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2권) (4/9)

04.

“네?”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약사가 되물었다. 우예린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높여 다시 말했다. 그러자 약사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난색을 표했다.

“처방전 없으면 안 돼요.”

낭패였다. 우예린은 시계를 흘끔거렸다. 지금 뛰어 올라가도 간신히 지각을 면하는 시간이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됐었던 것 같은데.’

우예린의 집은 교회를 운영하는데, 가끔 성당으로 착각하는지 고해 성사를 하고 싶다는 언니 신도들이 있었다.

어린 우예린은 교회 집사님으로 통하는 엄마에게 신도들이 훌쩍이면서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후 피임약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엄마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불안을 위로하는 거에 앞서 해결책부터 제시했다. 엄마 말로는 그때 처방전 없이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충남에서는 처방전이 필요 없었는데요.”

“지방에 있는 약국에서는 가끔 그러기도 하는데, 법적으로 처방전이 없으면 안 돼요.”

학생들이 학교 담벼락의 개구멍이 어디 있는지 알듯이 엄마는 처방전이 필요 없는 약국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예린은 울상을 지었지만 법적으로 안 된다는데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후 피임약은 부작용이 꽤 있어서 웬만하면 사전 피임약을 먹는 편이 좋아요.”

친절한 약사에게서 사전 피임약이라도 구입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우예린은 피임약을 가방에 쑤셔 넣고 회사를 향해 뛰었다. 뛸 때마다 정조대의 딱딱한 단면이 허벅지의 살을 치대었다.

전속력으로 뛴 결과 사무실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3분 정도 늦어서 눈치를 보며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파티션을 툭툭 두드렸다.

“예린아, 오늘은 좀 늦었네?”

입사 동기인 지수련이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늘씬한 몸매로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유명했던 동기. 그녀의 손에 들린 컵에서는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났다.

우예린은 카페인이 잘 받지 않는 편이라 커피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지수련의 입맛이 고급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김 대리님은 어디 계셔?”

김 대리는 그녀의 사수였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윗사람들에게 찍힐 것 같은 일에 대해서는 칼 같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마케팅 팀의 회의가 있었다.

우예린은 김 대리의 발표를 도와 자료를 정리하고 PPT를 만들기로 했었다. 저번 주에 퇴근하기 전에 다 만들어놓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주말 동안 도준희에게 잡혀있어 점검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회의 때문에 예민해져 있을 텐데.’

지각했다는 것까지 알면 잡아먹으려고 들지도 모른다.

“걱정 마. 아까 과장님 방으로 들어가셨어. 회의도 한 시간 미뤄졌고. 지금 준비하면 돼.”

상냥하기도 해라. 왜 남자 사원들이 지수련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과장님 방에?”

“응, 과장님이 궁금한 게 있으신가 봐.”

“대리님 긴장하셨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지수련이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케팅 과장인 최 과장은 김 대리의 직속 상사로 깐깐하고 까다롭기로 따지자면 회사에서 수위를 다툴 터였다.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한국에 돌아와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바로 과장의 직함을 달았다. 듣기로는 집안도 엄격한 교수 집안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최 과장은 실수나 흠집을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로 유명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생각이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두가 모인 회의 자리에서 최 과장에게 혼나기라도 한다면 정신을 못 차리고 울지도 몰랐다.

“수련아, 나 자료 좀 정리해야겠다.”

“으응, 알았어.”

“미안. 내가 지금 바빠서…….”

지수련은 좋은 동기이기는 하지만 일을 잘해서 그런지 우예린의 긴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초조한 우예린이 얼른 컴퓨터를 켜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예린 씨.”

반짝 켜지는 모니터와 달리 머릿속은 까맣게 변했다. 홱 옆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무서울 정도로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장님.”

“지금 왔나?”

최 과장이 컴퓨터 모니터를 흘끗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3분 지각이지만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이런 날에 신입이 늦게 왔다는 사실은 결코 좋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예린은 창백한 낯으로 최 과장을 응시했다.

최 과장이 들판 구덩이에 머리를 박는 쥐를 내려다보는 매의 시선으로 우예린을 쏘아보았다.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더 엄격한 사람이 최 과장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장의 직함을 단 게 아니꼬울 만한데도 말이 나오지 않는 것에는, 최 과장의 배경만이 아니라 성격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게 틀림없었다.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최 과장은 못마땅한 눈치가 역력했으나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회의 자료 만든 거 나한테도 가지고 와.”

“네, 알겠습니다.”

최 과장이 김 대리에게 눈치를 주었다. 동갑이라고 알고 있는데 분위기로 따지자면 최 과장이 훨씬 연장자 같았다.

“김 대리, 우예린 씨 회의 자료 잘 살펴봐. 발표를 할 사람이 발표 자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어떻게 발표를 할 생각이었던 건지 궁금하군.”

최 과장의 목소리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감정 하나 없이 딱딱 끊어졌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자신감이 공기처럼 그를 자연스럽게 감쌌으나 관용은 없었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 냉랭한 분위기에 가려질 정도였다. 과연 마케팅의 기계라 불릴 만했다.

‘김 대리가 최 과장에게 불려갔다고 했지.’

지수련을 흘끗했다. 지수련은 업무 능력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눈치도 수준급이라 자기가 낄 상황이 아니란 것을 재빨리 깨달은 모양이었다.

같은 마케팅 부서로 분류되고 있기는 하지만 지수련의 사수는 이 대리였으므로 이번 김 대리의 발표가 주가 되는 회의와는 큰 연관이 없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우예린에게 눈짓을 한 지수련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 폭풍우에서 벗어난 지수련이 부러웠다.

최 과장에게 한 소리 들은 김 대리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회의는 차장님도 오실 거다. 지금 같은 정신으로 회의하면 쉽지 않을 거야.”

“…….”

“준비해서 내 방으로 30분 내로 오도록.”

최 과장은 사무실 분위기를 얼음장처럼 만들고는 과장실로 들어갔다.

우예린은 김 대리의 눈치를 보았다. 회사는 피라미드였다. 최 과장이 우예린을 질책하지는 않았지만 한 소리 들은 김 대리는 기분이 좋지 못할 터였다. 최 과장, 김 대리, 우예린 순으로 피라미드의 층을 이루고 있었으니 우예린은 김 대리가 신경질을 부리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였다.

“하아, 씨발.”

김 대리가 한숨을 쉬었다. 짤막한 욕설에 우예린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김 대리의 새파란 눈초리가 어김없이 우예린을 향했다.

“우예린, 너 뭐야.”

“네?”

“어젯밤에 내가 자료 내 메일로 보내라고 했잖아. 못 봤어?”

김 대리가 눈썹을 치켜뜨고 우예린을 공격했다. 우예린은 눈동자를 떨었다. 핸드폰이라면 어젯밤에 도준희의 품에 있었을 거다.

오늘 아침에야 핸드폰을 돌려받은 우예린은 출근하느라 바빠 문자 메시지 함을 뒤져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김 대리의 문자는 메시지 함에 쌓여있을 터였다.

“죄송해요, 어제 일찍 잠이 들어서…….”

“잠도 일찍 잤으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와? 평소에는 일찍 잘만 오더니 중요한 날에는 늦네.”

김 대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예린은 살짝 억울해졌다. 사실 최 과장의 말대로 우예린이 정리한 발표 자료는 김 대리가 맡아서 해야 하는 게 맞았다.

우예린과 김 대리가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라 같이 발표를 한다고는 하지만 발표자는 김 대리로, 공은 김 대리가 다 가져가는 구조였다. 게다가 발표 자료 역시, 아직 신입 사원의 신분인 우예린이 맡기에는 난도가 높았다.

퇴근 전까지 일주일 동안 잠도 못 자고 끙끙대면서 만들었던 만큼 발표 자료에 자신은 있었지만 김 대리가 저렇게 굴자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 같은 말단은 저 높이 있는 절벽 위 사자 같은 최 과장보다 그 아래에서 썩은 고기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김 대리가 더 무섭고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됐고, 얼른 내 메일로 보내놔.”

“네…….”

김 대리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가자 우예린은 고개를 꺾었다. 마우스를 툭 치자 모니터에 로그인 창이 켜졌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며 입을 삐죽거리다가 맞은편의 지수련과 눈이 마주쳤다. 지수련이 입술을 달싹였다.

‘별꼴이야, 김 대리.’

같은 생각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련이 눈을 내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내라는 의미다.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힘내는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회사에서 대단한 인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몇 번 꾸었다. 학과에서 수석을 몇 번 했을 때는 그런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회사에 들어오자 부질없는 자신감이라는 걸 금세 깨달았지만…….

사회에서는 대학에서 쌓아온 학점이나 스펙은 하나도 쓸데없는 거였다. 좋은 대학을 간 만큼 적당히 공부했어도 어느 회사든 갈 수 있었겠지만 우예린은 노력이 결과를 불러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회사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보다 윗사람의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출 수 있느냐였다. 그런 방면으로 우예린은 낙제에 가까웠고, 억울한 일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우예린은 한숨을 쉬고 컴퓨터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문득 도준희가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도준희가 성실하다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학교생활도 개판으로 했을 게 틀림없었다.

회사를 문구점 구멍가게 취급을 하는 걸 보면 열심히 학점을 따서 입사할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대학에는 왜 온 거란 말인가.

‘학비 아깝게.’

어쨌든 도준희가 문제였다. 그만 아니었더라면 김 대리의 문자도 확인했을 거고, 무사히 메일을 보내서 이런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어휴.’

생각해봤자 억울해지기만 한다.

핸드폰을 켰다. 엄마의 문자와 이지나의 문자 아래로 김 대리가 보낸 문자가 있었다. 얼른 회의 자료를 보내라는 문자였다.

‘근데 왜 하필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내?’

김 대리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주말까지 회사 생각에 여념이 없을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 충분히 놀고 난 뒤에 뒤늦게 월요일에 있을 회의에 생각이 미친 게 아닌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존경하지 못할 사수일지라도 회사 상사다. 별 탈 없이 회사를 다니려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았다. 그게 싫으면 더 높은 직급의 사람과 한 라인을 타던가. 윗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 따위 모르는 우예린은 하라는 대로 하는 방법을 택했다.

회의 자료는 다행히도 지난주에 눈이 빠지도록 살펴본 덕에 특별히 고칠 점이 보이지 않았다. 마무리 검토를 한 뒤 김 대리의 메일로 자료를 보냈다.

우예린은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김 대리를 힐끗거렸다. 자료를 살핀 김 대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최 과장이 말한 30분 전까지 우예린은 김 대리에게 PPT 자료에 대해 설명했다. 이해했는지 김 대리가 일어났다. 우예린은 과장실로 가는 김 대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문 앞에서 우뚝 멈춘 김 대리가 눈살을 찌푸린 채 우예린을 돌아보았다.

“뭐 해?”

“네?”

“우예린 씨는 자리로 돌아가.”

우예린은 당황했다.

“어, 최 과장님이 방으로 오라고…….”

“나만 가도 돼. 가 봐.”

김 대리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망연한 우예린을 뒤로 하고 과장실로 쏙 들어간다. 우예린은 불투명한 유리로 감싸인 과장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매사 이런 식이다.

‘김 대리 이씨…….’

우예린은 가까스로 욕설을 멈추었다. 아무리 마음속에서라지만 상사를 향해 욕을 하는 건 우예린의 유교 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준희라면 당장 김 대리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 텐데. 아니면 사람을 고용하든가.’

하지만 우예린은 도준희와 달리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상식인이었다. 한숨을 쉬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왔다. 상황을 깨달은 지수련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김 대리와 최 과장은 이야기를 잘 끝냈는지 회의 시작 전에 기분 좋은 얼굴로 과장실에서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김 대리의 표정이 흡족했다.

최 과장은 언제 웃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냉랭한 표정으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그가 시무룩한 우예린을 흘끗했으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회의 준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차장이 마케팅부를 찾았다. 모든 사원들이 분분히 일어나서 차장을 맞이했다.

회의는 착착 진행되었다. 김 대리는 우예린이 설명한 대로 발표를 해나갔다. 자기가 알고 있던 것을 보태어 발표 내용은 풍부했다.

발표가 끝난 후 회의 자료를 보기 쉽게 정리했다는 차장의 칭찬이 있었다. 다만 사원 전체 질의응답 시간에는 김 대리가 당황했는지 말문이 막히는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저것도 모르냐.’

처음 입사했을 때는 전문적인 사람처럼 보였던 김 대리에 대한 존경심이 바닥을 쳤다. 내심 에휴, 한숨을 쉬던 우예린은 최 과장과 눈이 마주치고 숨을 들이켰다.

언제 보고 있었는지 최 과장이 차가운 눈으로 우예린을 보고 있었다.

“우예린 씨가 대답해 보지.”

“네?”

“자료 만든 거 우예린 씨 아닌가.”

다들 의외라는 시선으로 쳐다봐서,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는 김 대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못마땅하게 펜대를 굴리던 차장이 “그랬나?” 하며 우예린을 응시했다.

우예린은 침착하게 김 대리가 답하지 못한 질문에 제 생각을 풀어냈다.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해는 된 듯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넘어간 듯했다.

“좋군. 이번 제품은 김 대리가 발표한 대로 진행해 봐. 우 사원의 아이디어가 좋군그래.”

표정이 썩어들어 간 김 대리가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우예린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이거, 잘된 거지?’

라인을 탈 자신은 없었지만 차장에게 눈도장을 찍었으니 나쁜 건 아닐 듯했다. 가슴이 뒤늦게 밀려온 긴장과 설렘으로 쿵쿵 뛰었다. 발그레해진 얼굴이 차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최 과장을 향했다.

의외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인 줄 알았더니 아랫사람의 고충을 알아주는 면이 있을 줄이야.

‘단순히 김 대리가 답답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건, 속이 후련했다. 주말 내내 걱정했던 회의는 그렇게 흡족하게 끝났다. 회의가 끝나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는 사람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우예린은 재빨리 산부인과로 향했다. 회의가 끝났으니 잠시 미뤄두었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차례였다.

* * *

처방전을 들고 사후 피임약을 타러 약국에 가자, 우예린의 얼굴을 기억한 여자 약사가 아침에 미처 설명을 못 해줬다며 피임약 복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사후 피임약은 독하니 꼭 밥을 먹고 복용하라는 설명까지 들은 우예린은, 약국을 나오며 우울한 한숨을 쉬었다. 대학 때만 해도 자기가 이런 상황에 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준희 개자식.’

주문처럼 외고 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팀원들이 맛있는 걸 먹으러 간 사이 우예린은 근처 김밥 집에서 김밥을 사고 회사로 돌아왔다. 사람이 없어 탕비실은 텅 비어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김밥의 포장지를 깠다.

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맛이 없어도 약을 먹기 위해 밀어 넣으니 목이 턱 막혔다. 갑자기 뜨거운 게 울컥 치밀어올라 억지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도준희 미친놈.’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욕을 뱉어냈다. 주말 동안, 기분이 울적해질 때마다 도준희를 탓했던 탓에 욕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웠다. 기분이 좀 더 나아진다.

그것도 잠시, 이 모든 고생이 도준희가 콘돔을 끼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니 더 기분이 나빠졌다. 생각해 보면 마사지 샵에서 만난 이후에도 도준희는 콘돔을 끼지 않았다. 그때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게 천운이었다.

도준희는 콘돔을 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제는 그가 싼 정액이 구멍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끔찍한 소리까지 해대었다. 그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를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정말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만약 그렇게 됐을 때 도준희가 어떻게 반응하려나. 무슨 소리냐며 회피를 할까. 교회에 찾아왔던 언니들의 하소연을 생각해 보면 비겁하지만 흔한 변명인 것 같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기 애가 맞는 거냐며 의심할 수도 있어.’

자신이 남자 얼굴을 밝힌다며, 잘생긴 사람에게 눈이 돌아갈 게 분명하다고 대놓고 의심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상이다.

아니면 낳으려고 하려나? 비겁하지는 않지만 대책이 없고 달갑잖은 반응이었다. 무슨 반응을 보일지 상상이 안 간다.

‘당연하지. 미친놈이니까.’

미친놈 생각을 예상한다면 자신도 미친놈이어야 할 거다.

우예린은 서둘러 김밥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팀원들이 오기 전에 모두 치워놓아야한다. 입맛이 없는 탓에 끝까지 먹는 건 쉽지 않았고 결국 반 줄만 해치웠다. 이 정도로도 약을 먹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종이 갑을 깠다. 약은 한 갑에 한 알뿐이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탕비실 문이 벌컥 열렸다. 기겁을 한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입 안에 남은 김밥이 이 사이에 씹혔다.

“예린아!”

지수련이었다. 우예린은 서둘러 입 안에 남은 김밥을 꿀꺽 삼키고 종이 갑을 손바닥으로 슬그머니 가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끌어당겨 책상 아래로 떨어뜨렸다. 종이 갑이 무릎 위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으응?”

“어디 갔나 했더니, 왜 김밥을 먹고 있어? 발표도 잘했으면서.”

지수련이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반 줄 남은 김밥과 우예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그녀의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먹을래?”

지수련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 고기 먹고 왔어. 배 터질 것 같아. 고기 먹지. 김밥 가지고 배가 차?”

“입맛이 별로 없어서.”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커피를 탄 지수련이 우예린의 옆에 의자를 빼 앉았다. 아메리카노인 듯 쓴 커피 냄새가 났다. 지수련은 카페인 중독이었다.

“아니, 괜찮아, 괜찮아.”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혼자 있을 수 있게 나가준다면 정말로 고마울 것 같았다. 미안한데 나가달라는 말을 어떻게 부드럽고 완만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는 우예린과 달리 지수련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심장을 떨어뜨릴 말을 했다.

“나 사실 아까 예린이 너 봤어.”

“어? 어디서?”

산부인과에 들렀던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크게 들썩였다. 우예린의 마음도 모르고 지수련은 해맑은 얼굴로 조잘거렸다.

“잠깐 커피 사려고 카페 나갔는데 약국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 맞지?”

눈도 좋아라. 약국에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하더라도 무엇 때문인지 아는 건 아니다. 괜히 거짓말할 필요는 없지.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예린을 살폈다.

“머리가 아픈 건 아니고? 아플 만하잖아. 김 대리 하는 거 보니까 충분히 아플 만해.”

지수련이 목소리를 낮추고 빈정거렸다. 김 대리는 집 잘살고 예쁘고 일도 잘하는 지수련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지만 아주 명확한 외사랑이었다. 김 대리에 대해 말하는 지수련의 표정은 냉랭 그 자체였다.

“아니, 진짜 괜찮아. 회의도 잘 끝났잖아. 약국은 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거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최 과장님이 한마디 하니까 김 대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라. 최 과장님 다시 봤어.”

우예린은 지수련의 얘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무릎을 달달 떨었다. 덩달아 무릎 위의 약갑도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약이 떨어질까 봐 무릎을 멈추었다. 지수련의 얘기는 멈추지 않았다.

“과장님 멋있지 않니?”

이 말은 조금 더 잘 들렸다. 우예린은 눈을 크게 뜨고 지수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예쁜 얼굴이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취향이야?”

우예린은 심각하게 물었다. 이지나도 그렇고 도준희도 그렇고, 다들 자신을 향해 잘생긴 얼굴에 껌벅 죽는다고 폄하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자신이 잘생긴 얼굴에 취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확한 취향이 있었다. 아무리 잘생겨도 거칠고 사나운 인상에는 호감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잘생겼다고 느껴지지도 않는 탓이다.

우예린의 취향은 맑고 투명한,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마초는 특별히 싫어했고 너무 강한 남자 느낌이 나는 것보다는 청량한 소년미를 좋아했다. 딱 도준희처럼. 정확히 말하면 예전의 도준희 말이다. 시든 시금치처럼 시무룩해진 우예린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그냥 미친놈이고.’

대학 시절, 교정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도준희는 청량한 과즙을 톡톡 터뜨리며 가는 것 같았다. 머리 위에는 후광이 비쳤고 큰 키와 늘씬한 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요즘 인기가 많다는 연예인들보다 훨씬 더 연예인 같은 사람이 도준희였다. 오죽하면 옆 학교 사람들도 K대의 모델이라고 했겠는가.

도준희……. 자신의 첫사랑. 아니, 이제는 과거가 된 첫사랑이다.

우예린은 다시 울적해졌다. 어찌 됐건 그런 우예린의 확고한 취향에 최 과장은 살짝 벗어나 있었다. 차갑고 딱딱해서 같이 있으면 불편한 남자는 숨만 막힐 뿐이다.

“그런 취향?”

지수련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잘생겼잖아.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어린 거고 삼십 대 초반이면 많은 건 아니지. 우리 엄마, 아빠도 그 정도 나이 차이인걸.”

“뭐, 나이보다는…….”

“나이 말고는 딱히 흠일 게 없는데? 아, 무뚝뚝한 거?”

비슷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애교 많은 남자보다는 무뚝뚝한 연상이 좋아서 그런가. 그게 더 좋던데. 나이 많은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최 과장님 정도면 아주 괜찮은 편이지.”

“그렇구나.”

우예린은 의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탕비실에서 지수련을 내쫓는 건 힘들 듯하니 차라리 그녀가 나가는 게 나을 듯했다. 옥상의 야외 정원이라면 넓어서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무릎 위의 약갑을 꽉 움켜쥐는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

“최 과장님…….”

지수련의 말이 뚝 끊겼다. 문을 열고 들어온 최 과장이 눈을 치켜떴다. 대화의 당사자가 찾아와버렸다. 우예린의 머릿속이 일순 진공 상태가 되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지? 당황하던 우예린은 지수련의 입술과 혀가 미묘하게 방향을 바꾸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놀랄 만큼 능란한 태세 전환이었다.

“찾아가려고 했는데. 과장님 오셨네요. 커피 드시려고요?”

분명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을 거다.

“그래.”

“아까 회의에서 이해 안 가는 게 있었거든요.”

그러고서는 회의 때 최 과장이 김 대리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 질문을 퍼붓는다. 언제 그렇게 자세히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최 과장은 무뚝뚝하지만 질문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우예린은 문답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단했다. 그녀였다면 최 과장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해서 몇 초 정도는 멈춰 있었을 텐데, 과연 사람 대하는 게 능숙한 지수련다웠다.

어쨌든 그 덕에 누군가의 뒷얘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열성적으로 일 얘기를 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정신을 차리자 지수련은 깔끔하게 일어난 상태였다.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응?’

언제 문답이 끝났을까. 지수련은 우예린에게 눈짓만 하고 탕비실을 나갔다. 우예린은 당황해서 손을 움찔했다. 과장님이랑은 어색한데! 같이 나갈 타이밍을 놓쳤지만 지금이라도 나가자. 한 손에 약갑을 챙기고 다른 손으로는 물컵을 쥔 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도 이만…….”

“우예린 씨.”

움직이려다가 멈칫했다.

“네, 과장님.”

“어디 아픈가?”

최 과장이 우예린이 들고 있는 약갑을 눈으로 가리켰다. 우예린은 슬쩍 손바닥으로 약갑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난 또, 김 대리 일로 고생해서 병이라도 난 줄 알았지.”

‘농담을 하는 건가?’

우예린은 미심쩍게 최 과장을 바라보았다. 최 과장은 무심한 얼굴로 커피를 타고 있었다. 이대로 나가도 되나? 엉거주춤하게 서있자 역시 할 말이 남았는지 최 과장이 입을 열었다.

“원래 그런 편이야?”

“네?”

“원래 그렇게 긴장을 많이 하냐고.”

커피 잔을 든 채 최 과장이 우예린을 마주 보았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어서 우예린은 땀이 삐질 흘렀다. 어려운 상사를 대하느라 마음은 긴장하고 있는데 하필 지금 하체가 불편했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땀이 찼는지 정조대가 미끄러질 것 같았다. 아침에 벗으려고 할 때는 죽어도 안 빠지더니 왜 자꾸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우예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최 과장의 시선이 의아해졌다. 우예린은 다리를 꼬았다가,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부동자세를 취했다.

“어디 불편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적당히 긴장하는 건 좋은데 과한 건 좋지 않아. 신입이라고 겁먹을 필요도 없어.”

최 과장의 말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하체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아, 알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알고 있어.”

최 과장이 한숨을 쉬었다.

“열심히 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란 거야.”

최 과장의 눈엔 그렇게 보였던 걸까? 긴장을 많이 했던 건 사실이다. 일적으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김 대리는 자기가 윗사람에게 입 속의 혀처럼 구는 것처럼 신입 사원들도 자기를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랐다.

때문에 우예린은 눈치 빠른 사원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그만큼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최 과장이 이런 말을 하다니. 무뚝뚝하고 깐깐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눈치도 빠르고 세심한 편이었던 걸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할 말이 더 많이 떠올랐을 것 같은데.’

지금은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우예린은 허벅지를 딱 붙였다. 정조대가 내려가지 않도록 힘을 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과장이 서늘한 시선을 커피에 꽂았다.

“별거 아니야. 노력하다가 지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한 거니.”

김 대리처럼 이용하고 버리려는 태도가 아닌 것만 해도 감사하다.

지잉.

전화가 울렸다. 우예린의 전화였다. 양손에 컵과 약을 들고 있어 남는 손이 없는 우예린은 주머니의 진동을 느끼며 난감해했다.

최 과장이 무심하게 말했다.

“나갈 필요 없으니까 편하게 있어.”

탁.

최 과장이 나가자마자 우예린은 서둘러 물컵을 내려놓고 탕비실의 문을 잠갔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에 한숨이 길게 터져나왔다.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도준희의 이름이 떠있었다. 도준희의 이름만 보아도 긴장이 오스스 솟아났다.

주변을 살피며 귀를 쫑긋했다.

끼이.

탁.

탕비실에 붙어 있는 과장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우예린의 눈매가 얄팍해져서 위로 올라갔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우예린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이후에나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건 굉장히 부당한 상황이다.

‘당장 따져야 해.’

전화를 받자마자 강하게 나갔다.

“도준희!”

―깜짝이야. 왜?

도준희의 평범한 반응에 말문이 막혔다. 따져야 하긴 하겠는데 뭐라고 따져야 하지. 당신 때문에 오늘 팀원들 맛있는 거 먹는 데 가지도 못했다고? 그건 뭔가 투정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우예린은 기가 약해서 도준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을을 맞은 벼가 머리를 숙이는 것처럼 수그러들었다.

‘그래. 마구잡이로 굴지 말고, 할 말을 정리해서 퍼붓는 거야. 도준희랑 달리, 난 논리정연하고 이성적이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풀지 못한 분노와 불만이 가슴에서 들끓어 얼굴이 빨개졌다.

“왜 전화했어요?”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우예린은 다리를 불편하게 꼬았다. 바지를 입을 걸 그랬나. 아니다. 일반적인 속옷과 다르니만큼 티가 났을 것이다.

‘이건 왜 이렇게 미끄러질 것 같은 거야.’

차라리 벗어버리고 잠깐 나가서 속옷을 사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얼굴이 밝아진 우예린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흉물스럽게 생긴 주제에 새 거라서 그런지 정조대는 겉으로는 멀끔해 보였다. 우예린은 정조대를 내려다보다가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내리려는데.

멈칫.

‘더는 내려가지 않잖아?’

미끄러워서 벗겨질 줄 알았더니 이래서야 아침이랑 똑같다.

‘이게 뭐야!’

흙빛이 된 우예린의 귀로 도준희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뭐 하길래 끙끙대?

신경질이 난다.

“전화한 용건이나 말해요.”

―주변에 누구 있어?

문득 우예린은 도준희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부드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지 않게라니. 그래도 학교에서 만났던 도준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요 며칠의 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이상한 느낌에 우예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우예린, 누구 있냐고 물었잖아. 남자?

“나, 남자는 무슨 남자예요. 탕비실에 혼자 있어요. 사람이 있으면 애초에 전화를 받았겠어요?”

미친놈이다. 의심 많은 미친놈. 안 그래도 무서운 미친놈이 의심까지 많으니 소름이 돋았다.

―뭐, 어차피 남자랑 있어봤자 딴짓은 못 할 테고.

“…….”

―그건 잘 차고 있지?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라 도준희의 말을 듣자 화가 울컥 났다. 정조대는 땀 때문에 끈적이고 미끄럽기만 할 뿐, 벗겨지지는 않았다.

왜 속옷은 면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우예린은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땀을 흡수하지 못하는 속옷은 속옷의 기능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정조대는 속옷이 아니다. 속옷 모양을 한 불륜 방지 기구에 가깝다.

―약국 갔다 왔던데 어디 아파?

“아니요, 안 아파요. 근데…… 어?”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이 딱 굳어졌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어……, 약국 간 거, 어떻게 알았어요?”

도준희는 “난 또 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당당히 대꾸했다.

―명함은 괜히 보여준 줄 아나.

우예린은 오늘 아침 도준희의 손에서 흩날리던 심부름센터, 이른바 흥신소의 명함이 떠올라 현기증이 났다. 선풍기를 켜지 않아 더운데도 손등에는 소름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공포 영화를 보는 듯했다. 아니, 그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현실이 공포 영화야.’

“그,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갔다 온 거예요. 별거 아니었어요.”

―그래?

“네…….”

몸이 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자신감에 찼던 우예린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대꾸했다. 가까이 있나 멀리 있나 어차피 도준희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신세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예요?”

―그것도 그렇고, 날씨가 더워서 거기에 땀 차지 않았어?

정확한 예상에 우예린은 정조대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땀이 나서 습한 게 느껴졌다. 불쾌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꾸하기는 민망한 일이라 입을 꾹 다물었다.

도준희는 뭘 하고 있는지 숨이 거칠었다. 우예린은 눈썹을 모았다.

“뭐 하면서 전화 받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 잠깐만.

우당탕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을 것 같아 우예린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잠시 후 도준희가 멀끔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지금 혼자지?

“네.”

―치마 걷어봐.

“네?”

―걷어보라니까.

“왜, 왜요. 뭐 하려고요.”

도준희는 말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데 알 것 같았다. 두 번 말하게 한다고 귀찮은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도준희가 상상되었다.

―사람 없다며. 솔직히 말해. 아니면 계속 땀 찬 정조대 차고 있을 거야?

역시나 짜증이 스민 목소리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우예린은 불만을 삼키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밖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치마를 걷어 올렸다.

―빨리 걷어라.

“네…….”

―물티슈 꺼내봐.

물티슈는 없고 두꺼운 휴지는 비치되어 있었다. 휴지를 뽑아 물을 조금 묻혔다.

―안에 닦아내.

우예린은 그대로 실행하다가 상황이 어이가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끈적해서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묵묵히 계속했다.

―하고 있어?

도준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기자 우예린은 머리를 터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다했으면 이제 일반 휴지를 써.

물을 묻히지 않은 휴지로 정조대 안쪽을 닦았다.

‘누가 본다면 창피해서 죽고 싶을 거야.’

도준희의 지시대로 하다가도 때때로 뒷골이 띵할 만큼 민망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구석구석 닦아 내. 잘 만들기야 했겠지만 쇠에 땀이 닿으면 안 좋아.

‘퍽이나 걱정해 주네.’

불퉁한 생각이 튀어 올랐다.

―안쪽까지 닦아.

휴지를 깊숙하게 넣었다가, 손가락이 털을 건드렸다. 우예린은 미모사처럼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몸이라고 해도 어색했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우예린은 샤워를 할 때도 이 부분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후다닥 씻어내곤 했다. 휴지로 그 위를 대강 닦아냈다.

“다 했어요.”

―이젠 안 불편해?

“한결 나아요.”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목소리도 숨이 죽은 채소 같았다.

―하아.

수화기 너머로 도준희가 한숨을 쉬었다. 자괴감에 눈을 내리깔았던 우예린은 그의 한숨이 귀에 턱 걸리는 느낌이라 움찔했다.

“왜요?”

―보지 못하니 알 수가 있나.

그걸 꼭 알아야 하나? 의아했던 우예린은 약간 신경질적인 그의 목소리가 뜨겁다는 것을 눈치챘다. 귓불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기가 회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도준희가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아닌가 싶어 덜컥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였다면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을 텐데 도준희가 상대가 되자 아주 걱정이 되었다. 도준희라면 기상천외한 일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도준희도 같은 것을 생각했는지, 마뜩잖게 말했다.

―회사 꼭 다녀야 하냐?

“당연하죠!”

애초에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합격한 회사다. 도준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문제였다.

―흐음…….

도준희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우예린은 울상을 지었다. 도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참 좋겠다. 도준희를 짝사랑했었던 때도 그의 생각을 이렇게 궁금해한 적이 없었는데 이리된 상황에서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니 황당하기만 하다.

―알았어, 약속했으니까.

마침내 도준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우예린은 안도해서 한숨을 쉬었다.

―회사 끝나면 딴짓하지 말고 집으로 와.

우예린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씁.

“무슨, 딴짓을 해요, 내가! 이 꼴로는 하고 싶어도 못 해요.”

울분을 담아 와락 소리치자 도준희가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

만족스러운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나도 얼른 일 끝내고 갈 테니까.

“…….”

―집에서 봐.

목소리만큼은 녹을 것처럼 부드럽고 섹시했다. 우예린은 저절로 집중하는 귀를 탁, 때렸다. 얼굴 밝혀서 이 지경까지 됐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귀가 얼얼하게 아프자 정신이 들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닫으며 우예린은 두 눈을 강하게 빛냈다. 대책이 필요하다.

* * *

최강현. 회사에서는 최 과장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커피를 들고 과장실로 들어갔다.

“과장님, 오늘도 힘내십시오!”

문 밖에서부터 김 대리의 열의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최강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가 사라졌다.

김 대리에게 그의 아버지가 회사 임원이라는 걸 들킨 건 조금 곤란했다. 회의에서 면박을 주었는데도 여전히 저런 태도다.

최강현은 의자에 앉은 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김 대리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척을 질 생각도 아니었으니까.

그랬는데, 김 대리에게 당하며 쩔쩔매는 여자를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우예린.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차가운 커피를 쥐며 탕비실 쪽을 응시했다. 우예린은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건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탕비실은 매직미러로 만든 탓에 안이 훤히 보였다. 설계가 잘못된 탓이다. 매직미러인 줄 모르고 실수를 했던 사원들의 민원으로 조만간 교체될 예정이었다. 우예린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흘끗거렸다. 보아하니 매직미러인 줄 모르는 모양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를 응시했다. 외부인들이 생각하기에 신입 사원들은 모두 빠릿빠릿하고 성실할 줄 알지만, 열심히 하는 신입은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다. 머리가 좋은 이들 중에는 요령을 피우는 이들이 많고, 회사는 그런 요령이 안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우예린은 요령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신입이었다.

‘그러니까 김 대리에게 당하기만 하지.’

처음에는 어련히 잘하겠거니 싶어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눈에 거슬리더니 이제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예린은 볼 때마다 우직한 소처럼 김 대리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쯧, 혀를 찼다. 저렇게 요령 없고 성실하기만 한 사람이 회사에서 제일 못 버티기 마련이다. 스트레스로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으니까. 우예린은 얼마나 버티려나.

‘회식 때 듣기로는 부모가 엄하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인가.’

저런 보수적인 여자도 연애는 하겠지. 본인과 비슷한 보수적이고 성실하고 착한, 그러나 재미없는 남자를 만나서 공원이나 박물관 아니면, 카페를 돌아다니는 지루한 데이트를…….

‘남의 연애사에 무슨 관심이냐.’

최강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우뚝 멈추었다. 홱,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우예린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저 안에서 실수를 했던 사원들이 몇 있었지만 대개 적나라하게 눈을 뒤집고 화장을 하거나 코를 파거나 이를 쑤시는 정도였지, 치마를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스타킹을 바꿔 신으려는 건가, 의심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최강현은 그녀의 하체를 감싼 정체 모를 물건에 시선을 못 박았다.

‘저건 뭐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우예린이 도톰한 입술을 깨물며 금속 물체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최강현의 무뚝뚝한 눈매가 찢어질 듯 커졌다. 얌전하고 보수적인 신입, 우예린이라고……? 툭, 종이컵에 담겼던 커피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 * *

퇴근 후, 우예린은 버스 안이었다. 오늘 하루는 꼭 입사 첫날처럼 긴장으로 가득했다. 처음 입어보는 정조대가 불편했고, 혹여 누가 눈치챌까 봐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있어 손목까지 뻐근했다.

행여나 바람에 치맛자락이 날아갈까, 바람이 불면 치맛자락을 붙든 채 꼼짝도 안 했다. 다행히 그 외에 신경 쓰이는 일은 없었다. 김 대리의 눈초리가 뾰족한 것을 제외하고.

‘그러고 보면 과장님도 눈치가 이상했는데.’

빤히 쳐다보던 최 과장의 시선에 생각이 미쳤다. 김 대리는 오늘 아침 회의 일로 그렇다 치고, 최 과장은 왜 그럴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쳐다보더니 퇴근하는 시간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최 과장보다는 직속 상사인 김 대리의 문제가 더 컸다. 아랫사람을 곧잘 부려먹으면서 다행히도 화는 쉽게 풀리는 편이었다.

‘내일은 좀 일찍 가야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오늘 쌓였던 앙금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 대리의 문제를 머릿속에서 치웠다. 그러자 걱정거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도준희.’

우예린은 눈앞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대로는 안 돼.’

언제까지 도준희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흥신소에 조폭에, 위험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 도준희가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일하는 내내 대책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했다.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해도 깔끔하게 무시할 게 뻔했다.

우예린은 머리를 싸매다가 결국 이것도 남자 문제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럴 때면 떠오르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있지.’

반색한 우예린은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우예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국민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가 없는 때가 없었던 이지나는 남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주말 동안 바빴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뭐 하느라 바빴는데?]

도준희 얘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느라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핸드폰이 지잉, 지잉 울렸다. 성격 급한 이지나가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건 것이다. 전화를 받자 이지나가 특유의 빠른 말투로 말했다.

―도준희랑은 어떻게 됐어?

“으응?”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던 도준희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우예린은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우예린의 반응에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너 설마…….

수화기에 귀를 갖다 대며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데이트하느라 바쁜 거였어?

맥이 탁 풀렸다. 하긴 말을 안 했는데 지나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별 섹스라는 말에 넘어갔다가 이렇게 됐다는 것을.

도준희가 심상찮다는 걸 알려준 건 지나였지만 주말 동안의 일을 말한다고 믿을지는 미지수였다. 한숨을 쉬었다. 한숨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했는지 이지나가 혀를 찼다.

―헤어진다고 했다면서.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지나야.”

친구인 이지나라고 해도 사정을 얘기하는 게 창피했지만 어느 정도는 말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너 안전 이별법 알아?”

―뭐?

“그러니까 서로 감정 상하지 않게,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는 방법 말이야. 너 그런 경험 많잖아. 예전에도 끈질긴 사람 만났었는데 잘 해결했다며.”

―아 그 새끼? 힘들었지. 어지간히 질척거려야지. 꼴에 운동을 해서 위협적이기까지 했다니까.

이지나가 질색을 했다. 우예린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다.

―잘 차였지, 아주.

“차였다고? 어떻게 했는데?”

―그야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그건 왜?

“상대방이 헤어지자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래, 자세히는 말 못 해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이지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누가?

“누구긴.”

한 사람 말고 더 있겠는가.

―설마 도준희?

“응.”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지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지자고 잘 말한 거 맞아?

“응, 헤어지자고 했어. 자꾸 전화 오길래 전화번호 차단도 했다고.”

―그런데?

“그런데 집 앞에까지 와서……. 어쨌든 헤어지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나 봐.”

이별 섹스 얘기는 하지 말자. 도준희에게 순간 혹해서 넘어갔다는 소리를 하면 등신, 천치 온갖 욕을 다 들어먹을 것 같으니까.

“이해가 안 가. 알고 보니까 예전부터 날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본모습도 숨기고 있었고. 가지 말라고 수갑을, 아니 못 가게 하니까, 그래서 주말 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거야.”

―…….

“근데 알잖아. 나 거친 사람 싫어하는 거. 충남에 살 때 교회가 유흥가에 위치해서 그런 사람들이라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아. 하아, 어떻게 하면 헤어질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했던 문제를 한탄하며 털어놓았다. 이지나는 한참이 지나도 아무 말도 없었다.

“지나야?”

―그러니까 도준희가 널 예전부터 좋아해 왔고, 이제는 헤어지자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집착한다는 거지?

“바로 그거야.”

깔끔한 정리에 우예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도준희가? 내가 아는 그 도준희?

“맞아, 그 도준희.”

횡설수설했던 말을 깔끔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이지나에게 감탄했다. 그러자 이지나는 또 아무 말이 없었다. 우예린은 답답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들려?”

통신 상태가 안 좋나, 작게 중얼거리자 수화기 너머로 이지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린아, 혹시 꿈꾸다가 일어났어?

휴우, 말끝에 한숨이 붙었다.

“무슨 소리야?”

우예린이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화기 너머, 이지나는 네일 정리를 받은 손톱을 들여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도준희의 소문이 안 좋으니 헤어지라고 하기는 했지만 우예린이 도준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았다.

연애란 게 그렇다. 주변 사람이 충고를 해줘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을 칼로 무 베듯 가를 수 있으면 그 사람은 현자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우예린이 헤어지지 못하고 있으면 충고를 해주고, 헤어졌으면 위로를 해주려던 이지나는 모든 의욕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도준희가 집착을 하다니.

도준희가 누구인가. 캠퍼스에서 제일 이슈였던 남자가 아닌가. 그만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도준희를 좋아하는 우예린뿐만 아니라 이지나도 도준희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참 맑고 선하다는 평은 우예린이 도준희를 좋아하니 좋은 면만 본 것이고, 이지나가 보기에 도준희는 관심이 없는 대상에게는 지독하리만큼 냉정한 사람이었다.

캠퍼스의 화제 인물인 만큼 관심 있게 다가가는 학생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모두 도준희의 냉정한 무시에 나가떨어졌다. 말로 면박을 주는 것보다 쳐다도 보지 않는 무시가 더 강력했다. 사람을 잘 본다고 자부하는 이지나는 마침내 도준희가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근데 그런 사람이 뭐? 집착을 해?’

사귄다고 했을 때만 해도 놀라웠지만 지금은 너무 가서 오히려 푸시식, 관심이 식었다. 과대 해석해서 착각하는 거 아니야? 이제는 우예린이 도준희와 사귄다는 말 자체가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의 말에 따르면 도준희가 관심은 있는 것 같다 했으니까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거짓말 아니야. 나 진짜 큰일이라니까?

“나 바쁘다.”

손톱에 바람을 후, 불며 대충 대꾸했다.

사람을 좋아할 때면 작은 일도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이지나는 우예린이 지금 그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지나가 전화를 끊을 것을 예감한 우예린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잠깐만. 그것만 얘기해 줘. 넌 어떻게 했던 거야? 어떻게 해서 헤어질 수 있었냐고!

이지나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고 하아, 한숨을 쉬었다.

“돈 빌려달라고 해. 나 좋다는 사람 떼어내려면 나에 대한 환상부터 깨버리면 되거든. 힘내, 예린아.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 좀 그만 보고.”

분명히 뭔가 오해를 한 게 있겠지만 이지나는 그녀 나름대로 배려의 의미로 말을 가렸다.

‘내가 이렇게 자기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걸 알려나 몰라.’

이지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화를 끊었다.

우예린은 떨떠름하게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영화나 드라마 좀 그만 보라고?”

이지나는 스스로 말을 잘 가렸다고 뿌듯해했지만 우예린은 지나의 의중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도 친구라고…….”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 역시 아무것도 몰랐을 때, 도준희가 미친놈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뜬소문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라…….”

환상을 깨라. 어떤 의미로 효과가 있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어려운 방법이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유독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예린이 딱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부모님 아래서 남들에게 피해 끼치지 말라는 걸 주야장천 들어온 탓일지도 몰랐다.

“하아.”

머리를 싸맨 우예린의 눈에 버스 창밖의 PC방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우예린은 PC방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들으며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대학교 때 과제를 위해 찾았던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으니 오랜만이었다.

학교 컴퓨터실은 PC방보다 구형 컴퓨터에다가 속도가 느려서 급한 과제가 있을 때마다 PC방으로 뛰쳐나오고는 했다.

학교 근처 PC방에서 도준희를 만난 적도 몇 번 있었지. 그럴 때면 도준희에게 정신이 팔려서 과제를 하는 건지 도준희를 보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을 켰다. 퇴근하면 바로 오라고 했던 도준희의 말을 떠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PC방에 들어오며 주변을 살폈을 때는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정말 사람을 붙였을까.

‘괜히 겁주는 걸 수도 있잖아.’

마우스를 움켜쥔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원래 있던 손님 몇 명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사람을 붙였다고 해도 하루 종일 따라다니진 않겠지. 인터넷 창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좋게 이별하는 방법]

[아름답게 이별하는 방법]

[아름다운 이별]

다양하게 검색했다. 몇 가지 글이 눈에 띄었다. 우예린은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어 재빨리 받아 적었다.

우예린은 PC방에서 나와 도준희의 펜트하우스를 향해 걸음을 서두르며 다이어리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우예린은 학창 시절에 공부할 때도 메모지나 다이어리를 살뜰하게 활용하며 공부하는 스타일이었다.

다이어리에는 아기자기한 글씨로 또박또박 기록되어 있었다. PC방에서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일명,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정떨어뜨리기 프로젝트.

첫 번째 방법, 흥신소, 보디가드, 경찰의 힘을 빌린다. 흥신소는 돈이 부족하므로 활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어떤 흥신소가 도준희가 알고 있는 흥신소인지 모르므로 엑스 자를 쳐놓았다. 보디가드 역시 비용 문제로 기각. 남은 건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지만, 최후의 방법으로 미루어두었다.

이후부터는 활용성 높은 현실적인 방법들이었다.

두 번째, 생얼로 충격 주기. 우예린은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두 번째 방법을 재차 읽었다. 손거울로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조금 지워지기는 했지만 화장한 얼굴이다.

가방에 수정용 화장품들을 챙겨놓은 덕에 오늘 아침도 간단하게 화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 욕실에서 씻으면서도 섹스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도준희는 평소와 똑같았는걸.’

아니지, 중요한 건 생얼 그 자체가 아니라 아름답지 못한 모습일 테니까.

“좋아.”

어렴풋하게 감이 잡혀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눈눈이이. 도준희는 미친놈이다. 이제 그 사실엔 이견이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미친 짓을 하면 똑같이 미친 짓을 하는 거다.

집착하면 똑같이 집착하고, 화를 내면 똑같이 화를 내보자. 정조대를 채우면 도준희에게 역시 정조대를…, 채우기는 힘들 것 같은데. 우예린은 도준희의 열 받은 하반신에 정조대를 채우는 상상을 했다.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우예린의 열성적인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네 번째, 미친 짓 하기. 세 번째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네 번째는 좀 더 단어 뜻 그대로를 의미하는 적나라한 방법이다. 미친 짓을 통해 정을 떨어뜨리는 방법.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다섯 번째, 돈 빌려달라고 하기. 이지나가 말한 방법과 같은 거다. 자매품으로 집안에 빚이 많다고 하기가 있다.

여섯 번째, 수치스러운 짓을 통해 정떨어뜨리기.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코 파기, 트림하기 등…….

“우웩.”

본인이 적어놓은 거지만 속이 조금 메스꺼워져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일곱 번째, 여성스러운 매력 떨어뜨리기.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헐렁한 남자 팬티 입기와 걸걸한 말투로 얘기하기가 있다. 이것 역시 자신이 실천하기에는 조금 힘든 방법이지만, 그래도 남자 팬티를 입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예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여덟 번째, 흥미를 떨어뜨리기. 집착하는 마음은 그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소유하고 싶은 마음 자체를 없애면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해바라기처럼 헌신하는 사람, 즉 쉽게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쟁취하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는다. 헌신하거나 해바라기처럼 도준희만 바라보는 척한다면 흥미를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

다른 소소한 방법들이 있지만 크게는 위의 여덟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난도에 따라 순서대로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쉽게 할 수 있는 방법부터 체크를 해두었다.

그러다 보니 벌써 펜트하우스였다. 우예린은 우울한 눈으로 높은 괴물처럼 서있는 펜트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허벅지 근처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우예린의 신경을 불쾌하게 콕콕 찔러댔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왕 나온 김에 집에도 들렀다가 올까.

학창 시절에 말 잘 들었던 모범생의 특성이 도준희에게까지 발휘될 필요는 없었다. 도망가려는 찰나 핸드폰이 귀신같이 울려댔다.

보지 않아도 누구의 전화인지 알 것 같았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도준희였다. 우예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거기서 뭐 해?

“…….”

―올라와.

핸드폰을 쥔 우예린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미친놈이 아니라 귀신인가. 아니면 미친 귀신이든가.

문을 열고 들어선 우예린은 조심스럽게 집 안을 살폈다. 도준희가 보이지 않아서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 있나 했더니, 도준희는 주방에 있었다. 우예린은 주방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주방에선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고기를 굽고 있는 모양인지 도준희가 한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 다른 손으로 프라이팬을 휘저었다.

흰 티셔츠를 입은 도준희의 늘씬한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막 씻었던 걸까?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우예린은 홀린 듯 도준희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스스로를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학창 시절에 이지나가 왜 저를 보고 혀를 쯧쯧 찼는지 점점 이해가 되어서 곤란했다. 도준희의 잘빠진 허리에서 시선을 떼며 흠, 헛기침을 했다.

“구경 잘 했냐?”

우예린은 흠칫해서 눈을 이쪽저쪽으로 굴렸다.

“왜 늦었어?”

도준희가 뒤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물었다. 꼭 고등학생이 되어 선생님에게 혼나는 기분이라,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고등학생 때 모종의 이유로 그녀를 못마땅해하던 학생 주임 선생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우예린의 트집을 잡고는 했다. 그 후유증 탓인지 아니면 엄격한 부모 탓인지, 우예린은 엄하고 까칠한 사람 앞에서 꼼짝도 못 했다.

잔업 때문에 늦었다고 할까. 유혹에 흔들렸지만 이내 거짓말을 들키면 더 큰일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PC방에 있다 왔어요.”

도준희가 프라이팬을 든 채로 몸을 돌렸다. 기다랗고 날씬한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고 그 위로 프라이팬을 기울였다. 먹음직스러운 제육볶음이 접시로 떨어졌다. 우예린은 순간적으로 음식에 시선을 빼앗겼다.

“왜?”

“조사할 게 있었어요.”

“…….”

“사수가 당장 해야 한다고 독촉을 해서 늦은 거예요.”

우예린은 이 말이 변명하듯 들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영 그른 듯했다. 당장이라도 도준희가 거짓말을 한다고 질책을 할 것 같았다.

도준희가 프라이팬을 들자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그가 프라이팬을 다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고 우예린을 응시했다. 우예린은 긴장한 채 도준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도준희의 무표정한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랬어? 난 또, 튀려는 줄 알았네.”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을 보며 우예린은 진심으로 한숨을 쉬려다가 참아내었다.

회사에서 언제 나왔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던 건가? 적어도 PC방에 갔다는 건 알고 있었나 보다. 아니, 나를 떠보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이번 한 번은 무사히 넘어갔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씻고 와.”

“…….”

“오늘 내내 불편했을 거 아니야. 거기 신경 쓰느라.”

도준희의 고혹적인 목소리에 우예린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멈추었다. 생각해 준다고 착각할 뻔했잖은가.

‘불편했던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치마 위로 딱딱한 정조대를 고쳐 차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당장 오늘부터 정떨어뜨리기 프로젝트를 실행해야겠다. 속으로 결심하며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하루 종일 불편했던 건 사실이었던지라 걸음이 제법 급했다.

탁!

우예린이 화장실 안으로 사라지자, 주방에서는 달걀 프라이가 맛있게 익는 소리가 지글지글 흘러나왔다. 프라이팬을 내려다보고 있던 도준희는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홱, 뒤를 돌아보았다.

우예린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파충류처럼 번들거렸다.

그가 우예린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알아낸 사실은 우예린이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거짓말뿐만이 아니라 세간에서 나쁘다고 인식된 모든 행동들을 잘하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착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했다. 약지 못한 사람은 약은 사람의 타깃이 되는 법이다.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서도 참던 우예린. 이런 상황에서조차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만하지.

다만 유감스럽게도, 숨기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도준희는 점심 즈음의 일을 떠올렸다.

* * *

6시간 전.

“야이 개 잡놈아!”

도준희는 우예린에게 전화를 걸며, 달려드는 남자를 흘끗했다. 핸드폰을 고쳐 쥐고 달려드는 남자의 가슴을 팔꿈치로 찍었다.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진 남자의 발목을 자근자근 밟았다. 비명과 신음이 한층 커졌다.

뒤를 밟히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30분 전이었다. 숫자는 넷.

넷 정도면 어렵지 않다 판단하고 자주 사용하는 버려진 공사장으로 향했다. 도준희가 자신들을 눈치챘음을 알게 된 남자들은 기다릴 것 없다는 듯이 도준희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또 오랜만이네.’

충남에 있을 때는 이런 일이 간식을 먹는 것처럼 빈번했다. 도준희의 악명이 이미 충남 전 바닥에 깔려있었던 탓에 덤벼드는 이들은 대부분 사주를 받은 외부 사람이나 악에 받쳐서 돌아버린 놈들뿐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지금 놈들은 그런 이들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명단을 추려보았다.

우예린에게 약국에는 왜 갔냐고 묻자 흠칫하는 기색이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귀엽기는.’

―몸이 좀 안 좋아서 갔다 온 거예요. 별거 아니었어요.

신중하지만 긴장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남자의 배를 발로 후려쳤다. 명치를 제대로 맞은 탓에 금세 얼굴이 시뻘게진 남자가 각목을 떨어뜨렸다. 한 대 더 치자 무릎을 꿇고 컥컥, 숨을 토해냈다.

우예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면서 전화 받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 잠깐만.”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는 남자의 허리를 찼다. 얼굴이 새빨갛게 질렸다가 하얗게 질리기를 반복한다. 이놈은 이제 덤비지 못할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꺼림칙해하는 기색이 전해져 왔다.

‘굳이 몰라도 될 것까지 알려줘서 더 겁먹게 할 필요는 없지.’

한 놈 한 놈 달려드니 귀찮다. 쓰러진 사내들이 몸을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과연 혼자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짓을 교환하고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도준희는 전화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큼지막한 폐자재를 들고 휘둘렀다.

폐자재를 피하며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는 놈들의 가슴을 차례차례 걷어차자 남자들이 뒤로 나뒹굴었다.

우당탕!

하필이면 근처에 동네 양아치들이 재떨이로 사용하던 커다란 고철 통이 있었다. 고철 통이 쓰러지며 안에 있던 오물을 토해냈다. 도준희는 쌓인 담뱃재를 얼굴로 맞아 괴로워하는 남자의 허리를 깔고 앉아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술 사이에 물었다.

우예린이 담배 연기를 안 좋아하는 걸 안 뒤로 담배는 끊었기 때문에 불을 피우지는 않았다. 티셔츠를 펄럭여 바람을 일으켰다. 날씨가 제법 덥다. 티셔츠 아래로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복근이 살짝 드러났다.

우예린이 못 미더워 경고를 남기기는 했지만 상처가 덧나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얌전한 척을 해도 곧이곧대로 하는 법이 없는 우예린이 경고를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도준희는 검지 끝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혼자지?”

―네.

“치마 걷어봐.”

―네?

“걷어.”

―왜, 왜요. 뭐 하려고요.

도준희는 숨을 천천히 쉬었다. 바들바들 떠는 우예린의 목소리가 빌어먹게 깜찍해서 다리 사이가 오싹했다.

‘하아, 씨발……. 죽겠네.’

참나, 황당한 일이다. 우예린과 접점이 미약했을 때는 그녀가 그를 무서워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도 조심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무서워하는 목소리도 마음에 들다니. 하긴, 이렇게 멀쩡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딘가.

손 위에서 도망 다니는 햄스터를 보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서 도준희는 부러 천천히 얘기했다.

“사람 없다며. 아니면 계속 땀 찬 정조대 하고 있을 거야?”

우예린은 우물쭈물 머뭇거리면서도 도준희의 말대로 했다. 한때는 남에게 순종적인 우예린이 답답해서 다 뒤집어엎고 싶었는데, 투덜거리면서도 뜻대로 하는 우예린을 보자니 마음이 묘했다.

얼른 우예린이 퇴근하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꼿꼿해진 아래를 주무르며 입술을 핥았다.

수화기 너머 우예린이 곤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숨소리가 흔들리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도준희는 담배 필터를 입술로 질겅였다. 우예린이 앞에 있었다면 그녀의 입술을 질겅였을 것이다.

자신의 말대로 정조대 안의 습기를 제거하는 우예린의 손을 상상했다. 이런 거 해 본 적 없다고 당황하면서도 성실하게 구는 우예린을 떠올리자 느릿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얼른 시간이 갔으면 좋겠는데.’

―이제 그만 끊을까요?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 하는 눈치에 도준희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순순히 전화를 끊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따 보자, 우예린.’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느라 엉덩이를 들썩이자 아래 깔린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도준희는 고기를 뒤적이는 것처럼 무심하게 남자의 품속을 뒤졌다.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새끼…….”

허리가 나가서 꼼짝도 못 할 텐데 입만 산 놈이다. 도준희는 아예 눈을 감길까 하다가 힘 조절을 못 해 문제가 생길까 봐 말았다. 대신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갈겼다.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른 남자의 고개가 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기절한 남자를 제외하고 용케 정신을 붙든 남자들은 몸을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 사이에서 도준희는 태연하게 기절한 남자의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무릎을 널찍하게 벌린 채 한 손으로 핸드폰을 열어젖혔다.

“보자. 어떤 놈인가.”

통화 목록에 들어가자 상단에 있는 이름이 바로 눈에 띄었다.

[주오 형님]

통화 목록을 내렸다. 달리 눈에 띄는 이름은 없었다. 이 남자들이 황주오와 연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으나 단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슬쩍 들었다. 명치를 움켜쥔 채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던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민 머리가 번들거렸다.

“야, 빡빡이.”

툭 부르자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너희 황주오 밑에 놈들이냐?”

그러자 홱 고개를 들고 도준희를 쏘아보았다.

“황주오? 걔가 누군데?”

대머리 남자는 머리를 맞아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거칠게 말했다. 도준희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기는 더럽게 못하네.”

뭣 하면 직접 확인하면 되지. 도준희는 빼앗은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화면에 황주오의 이름이 뜨고 신호음이 갔다. 도준희는 담배 필터를 씹다가 퉤 뱉었다. 동시에 달칵, 소리가 났다.

―어, 일은 잘 처리했냐. 겁 좀 먹여서 이 바닥에 다시 발 안 붙이게, 그게 중요한 거야.

“황주오?”

―…….

거드름을 피우던 목소리가 딱 끊겼다. 도준희는 서울에 올라온 이후 많은 새로운 일들을 겪었지만 이런 일 또한 신선했다.

충남에서는 도준희의 집안이 집안이다 보니 애초에 겁을 먹고 몸을 사리는 놈들이 많았다. 그런데 백부 말고는 연고가 없는 지역에 오자 저를 묻어버리려는 놈이 생긴 것이다.

황주오는 백부의 오른팔의 새끼손가락 정도 되는 놈이었다. 사람은 끼리끼리라더니 백부가 옆구리에 늘어놓은 놈들도 돈이 되는 일에 환장을 하는 놈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황주오는 탐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행동도 잽쌌다.

우예린이 회사에 간 뒤, 백부를 찾아간 자리에는 황주오도 있었다. 손에 쥐고 굴릴 수 있는 사업장을 달라고 하자 눈에 불을 켜는 꼴이 하도 하찮아서 기억도 못 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가당찮았다.

도준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까 봤는데 금방 또 보네?”

―허어, 준희 동생. 아무리 큰형님 자식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우리 나이 차이가 말 놓고 그럴 정도는 아니지 않나?

“뒤통수치기 전에 말하지 그랬어.”

―그게 무슨 소리야? 뒤통수를 치다니.

뻔뻔한 오리발에 도준희의 목소리가 느릿해졌다.

“내가…… 이 새끼들 입을 직접 열어야 할까?”

도준희는 가는 눈으로 쓰러진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도준희가 미친놈이라고 불렸던 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 성격을 아무도 말리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피를 보는 데 있어 한 점 주저함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폭들이 연장질을 좀 한다고 해도 다 옛말인 요즘 상황에, 도준희는 눈에 띄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내 동생들이 실수를 좀 한 모양인데 이쯤에서 그만하지.

“그만?”

도준희는 입술을 달싹이며 발을 뻗었다. 깔고 앉은 남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있었던 건 진즉 깨달았다. 손을 자근자근 밟자 숨이 거칠어졌다.

“크흐흑.”

신음이 들렸는지 황주오의 숨소리가 굳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두를 신고 오는 건데.”

웃으면서 말하자 황주오가 서둘러 말했다.

―그만. 뭘 하려는 건가?

도준희의 얼굴이 멈칫 굳어졌다. 스산하게 싸늘해진 얼굴로 수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백부 아래 있다고 안 봐줍니다. 손목, 발목 잘 부지해서 노년 보내고 싶으면 머리를 굴려. 알아서 잘하시라고, 황주오 씨.”

탁.

핸드폰을 접었다. 일어나서 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화가 난 척 굴기는 했어도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스트레칭이나 다름없다.

“이쯤 있을 텐데…….”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하얀색 스프레이가 눈에 띄었다. 예전에 도준희가 멋모르고 시비를 걸던 양아치들을 데리고 놀 때 쓰다가 버린 것이었다. 허리를 숙여 스프레이를 주워 들었다. 흔들자 양이 아직 꽤 남아있다.

도준희가 뭘 하려나 싶어 고개를 들었던 남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안에 있을 때는 동네가 너무 조용해서 심심했는데, 올라오니까 서울이 좋긴 좋네.”

도준희가 남자들을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매끄러운 붉은 입술 사이로 고른 치열이 드러났다. 남자들은 도준희의 꺼림칙한 미소에 등골이 오싹한 듯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 하려는 거야.”

“경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필사적으로 도망가려는 사내들의 머리채를 붙들고 스프레이를 분사하는 도준희의 눈은 어린애처럼 반짝거렸다.

“으윽…….”

탈진해서 먼지 가득한 바닥으로 쓰러진 사내들의 등짝에는 하얀색으로 커다란 엿이 그려져 있었다. 미친놈이란 별칭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 * *

우예린이 씻는 사이 도준희는 팔팔 끓고 있는 된장찌개의 간을 보았다. 짜지도 않고 괜찮다. 일하지 말라고 했지만, 열심히 일을 하고 왔으니 배는 든든히 채워줘야지.

이거야말로 진정한 외조가 아닌가. 먹음직스럽게 끓는 국을 국자로 휘휘 저으며 도준희는 생각했다.

황주오가 오늘처럼 탐욕스럽고 멍청하게 군 것은 도준희가 백부에게 사업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도준희는 일자리 하나 달라는 수준으로 요구한 것이지만, 황주오가 한 꼴을 보니 그치는 도준희가 게임장이라도 요구할까 겁먹은 눈치였다.

여러 사업에 발을 걸친 백부 아래에서 게임장 관련 사업은 황주오가 책임자나 마찬가지였다. 자기 몫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 거다.

“갑자기 기분이 더럽네. 조질까?”

신랄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도준희는 기분이 좋으니 한 번은 봐주자고 결심했다.

백부는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평생 놀고먹어도 충분한 돈이 있는데 무엇 하러 일을 하냐는 게 평소 도준희의 생각이었으니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예린이 아득바득 일하러 나가는 것을 보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하긴 번듯한 직장이 있으면 아무래도 보기에는 좋겠지.’

우예린을 먹여 살리려면 가장으로서의 든든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가게를 운영한다면 적어도 한량처럼 보이지는 않을 게 아닌가.

백부는 막 새로 시작한 마사지 샵을 주려는 눈치였다. 꽃미남 마사지 샵이라는, 이름부터 거슬리는 가게 말이다. 도준희는 대표가 되면 간판부터 갈아 치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쯧쯧, 혀를 차며 흥신소에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가 세 번 울리기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아 깍듯하게 대꾸했다.

―예, 형님.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공손한 남자의 대꾸를 들으며 도준희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아까 말이야. 뭘 샀다고 했지?”

남자는 곧바로 대꾸했다.

―예, 우예린 씨는 처음에는 사전 피임약을 구매하고 다음에는 사후 피임약을 구매했습니다.

“그래. 피임약, 피임약.”

도준희는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몸이 안 좋아서 약국에 갔다는 우예린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약국에 간 건 사실이나 용건은 거짓인 셈이다.

“……임신이 쉬운 줄 아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좋게 생각하려던 도준희는 결국 못마땅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도준희.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성주 도씨 집안의 장남이자 외동아들. 도준희의 양친은 스무 살에 눈이 맞아 결혼하고 곧바로 아이를 갖고자 노력했지만 10년간 치성을 드려도 아이는 잘 생기지 않았다. 9년째에 포기할까 하다가 10년 만에 겨우 가진 귀한 아들이 도준희였다.

도준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 뒤. 도준희의 부모가 도준희를 가리켜 각고의 노력 끝에 생긴 아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면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치성을 더 드렸어야 했다고 한탄했고 하나는 9년째에 예정대로 포기했어야 했다고 한탄했다. 결국은 한탄이었다.

부모가 저를 귀한 아들이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때, 도준희는 동네 개구쟁이들을 괴롭히고 다녔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도준희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엔 그의 근처에 얼씬거리는 개구쟁이는 한 명도 없었다.

각종 항의가 빗발쳤지만 도준희의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고 자랑했던 것에 비해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자유, 나쁘게 말하면 방임. 도준희는 저를 내버려두는 부모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말로만 귀한 아들이지 결국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들 자신이라는 건 진즉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 부모 아래서 도준희도 스스로가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고3, 학교에서 늦은 공부를 끝내고 돌아가던 우예린이 후다닥 건넨 편의점 연고와 쌍화탕이 마음을 건든 건 이상한 화학 작용이 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도준희는 사실 충남에서 떵떵거리며 살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았다. 신선한 일들이 생기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우예린 하나만으로 복잡한 서울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주 도가(家)의 귀한 아들로서 임신이 어려운 걸 아는 도준희는 그 얼마 안 되는 가능성마저 차단하는 우예린의 행동이 영 못마땅했다.

‘계획적인 건 좋은 거지.’

그런 한편 불현듯 부아가 치미는 일이 반복되었다.

―임신이란 게, 쉬운 사람들은 쉽지 않습니까?

남자는 도준희의 못마땅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열심히 눈을 굴리며 살 궁리를 하는 그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공감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근데 뭐, 그거 몸에는 괜찮은 거야?”

도준희가 그릇에 찌개를 뜨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남자는 짜장면을 먹던 나무젓가락 끝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여자가 아니라서…….

“자랑이냐?”

―자랑일 것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 흘리는 웃음소리에 도준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별 시답잖은 말까지 하고 있다.

도준희는 핸드폰으로 가스레인지를 툭, 툭 쳤다. 우예린이 다 씻기까지 15분은 더 걸릴 터였다. 도준희는 식탁 한구석에 방치해 둔 지갑을 챙기고 문을 열고 나갔다. 펜트하우스 옆 건물 상가 1층에는 바로 약국이 있었다.

저녁 시간, 간단히 밥을 먹을 준비를 하던 젊은 약사가 즉석 밥을 내려놓고 도준희를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도준희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약사는 의아한 얼굴로 도준희를 찬찬히 살폈다. 약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 남자잖아?’

이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몇 번 보았는데 역시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나. 눈에 안 띌 수 없는 외모라 기억에 똑똑하게 남아있었다.

‘뭘 사러 온 거지. 환절기도 지나 감기 환자도 줄었는데.’

건강해 보이는 남자가 무슨 용건으로 왔을까. 내심 궁금함을 삼키고 도준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준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사후 피임약 말입니다.”

“……네? 아, 네.”

약사는 황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얼핏 듣기로는 약이라서 그다지 좋은 건 아니라는데.”

“아, 그렇죠.”

잠시 당황했던 약사는 곧 친절한 얼굴로 대꾸했다.

“약이라서 몸에 안 좋은 건 아니고요, 사후 피임약 자체가 호르몬제라 아무래도 몸에 좋지는 않아요. 평소에는 일반 피임약 먹는 게 좋고요. 일반 피임약은 굳이 피임 목적이 아니더라도 생리 주기 조절이라든지 생리통에 효과가 있는 경우도 있어서 평소에도 복용하시거든요.”

도준희는 설명을 듣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사의 대답이 떨떠름했다. 약이라고 모두 몸에 안 좋은 게 아니란 건 알지만 도준희의 부모는 감기에 걸리면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면 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 민간 신앙 신봉자였다.

돈이 썩어 넘칠지언정 병원에 가는 돈은 아끼는 타입으로, 도준희는 그런 부모가 무식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역시 인공적인 약을 먹는 데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었다.

“약은 웬만하면 안 먹었으면 좋겠는데.”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용케 그 소리를 들은 약사가 대안을 제시했다.

“100퍼센트 안전한 피임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약이 싫은 경우에는 콘돔을 사용하시면 되죠.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기도 하고요.”

도준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약사는 뭘 잘못 말했나 싶어 웃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도 기억에 남을 만큼 잘생기기는 잘생긴 손님인데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 이상했다.

‘가만히 쳐다보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싸한 느낌이 드는 거지.’

도준희 몰래 손으로 손등을 스윽 문질렀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등에는 소름이 돋아있었다.

약사의 느낌대로 도준희는 새로운 제안 역시 탐탁지 않았다. 텁텁한 고무를 끼고 자야 한단 말인가. 머릿속으로 피임약과 콘돔을 저울질했다. 잠시 후, 저울은 콘돔 쪽으로 기울었다. 도준희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었다.

“그거, 콘돔. 여기 있는 거 다 줘요.”

“다……요?”

“없어요?”

도준희가 비뚤어진 눈썹을 꿈틀하자 약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많아요.”

“몇 상자?”

“열 상자 정도.”

“일단 다 줘요.”

“종류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도준희는 미간을 좁혔다. 종류? 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에나 콘돔을 만져봤던 도준희는 콘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조폭들이랑 뒹굴다 보면 보통은 그네들에게서 배우는 게 있겠지만 도준희에게 성교육을 하고 싶어 하는 어깨는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도준희는 성 쪽으로 무지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도준희의 고민은 짧았다.

“얇고, 큰 걸로.”

당당한 주문에 약사가 귀를 의심했다.

“예?”

“고무가 얇고, 사이즈는 제일 큰 걸로.”

“…….”

“그런 건 없는 겁니까?”

“아, 아니요. 있어요. 드릴게요.”

약사는 손바닥 크기의 상자를 세 박스 꺼내왔다. 도준희가 쳐다보자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신 콘돔은 이게 답니다.”

도준희는 약간 껄끄러운 표정으로 콘돔을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한 달 안 넘겠는데.’

일단 써봐야 알겠지. 납득하고 가격을 치렀다.

콘돔이 담긴 약국 봉지를 손목에 건 채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약국은 거짓말을 했고, PC방은 왜 갔을까. 흥신소에선 기록이 다 지워져서 뭘 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고 했다. 회사 일을 한 거라면 보안 문제도 있으니 기록을 다 지운 게 맞기는 맞을 텐데.

‘하긴 컴퓨터로 뭘 해봤자 별거 아닌 거나 검색했겠지.’

우예린이 작은 머리를 굴리며 타자를 치는 상황을 상상하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는 핏대가 선 주먹으로 이마를 툭 쳤다. 너무 귀여운 탓에, 약간 남아있던 못마땅한 마음마저 말끔히 사라졌다.

현관문을 열자 다 씻은 우예린이 젖은 머리에 수건을 감은 채 나와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곳저곳 살피던 우예린은 도준희를 보자 눈을 더 크게 떴다.

아무래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었던 듯 그를 보자마자 얌전히 입을 다문다. 도준희는 콘돔을 소파에 던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예린은 눈을 굴렸다.

어딜 갔다 온 건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얼굴에 훤히 드러난다. 도준희는 그가 던진 봉지를 목을 길게 뺀 채 힐끔거리는 우예린의 이마를 검지로 툭 쳤다.

“뭐 해?”

찔끔 놀란 우예린은 목을 원상 복귀시키고 시침을 뚝 뗐다. 도준희의 입술 끝이 비죽이 올라갔다.

우예린은 심각하게 눈살을 구긴 채로 시선을 식탁 위로 떨어뜨렸다. 분명 허기만 채울 생각이었는데. 하루 종일 긴장하고 신경을 써서 그런지 배도 안 고팠고, 도준희가 앞에 있으니 뭐가 목으로 넘어가겠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뭐지. 왜 밥그릇이 비어있을까. 우예린은 의아해하며 숟가락으로 빈 그릇을 벅벅 긁었다. 마찬가지로 밥을 다 비운 도준희가 우예린을 흘끗했다.

“더 먹고 싶어?”

“네? 아니, 아니요. 배불러요.”

“그러네. 보기보다 많이 먹네.”

도준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우예린은 얼굴을 구겼다. 정말 이상한 말이기는 한데,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변명처럼 들려도 그게 정말이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지, 반찬은 우예린이 좋아하는 거였고 심지어 맛도 좋았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먹자마자 잠자고 있던 허기가 깨어난 것처럼 배 속이 요동쳤다. 한 술, 한 술 뜨다 보니 어느새 다 먹었다.

우예린은 깔끔하게 비워진 밥그릇에서 희한하다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준희가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다 먹었으면 그릇 싱크대에 넣어놔.”

퍼뜩 고개를 들어 도준희를 응시했다.

“아, 내가 할게요.”

받은 만큼 되돌려 주라는 부모님의 교육상 우예린은 받기만 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도준희의 강압으로 이 집에 얽매여 있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도준희가 코웃음을 쳤다.

“그릇 깨먹지 말고 그냥 넣어.”

“하지만 음식도 하고 설거지도 다 하는 건…….”

도준희가 한쪽 눈을 슬쩍 찌푸렸다.

“누가 내가 한대?”

우예린이 눈을 깜박였다.

“네? 그러면?”

의아한 시선에 도준희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내일 오전에 사람 올 거야.”

“아, 네…….”

우예린은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불편하게 꼬았다.

“저기, 도준희.”

“왜.”

반찬을 정리하며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도준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씻어야 하는데…….”

“씻었잖아?”

“잘 못 씻었어요. 씻는 건, 아니, 이 상태로 씻을 수는 없잖아요.”

머뭇거리던 우예린이 원망 어린 목소리로 토로했다. 도준희는 반찬 뚜껑을 다 덮고 선 채로 우예린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아.”

“이거, 이제 벗겨줘요. 답답하단 말이에요.”

샤워 가운을 입은 채로 우예린이 다리를 떨었다. 들썩거리는 무릎을 보며 도준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마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하, 씨발.”

조용한 공기를 박살 내는 욕설에 우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준희는 식탁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우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예린은 긴장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우예린은 안절부절못하며 가운만 손으로 잡아 내렸다.

“좋아, 집이니까.”

긍정적인 대꾸에 밝아졌던 우예린의 표정은 곧 다시 흐려졌다.

“아니, 내 말은 집뿐만이 아니라…….”

“…….”

“회사에 갈 때도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우예린은 못 할 말을 하는 것처럼 신중한 자신의 태도가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기저귀를 차기 싫어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해?’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집에 가지 못하고 도준희의 집에 머물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불합리했다.

다시 한번 미친개에게 물려도 단단히 물렸다는 것을 깨달은 우예린은 입 안 살점을 잘근잘근 씹었다.

“왜?”

도준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예린은 도준희를 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 모든 건 상식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저 남자 때문이다.

“왜긴요. 아니, 미친놈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장난을 계속하겠어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도준희의 표정에 우예린은 속이 답답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 더운 날씨에 이런 거 하고 다니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알아요?”

오늘도 그렇다. 땀 때문에 미끄러운 정조대가 내려갈까 봐 마음을 졸였고, 낯선 쇠의 감촉이 불편한 건 물론, 누군가 눈치라도 챌까 봐 한시도 마음을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 겪었던 역경이 떠오르자 우예린의 순했던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갔다. 분노로 당당해진 태도로 도준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무표정하게 우예린을 응시했다. 곧 매끄러운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우예린은 두 눈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어디, 무슨 말을 하나 보자.’

“……회사에 상판이 반반한 놈이 있나 보지?”

도준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우예린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박였다가 입을 떡 벌렸다.

다른 남자 때문에 경고를 한다는 말. 처음에는 자신을 희롱하기 위한 말이라고만 여겼는데 이제 보니 퍽 진심인 듯했다.

우예린의 멍한 표정에 도준희가 팔짱을 끼었다.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핀트가 나간 얼굴이었다.

“누구를 꼬시려고?”

“…….”

“그러고 보니 회사에 사내새끼들 많은 것 같던데.”

“…….”

도준희가 한 손으로 제 턱을 쥐고 비틀었다. 으득, 소리가 흘러나왔다. 턱을 좌우로 움직인 도준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널 보며 군침깨나 흘리겠네. 씨발! 그딴 곳을 왜 다녀? 일을 하고 싶으면 얌전하게 여자들 많은 곳이나 다니면 되잖아.”

말문이 막혔던 우예린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전부터 도준희의 말에서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알겠다.

천사 같은 얼굴로 사고방식은 꼭 대학교 때 가장 싫어하던 마초 교수님과 비슷했다. 여자는 여자 많은 곳에서 일해야 한다니. 여기가 이슬람 무슬림도 아니고!

“여자들 많은 곳 어디요. 다방?”

우예린이 빈정거리듯 말하자 도준희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덜컥 겁이 났지만 이렇게 마초적인 사람은 도리어 강하게 나가면 움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저 사람의 모든 게 허장성세일 수도 있어.’

2학년 때의 전공 교수였던 그 마초 교수도 그랬다. 입버릇처럼 여학생들을 비하하는 말을 하다가 학생들에게 된통 당한 후에는 얌전해졌지 않은가.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안 하겠다고 약속해요.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짓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우예린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로 눈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강하게 나가면 적어도 도준희가 자신을 회유하는 시늉이라도 하리라고 생각했다.

도준희가 목을 돌렸다. 우드득, 소리가 났다. 움찔하는 우예린에게 도준희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럴 거면…….”

꿀꺽.

우예린이 침을 삼켰다.

“회사 때려치워.”

우예린은 눈을 크게 뜨고 도준희의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기는커녕 차라리 그게 낫다는 태도였다.

‘당신이 뭔데.’

우예린은 도준희를 자극할까 봐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준희가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건 이제 확실히 알겠다.

도준희의 본성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한번 뱉은 말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간 간신히 허락받은 회사도 못 가게 될 판이었다.

꼿꼿하게 세웠던 고개가 금세 수그러지고, 우예린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회사는…… 계속 다닐 거예요.”

원래 의도한 정조대 얘기는 다시 꺼내지도 못하고 홱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갔다. 쿵쾅쿵쾅, 발소리를 크게 내는 것만이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쾅!

문을 거세게 닫고 침대 위에 엎어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우예린은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즉시 불만을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뒤늦게 생각하고 속상해하는 사람이라 끓는 속은 가라앉기는커녕 더 뜨거워졌다.

고등학생 때 그렇게 그녀를 괴롭혔던 학생 주임 선생님에게도, 그 자리에서 부당하다 말하지 못하고 집에 가서 속상해하고는 했다.

잠자기 전 베개를 구기며 부모님 몰래 울었다. 부모님은 선생님이 이유가 있어 그랬을 것이라고 말할 게 뻔했으므로 속으로만 삭였다.

어린 시절 내내 그렇게 자라왔던 우예린은 정당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금의 마음이 꼭, 고등학생 때와 같았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속상한데 학생 주임 선생님 앞에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어 꾹꾹 참아냈던 그때.

마음에 뜨거운 김이 가득 차서 점점 부풀어 오르는데 그걸 표출할 수 없어 끌어안고 참아내기만 했던 마음 상태가, 아주 똑같다. 주먹으로 베개를 콱, 콱 내리쳤다. 고등학생 때와 달리 그것으로는 분노가 풀어지지 않았다. 속이 타버릴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뭘 잘못했다고.’

굳이 잘못한 걸 따지자면 예의 없이 문자로 이별 통보를 한 죄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 그녀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그거였다. 이지나를 따라 마사지 샵에 가서 도준희를 만난 것.

철없이 다시 만난 첫사랑에게 가슴 설레하고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동경한 것. 사귀자는 말에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받아들인 것. 그래. 굳이 따지자면 그런 거였다. 도준희를 만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다.

하반신을 감싼 미지근한 정조대가 음부를 압박하는 느낌이 신경을 쿡쿡 쑤셔댔다. 평범한 속옷과 달리 이 흉물스러운 물건은 시시때때로 제 존재감을 달갑잖게 알려댔다. 정조대를 의식할 때마다 도준희의 얼굴이 자동적으로 딸려왔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우예린은 베개를 꾹 쥔 채 이마를 베개에 세게 묻었다.

푹.

베개에 이마를 반복적으로 묻었다가, 아예 베개를 치우고 시트가 깔린 매트리스에 머리를 박았다.

‘답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곁을 떠나면서부터는 느껴지지 않았던 답답함에 속이 지끈거렸다.

쿵!

이마를 매트리스에 묻고 그대로 엎어졌다. 드라이기로 완전히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주변으로 펼쳐졌다.

탁, 탁.

매트를 손으로 쳤다. 베개를 구기는 것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을 때에는 손톱을 씹는다든가 무엇을 가볍게 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좋은 방법이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그 외에 스트레스를 풀 방법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버릇이었는데. 매트를 가볍게 두들기던 손의 힘이 무의식적으로 강해졌다. 침대 헤드에 손등이 부딪혔다. 그 순간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고개가 홱 들렸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당연하게도 도준희였다. 우예린의 손목을 붙잡은 채 도준희가 눈을 부릅떴다. 우예린은 입술을 깨물고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비틀어 빼내었다. 그리고 침착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냥…….”

“…….”

“쉬고 있었어요.”

도준희는 허리를 편 채 우예린을 가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우예린은 엎드린 채로 도준희를 곁눈질하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침대 위에 엎어졌다. 하, 사나운 헛웃음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별짓을 다 하네.”

“…….”

이를 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 마.”

“무슨 상관이에요?”

우예린은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가 해달라는 말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명령은 왜 해? 내가 내 몸 가지고 뭘 하든지 무슨 상관이라고.’

하고 싶은 말은 가슴에 묻은 채 도준희가 떠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든가. 네 몸이 아프지 내 몸이 아프냐.”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도준희는 빈정거리더니 방을 나갔다. 도준희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우예린은 다시 베개를 구겼다.

‘내 몸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이런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해?’

이번에는 베개를 들어 침대를 마구잡이로 내려쳤다. 침대 단단한 곳에 손이 부딪치고 쓸렸다. 주먹으로 머리도 때렸다.

쾅, 쾅. 온 힘을 다해 치다 보니 뇌까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몸이 아픈 순간에는 울분으로 꽉 찬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해도 되었다. 어디가 다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니 이 정도는 괜찮았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화가 풀리니까. 우예린은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반복적으로 머리를 때렸다.

한 열 번쯤 그랬을까, 문이 벌컥 열렸다.

“진짜, 씨발.”

손목이 거센 힘으로 잡혔다. 움찔, 놀란 우예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도준희가 명백하게 화가 난 얼굴로 우예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태연하게 굴었던 도준희의 분노한 얼굴에 우예린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왜요?”

우예린이 겁에 질린 눈으로 조심스럽게 묻자 도준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형형한 눈으로 우예린을 내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묵직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좋아.”

“…….”

“떼어줄게.”

“앞으로는……?”

도준희가 이를 갈았다.

“회사에서도 안 차고 다녀도 돼.”

“정말요?”

“그래.”

도준희가 손목을 홱 던졌다. 침대로 떨어진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쥔 우예린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도준희의 딱딱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폭력적인 모습을 봤을 때는 눈앞에 피가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런 걸로 말을 들어준다고?

도준희가 냉랭하게 명령했다.

“가운 걷어.”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도준희를 흘끗거리다가 가운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다른 꿍꿍이가 있어도 이것만 말끔히 벗겨준다면 뭐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운을 걷어 올리자 마른 다리가 먼저 드러났다. 뭔가 민망해서 허벅지까지 가운을 올린 채로 멈추었다.

“열쇠 주면 알아서 벗을게요.”

도준희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올리자 우예린은 바로 포기하고 가운을 허리까지 완전히 올렸다. 쳐다보기도 싫은 정조대가 드러났다.

소변을 보는 부분만 천과 검은 가죽으로 덧대어 있고, 나머지는 은색 철 가면처럼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다. 우예린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정조대를 바라보며 도준희를 소심하게 독촉했다.

“잠금장치만 풀어주면…….”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자 도준희가 뒷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찰칵.

도준희가 정조대를 열었다. 정조대의 열린 틈 사이로 음부가 훤히 드러났다. 아래가 시원해짐과 동시에 다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도준희의 눈치를 보았다. 도준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열린 정조대를 바라보더니 정조대를 붙잡아 내렸다.

“앗!”

순식간에 공기가 진득거리는 설탕물처럼 끈끈해졌다.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 도준희를 지켜보았다.

도준희가 검지로 정조대를 툭, 쳤다. 스륵 미끄러져 발목에 걸쳐진 정조대가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예린은 그 소리가 꼭 해방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몇 번 잠자리를 했다고 해도 이렇게 밝은 불빛 아래서 음부를 드러내는 건 창피했다.

“이제 됐어요. 나머지는 내가…… 어?”

서둘러 샤워 가운을 내리려는 찰나, 도준희가 무릎 사이로 손을 넣어 오금을 받친 채 끌어당겼다. 그 기세에 뒤로 넘어간 우예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도준희는 양팔로 우예린의 무릎을 단단히 고정한 채로 강하게 끌어 올려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우예린에겐 도준희의 까만 머리꼭지만 보였다. 거기까지 어찌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던지 우예린은 반응도 못 하고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할짝.

온몸의 털이 바싹 곤두서는 감각에 우예린이 비명을 질렀다. 할짝이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팔꿈치로 침대를 받치고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 아, 하! 무, 뭐 하는 거예요!”

도준희는 여느 때처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우예린의 질구 주변을 빨아들였다. 우예린의 눈이 확장되었다.

“아! 그, 그만하라니까!”

도준희의 머리를 붙잡으려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 침대 시트를 꽉 그러쥐었다. 도준희의 머리가 움찔거렸다. 입술이 오물거리는 게 음부의 연약한 살점을 통해 느껴졌다.

우예린은 눈을 꽉 감고 입술을 다물었다. 신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소리를 내면 그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신음 대신, 도준희가 혀를 놀려대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귀가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뭐라도 말을 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도준희가 혀로 질구를 포함한 음부를 강하게 핥아 올렸다. 우예린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기자마자 도준희가 다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허리가 움찔거렸다.

도준희는 우예린의 무릎과 허벅지를 꽉 안은 채로 입술을 천박하게 오물거렸다. 아랫입술이 질구를 적나라하게 자극했고 윗입술은 음순을 짓눌렀다.

혀는 질구 윗부분을 콕콕 쑤셔댔다. 도준희는 그대로 눈을 굴려 우예린을 응시했다. 붉어진 얼굴로 우예린이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다.

“흐읏!”

결국 참지 못한 우예린이 신음을 뱉자 도준희가 우예린의 음부에서 입을 뗐다. 우예린은 헐떡이며 혼몽한 눈을 가까스로 떠서 도준희를 응시했다. 도준희가 몸을 일으켜서 우예린의 무릎 사이에 섰다.

흥분해서 약간 달아오른 눈이 우예린의 음부를 내려다보았다. 음부를 사정없이 빨린 충격에 바들거리는 허벅지와 붉게 달아오른 음부가 도준희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도준희가 손가락으로 우예린의 바싹 선 동그란 살점을 튕겼다. 헉, 숨을 들이마신 우예린이 바르르 떨었다.

“정말 제대로 안 씻었나 봐.”

도준희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냄새가 진해.”

우예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감당 못 할 수치심이 눈가에 찰랑였다.

도준희의 말대로 아무리 샤워기의 물을 흘려보내도 정조대 안으로 손을 넣을 수 없으니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찝찝한 것만 면하게끔 열심히 씻었는데 저런 말을 듣게 되니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러니까 진작에 떼어주면 됐잖아요.”

“누가 싫대?”

“…….”

“난 좋아. 네 냄새.”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의미로 더 수치스러워졌다.

우예린은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도준희를 바라보았다가 자리를 잡는 도준희를 보고 움찔했다. 도준희가 한 손으로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바지가 내려가자 탄탄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전에는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는데 하얀 허벅지 여기저기에 오래되어 보이는 흉터가 보였다.

넘어지거나 쓸려서 생긴 흉터가 아니라, 누가 봐도 칼에 맞았다가 아문 듯한 흉터였다. 생생하고 날것의 느낌이 드는 흉터에 우예린이 우뚝 굳어졌다.

그사이에 도준희는 팬티를 내려 거대한 성기를 꺼내었다. 벌써부터 성기는 꺼떡이며 끄트머리에서 쿠퍼액을 흘려대고 있었다. 도준희가 질척한 성기를 보란 듯 천박하게 쓸어내렸다. 핏줄이 울퉁불퉁 돋아난 검붉은 성기가 가까이 다가오자 우예린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흉터가 가득한 허벅지와 검붉고 사나운 성기. 우예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 나는 지금 그거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에요.”

잔뜩 겁먹은 목소리에 도준희는 우예린의 허벅지 바깥으로 한 팔을 내린 채 몸을 숙였다. 한층 가까워진 도준희의 해사한 얼굴을 보며 우예린은 연신 침을 삼켰다.

“정조대 풀어줬잖아.”

“…….”

“내가 하나를 해줬으면 너도 한 번은 고분고분 굴어야지. 기브 앤 테이크, 몰라?”

공정함의 대명사 ‘기브 앤 테이크’가 이렇게 불공정할 수가 있나? 우예린의 눈에 억울함이 들어찼다.

“정조대를 풀어주는 건 당연히 해줘야 하는 일이고요.”

“…….”

“그걸 무슨 대단한 일을 해준 것처럼…….”

선심을 베풀고 있어?

말을 맺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도준희가 싱긋 웃었다.

“그럼 다시 채울까?”

“아니요!”

외치는 순간, 도준희의 두툼한 귀두가 성기에 닿았다. 이제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몸이 저절로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잠깐만요, 아직 준비가 덜 되었…… 흐읏!”

도준희가 마디 굵은 손가락을 우예린의 질구 안으로 처넣었다.

찌걱찌걱. 질척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예린의 속살 안에서 도준희가 두 손가락을 넓게 벌리자 빠듯한 느낌에 우예린의 입이 벌어졌다.

“잘 풀어졌어. 걱정 마.”

도준희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손가락이 쑥 빠지자 우예린은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도준희가 귀두로 우예린의 질구와 작은 살점을 연달아 비볐다.

우예린은 아랫배가 오싹오싹했다. 뜨겁고 두툼한 귀두가 미끄럽게 음부를 비벼대자 벌써부터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고여 들었다.

도준희가 귀두로 클리토리스를 지긋하게 짓뭉갰다. 도준희의 선단에서 흐른 쿠퍼액으로 미끈미끈해지는 느낌에 우예린은 발가락을 덜덜 떨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예린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도준희가 혀를 날름거렸다.

“아니면 더 빨아줘?”

우예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준희가 성기를 빠르게 문질러댔다.

탁, 탁!

허릿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살점끼리 부딪히는 야한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정신이 혼미한 듯한 우예린을 보며 도준희는 느긋하게 성기를 쑤셔 넣으려다가 입구에서 멈칫했다.

“아.”

우예린은 흐리멍덩한 시선을 들어 도준희를 바라보았다. 도준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쯧, 혀를 차고 뒷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냈다.

한 손으로는 우예린의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며 이빨로 콘돔 껍질을 깠다. 미끈미끈한 고무에 훅, 바람을 불고 완전히 곤두선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고무가 기둥을 감싸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일 큰 거 달라니까. 씨발, 낑기잖아.”

우예린은 혼미한 와중에도 도준희의 혼잣말을 정확히 들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에도 정신없는 움직임과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음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궁이 찢어지는 건 아닌가 불안해하지 않았나?

역시 아직 자신이 없다.

“자, 잠깐만. 도준희……! 하악!”

우예린이 다급하게 고개를 드는 순간 도준희가 성기를 질구에 쑤셔 넣었다. 두툼한 성기는 제 귀두 둘레보다도 작은 입구를 헤집듯 진입했다. 안에서 손가락을 벌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빠듯함에 우예린은 입을 벌린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도준희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로 끝까지 밀어 넣자 우예린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런 우예린의 목덜미에 손을 넣어 감싼 도준희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바들바들 떠는 우예린의 뺨에 입을 맞추며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앗! 우, 움직이지 마요, 안 돼!”

“걱정 마. 안 찢어져.”

고개를 젓는 우예린의 뺨에 입술을 문대며 도준희가 빠르게 소곤거렸다.

“좀만 참으면 곧 기분이 좋아질 거야.”

“아, 아파…….”

그는 울먹이는 우예린의 눈가에 어린 눈물을 혀로 핥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손을 하반신으로 내려 통통하게 곤두선 살점을 빠르게 비볐다.

강하게 자극되는 클리토리스와 자궁까지 들어갈 듯 쿵쿵 찧어대는 성기의 움직임에 우예린은 자지러지는 신음을 흘려댔다.

도준희가 성기를 거의 끝까지 빼낸 후에 안쪽을 강하게 찧었다.

팍!

우예린이 허리를 튕겼다. 격한 움직임에 샤워 가운이 저절로 풀어져 하얀 가슴을 훤하게 드러냈다. 도준희가 고개를 숙여 우예린의 젖꼭지를 입술로 지분거렸다.

“아앗!”

우예린은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기 위해 저도 모르게 다리를 들어 도준희의 허리에 감았다. 그러자 결합이 한층 편하고 깊어졌다. 우예린의 속살이 뜨겁게 도준희의 성기를 감쌌다.

“큭.”

도준희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고개를 들어 발간 얼굴로 신음을 뱉는 우예린의 뺨에 키스했다. 우예린은 흐릿한 시야로 도준희의 흥분한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씹, 새끼들이 왜 이걸 천국이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뜨거운 신음이 우예린의 뺨을 간질였다.

“이제 알겠어.”

“…….”

“네 안이 천국이야.”

팍!

감미로운 목소리와 달리 허릿짓은 광폭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빨간 혀로 우예린의 입술을 핥았다. 가슴을 콱 움켜쥔 채 허리를 거칠게 흔들며 입술을 핥는 도준희. 우예린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불한당.

이놈은 불한당이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불한당이 아니면 이럴 수 없었다.

그러나 저를 핥는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다. 불그스름한 홍조가 오른 뺨과 사랑스러운 눈. 붉어진 눈매가 지독하게 섹시하고 야했다. 천사의 얼굴에 악마의 표정이었다.

“흐읏.”

눈썹을 구긴 채, 도준희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자 우예린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너무 야해서, 보고 있으면 저마저도 이상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 * *

점심시간, 점심을 먹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커피를 타 야외로 나가는 와중에 우예린은 시든 민들레처럼 흐물흐물 책상 위로 엎어졌다.

‘졸려…….’

몸은 뻐근하고 정신은 나른하다. 도준희가 새벽 한 시가 넘도록 놓아주지 않은 탓이었다.

미친개는 힘이 세다더니, 그쪽 힘도 포함이 되는 게 분명했다. 아래가 얼얼해 침대 시트를 바득바득 쥐고 도망가려는 우예린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긴 도준희는 질척한 음부에 입을 대고 빨기를 반복했다.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천국은 개뿔. 그렇게 빨아대는 천국이 어디 있어?’

우예린은 가랑이 사이가 쓰려오는 것 같아 다리를 꼭 붙였다. 다행히 어제 그녀를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던 정조대의 딱딱하고, 불쾌하게 미지근한 감촉 대신 평범한 면 속옷이라 아래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기브 앤 테이크. 정조대 문제를 양보했으니 너는 수면을 반납하라는 의미였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도준희가 움직이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도 못하고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일어나 보자 주변엔 녹진해진 콘돔이 가득했다. 눈에 띄는 것만 세도 다섯 개가 넘어갔다.

그렇게 지독하게 해댔으면서 꼬박꼬박 콘돔을 사용했다는 점이 우습고도 미심쩍었다. 혹시나 회사에 있을 때 흘러내릴까 봐 씻으며 질구 안을 긁어냈지만 정액 같은 건 없었다.

‘다행이기는 하지만…….’

도준희의 의중을 추측하려다 그만두었다. 다시 말하지만 미친놈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똑같은 미친놈이 되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게 추락할 순 없지.’

어쨌든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우예린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한차례의 정사가 끝나고, 도준희는 만족스럽게 그릉대며 성기에서 콘돔을 잡아 뺐다. 사정액의 양은 무한인 걸까. 어째서 항상 저렇게 많이 나오는 거지.

지친 자신에 비해 쌩쌩한 도준희는 시간이 갈수록 물 먹은 화초처럼 싱싱하게 살아나는 듯했다. 인간이 아닌 건가. 도준희의 정체성까지 의심하는 우예린의 시선이 훤히 발가벗겨진 도준희의 딱딱하고 넓은 가슴에 닿았다.

분명 처음에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벗겨진 상태였다. 언제 벗었던 걸까? 그녀가 정신없이 신음을 지르는 중이었다면 못 알아챌 만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도준희가 티셔츠를 언제 벗었느냐가 아니었다. 우예린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허벅지와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자리해 존재감을 과시하는 상반신의 흉터였다.

대부분의 상처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로,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어떤 건 오금이 저릴 만큼 살벌하게 큰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크든 작든 다쳤을 때는 꽤 깊게 파였었던 듯, 흉터는 새살이 돋은 흔적으로 주변 피부색보다 확연히 하얬다.

‘누가 보면 군인인 줄 알겠어.’

우예린이 생각하는 가장 합법적이고도 위험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런 군인들도 저렇게 많이 다쳤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자 의심스러워졌다.

이제까지는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겠어.’ 하며 고개를 내저었으나 강렬한 의문에 사로잡힌 우예린은 입을 열었다.

―혹시…….

‘에이, 설마. 단지 조금 거친 것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떤 직감이었을까. 우예린은 기어코 금기어 같은 단어를 입 밖으로 뱉었다.

―조……폭?

도준희는 콘돔 포장을 찢으며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보자 마음이 크게 두근거렸다.

―내가 조폭처럼 보여?

도준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 피식 웃었다. 쿵쿵, 뛰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냥 미친 일반인과 조폭인 미친놈은 아무래도 다가오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하긴 조폭이 예전에는 흔했다지만 다 감옥 가고 잡혀서 이제는 좀 잠잠해진 상황이다. 역시 너무 과한 가정이었어. 한숨을 쉬었다.

도준희가 길고 두꺼운 페니스에 반투명한 콘돔을 씌우며 한 손으로 우예린의 가슴을 주물렀다. 수없이 빨렸건만 이런 태연한 스킨십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될 것 같았다. 우예린이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을 삼키는 순간 도준희가 흘러가듯이 한 말이 귓가에 꽂혔다.

―나는 아니고, 할아버지가 그랬지.

젖꼭지에서 오는 이상야릇한 느낌을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던 우예린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네?

―나 말고 할아버지가 그랬다고. 친할아버지. 감옥 가신 후로는 손 터셨으니까 이제는 뭐, 일반인인 셈이지.

어느새 그의 페니스 모양대로 맞춰진 듯한 우예린의 질내로 성기를 삽입하며 도준희가 기분 좋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우예린은 헐떡이면서도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하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인지.

―큰아버지가 할아버지처럼 굴고 있기는 하지만 조폭은 아니거든. 요즘은 주먹 휘두르는 것보다 머리 굴리는 게 더 잘 먹히는 세상이잖아.

허릿짓을 하며 도준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정부가 이 잡듯 잡았으니까. 그러게 적당히 해먹었어야지. 쯧.

그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암흑세계 얘기를 하며 혀를 차는 도준희를 보자 눈앞이 깜깜했다.

그 순간을 생각하자 우예린은 다시금 머릿속이 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다. 딱 지금과 어울리는 말인 듯했다. 알아봤자 좋을 것도 없었을 것 같은데.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굳어진 우예린은 문제 있냐고 물어오는 도준희에게 차마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쿵.

서류철 위로 이마를 찧었다. 답답하니 습관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막막한 현실이 답답해 한 번 더 찧었다.

쿵.

조폭이라니. 본인이 조폭이라곤 안 했지만 집안이 조폭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럼 도준희는 뭐지? 새끼 조폭?’

어쩐지, 마사지 샵에서 그녀를 희롱하던 남자들에게 보여주던 그 자연스럽고도 거친 모습은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부터 은연중 우예린을 괴롭혔던 의문과 불안의 이유가 이제 해결되었다.

‘아름다운 이별이 과연 가능할까.’

생각할수록 답이 보이지 않게 깜깜하다.

‘도준희가 먼저 나한테 질리게 만들면 되는 건데, 결국은…….’

머릿속 미로를 헤집어 간신히 적절한 답을 찾아낸 우예린이 벌떡 일어나 가방을 뒤졌다. 다이어리를 꺼내 펼치자 도준희의 감시를 불사하고 PC방에서 조사한 ‘아름답게 이별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이 줄줄이 적혀있었다.

우예린은 절박하고 진지한 눈으로 그녀가 적었던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곧 끄응,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걸 어떻게 해?’

지극히 상식적인 레일 위에서 남들이 가는 길을 걸어왔던 우예린이다. 수치스러운 데다가 혐오스럽기까지 한 방법들이 탐탁스럽지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나 죽었다 기세로 시도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아도 심란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다이어리에 턱을 묻었다.

“뭐 하는 거야?”

고개를 들자 파티션에 팔꿈치를 올린 지수련이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는지 티타임을 끝낸 사원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냥, 별거 아니었어.”

“으응?”

“정신 수련이야, 정신 수련.”

어색한 미소를 짓자 지수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입을 벌렸던 그녀가 돌연 휙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왜 저러지?’

어리둥절했던 우예린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련 씨, 어디 가?”

귀신같이 다가온 김 대리가 아쉬운 얼굴로 말하자 흠칫한 우예린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했다.

“일이 많대요.”

‘김 대리님이랑 있는 게 싫대요.’

“그래? 요즘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이는데. 이 주임은 뭘 그렇게 일을 많이 시켜? 수련 씨 힘들게.”

생각날 때마다 우예린에게 일거리를 한 아름 안기는 김 대리가 할 말이 아니었다.

지수련은 인기가 많았고, 잘생긴 남자 친구도 있지만 염치없는 김 대리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잘해주는 척을 하며 커피 한잔하자는 제안도 지수련은 후후, 웃으면서 유유히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녀의 태도에 김 대리는 더 안달이 난 것 같았다.

하하, 영혼 없이 웃어주던 우예린은 번개처럼 깨달았다. 갖지 못하는 걸 더 갖고 싶어 하는 게 인간 심리라면 도준희도 그런 걸까? 그럼 지금처럼 싫어하기보다 차라리 좋아하는 척을 해볼까?

‘자신은 없지만…….’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려던 우예린은 김 대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네?”

“내 말 안 들었어?”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셨는지…….”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귀가 먹었나? 그거 과장님 결재받았냐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영 감을 잡지 못하는 우예린을 답답해하며 김 대리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건넸다.

서류의 제목을 확인한 우예린은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건 대리님이 하신다고 하신 그 서류…….”

“무슨 소리야. 여유로우면 내가 한다고 했지. 나 바쁜 거 안 보여?”

아침부터 바빴다고 하는 김 대리의 말이 한 귀로 들어왔다가 반대쪽 귀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오늘은 오전부터 도준희 생각에 정신이 없어서 김 대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평소 김 대리가 바쁘냐고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여직원들과 커피 마시느라 바쁘다면 모를까.

“어쨌든 우예린 씨가 좀 도와줘. 결재만 받으면 돼. 그거 전에 회의에서 말 나왔던 그거야. 프로젝트 기획 의도는 꼭 잘 설명해 드리고. 알았지?”

“…….”

“저번에 대답 잘 하더만. 이것도 잘할 수 있겠지? 믿고 맡길게.”

우예린은 돌아가는 김 대리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회의 때 기분이 상한 눈치이긴 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는 건 아니겠지?

“과장님에게 까일까 봐 너 보내는 걸 거야.”

언제 다시 왔는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슬쩍 내민 지수련이 소곤거렸다.

“응?”

“저번 회의 때도 과장님에게 돌려 까였잖아. 이번에도 그럴까 봐, 너 시키는 거지. 하여간 이럴 땐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저 인간.”

설득력이 있는 그녀의 말에 우예린의 얼굴이 오래된 늪처럼 축축해졌다.

“과장님이 뭐라고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뒤로 흘려.”

벌써 미래를 상상하는지 안쓰러운 얼굴로 위로하는 지수련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이팅!”

“응, 고마워.”

우예린은 김 대리가 던지듯 놓고 간 서류철을 붙잡고 일어났다. 과장실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똑똑.

답이 없었다. 안 계신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커피 잔을 입에 대고 있는 김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짓을 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냥 열어봐.’

대충 그런 뜻인 듯했다. 우예린은 직속 상사인 만큼 좋게 생각하려고 했던 김 대리에 대한 호감도가 지하를 뚫고 들어가는 것을 생생히 느끼며 조심스럽게 과장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이 잠겨있거나 안에 아무도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김 대리가 나중에 결재를 받으러 들어갈 테니까. 그러나 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최 과장은 안에 있었다.

안에 있는데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까? 고개를 갸웃한 우예린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가만 보니 최 과장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팔짱을 낀 채 어디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우예린은 그가 뭘 그렇게 보고 있는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있는 거라곤 블라인드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깊게 하시지?’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로 걸어가 서류 파일을 책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두었다.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든 최 과장이 우예린을 보고 흠칫했다. 다소 과한 반응에 조금 민망해졌다.

“과장님?”

“큼, 무슨 일이지?”

어쩐지 자신을 보자 당황하는 듯한 최 과장의 표정에 우예린은 눈치를 살폈다.

‘내가 뭘 방해했나?’

다행히도 최 과장은 곧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안심한 우예린이 서류철을 가까이 내밀었다.

“결재를 받으려고요.”

최 과장이 서류철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직 페이지가 넘어가지도 않았건만 첫 장에서부터 눈살을 찌푸렸다.

“형편없군.”

“…….”

“원가비 통계와 비교표가 있으나 마나 하잖아. 누가 일을 이런 식으로 하지?”

더 읽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우예린에게 서류를 되돌려 주었다. 우예린은 얌전히 서류를 받아들었다. 자신이 작성한 게 아니라 그런지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지 대신 혼나고 있는 게 조금 억울했다.

“시정하겠습니다.”

“정확하게 하라고 말해. 김 대리에게 돌려주면서.”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 대리가 쓴 서류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기획자의 이름에는 김 대리와 그녀의 이름이 동시에 올라가 있는데 말이다.

궁금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얌전히 고개만 꾸벅 숙였다.

“네.”

짧게 대꾸하고 서류를 든 채로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 아까 최 과장이 보고 있었던 블라인드에 시선을 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저 창문은 탕비실과 이어진 건데, 어차피 불투명한 창문을 뭐 하러 블라인드로 가려놨을까?

우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으로 최 과장의 뒷모습도 점점 사라져갔다.

* * *

우예린은 침대에 앉은 채 방문을 힐끗거렸다. 밖에서는 조금의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던 우예린은 조금 망설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도준희에게 끌려와 이 거대한 펜트하우스에 지내게 된 지 이 주일째. 넓은 집이었지만 그나마 우예린이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건 이 방 하나뿐이었다. 방 하나가 원래 그녀의 자취방보다 넓음에도 자유가 없으니 답답했다. 창살 없는 새장과 다를 바 없는 꼴이었다.

달칵.

문을 열고 나갔다. 도준희는 거실에 없었다. 우예린은 거실을 지나쳐 문이 열려있는 방 앞에서 기웃거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을 좀 더 열었다. 방 안에는 운동 기구가 가득했다. 집이 넓으면 작은 체육관 하나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우예린은 이 집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도준희는 벤치 프레스에 누워 무거운 역기를 들었다가 내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흰 티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탓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의 굴곡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뚝은 근육이 단단히 올라왔고 팔목에서부터 손목으로 이어지는 푸른 힘줄이 사납게 도드라졌다.

“후우.”

숨을 내쉬며 역기를 들어 올리던 도준희가 우예린을 흘끗했다. 멍하니 도준희를 바라보던 우예린은 흠칫했다.

“왜?”

도준희가 역기를 든 채로 물었다. 우예린은 우물쭈물하며 대꾸했다.

“집에 좀 잠깐 갔다 오고 싶은데요.”

“…….”

“여긴 부족한 게 좀 많아서, 옷도 그렇고…….”

“회사 갈 때 입는 옷 사줬잖아.”

그건 그렇다. 어느 날 도준희가 한 아름 들고 온 쇼핑백은 모두 백화점에 입점한 가게의 것이었고, 우예린이 평소 사 입는 옷보다 고가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편하게 입는 옷도 없고, 또 제 개인 물건들이 없잖아요. 불편해요.”

“…….”

“그러니까 집에 잠깐 갔다 와도 될까요?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올게요.”

사실 지금도 계속 나가고 있는 월세라든가, 관리비 같은 것들이 신경 쓰였지만 그것 때문에 집에 보내달라고 하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집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은 퇴근 후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이 펜트하우스에 와야 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기 때문이다.

“후.”

도준희가 역기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로 기구에 걸어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행동은 역시나 거칠었다.

“필요한 건 주변에 백화점 있으니 사.”

우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돈이 썩어나는 줄 아나. 물론 필요하다는 걸 말하면 도준희가 사 오겠지만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이 주일째 내버려두고 있는 집이 걱정되었다.

“물건은 둘째 치고요. 먹다 남은 음식도 냉장고에 그대로 있어서 지금 썩어가고 있을 거예요. 빨래도 널어둔 채 그대로일 테고. 집에 들러서 처리할 게 많아요. 잠깐만 갔다 올게요. 잠깐만요.”

우예린이 간곡히 부탁했지만 도준희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사람 보내줘?”

태연한 얼굴로 거부하는 도준희를 바라보는 우예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런저런 핑계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답답하다는 거였다. 회사와 펜트하우스만 왔다 갔다 하는 이 생활이! 자신에게도 관리해야 하는 공간이 있단 말이다.

“나는…… 인형이 아니에요.”

잇새로 억눌린 목소리를 낸 후 홱 몸을 돌렸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벽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속이 미칠 듯이 갑갑했다. 문을 꼭 잠그고 벽에 머리를 댔다.

쿵.

벽에 세게 맞닿은 이마의 살갗이 아팠다.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려는 의도였다.

쿵쿵.

그렇게 5분이 되었을까. 머릿속이 혼미해져 고개를 들려는 찰나에 문이 벌컥 열렸다.

“이게 또 이 지랄이네!”

이마에 벽 대신 부드러운 게 닿았다. 눈을 뜨자 손바닥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도준희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왜요?”

우예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신 눈만 깜박였다. 도준희의 꽉 다물린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둔한 건지, 약아빠진 건지!”

결국 우예린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었다. 도준희가 집에 보내준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이’ 갔다.

자신이 도망갈까 봐 걱정됐는지 도준희는 직접 차를 끌고 원룸 앞을 막듯이 주차했다. 그 덕에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여유도 즐기지 못하고 말 그대로 급한 것만 해결했지만. 그것도 못 참았는지 따라 올라온 도준희가 우예린 냄새가 나서 흥분된다는 해괴한 소리를 하며 달려든 탓에 소리가 새어나갈까 불안해하며 섹스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우예린은 희망을 보았다.

그 속내는 도저히 모르겠으나 도준희는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와중에 그녀의 몸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평소에 그녀 자신도 소중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그녀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지만, 그것보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아 마음이 벅차올랐다.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하면 들어주는구나!’

종이 울리면 먹이를 먹을 수 있음을 학습한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예린도 패턴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좀 더 정확한 확인을 위해 바로 그날 밤, 우예린은 도준희의 행동을 제어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흐읏!”

우예린은 가슴을 거칠게 빨아들이는 도준희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었다. 도준희가 입술로 가슴을 지분거리며 다른 손은 아래로 뻗어 클리토리스를 사정없이 짓뭉갰다.

본성을 들킨 도준희는 잠자리와 애무마저도 거칠었다. 우예린은 우선 그걸 고쳐볼 생각이었다.

도준희와의 정사는 할 때는 정신이 없어 싫다 좋다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문제는 다음 날이 너무 괴롭다는 거였다.

“그, 그만!”

“…….”

“아파요.”

도준희는 쓰레기였다. 상식적으로 아프다고 호소하면 부드럽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도준희는 우예린이 아프다고 할 때마다 집요하게 애무를 했다. 흥분하면 안 아플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흥분했을 때는 아픈 걸 느끼지 못하기는 하지만, 역시 다음 날이 너무 괴롭다.

“그만!”

다시 외쳐도 도준희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짜증이 난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 도준희의 얼굴을 보며 우예린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꽉 쥐자, 도준희가 미묘한 눈으로 그녀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 손으로 뭐 하게?’ 하고 묻는 듯 비웃음을 띤 눈이었다.

만약 도준희를 치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걸, 그의 반짝이는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을 듯했다. 우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바보야? 소용없는 짓을 하게.’

이 집에서 자신이 맘껏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지만, 적어도 이 몸은 그녀 자신의 거였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우예린은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를 쳤다. 예상대로 도준희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우예린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 하는 거야?”

“말 안 들어주면 계속 이럴 거예요.”

우예린의 속내를 도준희도 눈치챈 게 틀림없었다. 긴장하며 쳐다보자, 생각과 달리 도준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준희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무시하려는 게 아닐까 했으나.

“해 봐. 어디 한번.”

씨익 웃는 도준희를 보자 불길해졌다. 반사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몸을 뒤트는 그녀의 허리를 도준희가 잡아서 위로 올렸다. 갑작스럽게 자세가 바뀌자 결합이 깊어졌다. 자궁이 꿰뚫리는 느낌에 우예린은 ‘헉’하고 입을 벌렸다.

도준희가 한쪽 무릎을 침대에 둔 채로 우예린의 양쪽 엉덩이를 붙잡아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 우예린은 혹여 떨어질까 봐 반사적으로 도준희에게 매달렸다. 도준희가 허리를 뒤로 빼더니 그대로 퍽, 위로 쳐 올렸다.

우예린은 비명 같은 신음을 흘렸다. 작살에 꿰인 것 같았다.

“아으, 아!”

도준희가 그대로 허릿짓을 하자 우예린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팍, 팍! 살끼리 맞부딪히는 음란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자해를 하든, 뭘 하든.”

흥분에 젖은 도준희의 목소리가 퇴폐적이었다. 우예린은 도준희의 어깨에 대고 고개를 꺾고 정신없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이건 안 된다. 거칠게 박히면서 우예린은 필사적으로 결심했다. 역시 답은 도준희를 질리게 하는 것뿐이다.

* * *

유약한 성격 때문에 조사까지 해놓고서 망설임이 길었지만, 결심한 후에는 상세한 계획과 실행만이 남아있었다. 아름답게 이별하는 방법. 일명 ‘미친개 떨구기 프로젝트’였다.

예전이었다면 주말 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기대하며 버텼을 금요일을 우예린은 방석 위에서 버티며 시간이 가기를 바랐다.

도준희, 그 미친놈이 끝까지 놔주지 않아서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거칠게 쓸린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결국 방석을 급하게 공수해 온 뒤에야 앉아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불편한 통증을 참고 퇴근 시간이 되자 우예린은 시계를 흘끗하고 짐을 챙기며 마지막까지 보았던 다이어리를 눈에 담았다.

프로젝트 그 첫 번째, 정 털리는 생얼.

이지나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에 따르면 충격적인 생얼은 없던 정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효과적이고도 사회생활에 영향이 없을 만한 시점을 기다리다 보니 금요일밖에 없었다.

리스트 중 제일 할 만하면서도 효과가 없을 것 같은 방법이기에 우예린은 이 방법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냈다.

하나, 라면을 먹고 바로 잘 것. 둘, 물을 마시지 말 것.

우예린은 살이 찌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얼굴은 잘 붓는 편이었다. 그런 탓에 회사에 가는 날이면 라면은 피하는 음식 중의 하나였다.

금요일 퇴근 후, 자기 전.

우예린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렸다. 물을 붓는 손길이 평소와 다르게 전투적이었다. 도준희에게 매달리며 눈물을 쏟아냈던 눈가가 소금기로 따끔거렸다.

‘발정 난 짐승.’

퇴근하고 돌아와 씻은 것뿐이었는데 무엇에 동했는지 폭주한 도준희 때문에 방에서 기어 나온 건 저녁때를 한참 넘긴 시점이었다.

자유가 없는 것도 없는 건데 이제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이러다간 큰일이 날 것 같다. 쑤시는 뼈마디를 주먹으로 탁탁 치면서 가스레인지 레버를 돌렸다.

자신에게 질리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해 봐도, 결국 핵심은 망가지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도준희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외적인 부분에서 매력을 잃는다면 더는 흥미를 갖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뻐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한 적은 있어도 못생겨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건 처음이었다. 외모를 망가뜨려야 한다는 게 막막했지만 우예린에게 망설임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아직 끓는 기미 없이 잔잔한 냄비의 물을 바라보았다.

미심쩍어진 그녀의 머릿속에 김 대리가 떠올랐다.

김 대리는 회사 다니는 낙이 여직원들과 티타임을 가지며 농담 따 먹기를 하는 거였다. 그의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했으니 말 다 했다. 그는 스스로 여직원들이랑 친하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였다.

화장을 안 하는 직원, 또는 바쁜 탓에 평소보다 화장을 대충하고 온 직원에게 우스갯소리를 한답시고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난 여자들이 화장 안 하면 이상한 생각 들던데.” 하고 낄낄대는 걸 보면 말이다.

은근히 직원의 얼굴을 훑어보며 화장을 잘하고 다녀야 한다느니, 그래야 예뻐 보이고 매력적이라느니, 심지어는 자기는 화장 잘하는 여자만 여자로 보인다는 하나도 관심 없는 말까지 해댔다.

수면 위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왔다. 서서히 물이 끓기 시작하는 냄비를 응시하며 우예린은 눈을 끔벅였다. 생얼로 정떨어뜨리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 대리에겐 아주 잘 먹히는 방법일 것 같다.

‘도준희에게도 먹히면 좋을 텐데.’

보글보글. 물이 끓어올랐다. 라면 봉지를 뜯고 스프를 꺼내 넣으려는 순간.

스윽.

어느새 다가왔는지 도준희의 헐벗은 가슴이 우예린의 어깨에 닿았다. 라면 스프를 든 채 굳어진 우예린을 흘끗한 도준희가 말했다.

“웬 라면?”

“……배가 고파서요. 퇴근하고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네가 놔주지 않아서 그렇잖아, 이 발정 난 짐승아. 우예린은 자신이 조금만 더 용기가 있고 되바라졌으면 이 말을 꼭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실의 우예린은 눈을 끔벅이며 은근하게 돌려서 표현할 뿐이었다.

“라면 안 좋아하잖아. 나와. 밥해줄게.”

이런 식으로 그가 자신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된다.

“아니요!”

우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오늘이어야 한다. 거친 잠자리로 인해 생리적인 눈물을 흘린 지금, 벗어나고픈 의지가 최고조로 오른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 시도하기 힘들지도 몰랐다.

“지, 지금은 라면 먹고 싶어요. 그럴 때 있잖아요. 라면이 엄청 당길 때.”

“별일이네. 앉아있어. 내 것까지 끓이려니까.”

긴장한 우예린에게서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도준희가 우예린에게서 라면 봉지를 뺏어갔다. 우예린은 얼떨결에 도준희에게서 밀려나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면바지만 꿰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인 도준희가 찬장에서 라면 하나를 더 꺼낸 뒤 끓는 물에 스프를 넣었다. 곧이어 주방에 자극적인 라면 냄새가 퍼졌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라면을 끓이고 있는 도준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문득 그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집착하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참하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예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지라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꾹 삼켰다. 면전에서 내 어디가 좋냐는 말을 하기에 우예린은 낯짝이 퍽 얇았다.

라면은 금방 완성되었다.

후룩.

어쩌다 보니 마주 보고 라면을 먹게 된 우예린은 면발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좀 짜지 않나.”

도준희가 눈썹을 꿈틀했다. 우예린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은 엄청 짰다. 본래 싱겁게 먹는 편이었기에 더 짜게 느껴지는 듯했다.

‘나트륨은 면발보다는 국물에 많다고 그랬지.’

우예린은 벌건 라면 국물을 바라보다 그릇을 들어 들이켰다. 국물을 끝까지 다 마시고 빈 그릇을 내려놓자 다리를 꼰 채로 곁눈질한 도준희가 피식 웃었다.

“배고팠어? 별일이네.”

흐뭇한 얼굴이다. 우예린은 그 얼굴을 보자 체할 뻔하여 얼른 고개를 숙였다.

효과적인 붓기를 위해 물은 안 먹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결국 물을 따라 벌컥 마시며 도준희를 흘끗했다. 뭐 때문인지 도준희는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우예린은 가슴이 뜨끔했다. 도준희를 떼어내기 위해 억지로 국물까지 다 마신 건데 저렇게 흐뭇하게 쳐다보니 양심이 따끔거렸다.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지간한 원룸 크기만 한 욕실의 세면대에는 그녀가 자취방에서 가져온 세면용품들이 줄지어 있었다.

칫솔에 치약을 바르고 폼 클렌징을 꺼내 들었다. 칫솔을 혀에 대자 혀가 따끔따끔했다. 맵고 짠 국물을 남김없이 먹으니 자극받은 혓바늘이 부어오른 탓이었다.

내일은 얼굴이 아주 퉁퉁 부어있을 듯하다. 우예린은 한 번 얼굴이 부을 때면 그녀의 양친마저도 혀를 쯧쯧 찰 만큼 정도가 심했다. 그런 탓에 짠 음식을 피했지만 지금만큼은 싫어했던 그 특성이 필요한 때였다.

하루빨리 평화로웠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밤새 무식하게 박아대는 도준희에게 시달리느라 수면 부족 상태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만 했는데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다 온 거 아니냐는 억울한 오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매일 아침 그의 마음이 바뀌어 회사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되는 그런 평화로운 일상 말이다.

우예린은 씻고 침대에 누웠다. 많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욱여넣었던 라면으로 인해 속이 더부룩했다.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옆으로 누워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속이 안 좋아.’

눈을 꼭 감았다. 라면 국물까지 먹은 건 괜한 짓이었나, 슬그머니 후회가 되었다.

잠시 후, 이불이 들춰지고 등 뒤에 뜨거운 온기가 닿았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는 우예린은 뒤에서 뻗어 나온 손에 손목이 잡히자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슴으로 우예린의 등을 감싸 안은 상태로 도준희가 그녀의 손을 주물렀다.

“더럽게 차갑네.”

투덜거리는 도준희의 손은 반대로 뜨겁다고 느껴질 만큼 따뜻했다.

“그러게 소화도 잘 못 하는 애가 왜 먹자마자 누워? 소화되면 자. 내일 출근도 안 하잖아.”

“졸려서 잘 거예요.”

“참아.”

“싫어요.”

“지금 당장 안 자면 죽냐?”

“죽을 수도 있어요.”

“…….”

“…….”

“씨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욕설에 우예린은 어깨를 움찔했다.

“고집은 똥고집이지.”

도준희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자 우예린은 너무나도 억울해졌다. 고집 하면 도준희를 따를 자가 없지 않은가? 사귀는 것도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닌 이 애매한 상황에서 사람을 부득불 붙잡고 있는 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아니, 애매한 사이도 아니지.’

일방적이기는 해도 분명히 이별 통보를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사귀는 것은 협의하에 해도 이별은 협의가 될 수 없는 문제였다. 마음이 사라지는 거니까.

모든 게 협의하에 진행되는 연애에서 유일하게 일방적으로 굴 때가 이별이라고, 이지나는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나서 당당하게 말했다.

우예린도 동의했다. 그런데 지금 도준희는, 그 일방적으로 잘린 관계의 끝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걱정 마요. 소화 잘되고 있으니까.”

“구라 치네.”

도준희가 피식 비웃었다. 손이 강하게 잡히자 우예린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도준희는 태연하게 우예린의 차게 질린 손을 조몰락대며 중얼거렸다.

“MT에서 밤늦게까지 먹은 다음 날 체해서 차도 못 탄 거, 기억 안 나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랬어요.”

“술은 무슨. 맥주 한 캔 마시고는 안주만 주워 먹더만.”

‘내가 그랬나?’

2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이 사람은 나만 보고 있었나. 뭘 이런 걸 기억하고 있어?’

“안 그랬어요. 지금 예전 일이라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거짓말은. 네가 계란말이 다 먹어서 집행부한테 욕먹은 것도 기억나.”

‘아.’

우예린의 얼굴이 수척해졌다. 그렇게 말하니 전부 기억이 났다. 학과에서 준비한 안주가 온통 소주를 위한 맵고 짠 탕밖에 없어서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건 계란말이 정도였다. 야금야금 먹었더니 어느새 동이 나버려 동기들에게 한 소리를 들었지 않았는가. 우예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난 너에 대해선 다 기억해.”

“…….”

“충남에서 교회 전단지 뿌리느라 거리에서 뽈뽈거리던 것도 기억나고.”

“……네?”

도준희가 우예린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너희 교회가 자리 잡은 그 거리가 내 백부 거나 마찬가지거든.”

“거기 유흥 거리의 업소들이 그럼…….”

“백부 사업처. 일 벌이기 좋아하는 양반이라서.”

부모님이 교회를 하고 있는 건 어찌 알았나 했더니 같은 곳에서 살고 있었구나.

신입생으로 입학한 도준희를 알게 된 지 햇수로 4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우예린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네가 눈치 없이 구는 것도 봤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방직 사거리, 빨간 마사지 업소.”

그가 툭 내뱉은 단어에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왔다.

“거기서 나오는 선생한테 말 걸었잖아. 눈치 없이. 등신이야?”

“내가 그런 곳인 줄 알았냐구요. 그리고 그런 데 간 사람이 잘못이지 내가 잘못이에요?”

“등신. 세상은 원래 좆같이 돌아가서 세상인 거야.”

우예린은 할 말이 없었다. 아는 척을 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꽤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학생 주임 선생님은 그 이후로 그녀를 볼 때마다 이유 없이 괴롭혔고 그로 인해 우예린은 권위적인 명령과 괴롭힘에 트라우마까지 생길 뻔했다.

“그렇다고 고작 그 이유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나 같으면 그거 빌미로 뼛속까지 빨아먹지. 멍청하게 약점 잡은 사람이 약점 잡힌 사람한테 괴롭힘을 당하냐.”

도준희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차라리 그처럼 협박했으면 그 선생님은 자신의 눈치를 봤을지언정 쫓아내고 싶다는 얼굴로 쪼아대지는 않지 않았을까?

우울해진 우예린은 속이 더부룩해서 가슴을 툭툭 쳐댔다. 도준희의 말대로, 소화가 잘되지 않았다. 돌연 도준희가 우예린의 몸을 돌렸다. 갑자기 도준희와 얼굴을 마주하게 된 우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준희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우예린을 끌어안고 큰 손으로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를 쓰다듬었다. 아기를 소화시킬 때 부모들이 하는 것처럼.

굳어진 우예린의 귀로 도준희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애새끼냐? 이런 것도 해줘야 하고.”

“해달란 소리 안 했어요.”

도준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우예린은 소심하게 항변했다.

“입 다물어라.”

나직한 목소리에 말없이 입술을 닫았다. 우예린은 마음이 불편했다. 독립적으로, 남에게 피해 안 가게, 잘 자라야 한다는 가족의 육아 방침상 이렇게 아기처럼 안기는 건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나 경험했던 터라 낯설기 짝이 없었다. 쓰다듬는 손이 따뜻해서 더 그랬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엄마들이 괜히 아기의 등을 쓰다듬는 게 아닌 듯, 꽉 뭉친 것처럼 더부룩했던 속이 조금 편해졌다. 자연스럽게 속에서부터 트림이 올라올 뻔하여 우예린은 입술을 깨물고 참아냈다.

부모님의 앞에서도 생리 현상을 드러내지 않는 우예린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곧 아차, 했다. 상대는 도준희였다.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굴어서 정을 떨어뜨려야 하는 사람.

‘차라리 트림하는 게 나았을 수도…….’

아무래도 자신의 성격상 아름답게 이별하는 방법, 이른바 미친개 떨쳐내기 프로젝트를 적절히 수행하는 게 쉽지는 않을 듯했다. 한숨을 쉰 우예린의 등허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위로 도준희의 따뜻한 손이 왔다 갔다 했다.

반대 손은 언제 들어갔는지 잠옷 원피스를 걷고 팬티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작은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만져대는 손이 야릇해서 우예린은 서둘러 자는 척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을 하는 걸 뻔히 안다는 듯 엉덩이를 주물거린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인다 싶더니, 그대로 내려와 질구를 쿡 쑤셨다.

중지는 위로 올려 클리토리스를 리드미컬하게 자극했다. 우예린은 허리를 움찔움찔 떨다가, 이대로는 누운 채로 삽입되겠다는 위기의식에 벌떡 일어났다.

“소, 소화가 안 됐어요.”

도준희는 누운 채로 우예린을 바라보았다.

“운동하면 소화돼.”

언뜻 맞는 말처럼 들렸지만 도준희가 하니 개소리 같았다. 그 운동이 섹스를 말하는 것임에야 말할 것도 없다.

도준희의 반쯤 감긴 눈은 졸려 보였으나 손은 잠기운이 없었다. 질구를 둥글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우예린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다음 날, 우예린은 눈을 떴다. 주말이라 알람을 설정하지 않았더니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듯 주변이 환했다. 침대 위에는 그녀뿐이었다.

느릿하게 일어난 우예린은 허리를 감싸 쥐었다. 도준희의 억센 손아귀에 괴롭혀진 부분이라 멍이 들었을 것이다. 잠옷을 들춰 보았더니 과연, 푸른 멍이 들어있었다. 우예린은 얼굴을 구겼다.

‘바보, 미친놈, 미친개!’

우예린은 속으로 도준희를 욕했다. 자는 척을 하면 안 건드릴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체력 부족, 수면 부족으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일을 열심히 해서도 아니고 밤 생활로 인한 과로 상태를 들킨다면, 창피해서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일단 씻기부터 하자.’

문을 열고 나왔다. 도준희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예린은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직행했다. 어제 늦은 시간 라면을 먹은 탓인지 입 안이 갈증으로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양치를 하고 시원한 물부터 먹어야겠다.

화장실 문을 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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