 심상찮은 반응에 긴장이 되어 손가락이 다 곱아들었다. 성향이 많이 다른 친구긴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 더 친해진 사이였다.

그녀의 권유로 발을 들이민 마사지 샵에서 도준희를 만난 사실을 숨기다니. 입장을 바꾸어도 서운하고 화가 날 일이 맞다.

“미안해. 말하려고 했는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와, 나 미치겠다.”

이지나가 심각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뭐라고 말해야 이지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우예린은 입을 다물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지나야?”

“이 가시나야!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얘기했어야지!”

골치 아프다는 듯 눈을 찌푸렸던 이지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찔끔 놀란 우예린이 미안하다고 발작적으로 소리치자 이지나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우예린은 뭔가 이상해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떻게 그런 걸 숨기냐고 배신이라고 씩씩거릴 줄 알았는데 왜 저렇게 심각한 거지?

“안 그래도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도준희. 나도 어제 들었단 말이야.”

“뭘?”

“거기 내 남친이 있어서 우연히……. 아, 몰라. 너 어떡하려고 그래?”

매사 태평한 이지나가 짜증을 내자 우예린은 어리둥절했다. 한발 늦게 작동하는 위기 감지 본능이 불길한 냄새를 감지했다.

“……왜 그러는 건데?”

“내 남친, 너도 봤지? 걔가 거기 신입이라 소식을 늦게…….”

“잠깐, 네 남친을 내가 봤다고? 언제?”

“봤잖아. 나랑 키스하는 거.”

당당한 고백에 우예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금시초문이다.

‘네가 남자친구랑 키스하는 걸 내가 어떻게 보겠니.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더라. 거기서 일하는 남친?’

“내가 너 키스하는 건 마사지 샵에서 본 거 말고는…….”

“응, 거기.”

이지나가 깔끔하게 대꾸하자 우예린은 말을 잃었다. 잠시 싸한 정적이 둘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우예린이 벼락같이 외쳤다.

“거기 유흥업소 아니었어?!”

“야, 남의 가게에 헛소문 만들지 마!”

안 그래도 카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걸 인지한 참이다. 보통은 우예린이 타박하고 이지나가 듣는 쪽이었는데 어째 입장이 바뀌었다. 우예린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동자만 떨었다.

“난 또 무슨 말이라고. 또 그 소리야? 아니라고 했잖아. 거기 특허받은 건전 마사지 샵이야. 내 말 못 믿었어?”

“생각해 봐. 마사지사랑 키스하는 걸 보고 누가 건전한 마사지 샵이라고 생각하겠어.”

이지나의 타박에 우예린이 힘없이 꿍얼댔다. 지금까지 긴가민가했었는데 평범한 마사지 샵이 맞았다니.

‘그럼 뭐야.’

우예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 그럼 건전한 마사지 샵에서 혼자 옷 벗고 세게 해달라느니 왜 거기밖에 안 하냐느니 뭐라고 한 거야……?”

“도대체 뭔 짓을 해댄 거야. 내가 너 얼굴 때문에 큰 사고 칠 줄 알았어.”

“그게 지금 할 말이니?”

뒤늦게 극심한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는 우예린을 보며 이지나가 혀를 쯧쯧 찼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너는 오해해서 그렇다고 치고 도준희는 왜 그런 건데.”

우예린은 잠깐 눈을 위로 굴리고 고민했다.

“장난치려고 장단을 맞춰줬나?”

“돌았냐?”

이지나의 차진 말투가 어쩐지 도준희를 떠올리게 했다. 이지나가 빨대로 음료수를 휘휘 저었다.

“네 말 들어보니까 단단히 코 꿰인 거 같은데.”

“누가 누구에게?”

“네가 도준희에게, 이 멍청한 친구야!”

이지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잘생기고도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보통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지나가 한심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며. 근데 아직 하나도 모르네. 정신 차려, 우예린. 너 조폭 같은 거 싫어하잖아.”

“싫어하지.”

“근데.”

이지나는 짤막하게 말하고 팔짱을 꼈다. 말 없는 친구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우예린은 뭔가 깨닫는 게 있었다. 우예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입술까지 하얗게 된 채로 바들거리는 우예린을 보며 이지나가 안쓰러운 얼굴로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남자 친구도 말을 잘 안 해주려고 해서 여기저기 귀동냥을 좀 했지. 도준희, 조폭들의 도련님이란 사람과 친분이 있나 봐.”

“조폭은 아니란 거잖아?”

혹시나 첫 번째로 사귄 남자 친구이자 첫사랑이 무법 지대에 사는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봐 잔뜩 긴장했던 우예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것보다 안 좋을 수도 있어. 사채를 썼다는 것 같은데.”

“사채……, 도준희가?”

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도준희가? 하고 다니는 건, 심지어 양말마저 명품이라는 사람이 무슨 사채를 써?”

“그러니까 그 사치 때문에 사채를 썼다는 거 아냐.”

아무리 아는 사람이 많아 아는 것도 많은 이지나라지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소문에 대해 빠삭한 만큼 잘못된 정보도 많이 퍼뜨리고 다니지 않았는가.

우예린의 의심스러운 표정에 이지나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엄청난 밑바닥 인생이라는 거지. 조폭들 탄 차에 끌려가듯이 타는 것도 봤대.”

“…….”

“너 우리 이모부 사채 썼다가 이모가 겨우 이혼하고 나온 거 알지?”

이지나가 만날 술만 마시면 하는 말이 사채 쓰는 남자는 손목을 썰어두고 도망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살벌하게 기억하다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우예린의 손을 꽉 잡고 이지나가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얼른 도망쳐. 같이 드럼통에 묻혀서 태평양에 수장되기 전에.”

“헉!”

영화에서나 나올 말. 그러나 왜인지 도준희가 자연스럽게 욕을 짓씹었던 게 떠오르자 상당히 현실감 있는 상상이 되었다. 우예린은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처럼 새파랗게 되어 손을 달달 떨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대학 때의 소문처럼 헛소문일 거야.’

그러나 머릿속 한편에선 도준희가 “씨발.” 하고 말하던 장면이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점잖다고 생각했던 아름다운 도준희. 붉은 입술이 비틀어지며 내뱉던 걸쭉한 욕. 그녀를 둘러쌌던 마사지 샵의 사내들을 겁먹게 만들었던 낯선 남자.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귀는 게 맞지 않느냐며 집요하게 몰고 갔던 도준희.

사귄다고 했지만 왜 남들이 말하는 연애하는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도준희의 위험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도준희가 사실은 어떤 사람이든, 분명한 건 그녀와 같은 종류의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그건 학벌이나 외양을 떠나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념에 관한 문제였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본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외모나 취향보다 좀 더 본질적인 특성.

도준희와 우예린은 정반대의 본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며칠 내내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대며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었다. 울적했던 우예린의 표정도 차분해져 갔다. 무엇이 진실이든 도준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 * *

연애는 처음인 사람도 연애에 대해 듣는 건 많다. 예를 들어 연애를 할 때는 연락을 자주 해야 한다든지, 서로의 일상을 챙겨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

이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포털 사이트 검색을 즐겨했던 우예린은 비교적 올바르고 예의 바른 이별 방법도 글을 통해 배웠다.

되도록 얼굴을 보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전화나 문자로.

잠수 이별은 최악.

상대방이 되먹지 못한 인간인 경우에는 복수의 의미로 잠수 이별을 택하는 사람도 심심찮게 있는 모양이지만 우예린은 도준희가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예의를 차리고 싶어 하는 모범생적인 기질도 기질이지만 잠수 이별을 할 만큼 그가 그녀에게 최악으로 대한 건 또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잊지 못할 첫사랑인 도준희에게 이별을 고하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사귄 지 일주일도 되지 않고서 말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인데 얼굴을 떠올리면 이제 마냥 설레지만은 않는다는 사실도 착잡했다. 그를 떠올리면 역시 잘생긴 사람이라는 감상과 아련함, 약간의 설렘과 갑자기 크기가 커진 정체 모를 두려움과 찝찝함을 느꼈다.

이런 마음 상태로 그를 계속 만날 수는 없다. 우예린은 제사라도 지내듯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둔 채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이제 이별을 고할 시간이다.

만나는 건 겁이 나서 애초에 제해놓았고 그다음은 통화였지만 그것도 무섭다. 남은 방법은 문자인데…….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어김없이 도준희의 문자가 와있었다.

[난 이제 퇴근 중. 밥은 먹었어요?]

알바는 직원과 달리 일찍 퇴근하나 보다.

마사지 샵은 보통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데 도준희는 저녁 먹을 시간 즈음이면 퇴근을 하는 눈치였다.

‘문자만 보면 평범한 연인 사이 같아.’

잠깐 고민했던 우예린은 약해진 마음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잖아. 생각이 달라질 일은 없을 거야.’

밥은 잘 먹었다. 도준희 씨도 얼른 맛있는 거 드시라고……. 성실하게 대꾸하다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우리 헤어져요.]

너무 다짜고짜 말하나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우린 안 맞는 것 같아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사람 만나세요.]

좋은 사람 만나라는 건 좀 아닌가? 사람 기만하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갸웃한 우예린은 마지막 말은 지웠다.

[건강하게 잘 지내요.]

전송. 수 초간, 핸드폰은 잠잠했다. 긴장했던 우예린이 떨리는 숨을 내쉬고 폴더를 닫으려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

[무슨 소리예요?]

[봤으면 말을 해.]

[너 우예린 맞아?]

[아니면 뒤질 줄 알아.]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우예린은 덜덜 떨다가 얼른 번호 차단 설정을 했다. 도준희의 문자 창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음의 평온을 얻고 한숨을 내쉬려는 참에 핸드폰이 또 쉼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준희에게서 온 전화였다. 우예린은 허둥지둥 전화 거부 버튼을 누르고 전화도 수신 거부했다. 마침내 조용해진 핸드폰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마음을 썼던 일이 해결되어서일까, 한편으로는 후련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찝찝했다. 고민을 많이 한 탓에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두통약을 삼키고 일찍 잠에 들었다. 아침에 출근하려면 기력을 많이 뺏기면 안 된다.

* * *

“씨, 씨발 새끼야!”

도준희는 달려드는 남자의 배를 발로 차고 쓰러지는 그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젖혔다. 이미 많이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은 남자가 두려운 눈으로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가 머리칼을 단단히 잡아챘다. 머리카락이 당겨지다 못해 두피가 뜯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도준희의 해사한 얼굴을 보며 풍 맞은 사람처럼 입술을 달달 떨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남자가 아는 도준희는 미친 새끼였다. 요즘 세상이 어느 때인데, 깡패들도 연장질보다는 변호사를 앞세우는 걸 선호하는 시대다. 그런데 이 새끼는 깡패도 아닌 주제에 깡패보다도 더하게 굴고 있는 것이다.

“네가 여기 일에 무슨 상관이라고 끼어들어!”

도준희는 남자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로 공사장 안을 둘러보았다. 이미 그의 백부가 보낸 사람들이 남자들을 붙잡고 무릎 꿇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나설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상관이냐고, 네가!”

악을 지르는 사내가 귀찮은지, 시선을 내린 도준희의 매끄러운 눈매에 주름이 잡혔다. 커다란 손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짝!

뺨을 얻어맞았는데 어째서 머릿속이 울리는 것일까. 남자가 얼빠진 얼굴로 도준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더럽고 어두침침한 곳에 있는 주제에 얼굴 하나는 반짝거리는 이상한 미친 새끼를.

“도대체 왜 자꾸 방해를…….”

어물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는 도준희의 눈가가 못마땅하게 찡그려졌다.

“너희들이 우리 구역 넘보는 게 일인 것처럼, 나도 일하고 있는 거잖아.”

“……일?”

“알바 말이야.”

알바? 자신한테는 생계가 걸린 일인데 그걸 알바로 표현하는 도준희의 얼굴이 너무 태연해서 남자는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고작 그런 일로 우리에게 끼어들어? 그 돈을 차라리 우리가 주면 되잖아!”

더는 머릿속이 흔들리지 않자 남자는 다시 악을 질렀다. 도준희는 짜증스럽게 남자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네가 내 백부보다 돈 많냐?”

“뭐?”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두피가 뜯어지는 고통에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신음을 흘렸다.

일그러진 얼굴의 남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도준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먹으려 했던 구역이 내 백부 거라고, 씹새야.”

그럼 이 미친놈이 그 미친개?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찰싹! 뺨을 한 대 더 때렸다. 혼이 빠진 얼굴의 남자를 바닥에 팽개쳤다. 큰아버지의 부하 하나가 달려와 남자를 억압했다.

“나 먼저 가.”

“수고하셨습니다, 도련님!”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도준희에게 허리를 굽혔다. 먼지 날리는 공사장을 빠져나온 도준희는 엉덩이에 느껴지는 진동에 얼른 핸드폰을 꺼내었다. 평소에는 하루 세 번 들까 말까 하는 핸드폰이었지만 요즘 도준희는 손에서 핸드폰을 떼어놓는 일이 없었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기 때문이다. 도준희는 난생처음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다.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잦은 연락이라 했던가. 연애 좀 해봤다 하는 놈들의 조언을 되새긴 도준희는 지금 그 조언을 충실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이런 거보다는 직접 만나는 게 좋은데.”

혀를 차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일이 바쁘다는 말에 기다린 지가 일주일이다. 연애를 시작한 뒤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게 점점 불만스러워졌지만 도준희는 참았다. 우예린은 성실한 여자였고, 지금은 바쁜 시기라고 하니까.

‘며칠만 더 봐줘야지.’

하지만 나중에도 이런 식으로 굴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성실한 우예린은 핸드폰을 잘 보지 않는 듯했다. 문자를 열 통을 보내면 그중 두 통 정도에만 겨우 답장이 온다.

“각 잡고 얘기를 해봐야지, 답답해서 원…….”

불만스럽게 투덜거리지만 장갑을 서둘러 벗어던지고 핸드폰을 확인하는 도준희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핸드폰 문자 창을 켰다.

[우리 헤어져요.]

안 맞는 거 같다 어쩌고저쩌고하는 개소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도준희의 눈에 들어온 문장은 그거 하나였다. 도준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헤어져?”

그의 기억으로는 사귄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사귀면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는 뭐가 좋냐. 계집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여기저기 쪽팔림을 무릅쓰고 물었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가 막혔다.

“골 때리네?”

도준희는 차가운 손끝으로 이마를 긁었다. 몸을 격하게 움직이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에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이 콕콕 박혀있었다.

흐릿했다. 우예린처럼.

그 여자의 마음을 모르겠다. 분명 처음에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번호까지 땄잖아. 그 겁쟁이 우예린이.

근데 갑자기 왜?

눈앞이 캄캄했다. 도준희는 머리가 어지러워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도준희에게 있어서 우예린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선명한 적이 없었다.

“씨발, 우예린.”

조그마한 계집애가 어쩜 그렇게 속을 터지게 하는지, 이번에는 그의 방식대로 살짝 밀어붙였더니 어김없이 도망을 간다.

핸드폰이 손 안에서 찌직, 소리를 냈다. 액정에 얼기설기 금이 갔다. 조금 더 힘을 주자 박살이 났다. 깨진 핸드폰을 바닥으로 던졌다.

도준희는 박살이 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우예린이 무슨 말을 남겼을까 기대하며 핸드폰을 켠 스스로가 병신같이 느껴졌다.

“미치게 만드네, 진짜.”

후, 한숨을 쉰 도준희의 눈이 반질거렸다. 그에게 얻어맞은 이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도준희의 광기 어린 눈빛이었다.

당장 우예린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하루 일정을 마무리한 도준희는 불 하나 켜지 않은 집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뭐가 잘못됐지?’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 순진하고 사람을 잘 믿는 우예린은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도준희에게 끌려다녔고 잠자리를 했으며, 그게 좋아 도준희를 또 찾아왔다.

도준희는 만족스러웠다. 이제 슬슬 몸만이 목적인 관계가 아니라 좀 더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예린이 겁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열이 뻗치는 와중에도 적정 거리를 지켜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다가갔다.

그 결과 먼저 번호를 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우예린이 번호를 받고 싶어 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도준희는 그게 다 자신이 신중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귀는 것까지 성공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중간에 뚜껑이 완벽하게 열리는 일이 생긴 것이다. 우예린이 원하는 남자상은 착하고 똑똑한 남자. 도준희는 거기에 ‘잘생긴 남자’를 추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돈을 긁어모을 거라며 백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마사지 샵은 웬만큼 잘생겼다 하는 놈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곳이었다. 우예린이 혹할 만한 얼굴들이 꽤 된다는 뜻이다.

발랑 까진 우예린이 혹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과연 그 생각이 그대로 들어맞아 사고가 발생했다.

“나는 어때?”

사내새끼들에게 둘러싸인 우예린을 보는 순간 뚜껑이 열렸다. 그래서 본 모습을 살짝 보이고 말았다. 다 보인 것도 아니었다. 반의반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아차, 싶어서 손을 봐주는 건 다음으로 미루었다.

우예린이 그때부터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문자를 확인하는 것도 늦고, 답장을 보내는 것도 늦다.

그것까지는 우예린이 회사에 다니는 착실한 사회인이니까, 바쁘겠지 하면서 이해했다. 이해하기 싫었지만 우예린이 그를 무서워하는 건 원하지 않았으므로 이해하는 척했다.

‘그런데 뭐? 헤어져?’

직원 새끼들이 화나게 해서 화를 좀 냈더니 금방 겁을 먹어가지고 벌벌 떨고서. 이제는 헤어지자고, 그것도 문자로.

새로 산 핸드폰을 강하게 쥐었다. 개통한 지 세 시간도 안 된 핸드폰이 망가질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다. 손에 힘을 푼 도준희가 싸늘한 눈으로 검은색 몸체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핸드폰이 꼭 우예린이라도 되는 양,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건 예의가 아니지, 우예린.”

* * *

우예린은 기분이 좋았다. 최근 며칠 동안 일에도 집중을 못 해 실수가 잦았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일을 깔끔히 마무리해 대리에게 칭찬까지 들었다.

신입이 일을 못하는 건 당연하다지만 그건 말뿐, 실제로 일을 못하면 가시 같은 눈초리를 받는 것이 회사였다.

맡은 일은 책임감 있게 완수하는 것에 소소한 뿌듯함을 느끼는 우예린에게 오늘 하루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우예린의 자취방은 주택가 골목 중간에 위치한 다세대 주택이었다. 주변에 소소하게 식당도 있고 모텔도 있는 적당한 도심. 그래도 집 주변은 차도 잘 다니지 않아 조용해서 마음에 쏙 드는 집이었다.

그런데 주택 근처에 웬 처음 보는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세워진 곳 앞이 카페였다. 가끔 출근할 때 배가 고프면 샌드위치를 사먹는 카페는 주인이 소일거리로 카페를 하는지 닫혀있는 날이 심심찮게 있었다.

‘뭐지? 주인아저씨 건가?’

돈이 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런 스포츠카도 모는구나. 노년을 스릴 있게 보내시나 보네. 그래도 빨간색 스포츠카보다는 검은색 고급 세단이 더 잘 어울리지 않으려나.

멀뚱멀뚱 생각하다, 남이야 스포츠카를 몰든 고급 세단을 몰든 무슨 상관이랴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스포츠카의 창문이 스륵 내려갔다. 정적을 깨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우예린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처음 보는, 싸늘하도록 무표정한 얼굴의 도준희가 핸들 위에 손을 얹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도, 도준희…….”

“이름은 안 잊었군.”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 싶었는데…….

“난 또 워낙 칼같이 끊어내서 내 이름도 기억에서 도려낸 줄 알았지 뭐야.”

빈정거리는 거였다. 도준희의 얼굴은 조각 같았다. 잘생김을 표현하는 의미의 조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표정이 없는 얼굴은 전에 없이 냉랭해서 냉기가 풍겼다. 꿈틀거리는 목울대는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소매를 걷어 드러난 손목은 오늘따라 유독 강인해 보였다.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도준희였는데. 이건 누구지?

우예린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자 도준희가 날카롭게 경고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도망가면 나 야마 돌아.”

움찔, 발을 멈추자 도준희가 후,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

“왜, 왜, 왜요?”

“애인 사이에 용건이 필요해?”

도준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내가 그만하자는 말을 안 했나? 아니면 그 문자를 이별 메시지로 해석하지 않은 건가.

잠깐 고민했던 우예린은 이참에 말로 확실히 하자 싶었다.

“헤어진 사이에 그런 말은…….”

“누가.”

도준희가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누가 헤어져.”

반박은 받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목이 저절로 어깨에 가까이 붙었다. 안 그래도 왜소한 몸이 더 작아졌다.

떨리는 우예린의 다리를 발견한 도준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화를 간신히 눌러 참은 목소리가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이리 와. 대화 좀 해.”

“…….”

“혼자 헤어지자 하고 헤어지는 게 네 매너야?”

도준희가 차가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던 문제라 찔려서 우예린은 망설였다.

‘그래, 잠깐 얘기 좀 하는 건데 뭐가 문제겠어. 당신과 나는 안 맞는 것 같다고 확실히 얘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거야.’

스포츠카의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도준희에게 어울리지 않는 차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날카롭고 사납기만 한 차는.

우예린이 생각하기에 그는 짙은 색의 부드러운 차체를 가진, 조금 큰 차가 어울렸다. 도준희는 다소 자유로워 보이기는 해도 자상하고 점잖으니까.

우예린은 도준희의 날카로운 눈매가 눈에 들어오자 생각을 멈칫했다. 예전에는 분명 그런 차가 도준희의 이미지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불만스럽게 눈을 치켜뜬 그에게는 이 날카로운 빨간 스포츠카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듯도 했다.

이제껏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 실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접한 기분이었다.

일반 세단에 비해 좌석이 낮아서 조금 어색했지만 어색함을 길게 느끼기도 전, 도준희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차에 타라고 명령한 도준희는 정작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핸들에 얹은 손목엔 푸른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대학생 때는 저 손목만 훔쳐봐도 애간장이 녹았다.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왜.”

도준희가 입을 열었다. 우예린은 어깨를 움츠렸다가 뒤늦게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문자를 보낸 거야?”

“…….”

“해킹을 당한 건가 했는데 반응 보니 네가 보낸 게 맞나 보네.”

도준희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그도 자신처럼 이 상황을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욕을 하는 모습이나 다소 거친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도준희도 사람이었다. 사귀자고 말한 걸 보면 이해는 안 되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걸 텐데.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받았으니 어이가 없기도 할 것이다. 우예린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이유가 뭔데?”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요즘 많이 바빠서요.”

“…….”

“문자를 볼 시간도 부족하고, 답장을 하는 것도 어렵고 해서…….”

“그게 문제야? 문자 줄일게. 전화도.”

도준희가 딱딱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몰랐던 우예린은 눈을 깜박였다. 도준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말했다.

“그럼 돼?”

우예린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열었다.

“그것만이 아니고요, 사실 제가 너무 급작스럽게 연애를 시작한 것 같아서 조금 후회가 돼요.”

“…….”

“그리고 또, 아직 도준희 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

“섣불리 결정한 것도 같고요. 만날수록 저랑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약간 더듬거린 부분도 있지만 무사히 잘 말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의사가 전해졌겠지.

도준희는 무표정하게 듣고 있다가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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